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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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이 터졌던 국가 중 하나인 프로이센

1 개요

1848년 3월 전 유럽을 뒤흔든 혁명. 프랑스에서 오를레앙 왕가가 쫓겨난 2월 혁명독일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3월 혁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쉽게 생각하면 유럽에서 일어나는 아랍의 봄이라고 비유하면 된다.
그러고보니 70년뒤 러시아 혁명도 신력으로 3월 혁명이네

2 전개

1848년은 유럽사에서 '혁명의 해'로 규정되어 있는 데 실제로 연초부터 연말까지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서 혁명이 터졌다.

우선 1월에는 시칠리아에서 양시칠리아 왕국의 강압 통치에 항거하는 민중 봉기가 폭발했고,

2월에는 루이 필리프7월 왕정에 맞서 노동자를 중심으로한 파리 시민들이 봉기,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스 2월 혁명)

3월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베를린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에서 혁명이 폭발,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영국으로 망명했고 바이에른, 작센 같은 독일 연방의 나라들에서도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서는 헝가리인, 체코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이 잇따라 봉기해 독립하려고 해 순식간에 합스부르크 제국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했다.

이곳 이외에도 혁명은 교황령, 토스카나 대공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영국령 아일랜드에서도 폭발해 러시아와 영국 본토를 제외한 주요 유럽 열강에서 혁명 운동이 폭발했다.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체코인의 주동으로 슬라브민족회의가 소집되어, 체코인과 폴란드인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3 결과

혁명의 결과는 엇갈려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수립[1]되었으나 그외의 지역에서는 혁명이 짓밟혔다. 결과적으로 더 말할 것도 없는 실패의 혁명들이 되었다.

1848년 12월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통치능력이 없는 백부인 페르디난트 1세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 혼란 상태에 놓인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듬해 11월 헝가리 독립군이 패배한 뒤 오스트리아는 1850년대 소위 '바흐 절대주의'(신 절대주의)시대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20년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도 더이상 구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타협하게 된다.

독일 연방에서는 1849년 프로이센에서 오스트리아의 혁명이 일시 성공한 틈을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자유주의 헌법을 수용하는등 여러 제후국에서도 혁명이 성공하는듯 했으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입헌과정에서 소독일주의 대독일주의와 세습황제파 선출황제파 공화제파의 병림픽이 오래 지속되면서 군주제주의자들이 반격하여 혁명이 진압되었다. 이미 혁명이 용도폐기된 시점에 프로이센 국왕에게 황제관을 바쳤지만 '돼지들의 머리에나 어울리는 관' 이라는 빈정거림과 함께 거부 당했다.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왕국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 참패해 국왕이 퇴위하는 일이 일어났으며, 혁명가 마치니를 중심으로 교황령은 혁명으로 교황이 쫓겨나고 일시적으로 '로마 공화국'이 수립되기도 했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간섭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교황령 자체는 21년 뒤 찾아온 리소르지멘토에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4 의의

혁명의 결과 보수로의 회귀인 '빈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고조되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체제에 의해 억눌려 있던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다시 개시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참고로 러시아는 혁명이고 뭐고 없고, 심지어 그 이듬해에 오스트리아에서 폭발한 헝가리 독립 운동 탄압을 지원해 14만 대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흠좀무. 이 때문에 크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신성 동맹을 깨고 뒤통수를 치자 몹시 분개했는데, 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내란 진압을 지원했으니 오스트리아를 우방으로 만들었다는 인식 하에서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이 폭발적인 확산은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의 약체화를 초래했으며, 반대로 민족국가였던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 반도가 프로이센 주도로 통일을 향해 달려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둘 모두 일단은 프로이센의 제관 거부와 탄압,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민족통일의 움직임은 일단 좌절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유럽 열강 중 영국은 혁명의 여파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지만, 참정권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이 시기 종말을 맞은 뒤 결국 '2개의 국민'을 통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를 낳았다. 이 때문에 사실상 이 역시 하나의 혁명이라는 견해가 있다.
  1. 하지만 그 공화정의 대통령은 왕자 대통령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로, 얼마 안가 친위 쿠데타로 제2제정으로 전환한다. 이뭐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