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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二八事件
Érèrbā Shìjiàn
Jī-jī-pat sū-kiāⁿ
1 개요
1947년 발생한 중화민국 치하 타이완 역사상 최악의 양민학살 사건이자 아직도 타이완 최대의 아픔으로 남아있는 사건.
2 원인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타이완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미 국무부, 중국백서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일본제국이 패망한 이후, 타이완은 중화민국에 반환된다.
이 당시 일제의 대만 통치는 조선 통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저항이 적었다지만, 그래봐야 본질은 식민지였기에 대만인들은 2등 국민 취급되었고 후술된 개돼지 발언처럼 일본제국에 딱히 호감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터지면서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 등은 타이완 민중의 삶을 더 고달프게 했고 일제에 대한 원망도 점점 늘어갔다. 그렇기에 일본이 물러가고 중국 국민당 국부군이 타이완에 진주했을 때, 꽤 많은 대만인들은 자신들을 같은 한족이라고 여겨주는 국민당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민당은 국공내전으로 인해 대륙에서조차 인플레이션과 인력, 물자 부족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데다가, 대륙의 역사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타이완에 대한 이해도가 결여되어 있었다. 심지어 일부 국민당원은 대만인들을 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간주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정부의 요직은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그나마 차지한 소수 본성인들의 임용도 본토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대만인들은 다시 2등 국민으로 전락하며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여기엔 타이완이 국공내전의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던 까닭에 국민당이 갈등을 조정할 유능한 인재를 타이완에 파견할 수 없었던 상황도 한 몫 했다.
그리고 이런 조치에 배신감을 느낀 대만인들은 국민당에 대한 기대감만큼 실망감 역시 매우 커졌다. 당시 돌았던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라는 말이 당시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데, 일본인은 개 같이 대만인들을 괴롭히고, 국민당은 돼지 같이 타이완의 재산을 먹어치우기 바쁘다는 뜻이다.
3 발단
(린징마이의 모습)
사건의 발단은 정말 어이없는 사건에서 일어났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 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과부 린장마이(林江邁)[1]가 담배노점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 대륙에서 담배는 전매품이 아니었지만 대만에서는 정부의 전매품이었다. 그 날 전매국 직원과 경찰이 이 노점을 허가받지 않았다며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강경하게 단속한 점에 있었다.
(사건의 발단이 된 천원시 학생의 피살을 묘사한 판화도)
지나치게 과격한 탄압에 항의하는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 급기야 경찰이 쏜 총에 학생 천원시(陳文溪)가 맞아 사망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4 항쟁의 격화
학생이 사망한 날이 그 다음 날인 1947년 2월 28일인데,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타이완에 들어온 국민당 경찰과 장제스 휘하 군 부대 본부를 에워싼채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관을 구타해 사망케 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군중들은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으로 점차 시위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 전 섬으로 확대되었다.
이 때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의 갈등이 결국 상호 간의 유혈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던 마당에 위에서 말한 특권 독점에 따른 갈등도 있었고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으니[2] 갈등이 결국 폭력으로 번진 것이다. 당시 대만 본성인이 외성인과 국민당에 저항할 때 두 집단을 구별한 기준은 대만어/일본어 구사능력이나 기미가요 제창 가능 여부였고, 저항의 메세지를 일본어로 방송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외성인이나 국민당에서는 '매국노'들이라면서 강한 반감을 보였으니 둘 간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3] 그리고 3월 2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포하였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한 발포를 하는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부터 사태가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리위원회의 성격이 점차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여기에 타이완 본토인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타이완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로까지 발전하면서 국민당 측에서도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5 진압과 학살
천이(陳儀)는 겉으로 대만 현지 주민들과 대화를 모색하는 척 했지만, 한편으로 본토에 진압 병력의 증파를 요청했다. 사건이 타이완 섬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자체의 병력으로 시위의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처음에 장제스는 국공내전 때문에 군대 파견을 거부하다가 이번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에 3월 8일 증원군을 타이완에 파견했다.
그리고 3월 8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된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민당 군 21사단이 타이완 북부에 투입되면서 시작된 진압은 일주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사건 발생 50주년에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약 1만 8천명에서 2만 8천명[4], 또한 이와 별도로 외성인 7~8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아무래도 대만 역사에 무지한 국민당군 입장에서는 2.28 관련 시위 참여자들이 순 매국노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타이완 섬 외부가 고향인 국민당군 장병들과 대만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 번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되면 돌이키기 어려웠다.
지룽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학살을 묘사한 기록화들. 국민당군은 진압 과정에서 수상한 사람에게 표준중국어로 말을 걸었고 대답하지 못하면 친일파로 간주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몇몇 그림을 자세히 보면 피해자들 뒤에 바다가 묘사되어있는데 몇명을 사살하면 시체들의 무게로 사람들이 줄줄이 바다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2.28 사건의 희생자들의 추적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장제스는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 위윈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한다. 결국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계엄령을 종결하면서 일단락되었다.
6 그 후
이 사건은 민주화 이전 타이완에선 언급조차 꺼려하는 최대 금기였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타이완으로 외성인들이 들어오고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심지어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조차 징역형을 선고했을 정도.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은 철저하게 잊혀지고 만다. 국민당이 피해자들의 재산을 싹쓸이해가고 이후로도 본성인 출신 지식인들을 친일과 친공의 싹을 없앤다는 명분[5]으로 수차례 짓밟은 건 덤.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타이완에서 언급된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무려 40년이 지난 1987년 2월 28일 정난롱이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연구회를 성립한 시점부터였다. 이후 1988년 타이완 출신의 리덩후이 총통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정부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오랜 논란 끝에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정부가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6] 그 뒤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은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정하지만 장제스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1995년 정부의 첫 공식 추도행사에 참석한 리덩후이 당시 총통)
대륙에서 들어온 군인에 의한 2~3만명 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사건이 너무 오래 지나 정확한 진상조사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최소 1만 8천명이 사망했음에도 2.28 사건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어 유가족에게 보상을 완료한 것이 2천여 명, 구체적으로 신상정보가 밝혀진 피해자는 겨우 5~6백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화민국 정부는 오늘날까지 2.28사건의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않아서 2.28를 다룬 한 전시관에서는 2.28사건을 두고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타이완의 역사는 아직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다[7]"라고 언급했다.
이 사건은 본성인들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각인시켰고 중화민국 반환 직후부터 발생한 타이완 독립운동의 가장 강력한 발판이 되었다. 아울러 뒷날 타이완에서 계엄반대 운동의 원인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민주진보당의 성장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중화민국의 실질적 국부 격인 장제스가 직접 연루된 사건이라 국민당에서는 아무래도 2.28 사건이 부각되는 것을 내심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일례로 마잉주 총통은 2.28 사건을 '일부 부패한 관료들의 탐학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 정도로 언급하여 장제스와 국민당 핵심 계층 및 타이완 독립과의 연관성에 대해 긍정하지 않고 있다.[8] 한편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중정기념당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데[9], 여기에 대해서는 워낙 논쟁이 많아서 쉽게 결론이 날 것 같지는 않다.
현재 2월 28일은 중화민국에서 '평화기념일'이란 날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중화민국의 공휴일 중 '실질적 영토(=타이완 지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날'은 이 날이 유일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덩샤오핑 집권 전까지는 이 사건을 국민당 집단의 폭정에 대한 '타이완 인민의 의거'로 규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그러나 덩샤오핑 이후 국민당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10] 또한 당시 중화민국 민주화를 주장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타이완 독립도 같이 주장했다는 점으로 인해서 이 행사는 없어졌다. 속보인다 물론 2.28 사건 피해자들도 중국 공산당 천안문 6.4 항쟁 진압과 문화대혁명, 티베트 탄압 등을 들어 국민당과 다를게 없는 공산당이라며 크게 아쉬울거 없다는 입장.
7 한국과의 비교
한국의 대구 10.1사건, 5.18 민주화운동, 특히 본토에서 떨어진 바다 건너 섬에서 원주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제주 4.3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라 그런지 관련 기념재단 및 단체와의 교류도 많은 편이다. 4.3 사건보다 먼저 명예회복과 정부 사과가 있어서 4.3 관련 단체에서 2.28 사건의 명예회복 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11]
우연의 일치로 1960년 2월 28일에는 대구에서 4.19 혁명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2.28 학생민주의거가 일어났다. 타이완의 2.28 사건과는 정 반대의 결과가 빚어진 셈이다.
8 트리비아
이 사건의 원흉 중 하나인 타이완 성 행정장관 천이는 사건이 끝나고 해임되었다가 1년 뒤인 1948년에 저장 성 정부 주석으로 다시 등용되었는데, 국공내전 도중에 중국 공산당에 투항하려했다가 발각[12]되어서 1949년에 체포되었고, 1950년에 자신이 사고를 쳤던 바로 그 타이완 땅에서 처형되었다.[13] 천하의 개쌍놈의 자업자득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 총통의 취임식 식전행사로 대만 역사를 요약하는 무용이 공연되었는데, 2.28 사건에 대한 묘사도 포함되었다. 국민당측 표정이 궁금하다 민진당의 재집권 때문에 가능해진 광경으로 해석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2.28 사건에 참가했던 대만 본성인들은 국민당의 폭압에 저항할 때 저항 메세지를 일본어로 방송하거나 기미가요 제창 여부로 본성인과 외성인 여부를 구분했고 이것이 국민당과 외성인을 더욱 자극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2.28 사건의 이면에는 일제 파시즘 체제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 한계점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9 대중문화
허우샤오셴이 제작한 1989년작 대만 영화 '비정성시'는 1945~1950년대까지의 대만 현대사를 관통하는데, 영화 중간에 2.28사건의 발생을 언급하는 장제스의 연설문이 나온다.
- ↑ 장이 자기 본성.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결혼한 여자는 자기 성 앞에 남편 성을 붙인다. 대륙에서는 요즘은 이 방식을 쓰지 않으나 타이완에서는 쓰고 있다.
- ↑ 지금이야 대만에서도 표준중국어를 쓰지만 당시 대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대만인들이 주로 썼던 중국어 방언인 대만어는 아예 표준중국어와 의사소통이 안 된다.
- ↑ 영화 비정성시에 이 때의 일화가 하나 나온다. 귀머거리 주인공에게 대만어로 질문하고 알아듣지 못하자 곧바로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동행인이 사정을 설명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당시의 사회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고 비슷한 일이 실제로도 있었다고 한다.
- ↑ 본성인측의 비공식적인 주장은 3~4만명이다.
- ↑ 비중은 대만 본성인의 특성상 친공보단 친일 청산 쪽이 더 강했다.
- ↑ 아이러니하게도 2.28기념공원 바로 밑에는 장제스의 건강을 기원하는 개수공원(介壽公園)이 존재하고 또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중정기념당이 있다.
- ↑ 다른 나라의 예시를 언급하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학살자를 처벌했는데 타이완에서만 실패했다. 운운. 그리고 그 다른 나라는 한국도 포함된다.
예? - ↑ 그나마 마잉주 총통은 국민당 입장에서 껄끄러운 2.28 사건 추도행사에 재임 중 매년 참석했다. 한국에서 5.18 광주 민주항쟁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 추도행사 진행이 여야, 정파 성향에 따라 논란을 빚고 있는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
- ↑ 급진적인 독립파들에게 장제스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닌, 침략자다. 올림픽에서 국기 게양 못한다고 하지만 그 국기가 바로 그들에겐 침략자들의 상징물이다.
- ↑ 당시 양안의 집권자인 덩샤오핑과 장징궈는 그저 상대방의 최고권력자라서 존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양안이 갈라진 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 ↑ 여담으로 6.25 전쟁 당시 전황이 불리해질 경우 망명정부를 고민하고 있었던 이승만과 미군(유엔군)은 제주도를 유력한 피난지 가운데 하나로 봤다. 만약 실제 피난했다면 4.3의 위상은 2.28 사건과 정확히 같아졌을 것이란 소리.(...)
본토는 뽀글이 뚱뚱이 만세! 제주도는, 본토를 수복하자! vs 제주도는 독립 된 나라다!하지만 여러 문제 때문에(식수 문제, 제주도의 협소함) 제주도보단 일본 야마구치 현이나 저 멀리 남태평양 사모아에 한국 국민 일부를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더 유력한 계획이었다. - ↑ 자신의 옛 부하이자 장제스의 심복인 탕언보(湯恩伯)에게 같이 투항하자고 권유를 했는데 탕언보가 장제스에게 밀고를 해버렸다.
- ↑ 원한관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다른 견해도 있는데 여기를 참조해봐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