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대지진

(1755년 포르투갈 대지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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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날, 리스본의 모습을 묘사한 판화. (출처)

"...격렬하게 요동치던 땅이 잠잠해지고 무시무시한 파도로 해안가를 덮쳤던 타구스 강이 잔잔해진 뒤에야, 모든 것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생존자들은 리스본의 종말을 경고한 예언들을 기억해냈다... (중략) ...요한묵시록에 묘사된 최후의 날 ㅡ 당대 사람들은 리스본 지진을 그렇게 기억한다. 사실 1755년 11월 1일은 최후의 날이나 다름없었다. 땅과 바다, 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리스본을 돌이킬 수 없는 폐허로 만들었다."

 
- 니콜라스 시라디 (건축비평가)

"...이는 5세기 로마의 몰락 이래로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참사다."

 
- 토머스 D. 켄드릭 (역사학자)

"...18세기에는 우리가 오늘날 아우슈비츠를 입에 올리는 것만큼 빈번하게 리스본을 입에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신뢰의 붕괴를 의미하는 데는 그 장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수전 니먼 (철학자)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발생일시
(UTC)

1755년 11월 1일 오전 9시 30분경
진앙세인트 빈센트 곶 남서쪽 200km
진원의 깊이불명
규모M 8.5~9.0
여진 횟수
9월 기준
불명
피해상황
(추정)
사망자30,000~100,000명
부상자불명
재산피해건물 1만 채 이상 파괴됨[1]

정확한 사망자는 추산조차 불가능했던 끔찍한 대지진이자, 18세기 유럽인들의 세계관과 정신을 뒤흔들어 놓기까지 한 가공할 대재앙.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문으로서의 지진학이 제창된 계기이자 근대적 재난관리, 국제재난구호 시스템의 탄생을 이끈 사건.

1 재난의 개요

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의 도시 리스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대지진. 오전 9시 30분경 한 차례의 강진과 그에 못지않은 두 차례의 여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전 11시경에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까지가 대략적인 재난의 내용이다.

재산피해는 정확히 집계하기는 어려우나 리스본 시의 건물 대략 1만 채가 대파되었으며, 인명피해는 최소 1만명에서 최대 10만여 명(추정치)에 달할지도 모른다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한편 현대의 지진학자들은 당시 지진이 리히터 8.5~9.0(보통 리히터 8.7) 정도에 달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1.1 최후의 날

11월 1일 아침, 당시만 해도 리스본은 수많은 시민들로 북적거리면서 마침 닥친 축일인 '만성절'[2]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도시 속에 빽빽하게 들어찬 성당들마다 시민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귀족들은 관례적으로 약간 늦게 미사에 참석했기에 도착이 늦어지고 있었다. 포르투갈 왕실은 마침 개인사로 인해 리스본을 잠시 비운 상황이었기에 미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본의아닌 "천운" 을 누렸다.

이때의 분위기에 대해 한 자료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완벽하게 멋진 날씨였다. 태양은 광휘를 가득 발산했고 하늘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수많은 주민이 살고 있는 융성하고 풍요한 도시를 극한의 공포와 폐허로 뒤바꾸어 놓을 사건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 《세계의 역사 5편 :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 Houghton Mifflin, 1914, p.618

미사의 시작을 알리는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신부와 수사, 수녀들은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3] 저 악명 높은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그 순간에도 이단들을 어떻게 처단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다. 거리에는 자기 몸을 채찍과 쇠사슬로 치면서 "참회! 참회!" 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리스본이 아직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했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이 닥쳐올 것"이라며 불안하게 수군거렸고, 이 심판이 닥쳐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성결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9시 30분. 북대서양 100km 밖 지점에서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파는 곧장 리스본으로 향했고 그 뒤를 쓰나미가 뒤따르고 있었다.

리스본의 수호성인인 성 빈센트를 기리는 대성당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성당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계단과 바깥 광장에까지 사람들이 모여서 미사를 올렸다. 성가대의 감미로운 합창이 이어졌다. 신부가 경건한 표정으로 강단에 올라서서 "Gaudeamus omnes in Domino, diem festum", 즉 축제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주님을 기뻐하자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축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P파가 리스본을 관통해 지나갔다.

리스본에 가득한 수많은 종탑들의 종이 불길하고 음산하게 진동했다. 촛대가 내팽개쳐지고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 조각들이 미사를 올리던 신도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리스본 시내 전 지역에서 미사를 올리던 신도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뛰쳐나왔고 도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시 전체를 울리는 수많은 종들은 잠시 후에 있을 심판의 순간을 불길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S파가 리스본을 강타했다.

순간 도시가 거의 주저앉듯이 크게 흔들렸고,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의 머리 위로 교회 첨탑들과 주택들, 공공건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이 거리에서 수십 명, 저 거리에서 수십 명, 광장에서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연기와 먼지가 하늘을 덮었고, 방금 전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경건한 분위기였던 한 도시가 일순간에 비명과 신음과 울부짖음으로 가득찬 끔찍한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생존자들은 가족 친지들을 찾아 헤맸으며 일부는 "오 주여, 긍휼을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만을 목놓아 외쳐 댔다.

채 2~3분도 되지 않아, 두 차례의 여진이 차례로 리스본을 강타했다. 그나마 온전하던 일부 건물들조차 이 지진에는 와르르 무너졌다. 주님의 긍휼을 부르짖던 목소리는 쏟아지는 건물 잔해 밑에서 기괴하게 끊겼고, 세 번째의 여진이 도시에 닥쳐올때는 이미 도시에는 무너질 건축물도 남아있어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과 사람 시체가 뒤섞인 현실에 만들어진 하나의 지옥이 되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생존자들도 목쉬어 버린 비명을 내지를 뿐이었다.

여기에 수많은 교회들에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했던 촛대들은 거꾸로 도시를 집어삼키는 화마로 변했다. 사용된 장엄한 촛대들이 지진에 쓰러지며 화재가 발생하였고 도시의 모든 것을 쓸어간 지진파 다음에 화염파가 무너진 도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일어나 움직일 힘도 없던 몇몇 생존자들은 속절없이 화염에 휩쓸렸고 태울수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울 듯한 강렬한 화염은 왕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소중한 사료들과 탐험가들이 목숨을 바쳐 작성한 여러 세계지도들 같은 귀중한 자료들도 태워버렸다. 일어나 걸을 힘이라도 남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타구스 강의 강만에 자리잡고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항구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희망이 아닌 죽음의 집요한 절망이었다. 바로 쓰나미(지진해일)가 밀려온 것이다.

높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지진해일이 한때 융성했던 이 아름다운 항구를 덮쳤다. 정박되어 있던 선박들과 수십 년 전, 수백 년 전에 침몰하여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은 침몰선까지 단번에 끌어올리며 대량의 잔해가 해변에 밀려들었고 이에 몇 남지도 못한 생존자들을 재차 쓸어갔다. 파도가 모든 것을 휩쓸어 간 이후, 리스본에는 검게 그슬린 약간의 잔해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4]

1.2 카르발류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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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조세 국왕(D. josé) : "이런 재난에 도대체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는가?"

카르발류(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5] : "죽은 사람은 장례를 치르고, 산 사람은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개인사로 잠시 리스본을 비운 동 조세 국왕이 급히 돌아와 보니 리스본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 되어 있었다. 수많은 건물과 주민들이 죽어 도시가 초토화가 된 것도 모자라 여기에 감옥이 파괴되며 범죄자들이 마구 뛰쳐나오며 자연재해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도시를 더욱 악화시켰다. 도시 곳곳에서 약탈, 강간, 방화행위가 잇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경건하기 짝이 없었던 도시가 오늘은 사실상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국왕은 자신이 신뢰하는 카르발류에게 사태의 해결을 위한 전권을 맡겼고, 결과적으로 이는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우선 카르발류는 사방에서 날뛰는 도둑들과 강간범들을 붙잡아 즉결재판에 넘기고, 치안의 확보를 위해 지방에 주둔해 있던 군 병력들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재난을 간신히 피한 귀족들과 유력자들이 공포에 질린 시민들을 진정시킨 뒤, 카르발류는 대주교와 긴급히 면담하여 일체의 종교적 장례절차를 생략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것에 동의를 받아냈다. 시신의 재빠른 수습은 위험한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을 막아주었다. 이후 생존자들을 불러모아서 식량 배급소를 열고 군인들이 직접 대동한 자리에서 식량을 공평하게 배분했다. 모든 것이 정확히 그의 계획대로였다.

사람들은 놀랍도록 차분한 태도로 이제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르발류는 도시 재건사업을 잠시 보류시킨 뒤, 1758년 7월 12일에 도시 계획법을 공포하고 이에 따라 재건하도록 했다. 건축이 5년 이상 지연될 경우에는 부동산 구입을 희망하는 타인에게 권리가 넘어갔으며, 대부분의 집들은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모든 것이 질서가 있었고 앞뒤가 맞았으며 순서가 있었다. 카르발류는 리스본을 그 근본부터 완전히 다른 신도시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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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스본에 이제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행여라도 닥쳐올 또 다른 지진에 대비하여 모든 건물은 4층 이상 지을 수 없었고, "가이올라" 라는 신 건축공법을 도입해야 했다. 포르투갈어로 "새장" 을 뜻하는 가이올라 공법은 건물벽에 완충재의 목적으로 목제 프레임을 X자형으로 댄 뒤에 그 사이를 벽돌과 석재, 회반죽으로 채우는 형태였다. 또한 모든 건물은 그 기초 밑에 목재 더미를 묻어두어 건물이 흔들리는 지반 위에서도 유연하게 탄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거리에 잔해가 쌓이더라도 안전할 공간을 확보하도록, 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넓은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7개의 대로가 18m 폭으로 깔렸으며 동서 방향으로는 12m의 폭으로 유지되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꼬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이 재건된 것도 이 때의 일.

신임 도시설계자로 에우제니우 도스 산토스(Eugénio dos Santos), 마누엘 다 마이아(Manuel da Maia), 그리고 카를로스 마르델(Carlos Mardel)이 임명되었다. 마이아는 예전 런던의 대화재 이후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구상했던 설계도를 기초로 해서 기하학적 구조의 도시를 설계했다. 모든 건축 자재들은 대량양산을 위해 표준 규격을 잡아놓고 신속하게 찍어냈다.

물론 반발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기 땅의 소유권을 잃을까 염려한 서민들, 더 이상 주택으로는 차별성을 기대하기 힘들어지게 되어[6] 자존심이 상한 귀족들이 불쾌해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성직자들은 심판을 무시하고 "감히" 재건을 했다가 다시 더 큰 심판을 겪게 될까 불안해했다. 심지어 카르발류는 아베이루(Aveiro)를 주축으로 한 일부 귀족들 사이에 반란모의가 있었다는 것까지 밝혀냈고 그들을 엄중하게 처벌했다. 시민들의 동요는 군인들이 직접 내리눌러서 통제에 따르도록 했다. 가브리엘 말라그리다(Gabriel Malagrida)를 주축으로 하는 일부 예수회 소속 성직자들이 통제에 따르지 않자 카르발류는 그들을 국외추방하는 법령을 공포하는 것으로 맞섰다.[7]

1.3 다시 태어난 리스본

"...세계 최초로 지진에 관한 객관적 설문조사를 실시한 공식적 시도였다..."

 
- 리처드 험블린, 《테라 : 인류의 역사를 바꾼 4대 재난의 기록》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졌다.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겪은 뒤 폐허가 된 한 도시가, 지진대비와 재난관리에 있어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모범적 선례로 거듭났다.

카르발류의 재난대비 시스템은 리스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포르투갈 전역의 성직자들은 "지진을 언제, 어떻게 느꼈는지, 얼마나 피해가 컸는지, 여진은 몇 번 있었는지, 귀하의 교구에는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에 대해서 전국가적인 설문조사를 실시,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여 분석, 참조함으로써 지진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실시했다. 서유럽에서 해당 지진으로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다른 국가들은 포르투갈에 사절을 보내서 해당 자료들을 공유하고 교환하며 국제공조를 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8]

이 때를 계기로 리스본 시가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과거 교회권력에 대한 유럽 계몽주의의 승리이자 도시공학, 건축학의 눈부신 발전, 재난관리의 실제적 경험, 국제공조 시스템, 기타 모든 것들에 대한 성취와 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리스본이 너무나 많은 교육비를 치르기는 했지만, 이제 리스본은 더 이상 과거의 그 취약한 리스본이 아니었다.

2 종교사학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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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참사 이후 하느님의 도덕적 인격이 이런 재난을 허용할 수 있다는 논증은 처음에는 철학자들에게, 나중에는 신학자들에게도 그 견인력을 잃기 시작했다. 리스본 참사는 중세적 사유에서 일어난 피로골절(stress fractures)을 아주 극적으로 드러냈으며, 한때는 이런 참사를 포용할 수 있었던 윤리적, 신학적 범주를 단숨에 압도해 버렸다... (중략) ...만일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든 간에, 피에 굶주린 그의 폭력성은 무작위적이고 무분별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성절에 일어났던 리스본 참사 배후에 도덕적 의지가 존재했다면, 그것이 전달할 수 있었던 도덕적 교훈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의지적 잔인함은 극단적이었다."

 
- 《고통과 씨름하다》, 토머스 G. 롱, p.41

"리스본의 지진은 볼테르에게서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라는 질병을 제거하기에 충분했다."

 
- 《부정 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p.361

일반 대중들 사이에, 사회 전반에, 유럽인들의 인식 속에 비로소 악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대두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실패했고 과거의 패러다임에 거대한 금이 갔다.

더 이상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가능한 최고의 세상" 이 아니었다. 이 대지진에는 의미도 교훈도 사랑도 자비도 없는 듯했다. 리스본이 어떤 도시였던가? 당시 종교적이기로는 거의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던 도시였고 조금이라도 더 경건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했던 도시였다. 그러면서도 이 도시가 너무나 타락한 나머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던 도시였다. 도시 전체에 성당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인가?

악의 문제 항목에도 나오듯이 고금을 통틀어 수많은 종류의 해명이 시도되어 왔으나, 일개 인간을 철저히 무력해 보이게 만들 정도의 가공할 재난은 아예 그 입을 막아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무언가의 경고인가? 수만 명의 무고한 "경건한 신자" 들의 희생으로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말인가? 인간의 잘못 때문인가? 도대체 그 "잘못" 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단계인가? 수만 명이 희생되는 대가로 얻을 선이란 대체 무엇인가? 유럽인들은 그야말로 거대한 혼란에 빠졌다. 계몽주의는 즉각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볼테르, 루소, 칸트, 괴테 등 당대의 거성들이 앞다투어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지만 대지진을 막지는 않은 신" 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이전까지 교회에서 논의하는 "악" 이란 단지 개인의 차원의 고통 내지는 불행 정도에 그쳤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경고입니다,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뜻입니다, 뭔가 죄를 지어서 그럴 겁니다" 와 같은 해명이 꽤 설득력도 있었고 또한 잘 먹혀들어갔다. 그러나 이번 대지진은 달랐다. 그러잖아도 거의 신경증적으로 금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한 축일을 위해 모여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던 그 시점에, 그들은 하늘의 그 높으신 분에게 철저하게 부정당했고 거부당했으며 유린당했다. 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바티칸 역시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뒤늦게 리스본 대주교가 "이번 재난과 신의 섭리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 고 간신히 입장을 밝힌 행간에는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민중들의 당혹스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게다가 리스본에서 그나마 재난을 피할 수 있었던 몇몇 구획들은 도리어 재난 이전에는 가장 타락한 곳이라고 지탄받던 곳이었다. 하필이면 그곳이 바로 리스본의 얼마 없는 집창촌이었던 것. 즉 교회란 교회는 전부 무너지고 신자란 신자는 전부 죽었는데 집창촌과 매춘부들은 도리어 살아남은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아마도 교회같이 높은 건물로 가득 차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는 지진에 큰 피해를 입기 쉬었겠지만, 집창촌이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서고 사람이 많이 모여살리 없기 때문에 피해를 적게 입은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혁명에 따른 것과 함께 유럽인들은 점차 종교적 세계관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이후 19세기 중엽에 세속화(secularization)으로 이어졌고, 이로써 비로소 유럽인들은 종교적 교리와 가치관이 그들의 생활규범이 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에게 종교가 우리나라에게 있어 유교가 갖는 가치와도 비슷하게 되는 수준으로까지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3 대중매체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주인공이 바로 이 지진 속에 휘말리는 대목이 나온다. 애초에 해당 소설의 작성 동기는 이 대지진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어쌔신 크리드: 로그에서는 에덴의 조각 회수 임무를 맡은 셰이 패트릭 코맥이 리스본에서 어느 대성당 밑에 있는, 먼저 온 자들의 유적지에 있던 지구자기장 조절장치를 건드려서 발생한 것으로 나오며 이 사건은 셰이가 암살단에 회의를 느끼고 템플러로 전향하는 계기가 된다.

4 같이 보기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19세기 이전에 발생한 지진
19세기 이전20세기
발생 날짜규모해당 지진
779. 3. ??M7.0?779년 경주 지진
1556. 1. 23M8.0?산시 대지진
1643. 7. 25M6.5~7.0?1643년 울산 대지진
1681. 6. 26M7.5?1681년 양양 대지진
1703. 12. 31M8.1?겐로쿠 대지진
1707. 10. 28M8.6~9.3호에이 대지진
1755. 11. 1M8.5~9.0리스본 대지진
1797. ??. ??M8.71797년 남아시아 대지진
1833. 11. 25M9.0±0.21833년 남아시아 대지진
1897. 6. 12M8.31897년 아삼 지진
  1. NOAA Significant Earthquake Database의 피해액 등급 기준, 4(Extreme)이다.
  2. 한국어:모든 성인 대축일/포르투갈어:Dia de Todos os Santos/영어:All Saint's Day
  3. 역사학자 찰스 복서(Charles Boxer)에 따르면 당시 리스본의 인구 열 명 중 한명이 이러한 성직자들이었다고 한다.
  4. 그나마 안전할 수 있었던 극소수의 지역은 알파마(Alfama) 등이었다.
  5. 전직 외교관이자 왕의 총애받는 측근. 이후 1770년에 왕에게 그 유능함을 인정받아 폼발 후작으로 승격된다.
  6. 카르발류의 새 법령에 따르면 귀족들은 어떤 건물의 소유주가 귀족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어떠한 표식도 붙이거나 걸어둘 수 없게 되었다.
  7. 말라그리다 신부는 일명 "타보라 후작 사건" 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훗날 마리아 1세 국왕이 재조사를 통해 이것이 자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카르발류의 누명 모의임이 밝혀졌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이 신부는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카르발류는 유죄선고를 받았지만 고령임이 참작되어 추방 명령을 받았다.
  8. 스페인 왕실에서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금을 지원했으며, 프랑스에서는 원조가 필요할 시 돕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예외적인 사례가 네덜란드인데 이곳은 구교 대 신교의 갈등이 깊었기 때문에 이 재난을 신의 정당한 징벌로 이해했고 원조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