이름 | 후루타 아츠야(古田敦也) |
생년월일 | 1965년 8월 6일 |
국적 | 일본 |
출신지 | 효고 현 |
출신학교 | 카와니시메이호 고교(효고) - 리츠메이칸 대학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9년 드래프트 2순위 |
소속팀 | 야쿠르트 스왈로즈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0~2007) |
199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잭 하웰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구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9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사사키 가즈히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1997년 일본시리즈 MVP | |||||
트로이 닐 (오릭스 블루웨이브) | →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스즈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
2001년 일본시리즈 MVP |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니오카 토모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역대감독 | |||||
와카마쓰 쓰토무 (1999 - 2005) | → | 후루타 아츠야 (2006 - 2007) | → | 다카다 시게루 (2008 - 2010.5) |
1 개요
일본 야구 만화에서 가장 많이 오마쥬되는 선수 중 하나.[1]
일본프로야구 前 선수, 감독. 현역 시절에는 일본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대표하는 레전드이며, 팬들은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담아 그를 미스터 스왈로즈라고[2] 부른다. 현역에서 은퇴 뒤로는 해설가, 평론가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 데뷔하기까지
대학 시절 나름대로 주목받던 포수였던 그는 리츠메이칸 대학을 졸업할 당시 2순위 이상 지명이면 프로, 3순위 이하로 지명 받으면 사회인야구팀[3] 도요타 자동차로 보낸다고 대학팀 감독이 공언했다. 닛폰햄 파이터즈로부터 2순위 지명한다는 약속을 받고 기자회견 준비까지 했지만, 정작 드래프트 현장에 있던 당시 닛폰햄 감독이 안경 낀 포수는 안 된다고 주장,[4] 결국 닛폰햄은 2순위로 오가와 코이치라는 내야수를 지명했다.[5] 대신 닛폰햄 구단은 후루타에게 '3순위에선 반드시 뽑겠으며, 대우는 2순위 수준으로 해 주겠다' 라는 약속을 했으나 동료 선수들의 패키지 취업에 대학팀과 사회인야구팀 간의 관계 등을 감안하여 결국 사회인야구팀으로의 진출을 결정하게 된다.
이후 사회인야구팀 토요타 자동차 야구단에서 뛰던 후루타는 1988 서울 올림픽때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노모 히데오와 함께 배터리를 이루며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가치를 재평가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덕분에 1989년 드래프트에선 2순위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지명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앞선 드래프트에서 약속까지 받고도 물을 먹었던 경험 때문인지 지명 받은 이후는 이게 정말 생시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듭 물었다고 한다. 다만, 이런 드라마틱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드래프트에 노모 히데오가 등장하여 무려 8개 구단이 1순위에서 경쟁을 벌였던 탓에 상대적으로 주목은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6] [7] [8]
우여곡절 끝에 야쿠르트에 입단한 후루타였지만, 이후의 길이 그리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안경 낀 선수는 포수에 적합하지 않으며 성적도 시원찮다는 인식이 강했던 데다, 무엇보다 당시 야쿠르트의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부터가 후루타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노무라 감독은 후루타를 보고 "어깨는 1류지만, 타격은 2류, 리드는 3류"라 평하며, "안경 낀 포수는 곤란하다. 차라리 그냥 2군에 있는 다른 애들을 키우는 게 낫겠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기존 주전 포수의 입지까지 탄탄했다면 후루타는 2군이나 전전하다가 백업 포수로 선수 생명을 마쳤을지도 모르나, 다행히(?) 당시 주전 포수였던 하타 신지의 어깨가 형편없을 정도로 약했던 탓에 노무라 감독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후루타에게 자신의 포수 리드를 가르치는 등 적극적으로 조련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데뷔시즌 도중 하타 신지를 밀어내며 야쿠르트의 안방을 차지하기에 이른다.[9] 다만, 2류급 타격이라는 감독의 지적처럼 데뷔 초반에는 타격이 썩 뛰어나진 않았으나,[10]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전을 차지할 수 있던 건 뛰어난 도루 저지율과 근성 넘치는 뛰어난 수비 실력 덕분이었다.[11]
3류라는 포수 리드 역시 루키시절부터 뒷줄 벤치에 앉은 노무라 감독의 바로 앞 줄에 앉아 경기 중에도 끊임없이 학대개인교습을 받았으며 말 그대로 심리전을 방불케하는 볼배합이 가능한 포수로 급성장하게 된다.[12] 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후루타 전용 비디오 룸(...)을 만들어 두어 책상 가득히 다음 상대의 경기 비디오를 쌓아둔 덕분에 거의 새벽까지 반복재생한 후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고 어쩌면 이 포수의 가장 대단한 점은 미쳐버리지 않았던 멘탈일지도 모르겠다(...)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1993년 일본시리즈 7차전에서 키요하라 카즈히로에게 선제 홈런을 내 주자마자 경기 전에 예정된 볼 배합을 모조리 바꿔 이후 세이부의 득점을 틀어막은 것은 백미.
3 전성기 시절
각고의 노력 끝에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한 후루타는 팀의 주축 선수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1992년 리그 우승을 일궈냈고, 이어서 1993, 1997, 2001년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하며 팀의 최고 간판 선수이자, 90년대 야쿠르트 황금시대를 이끄는 주역이 된다. 특히 1997년에는 센트럴리그 MVP는 물론, 포수 최초로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한데다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쇼리키 마츠타로[13]상마저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14]
또한 데뷔 이듬해부터는 약점으로 지적됐던 타격 부분까지 완벽하게 각성하여 1991년에는 센트럴리그 타격왕을 차지하고,[15] 1992년엔 3할-30홈런과 함께 일본 최초로 올스타전에서의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2003년에는 1경기 4홈런을 치고, 2004년에는 한국 기준 마흔의 나이로 23홈런을 치는 등 은퇴할 때까지 2097안타, 1009타점, 217홈런, 통산 타율 .294을[16] 기록하는 대타자가 된다. 이 정도면 올스타전 17시즌 연속 출장이란 대기록이 단순한 덤으로 여겨질 지경.
그런데 진짜 문제는 포수로서의 수비 스킬과 리드 쪽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그런 타격 실력을 쌍그리 잊게 할 정도였다는 것인데, 오죽하면 일본프로야구 팬 대부분이 후루타를 수비만 뛰어난 포수 정도로 인식했다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포수 리드는 그 깐깐하기로 소문난 ID 야구의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아예 전부 믿고 맡길 만큼 뛰어났고, 수비율이 높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포수 스킬의 주요 척도 중 하나로 다뤄지는 도루 저지율에선 시즌 도루 저지율 1위를 9번이나 차지했을 정도로 막강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1993년도와 2000년에 기록한 도루 저지율은 자그만치 평균 6할대다. 1993년에는 .644이라는 엄청난 수치를 기록했으며, 이는 2016년 현재까지도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17][18]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거의 모든 일본프로야구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후루타 아쓰야를 1990년대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뽑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를 일본 포수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여긴다.
4 일본프로야구 파업
2004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합병 소식이 언론을 통해 밝혀졌을 때 일본프로야구계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단순히 구단 하나가 줄어든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재정 상황이 나빴던 퍼시픽 리그에서 두 팀이 합쳐진다는 건, 퍼시픽 리그가 아예 사라지고 센트럴 리그와 합병되어 단일리그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19]
선수들에게도 자신들의 직장이 2개가 준다는 것은 이와 연관된 수많은 선수, 지도자, 직원들의 고용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 일본프로야구 선수노조 위원장을 맡고 있던 후루타는 각 팀의 주축선수들을 설득해 긴테쓰와 오릭스의 합병을 반대하는 파업을 결의, 일본프로야구 사상 첫 선수단 파업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구단들은 수십억 엔의 피해를 입고, 주변 상가 역시 매상에 크나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은 오히려 후루타 쪽이었다. 그는 뛰어난 달변가였고, 때때로 눈물을 보일 줄도 알았다. 당시 TV 아사히의 뉴스프로그램에서 파업에 대한 심경을 인터뷰하자, 후루타는 생방송 도중에 고개를 푹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이 전국에 생방송으로 보내졌고, 이후 팬들은 경기장에 '지지마라 선수회', '후루타 선수회장 파이팅'등 다양한 현수막과 구호로 선수회에 지지를 보냈다.
협상 중에는 구단주 측의 인사가 악수를 청하자 "지금은 마음 편하게 악수를 할 입장이 아니다"라며 악수를 회피하는 장면이 중계되어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기도 했으며, 지속적으로 여러 매체들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과 양대리그 유지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구단주들에게 새로운 구단을 공모해 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하자, 구단주들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후루타에게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긴테쓰와 오릭스의 흡수합병은 막지 못했지만, 새로운 구단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탄생하며 긴테쓰와 오릭스의 1.5군 선수들을 구제하는데 성공했고, 최종적으로는 양대리그와 그와 연관된 수많은 이들의 고용을 유지하는 데도 성공했다.
특히 이 파업의 성공은 일본 사회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요미우리 신문과 기업집단에 맞서 상대적 약자라 할 수 있는 프로야구 선수들이 이룬 승리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이로 인해 후루타는 야쿠르트의 프랜차이즈 스타, 야구계 최고의 포수라는 타이틀마저 뛰어넘은 일본 야구팬 전체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이때의 이야기는 NHK에서 다큐 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했다.
5 감독 겸 선수 시절
2006년,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사임하면서 차기 감독으로 전격 발탁되는데, 이때 구단과 선수로서 1년, 감독으로서 2년 계약을 맺게 된다.[20] 즉, 선수로 뛰는 동시에 감독의 역할까지 동시 맡게 된 것으로 이는 일본프로야구에서는 노무라 카츠야 이후 29년만의 일이었다고 한다.
감독 첫 해에 팀은 리그 3위를 기록하면서 A클래스를 유지했지만 5할 승률은 달성하지 못 한 데다가 선수로써는 최악의 타격성적을 남겼으며, 2007년에는 팀이 21년만에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면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으로서, 선수로서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21]
참고로 그의 은퇴 이후 그의 등번호였던 27번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명예번호[22]로 지정된다.[23]
이후 한 방송에서 명장 노무라 감독의 최고의 이해자이자 수제자임에도 감독으로의 성적이 그다지 별로였던 것에 대해 츳코미 질문을 받자 노무라 감독은 ID야구라는 이미지에 비해서 상당히 다혈질에 직선적으로 쓴소리를 바로 내뱉는 스타일이었지만 본인은 특히 젊은 선수들에게는 뭐라고 하려다가도 마음이 약해져 전혀 쓴소리를 할 수 없었던 등 선수단 분위기를 카리스마 있게 잡지 못한 것을 고백하고 이것이 선수 겸 감독의 한계가 아니겠느냐는 위로를 듣기도 하였다. 웬지 다음에 감독 복귀하면 뒷 줄 벤치에서 작은 스피커로 끊임없이 불평과 궁시렁거림을 귓가에 마르고 닳도록 반복재생하는 후루타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6 은퇴 이 후
2014년 현재는 후지 테레비의 전속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틈틈이 예능이나 드라마에도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후지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갈릴레오 시즌 2 4화(2013년 5월 6일 방영분)에 게스트 출연. 어떤 베테랑 투수의 연습 파트너로 등장해서 볼을 받아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수노조 위원장과 감독으로 보여준 지도력[24] , 국민 포수 이미지 때문에 참의원 선거 시즌이 되면 자민당과 민주당의 러브콜을 받고 있으나, 본인은 고사로 일관하고 있다.
7 기타
- 1995년에 후지TV 아나운서인 나카이 미호와 결혼해 일본에서 야구선수-지상파 아나운서 커플의 시초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스포츠계의 대표적 잉꼬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연봉 16억의 별명많은 형님이 생각난다.참고로 금슬 좋은 두사람이 이혼 위기를 맞은 적이 있는데, 2002년 나카이 미호가 자궁종양 적출 수술로 인해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었고, 남편이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아내가 이혼을 신청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후루타의 답변은 "널 사랑하니까 안 돼."오오 간지 오오...
-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에는 자신이 대타로 나갈 때 직접 심판에게 다가가서 대타, 나(代打、おれ) 라고 외쳤다고 한다.(...)
- 상당히 온화한 성격인 데다 비교적 체구도 작은 편이라 상대팀 투수들이
만만하게 보고위협구를 자주 던졌다고 한다.즉, 싸움이 나도 후루타 정도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다.심지어 한 타석에 4번 연속으로 공이 머리로 날아든 적이 있었을 정도다.
- 1988 서울 올림픽에서 훗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박동희와 만났다. 3년 후인 1991년 최초의 한일 슈퍼게임에서 다시 박동희와 재회했는데, "너처럼 빠른 공을 가진 투수가 아직까지 상 하나도 못탔다고?"라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박동희는 이듬해인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의 우승에 기여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 선수노조 위원장을 맡고 있던 2002년에 한국에서 임수혁 선수를 돕기 위한 자선 경매 행사가 열리자 유니폼과 사인볼을 기증하기도 했다.
- 실업팀 토요타 자동차에서 뛴 인연으로 연봉이 억대를 넘어간 현역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줄곧 토요타 자동차만 타고 있다.
- 안경 쓴 모습이 닮았다는 이유로 별명은 노비타(のび太). 실제로 둘은 생일도 하루 차이가 난다. 참고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홈 구장은 진구구장이다(...). 물론 명명과정에선 아무런 관계 없지만.
설마 도라에몽 한국어판 번역하며 노진구라고 번안한 사람이 야쿠르트팬이었다던가
- 아라시의 마츠모토 준이 후루타의 열혈팬임을 밝힌 바 있다. 후루타를 보기 위해 여러번 진구구장에도 갔었고 심지어는 팬감사회까지도 갔었다고.
vs아라시에 나왔을때는 아주 좋아 죽었다
- 은퇴시즌에는 각 구장에서 후루타 은퇴 세리머니가 펼쳐졌고, 후루타가 타석에 등장하면 야쿠르트팬 뿐만 아니라 상대팀 팬들도 자발적으로 후루타 응원곡을 불렀다. 이쯤되면 후루타가 일본 야구팬들에게 어느정도의 존재인지 실감할 수 있을 듯.
8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90 | TYS | 106 | 334 | 70 | 12 | 1 | 3 | 32 | 26 | 1 | 43 | 44 | .250 | .353 | .332 | .686 | ||
1991 | 128 | 485 | 140 | 23 | 5 | 11 | 58 | 50 | 4 | 62 | 57 | .340 | .428 | .500 | .928 | |||
1992 | 131 | 568 | 150 | 27 | 3 | 30 | 87 | 86 | 3 | 78 | 87 | .316 | .422 | .576 | .997 | |||
1993 | 132 | 595 | 161 | 29 | 0 | 17 | 90 | 75 | 11 | 59 | 83 | .308 | .381 | .462 | .842 | |||
1994 | 76 | 287 | 62 | 9 | 0 | 3 | 24 | 19 | 3 | 20 | 40 | .238 | .297 | .308 | .605 | |||
1995 | 130 | 551 | 143 | 18 | 1 | 21 | 88 | 76 | 6 | 46 | 51 | .294 | .357 | .464 | .821 | |||
1996 | 119 | 492 | 112 | 24 | 2 | 11 | 57 | 72 | 5 | 46 | 68 | .256 | .332 | .396 | .728 | |||
1997 | 137 | 598 | 164 | 32 | 2 | 9 | 74 | 86 | 9 | 64 | 64 | .322 | .413 | .446 | .859 | |||
1998 | 132 | 552 | 135 | 19 | 1 | 9 | 58 | 63 | 5 | 46 | 62 | .275 | .344 | .373 | .713 | |||
1999 | 128 | 548 | 146 | 26 | 2 | 13 | 79 | 71 | 10 | 51 | 41 | .302 | .368 | .445 | .813 | |||
2000 | 134 | 562 | 138 | 31 | 0 | 14 | 65 | 64 | 5 | 45 | 54 | .278 | .349 | .425 | .774 | |||
2001 | 121 | 503 | 143 | 23 | 0 | 15 | 59 | 66 | 1 | 43 | 41 | .324 | .390 | .478 | .868 | |||
2002 | 120 | 458 | 126 | 24 | 1 | 9 | 49 | 60 | 3 | 28 | 15 | .300 | .352 | .426 | .778 | |||
2003 | 139 | 576 | 146 | 27 | 1 | 23 | 69 | 75 | 2 | 49 | 77 | .287 | .360 | .479 | .839 | |||
2004 | 133 | 532 | 148 | 23 | 0 | 24 | 72 | 79 | 1 | 36 | 66 | .306 | .365 | .503 | .868 | |||
2005 | 96 | 357 | 85 | 15 | 0 | 5 | 29 | 33 | 1 | 19 | 54 | .258 | .306 | .350 | .656 | |||
2006 | 36 | 98 | 22 | 5 | 0 | 0 | 11 | 8 | 0 | 7 | 13 | .244 | .299 | .300 | .599 | |||
2007 | 10 | 19 | 6 | 1 | 0 | 0 | 2 | 0 | 0 | 1 | 0 | .333 | .368 | .389 | .757 | |||
통산 | 2008 | 8115 | 2097 | 368 | 19 | 217 | 1003 | 1009 | 70 | 748 | 951 | .294 | .367 | .442 | .808 |
- ↑ H2의 안경 낀 포수 노다의 모델이다.
안경 낀 포수는 조심해야 한다고 - ↑ 프로 데뷔 이래로 쭉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도 장장 18년 동안 오직 스왈로즈에서만 뛰다가 은퇴했다.
- ↑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한국의 사회인야구보다는 과거 한국에도 존재했던 실업야구에 더 가깝다.
- ↑ 당시 닛폰햄 구단 상무였던 오사와 케이지가 훗날 술회하길, 후루타가 야맹증이라는 야구선수로써는 시력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아 지명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한다.
- ↑ 오가와 코이치는 프로에서 10년간 평범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다가 은퇴했다.
- ↑ 이 89년 드레프트의 8개 구단 동시 지명은 아직까지도 진기록으로 남아 있다. 참고로 89년 드래프트에는 노모 히데오 외에도 유명한 선수들이 꽤 많았다. '외계인' 신조 츠요시가 한신 타이거즈에 드래프트 지명 5순위로 데뷔하였고,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드래프트 지명 1순위로 데뷔하였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4순위 지명 마에다 토모노리는 2013년까지 무려 24년동안 현역생활을 하였다. 그 외에도 세이부의 시오자키 테츠야, 히로시마의 사사오카 신지 등 각 팀의 에이스나 주축 선수로 성장할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 ↑ 당시 최악의 암흑기를 겪던 후루타의 고향 팀 한신 타이거즈도 원래는 후루타를 지명하려고 했지만, 위의 니혼햄의 경우와 같이 안경 낀 포수라는 점 등등의 이유로 지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신은 1997년 주니치에서 야노 아키히로를 받아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주전 포수를 마련하지 못하고, 흑역사는 2000년대 초까지 연장된다;
- ↑ 여담이지만 노무라-호시노 체제를 거치며 야노가 10여년간 안방마님으로 자리잡고, 한신은 나름 2000년대의 강팀으로 도약한다. 하지만, 야노의 노쇠화 이후 새로운 주전 포수를 키워내는데는 애를 먹으면서 조지마 겐지(前 시애틀), 후지이 아키히토(前 라쿠텐), 히다카 타케시(前 오릭스) 등의 외부 영입으로 포수를 충당하고 있다.
그 사이 가능성있는 유망주들은 어째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갔다카노 케이스케 항목 참조. - ↑ 이후 하타 신지는 외야수로 포지션을 전향, 타격을 살려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 ↑ 1990년 데뷔할 때의 성적은 홈런 3개, 타율 0.250, OPS .686였다. 포수란 걸 감안했을 때는 그냥저냥 쓸만한 수준.
- ↑ 이런 뛰어난 수비 실력을 인정 받아, 후루타는 데뷔한 해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참고로 한국과 달리 일본의 골든 글러브는 순수하게 수비만 보고 주는 상이다.
- ↑ 노무라 감독도 이후 인터뷰에서 '너는 캐칭과 스로잉은 되니까 볼배합을 배워야 하니 시합이 시작되면 내 바로 앞에 앉아서 경기 내내 내가 중얼거리는걸 듣고 배워라'라고
갑질시킨 것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 ↑ 요미우리 신문 창업주. 일본프로야구의 성립에 주된 역할을 했다.
- ↑ 90년대 후루타의 성적은 야쿠르트의 성적과 직결되었다. 후루타가 별 탈 없이 정상적으로 출장한 시즌의 야쿠르트는 리그를 지배하는 강팀의 포스를 보였다. 하지만 후루타가 부상당하거나 해서 제대로 출장하지 못한 시즌에, 야쿠르트는 얄짤없이 4위로 떨어졌다...; #
- ↑ 일본 프로야구에서 포수 출신 타격왕은 당시 야쿠르트 감독이었던 노무라 카츠야 이후 처음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노무라 감독이 후루타와 타격왕 경쟁을 벌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 등 타팀 선수에 고의사구를 지시했던 것은 오점으로 남아있다. 여담으로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이 해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양대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타율은 후루타에, 타점은 후루타의 팀메이트인 히로사와 카츠미에게 근소한 차로 밀려 홈런왕만 차지하고 삼관왕 달성에는 실패한다.
- ↑ 시즌 타율 3할을 넘긴 해가 8회나 된다.
- ↑ 포수의 도루 저지율은 4할만 넘겨도 뛰어난 건데, 6할을 넘겼다는 건 말 그대로 감히 범접할 만한 사람이 없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도루 저지 실력으로 명성이 자자한 포수였던 만큼, 주루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주자라도 어지간히 확신이 서지 않으면 아예 도루를 시도하지 않았을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루 저지율이 6할이라니, 이건 그저 괴수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 ↑ 워낙 강견을 자랑하는 포수이다보니 실제 당시 야쿠르트의 경기 장면에서는 보내기 번트가 조금만 짧아도 2-4(6)-3의 병살 플레이도 종종 볼 수 있을 정도
- ↑ 실제로 모기업 다이에의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역시 해체설이 돌기도 했다.
- ↑ 당연한 말이지만, 각각의 연봉도 따로 받았다. 특히 감독을 맡은 이후 개인 성적이 급락한 바람에 2년차 때는 선수 쪽 연봉이 무지막지하게 깎여 나갔다.
- ↑ 여담으로 은퇴 경기에서 야쿠르트 최전성기에 함께 배터리를 이루었던 타카츠 신고와 마지막으로 배터리를 맞추었으며, 같은 해 은퇴한 드래프트 동기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사사오카 신지와 대결하면서 마지막으로 타석에 섰다.
- ↑ 명예번호는 지정된 이후에는 다른 선수가 쓸 수 없는 영구결번과는 달리 충분한 자격을 가진 포수라면 이 번호를 물려받는 것이 가능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한테나 줄 수 있는 번호는 아니다. 참고로 야쿠르트의 명예번호는 27번 외에도 와카마츠 츠토무-이케야마 타카히로-이와무라 아키노리-아오키 노리치카-야마다 테츠토로 이어지는 1번이 있다.
- ↑ 후루타 이전의 야쿠르트의 27번은 팀의 정포수 번호이기는 했다. 카네다 마사이치의 노사인 강속구를 10년간 받아냈던 네고로 히로미츠부터 카토 토시오, 오오야 아키히코로 이어지게 된다. 오오야 역시 야쿠르트에서만 16년을 뛴 레전드. '철포 어깨의 살인자' 라고 불리울 정도의 강견으로 일세를 풍미한 명포수로 1996년, 1997년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을 맡아 1998년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토대가 되는 팀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잠깐 1년간 론 데이비스라는 한신전 전용 용병이 있었지만 무시하자 - ↑ 그의 스마트한 이미지는 현역 선수시절부터 인정받아왔지만, 선수파업 당시 요미우리 신문을 비롯한 야구계 및 일본사회 주류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승리로 이끈 모습은 그의 이미지를 실재로 바꾸어버렸다. 후루타 은퇴 당시 한 방송사는 이 사건으 '혁명'으로 묘사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