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역사

1 고대

포르투갈의 역사
História de Portugal

선사 - 로마 - 게르만족의 대이동 - 헤콩키스타 - 포르투갈 제국 - 현대
선사로마 제국게르만족의 대이동
켈트인갈라이키아 속주반달족수에비 왕국



수에비 왕국



수에비 왕국
루시타니아인루시타니아 속주알란 왕국서로마 제국서고트 왕국동고트 왕국서고트 왕국
퀴네테스인반달족

약 4만~3만년 전에 현생인류가 이베리아 반도에 살기 시작했지만, 이 땅이 주류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뒤에 로마 제국이 지중해를 따라 영토를 넓혀가면서다. 포르투갈 땅은 기원전 29년에 속주 루시타니아로서 고대 로마 제국에 편입되면서 500년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데, 포르투갈어의 기원이 라틴어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서고트족과 수에비족 등의 게르만계 민족이 정착하였고, 8세기경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아랍인, 베르베르인(무어인)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 거의 대부분이 점령당했다.

2 중세

포르투갈의 역사
História de Portugal

선사 - 로마 - 게르만족의 대이동 - 헤콩키스타 - 포르투갈 제국 - 현대
헤콩키스타포르투갈 제국현대



아스투리아스
왕국
갈리시아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왕국이베리아 연합포르투갈 왕국
1



2



3


포르투갈 백작령
우마이야후우마이야무라비트
무와히드

포르투갈의 기원은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의 아폰수 6세(Afonso VI)가 자신의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1]에게 준 포르투갈레 백작령. 이후 보르고냐의 아들 엔히크[2]가 전쟁을 통해 공작으로 독립하고 국토회복전쟁 중 이슬람 왕조에 승리를 거둔 것을 계기삼아 본격적으로 독립을 선언, 스스로 아폰수 1세라 칭한다. 교황의 중재로 카스티야 왕국도 이를 인정하고 교황의 정식 인가를 받아 국제적으로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 받게 된다. 당시 포르투갈은 왕이없었다

3 대항해시대

유럽에서도 구석탱이 변방에 끝에 위치한 탓에 일찌감치 바다에 눈독을 들여서 15세기 초부터 엔히크 왕자의 주도 아래 아프리카로 탐험대를 보냈고 이후 바스코 다 가마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여 대박을 치게 된다. 그리하여 한때는 교황의 중재아래 스페인과 더불어 토르데질랴스 조약[3]으로 지멋대로 세계를 분할할 정도의 강대국이었다. 흠좀무. 과거 주요 식민지로는 브라질, 아소르스 제도, 모잠비크, 앙골라, 상투메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동티모르, 마카오 등이 있었다.

이 외에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포르투갈 출신.[4]

이때만 해도 포르투갈의 세계적 위상은 상당했다고 한다. 유럽의 한 사신이 동쪽으로 가다가 서남아시아 지방에 잠시 정박했는데, 현지 군인 장교가 사신을 보더니 포르투갈어로 말을 걸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는 당시 포르투갈어가 적어도 유럽 및 중동에서는 국제어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 포르투갈 몰락의 씨앗이 있었다. 그렇게 인도 맛을 한번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진 포르투갈 왕실이 해외무역에 국가 경제를 올인한 것이다. 덕분에 국내 경제는 아예 파탄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의 해외 무역은 수익률은 좋긴 했지만 인도로 떠난 상선의 반이 돌아오면 초대풍작일 정도로 꼴아박기 딱좋은 리스크가 아주 큰 사업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게 성공만 하면 수입이 엄청난 모험이긴 했다. 예를 들어 마젤란의 탐험대는 탐헌 도중에 배를 1척 빼고 전부 꼴아박혔지만, 이 1척이 가지고 온 상품들이 탐험에서 잃은 것들은 전부 메꾸고도 남는 정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돈은 그렇다쳐도 배라는 물건이 저글링 뽑듯이 뽑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에 문제는 문제다. 더군다나 숙련된 선원들은...

아예 그 인도를 식민지로 노리고자 쳐들어간 적도 있지만 당시 인도는 무굴 제국 체제에서 명군급 황제들이 제위하고 무기나 병력 수,장비,사기에서도 절대로 꿀리지 않았기에 포르투갈 원정군이 털리기도 했다. 그나마 인도 남부의 소규모 제후국들과 해안가 지방을 제압하고 캘리컷이나 고아 주같은 작은 지역을 식민지로 삼은 게 성과였지만.

그 외 인도양의 해상 무역루트를 노리고 자주 소규모 군사원정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때문에 오스만 제국 및 이슬람 토후국들과 소말리아,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에서 싸우기도 하였고 동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해 발판으로 교역의 발판으로 삼은 뒤 오만호르무즈의 해안가를 잠시 정복하기도 하였다.[5] 심지어 미얀마의 용병대장 필리페 드 브리투가 미얀마 남부에 자신의 국가를 멋대로 세웠다가 나중에 미얀마에 털리기도 하였다. 그 외 중국에도 내항하였고 마카오를 교역기지로 삼을 수 있었다. 또 일본[6]에 내항하여 조총, 카스텔라, 담배 등을 전래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7]

거기서 더해 말라카동티모르 지역도 점령하였으며 스리랑카도 잠시 정복하였다. 이렇게 장대한 해상제국을 세웠다.

하지만 저런 무역과 식민지 전쟁은 포르투갈처럼 내실이 탄탄하지 않은 국가가 지속해나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역세력의 반발과 주변 국가들의 침공으로 몇몇 오지를 제외하고 알짜배기 땅은 점령했다가 도로 뺏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거기에 왕실이 그나마 무역으로 쓸어담은 부를 또 부정축재를 하니 나라꼴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게다가 바다로 나간 남자들이 폭풍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나중에는 군대에 징집할 남성마저 부족해지게 된다.(…)

이 부족한 남자들의 땜빵은 식민지에서 온 흑인이나 해외용병들로 매우게 되었다. 그때문에 포르투갈에서는 옆나라 스페인과 달리 인종차별 개념이 매우 약했다. 흑인 노예이나 황인과 혼혈하기도 했으니(…). 나중에는 이집트 해군을 격파할 정도로 강성했던 해군도 비실비실해져 오만 제국 해군에게 쳐발리고 동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빼앗기고 만다.[8]

그 후로도 경쟁국 스페인과 후발 주자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에 차례 차례로 주도권을 뺏기고 개털려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당시 아비즈-베자 왕가의 군주였던 세바스티앙 1세가 다소 무리하게 시행한 모로코 원정에서 전사함에 따라 왕실 직계 혈통이 끊겼는데, 이를 노린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가 왕위 상속권을 주장하며 무력 합병해 이베리아 연합으로 편입시키고 합스부르크-펠리페 왕조를 열어 자신이 포르투갈의 왕 펠리페 1세로 즉위한다. 형식상 에스파냐-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이지만 그 지위는 에스파냐의 핵심인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 밑이었다.

4 독립

스페인에게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을 일으켜 결국 독립했지만, 국력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이 때 동군연합당한 시절 이전부터의 동맹이었던[9]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서, 안그래도 친했던 영국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국력 자체가 원래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은데다 영국의 성장까지 겹쳐서, 17세기 이후의 포르투갈은 거의 영국의 대유럽 전략의 도우미 정도의 존재감으로 전락하게 된다.(...)

1755년 11월 1일에는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가 수도 리스본을 덮쳐 초토화되었다. 이때 최소 3만 명에서 7만명 가까이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하필 이 날은 천주교의 축일인 만성절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스본의 사창가는 대부분 무사했다. 이 참극은 유럽 각지에서 종교적 신념이 박살난 근현대사 역사적 일로 많이 언급되는데 종교적 명절에 사망자 대다수가 독실한 신도에 교회들이 무수하게 박살난 반면에 더럽다던 사창가가 무사했으니 정말 신이니 예수가 있는 거냐며 유럽 각지에서 계몽주의 학자들은 이거봐라, 예수이네 뭐니 믿어도 이건 뭐냐? 어디 좀 설명좀 해봐라! 톡 쏘아붙였고 유럽 각지에서 무신론도 널리 퍼졌으며 바티칸 교황청도 당황해했다.

5 브라질의 독립

나폴레옹 시기 진격해오는 프랑스군에 의해 본토의 점령이 눈앞에 닥쳐오자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가는 브라질로 수도를 옮기면서 브라질 왕국이라는 새로운 왕위를 만들어 포르투갈-브라질 연합왕국을 새로이 결성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브라질이 살만하자 눌러 앉아있던 국왕 주앙 6세는 왕이 안돌아오자 본국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면서 이를 달래기 위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브라질에 남아 있었던 아들 페드루는 이를 틈타 브라질 제국으로서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자신은 브라질 제국의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다.

나폴레옹 전쟁까지 처맞아 극도로 약해진 포르투갈은 독립을 선언한 브라질을 어떻게 할 힘이 전혀 없었고, 결국 브라질의 독립을 허용하였다. 이는 브라질의 천연자원과 노예노동으로 부를 얻던 포르투갈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사건이었고 브라질 독립 이후 포르투갈 왕국은 급속히 몰락한다.

6 현대

국내에서 공화파와 왕정파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왕과 왕세자가 암살 된 뒤 어린 마누엘 2세가 즉위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0년 혁명에 의해 당시 국왕이었던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나라는 뒤엎었으나 분열로 찢겨져나간 좌파 혁명 세력의 독재적인 집권은 정계를 더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지지를 스스로 상실시켰다. 세계대전 참전의 뒷감당에 실패하여 폭발한 인플레이션과 집권 세력 간의 정치적 혼란이 끊임없는 상황속에서 결국 1926년, 세계 대공황을 3년 앞두고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노조와 공산당조차 정권을 지지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정권을 뒤엎었으며, 왕정 복위는 없었다. 쿠데타 세력은 제2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해가며 신 내각이 탄생했다. 이때 내각 인사중에 살라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쿠데타를 계기로 입각했으면서도 특이하게 군인이 아니라 재무장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경제학 교수 출신이었다. 살라자르는 군사 정권의 재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전 세계적인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포르투갈의 경제를 재건시키고 재성장을 이룩하여 국민적인 유명세와 지지를 얻었다.

살라자르의 뛰어난 수완은 경제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어서 쏟아지는 지지를 기반으로 다른 군인들을 모두 제치고 포르투갈의 총리를 겸임하기 시작한 1932년부터 이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살라자르는 총리 자리를 지키면서 포르투갈의 실권을 손아귀에 쥐고 독재 정권을 성립시켰고 군인 대통령조차 그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파시스트과 극우 세력을 탄압[10]하면서도 파시스트적인 조합주의 경제 정책과 극단적인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면서 살라자르의 입맛대로 산업을 통제하고 성장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과 부채 지불, 건전한 예산으로 매년 포르투갈의 재정은 흑자를 기록했다.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Football(축구, 포어로는 Futebol이라 쓴다.), Fado(파두, 포르투갈의 음악), Fatima(파티마, 종교)의 3F[11]을 비롯한 우민화 정책 덕분에 문해율은 심각하게 낮았음에도 30여년의 살라자르의 집권기 동안 경제 성장이 멈춘 적이 없었으며 이런 현상은 그가 1968년 병으로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살라자르 정권은 해외 식민지들의 독립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포르투갈과 같이 해외에 식민지들을 지배하였던 영국이 2차 대전 중 본국에 지원을 해주는 대신 독립을 약속한 결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들의 독립을 반자발적으로 인정한데 반해, 중립을 지켰던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정권은 식민지들의 지배를 고수하면서 이 시기에 포르투갈은 유럽 최후의 식민 제국주의 국가라는 국제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동남아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유지하고자 했던 프랑스조차 끝없는 전쟁에 경제가 무너지고, 정권이 무너지면서 결국 1960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해외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게된다. 이에 따라 수많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서구열강들로부터 독립하면서 앙골라와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도 독립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다. 인도에서 유지하고 있던 고아 같은 경우 인도군이 그냥 처들어와서 탈환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살라자르 정권들은 이들 식민지들의 독립 요구를 앙골라, 모잠비크는 나라가 아니라며 묵살했고 북쪽 추운 나라누군가옆 나라에 비슷한 얘기를 했던게 떠오른다면 지는거다 1961년 이후 앙골라와 기니비사우,모잠비크등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반군 조직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이에 살라자르 정권은 군대를 파견하여 식민지 반군들의 무력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하면서 포르투갈 식민지들은 사실상 전쟁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식민지 반군들도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전쟁은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고 식민지들의 독립 이탈을 무력으로 막겠다고 전쟁비용으로 투입되는 막대한 돈 또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결국 장기화되는 식민지 전쟁 자금으로 포르투갈 경제는 크게 박살났다. 그럼에도 1968년 살라자르가 물러나고 총리가 된 카에타누 역시 독재 정치와 식민지 탄압 정책을 이어갔고 이러한 독재정치와 장기화되어가는 식민지 전쟁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4년 청년 좌파 장교들에 의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면서 독재 정권이 결국 붕괴되었고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새로 들어선 정부는 아소르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 마카오를 제외한 그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상투메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같은 해외 식민지들을 포기하고 이들의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덕분에 무수한 넓은 땅을 포기하었고, 땅도 남한 면적만한 작은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식민지 중 하나였던 마카오1999년 12월 중국에 반환했다. 이후에 경제 성장에 집중하여 선진국에 진입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한 동안 경제가 막장세를 달려가던 브라질로부터 이민자가 들어오는 등의 호황을 누리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화 위기를 맞아 경제가 급속히 막장화 되어가면서,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처럼 심각한 혼돈에 시달리고, 브라질이나 앙골라등에게 손을 벌려야되는 처지가 되었다.

현재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중에 있는데, GDP가 크게 떨어지는 등의 문제로 인해 확실한 선진국에서 선진국-개도국을 오가는 애매한 위치로 떨어져 버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웃 스페인보다 체감 경기는 좀 낫다는 점. 실제로 실업률 자체나 청년실업률이나 스페인보다 양호한 편이다. 다만 이건 노동인구 태반이 브라질이나 앙골라, 모잠비크 등으로 빠져나간 영향이 크다. 2010년대 전반기에만 60만명이 빠져나갔으며[12] 출산율도 1명대 초반으로 떨어진 덕택에 사회전체의 고령화도 가속화되어가는 중 그래도 상황이 나아지면 브라질이나 앙골라, 모잠비크 동티모르에서 노동인구를 공수해오는 걸로 어떻게 땜빵은 되기는 하다[13] 그렇지만 2014년 이후로부터 원자재값 하락의 여파로 브라질과 앙골라의 경제가 급속히 침체되면서 이민행렬은 잠시 줄어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시이기는 하고 없던 일자리가 생긴건 아니기에 앞으로도 원래 상태로 돌아갈려면 한참멀었다.
  1. 프랑스의 부르고뉴 공작 앙리의 아들로 프랑스어로는 앙리 드 부르고뉴가 된다. 부르고뉴 공작은 원래 프랑스 카페 왕조 로베르 2세의 막내아들 로베르의 후손으로 카페 왕조의 방계 왕족이다.
  2. 엔히크 드 보르고냐로,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 엔히크 공작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엔리케라는 표기도 많이 보인다.
  3. 포르투갈어로 읽었을 때의 발음.
  4. 그러나 세계일주 항해는 스페인 왕의 후원을 받았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영어식 표기고, 포르투갈어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다.
  5. 잠시라지만 거의 150년간이었다. 나중에 오만 내륙지방의 이슬람 제후와 오스만 연합군에게 털려서 모조리 뺏긴 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지역도 남부 모잠비크 지역을 제외하곤 대부분 다 뺏긴다.이 후 오만이 오만 해상제국을 세워서 서구 열강이 다시 돌아올때까지 왕초노릇을 한다.
  6. 일본에 처음 온 서양인이 바로 포르투갈인이었다.
  7. 우리가 먹는 이란 단어도 포르투갈어에서 온 말이다
  8. 사실 오만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잘 안알려져서 이지 전성기 오만은 인도양의 해상제국이였다
  9. 공식적으로 동맹이 체결된 것은 1386년부터로 이미 이때부터 계산해도 현재까지 유지되는 세계 최장기간의 동맹관계지만, 포르투갈 건국시기, 대 이슬람 레콩키스타가 한창이던 1186년 리스본 공략전에서도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인 십자군의 원조가 전투의 승리와 함께 성공적인 건국을 이뤄낸 것을 생각하면, 양국의 동맹관계는 거의 900년에 가까운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10. 뭔가 앞뒤가 안맞는 소리 같지만 실제로 살라자르는 안빈낙도를 추구 했기 때문에 열성적인 파시즘은 싫어했다. 실제로 국가조합당과같이 노골적인 파시즘을 표방하는 정당들과는 관계가 험악했었다.
  11. 동아시아에 있는 모 나라그 분께서 실행하신 3S정책과 매우 비슷하다.
  12. 얼핏보면 적은걸로 보이지만 인구비율로 치면 한국에서 하나의 광역시급 인구가 빠져나온꼴이다! 결코 적은게 아니다.
  13. 실제 브라질의 출산율은 1.8명대 정도로 그리 높다고 볼수없는 수치이지만 앙골라와 모잠비크, 동티모르는 출산율이 아직도 2명대를 훌쩍넘는다. 그러니까 이들나라의 교육수준이 향상된다면 어떻게든 땜방은 가능하다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