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우산 시위

(2014년 홍콩 우산 혁명에서 넘어옴)
햇볕이 더 강하게 내리쬔다면, 마땅히 우산을 펼쳐 하늘을 막겠다
홍콩, 우산 혁명[1]
현장의 모습
비공식 우산 혁명 주제가 "誰還未發聲"(발언하지 않은 자 누구인가)

1 개요

2014년 9월 27일부터 시작된 홍콩 주민들의 시민불복종 운동. 처음에는 대학생·지식인 중심의 시위였으나, 이후 중·고등학생과 일반인들의 광범위한 지지까지 합류한 전 홍콩적인 시위가 되었다. 시위 전개 과정에서 홍콩 경찰이 최루탄과 최루액·살수차 등을 이용해 진압을 펼치자 시민들이 지참하고 나온 우산[2]을 이용해 최루액을 막아내는 모습이 보이자 '우산 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한국 언론에서도 우산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홍콩에서는 정치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이전에도 여러 번 일어났지만, 이번 대규모 시위로 홍콩 정부의 평판도 손상되었고, 주변국(특히 대만)도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2 주요 세력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은 크게 셋이다.

홍콩대학 법학부 교수 베니 타이(戴耀廷·Benny Tai), 홍콩중문대학 사회학부 협력교수 찬킨만(陳健民·Chan Kin-Man), 침례회 목사 추이우밍(朱耀明·Chu Yiu-Ming)이 공동대표로 있다. 2013년 1월 16일 "센트럴을 점령하자"는 내용이 담긴 <시민 저항의 가장 파괴적인 무기(公民抗命的最大殺傷力武器, Civil disobedience's deadliest weapon)>라는 베니 타이의 기고가 계기가 되어 3월 27일 창단했다. Occupy Central이라는 구호에서 볼 수 있듯 월가 점령 시위의 구호를 답습했으며, 비폭력을 표방하고 있다.
홍콩 최대의 대학생 조직. 그 이름대로 청년 세력을 대표하고 있다. 홍콩대학 문학부 학생인 알렉스 차우(周永康·Alex Chow)[3]가 총비서장이다. 시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건 홍콩중문대학 학생이자 부비서장인 레스터 셤(岑敖暉·Lester Shum).
8개 대학 학생회가 회원으로 가맹했다. 서울에만 수십 개의 4년제 대학이 있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고작 8개만 가맹했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홍콩의 4년제 대학은 저 8개뿐이다. 즉 홍콩의 대학생 조직 전체가 시위에 가담한 것이다.
  • 홍콩대학 학생회
  • 홍콩중문대학 학생회
  • 홍콩 이공대학교(香港理工大學·The Hong Kong Polytechnic University) 학생회
  • 홍콩 시티대학교(香港城市大學·City University of Hong Kong) 학생회
  • 홍콩 침례대학교(香港浸會大學·Hong Kong Baptist University) 학생회
  • 링난 대학교(嶺南大學·Ling Nan University)[4] 학생회
  • 홍콩 수인대학교(香港樹仁大學·Hong Kong Shue Yan University) 학생회
  • 홍콩 과학기술대학교(香港科技大學·The Hong Ko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학생회
  • 학민사조(學民思潮·Scholarism)
혁명의 상징이자 스타로 급부상한 학생운동가 조슈아 웡(黃之鋒·Joshua Wong)이 위원장이다. 표준중국어로 황즈펑이라고 부르고, 광동어로는 웡지풍이라고 부른다. '학민'은 "학생도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여 적극적으로 급진적 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수나로? '사조'는 5·4 운동에서 나온 용어로, 중국의 전통 사상을 버리고 민주·사상·언론의 자유를 내세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고등학생 활동가의 조직치곤 꽤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데, 중국 공산당이 홍콩 정부를 통해 주관하는 중국 국민 교육의 철회를 구호로 2011년에 창단했다.[5] 청소년 계층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원칙적이고 강경한 성향을 띤다. 그래서 중국 본토에서는 이들을 극단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했다.

3 배경

영국에게서 홍콩을 다시 반환받을 때 덩샤오핑은 홍콩에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가 적용되지 않고, 현재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최소한 50년간 유지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유지하기로 한 바 있다.[6] 그리하여 홍콩은 중국의 일개 행정구역이면서도 독자적인 헌법·행정부·법원을 보유하는 고도의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홍콩의 수반[7]이라 할 수 있는 홍콩 행정장관은 <홍콩 기본법 제45조>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통해 선출되므로 상대적으로 친중파가 당선되기 용이한 구조였다. 그래서 홍콩의 야당 세력인 '민주파'는 행정장관 선거의 직선제를 꾸준히 요구해왔고, 결국 2017년부터 홍콩 특별행정구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행정장관을 선출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미인대회식 '직접선거', 더럽게 고맙다"

위 짤방에서 왼쪽은 홍콩 TVB에서 개최하는 미인대회의 결선 방식이고, 오른쪽은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안이다. 저 미인대회는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10인을 뽑고, 이 중에서 또 3인을 남긴 뒤, 최후의 1인은 1인 1표의 팬 투표로 결정한다. 그런데 중국 정부의 제안은 이와 놀랄만큼 닮았다. 중국의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후보자 2~3인을 내보내면, 홍콩 구민은 이 중 1명을 직접 선거로 뽑으라는 것이다. 당연히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민주파·반중파 인사가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반길 리가 없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직접 선거를 하더라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허가를 받은 친중파 후보 1·2·3 중 한 사람을 뽑는, 심하게 말하면 '어용 선거'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직접 선거는 보장하지만 후보는 대륙 입맛에 맞는 사람만 허가하겠다'는 조삼모사와 같은 논리로 보고 분노 게이지가 오른 사람들은, 입후보의 자유까지 보장하라며 시위에 나서게 된다.

일국양제 원칙 자체야 50년은 형식적인 숫자이고 중국인도 홍콩인도 둘 다 자동 연장으로 보며,[8] 그나마 "사회주의 체제"는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고 중영 공동성명에 명시되어 있어 상관없지만 이렇게 되면 일국양제는 껍데기만 남고, 실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중국 중앙정부가 꼭두각시 행정장관을 통해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르게 되어 대륙과 홍콩의 차이는 억지로 좁혀지는 모양새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일국양제는 모양새만 남고 실질적으로는 통합된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래서 홍콩인들은 이 사실을 직시하고 반발 운동을 벌여 왔고, 이것이 폭발한 것이 우산혁명이다. 참고로 홍콩을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는 성난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항의를 받기도 했다.

물론 이는 직접적인 기폭제였을 뿐이고, '홍콩'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민주파는 이전부터 계속 친중파나 중국 정부의 공산화 정책에 반발해왔다. 이를테면 조슈아 웡은, 과거 중국이 홍콩 고등학교 교과목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찬양 내용을 담고 있는 국민교육 과목을 추가하려고 하자 학생들의 시위를 조직해 교과목 채택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또 홍콩 반환 이후 중국인이 대거 홍콩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물가가 상승하고 일자리는 줄어들어, 홍콩 젊은이들의 삶이 어려워진 것을 시위의 원인 중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기사

4 진행 상황

주요 시위 지역. 처음에는 애드미럴티(金鐘·Admiralty) 등 도심에서 시작하였으나 코즈웨이 베이(銅鑼灣·Causeway Bay)와 완차이 구(灣仔區·Wan Chai District)를 거쳐 카우룽 반도의 몽콕(旺角·Mong Kok)까지 시위가 번지고 있다.

해가 뜬 뒤에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당초의 시위자는 100여 명 정도로 적었으나 시위대는 갈수록 늘어났다.
  • 9월 28일: 홍콩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여[10]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강경 진압은 시위대에 대한 지지가 도리어 늘어나는 역효과를 낳았다. 우산이 시위의 상징으로 우뚝 선 날이었다.
  • 10월 1일: 중국의 국경절[11]이었으나 시위대는 시위를 계속하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지에서의 시위이고 무려 10만여 명의 시민이 시위에 나섰으나 (외신들의 공통된 보도에 따르면) 철저하게 비폭력적이고 질서정연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우산 혁명'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위대가 들고 있는 물품은 우산이나 마스크 정도가 전부이고,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숙제를 하는 모습이나 시위대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 같은 게 보도되고 있다. 센트럴 바깥으로 시위가 확산된 것도 이날이었다. 시민단체들의 예상을 넘어선 규모로 시위가 커져 원래의 시위구역 바깥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난 것.
시위대 중 학생 지도부는 행정장관인 렁춘잉(梁振英, Leung Chun-Ying)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으며, 10월 2일까지 퇴진하지 않을 경우 점거 구역을 정부 청사 등으로 확대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 10월 2일: 렁춘잉과 학생들의 면담이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이후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홍콩 당국이 시위대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아 우산 혁명의 열기가 좀처럼 퍼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난리통에 정말로 시위자 1명을 집단 폭행한 경찰관 7명이 체포되었다.
시위대의 구호가 뜬금없이 "쇼핑 하러 가자"[12] 바뀌어 큰 웃음을 주고 있는데, "시위 캠프 철거 후 더 많은 시민이 몽콕에 쇼핑을 하러 가야 한다"는 당국의 발언을 조롱한 것으로 보인다고. 나도..나도 쇼핑할 거야 시위대는 당국의 '만만디' 전략에 '혁명의 불씨'를 꺼뜨릴 뻔했다고 보고, 적극적인 반격을 통해 충돌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전술의 선회를 시도하고 있다.

5 결과, 영향

시위가 12월 15일자로 종료되면서, 홍콩 시민들은 '진정한 민주화'를 쟁취하지 못했다. 사실 이번 직선제 문제도 홍콩만의 일이 아닌 (최종적으로) 중국 전체의 일임을 생각해볼 때 애당초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상당히 어려웠지만.

하지만 홍콩 시민들은 이번 우산 혁명으로 홍콩의 민주주의 수준에 대한 공론화, 중국 공산당이 약속한 높은 수준의 자치권과 일국양제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세계에 폭로, 그리고 홍콩 시민 스스로의 단결력을 쟁취하였기 때문에 이번 시위는 완전한 실패가 아닌 절반의 성공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한편 중국 대륙 정부는 괴뢰 직선제를 지켜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홍콩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이 해외에 알려져 비난을 받았으며, 홍콩 시민들을 전혀 납득시키지 못함으로써 홍콩의 반중 감정을 심화시키고, 대만에서도 중국 정부에 그나마 협조적인 중국 국민당이 참패하는 등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려다 도리어 역풍이 불어 손해가 만만치 않았다.

더불어 세계적인 언론-인터넷 통제국인 중국은 이와 관련된 모든 검색어를 통제했고, 그동안 통했던 인스타그램이 이 때를 기점으로 차단되었다.

그리고 시위 종료 후 약 한 달 째인 2015년 1월 12일, 홍콩 경찰이 시위 핵심 인물들을 하나씩 체포하거나 소환 조사하려 하고 있다. 이에 맞서 홍콩 민주파는 새로운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그리고 2015년 9월 28일, 우산과 천막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우산혁명 주도세력들은 9월 28일을 1년전 '우산'이 처음 등장한 날로 보아 기점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 입법회 선거에서, 역대 최고 투표율과 처음으로 독립파가 입법회에 진출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56&aid=0010359169

6 반응

6.1 중국 내의 반응

  • 홍콩 정부: 친중파인 렁춘잉이 행정장관으로 있는 홍콩 정부는 당연히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강경 진압을 천명하였고, 진압에 나선 경찰은 최루탄 등을 사용하여 진압에 나섰다. 또한 10대 청소년을 포함하여 시위대 75명을 연행하였으나, 이게 시위대를 향한 광범위한 지지를 부르는 역풍을 불러오자 강경책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뒤에서 친중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는 루머가 횡행하고 있다. 경찰이 친중 단체의 홍콩 시위대 습격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루머도 있었다. 우린 간섭 안 할게 겉으론 다만 모두 확실하지는 않다.
  • 중국 정부: 결론적으로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중국은 겉으로는 "홍콩 내정은 홍콩인이 알아서 하라"는 입장이었고, 홍콩이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만 선언하지 않으면 무력개입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내심이야 친중국 세력을 지지했겠지만, 어쨌든 사태 내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시위대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으므로, 외교부 대변인 화춘잉(華春瑩)을 통해 '법에 의한 처리'를 주문하였다. 10월 1일엔 시진핑'일국양제'를 고수한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현재 중국 정부의 직선제안을 고수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다. 또 여론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인스타그램 등 인터넷 SNS 서비스를 차단하고, 중국 내 인터넷과 언론에서 우산 혁명에 대한 내용을 검열하는 한편, 외신의 홍콩 관련 보도를 차단하는 등 언론 통제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위 1달이 지나자 시진핑이 직접 반란이라는 단어까지 언급하며 강경 대응할 태세임을 예고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홍콩이 전세계적으로 보는 눈이 많다보니 아무리 자국의 특별행정구이고 법적 근거가 있다고 해도 국제사회의 눈치를 안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산 시위는 티베트나 위구르와는 달리 독립문제가 아니라 중국측이 자치를 보장한 홍콩의 내정이기 때문에 중국측이 개입할 명분도 없고, 더군다나 여기에 개입했다가 유혈사태라도 나면 서방측에게 중국 체제가 민주화를 탄압한다는 좋은 선전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독립운동 세력이 일부 개입하기는 했지만 주류 세력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홍콩의 민주주의는 중국 정부가 중영공동선언으로 50년간 보장을 약속했기 때문에, 더더욱 개입의 명분은 없는 상태였다. 천안문 항쟁의 잔인한 유혈진압 이후 현재까지도 중국이 서방측의 인권공세에 별말 못하는 것을 보면 섣부른 유혈사태는 중둑의 국격을 추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시위의 최고조기에서도 학생을 제외하면 이 시위에 대해 홍콩 중산층의 반응이 싸늘했기 때문에 실패는 예상되었고, 중국은 당국은 섣불리 개입해서 민심을 자극하기 보다는 그대로 놔두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시위가 끝난 후 중국측의 입김이 들어간 선거제에 대한 지지율이 도리어 더 높아졌다. 홍콩 교민신문 다만 천안문 사태 당시보다 중국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과 미-중 간 상호교류가 넘사벽으로 커진 것, 미국의 대외 영향력과 경제 상황이 (해외에 대한 적극 개입을 또 시도하기에) 다소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하면. 미국은 어지간한 대참사가 벌어지지 않는 한 웬만하면 방관할 가능성도 있다(ISIL의 준동에도 이전 테러와의 전쟁 때와 같은 개입은 하지 않는 미국이다!). 당장 천안문 사태 직후의 경제제재도 잠시 하는 척하다가 그냥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홍콩에서 섣불리 일을 벌였다간 가장 손해보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중국 정부가 너무나 잘 알기에 불상사는 없었다. 티베트나 위구르와 같은 분리독립세력에 대해서는 엄단을 부르짖는 시진핑이 홍콩에 대해선 말로만 강경대응을 논했을뿐이다. 물론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티벳이나 위구르와는 달리 중국에서 독립하자는게 아니기 때문에 중국이 개입할 명분도 없었다. 실제로 홍콩의 시위는 일부 지역, 일부 학생 계층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중국 측이 굳이 무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중국은 홍콩시위 자체보다는 이 운동이 자국에 옮겨붙지 않을까 더 염려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위에 대한 보도는 중국 매체에서 철저히 통제되었다.

6.2 중국 외의 반응

  • 미국: 백악관 대변인 조니 어니스트는 정례 브리핑을 통해 "홍콩 기본법에 따른 홍콩의 보통선거와 홍콩인들의 열망을 지지한다"고 발언하여 시위대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국무장관 존 케리(John Forbes Kerry)는 중국 외교부장 왕이(王毅)의 면전에서 "홍콩의 시위를 존중해야 한다"며 우산 혁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물론 왕이는 이를 내정간섭으로 보고 맞받아쳤다.
  • 영국: 현재 홍콩 문제와 관련해서 앞으로 32년간 개입할 권리가 있는 유일한 국가이고, 당연히 개입에 나섰다. 1997년 중국에 반환하되, 50년간은 홍콩의 체제를 보장하기로 합의했기에, 영국이 유사시 개입할 권리가 인정된다. 영국은 홍콩의 체제보장과 관련하여 2047년까지 해당 합의에 의거 중국이 일국양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칙이 훼손되고 있음에 우려를 표했고, 외무부를 통해 홍콩의 보통선거안을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닉 클레그(Nicholas William Peter Clegg) 부총리는 항의의 의미에서 중국 대사를 초치할 계획임을 밝혔다. 일국양제가 중국의 일방적 약속이 아닌 영-중 양국의 합의이기 때문에 영국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일국양제가 지켜지는지를 확인하겠다며 바로 조사단을 보냈는데, 11월 30일, 우산 혁명을 조사하려는 영국 조사단의 홍콩 방문을 중국이 허용하지 않겠다고 한 사실이 밝혀졌다. 거절 사유는 중국이 홍콩의 체제에 있어 아직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이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것. 이걸 노린건가
  • 중화민국: 마잉주는 물론, 정부 차원에서 시위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중국은 중화민국에 하나의 중국을 내세워 압박하면서 홍콩의 일국양제를 대만에도 적용하겠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으므로, 홍콩이 일국양제 하에서 최대한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중화민국 입장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대응은 일국양제가 훼손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시위가 다시 불붙은 11월 29일 중화민국에서 지방선거가 열려, 친중 성향의 중국 국민당민주진보당에 대패했다. 홍콩을 향한 중국의 대응이 반중 정서를 부추겼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을 정도로, 중화민국은 우산 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결국 이로부터 약 1년 후 정권까지 반중성향이 강한 민진당 정부로 바뀐다.
  • 러시아: 관영 언론을 통해 난데없이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다.만물 미국설 다만 반정부 성향의 민간 언론들은 시위를 지지했다.
  • 한국: 정부 차원의 논평은 없었지만, 진보 성향의 한국인들 중에 지지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고 홍콩의 한인 유학생들 일부가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시위대들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참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다만 민주화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일부 보수, 노년층에서 "빨갱이들의 준동"이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근데 이 시위대들이 누굴 향해 시위를 하는 지는...

7 시위 주동자 사법처리

  • 시위를 주도한 조슈아 웡등의 학생운동가들은 보석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2016년 7월 유죄판결을 받았다. 형량선고는 8월에 있다고 한다. 중국과 친중파 측은 조슈아 웡등의 학생운동 세력이 미국이나 서방과 같은 외부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는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긴데 선전전을 펴고 있다. 8월 15일, 조슈아 웡 및 학생 지도부 세명은 중형이 내려질 것이라는 서방 언론의 예측과는 달리 불법집회 및 도로 점거 혐의로 120시간 사회봉사 명령 또는 3주 구류에 1년 집행유예로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았다. BBC기사. 보석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피고 세명은 재판 참가후 바로 귀가. 이렇게 가벼운 형량이 선고된 것은 사태가 별다른 유혈 없이 진정된데다가, 홍콩의 전반적인 여론은 "스무살도 안된 애들이 그냥 객기부린거 너그러이 봐주자"는 식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형을 언도하면 오히려 반중파들의 입지만을 강화시켜준다고 판단한듯 하다.

8 트리비아

  • 세계가 이 혁명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홍콩은 국제 도시인 동시에 중국의 민주주의에서 큰 상징성을 갖고 있는 만큼 이게 어떤 결말을 맞느냐에 따라 차후 중국의 대내 정책이나 민주주의 정책의 앞길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시위 초기에 행정장관 렁춘잉의 딸이 시위대를 향해 초고도의 어그로를 끌었다. 당연히 사퇴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던 렁춘잉은 코너에 몰렸었다.
  • 한편 한국처럼 민주화를 위한 희생을 각오했다는 학생들의 인터뷰와 한글로 된 피켓이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시위대는 한국의 시위법도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루탄에 대한 대응으로 랩으로 얼굴을 감싼다던가 집회방식 등을 노동당에 직접 연락해서 전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마침 홍콩의 주요 민주파정당 중에도 노동당이 있다.[13]
  • 시위대에 폭력을 가하는 폭력단체가 등장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에서 보낸 요원들이라거나, 삼합회개입했다는 의혹이 횡행하는 상황.
  • 홍콩 유명인들의 지지 발언이 이어졌는데, 특히 주윤발·양조위·유덕화 등 많은 홍콩 스타들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반대로 성룡 등 친중 노선을 띤 인사들의 시위 자제를 촉구하는 발언도 있었다). 시위를 지지한 이들의 중국 본토 활동이 금지당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까짓거 돈 좀 덜 벌면 그만이라고 쿨하게 화답한 윤발 따거지만 헛소문. 2015년 현재 위의 연예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잘만 활동하고 있다.
  • 서울 홍콩 관광청 사무소의 발표에 따르면, 시위 지역의 교통이 빡빡할 뿐 큰 불편함이나 위험은 없는 듯.
  • 한편 칭화대학 강사인 경제학자 셰궈중(謝國忠, Andy Xie)은 "3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민주화 시위로 홍콩 경제가 침체기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홍콩의 한 정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지역 소비와 긴밀히 연결된 소매판매가 지지부진한 것은 민주화 시위가 소비 심리에 타격을 입히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14]
  • 시위장소 주변 상인들이 "생업에 타격을 입고 있다"며 시위대가 설치한 바리케이트를 가져가는 등 실력행사에 나섰다. 관련기사 관광업계에서도 시위대 탓에 타격이 크다고 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인데, 바로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8년 촛불시위 때 광화문 일대 식당 주인 등 상인들이 "시위로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걸었다 패소한 일이 있다. 관련기사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촛불집회 때문에 외국 관광객이 줄었다"고 발언했다.
  • 2015년 9월 3일, 11월 17일 두 차례에 걸쳐서 축구판 우산 혁명벌어졌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를 참고.
  • 2016년 1월부터 다시 시위가 발생했다.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의 주주 등이 두달 새에 5명이나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중국 정부의 소행으로 보고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집회는 수십명이 참가했으며, 홍콩 우산 시위때처럼 크게 번지지 않았다.
  • 2016년 2월 춘절 몽콕의 어묵 노점상 단속이 도화선이 되어서 몽콕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일어났다. 여기까지만 적으면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대치상황이라 별달리 특기할 사항도 없겠지만, 문제는 여태까지의 상황과 대단히 이례적으로, 폭력 시위의 양상이 드러난 첫 대치다. 춘절이더라도 노점상의 경우 눈감아주는게 암묵적 관례였는데, 이 관례를 깨고 노점상을 강제적으로 단속하려는게 직접적인 발단이 되어서 이에 격노한 홍콩 분리주의단체의 주도로 상황이 격화되었다. 홍콩 전통어묵은 단순히 어묵만이 아닌 서민층의 길거리 음식이라는 상징도 있었기 때문에 이 시위를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일명 '어묵 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물론 렁춘잉 등의 친중 공권력들은 노발대발한 상황.
  • 이번 사태가 월가 점령 시위와 비교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젊은 학생층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있겠지만 홍콩의 경제적 위상이 저하됨에 따른 불만 표출도 있다. 중국 귀속 당시 홍콩의 경제력은 중국 본토의 15%에 달할 정도였으나, 현제는 2%대까지 축소되었다. 중화권 금융 허브도 홍콩에서 상하이로 옮겨가고 있으며, 홍콩인들은 자신들의 위상 저하에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다. 사실 영국총독부 당시의 정치제도가 중국의 자치령인 현재보다 민주적이었다고 하긴 힘들다. 홍콩의 의회 역할을 하는 홍콩 입법회 의원선거가 완전 직선이 된 게 1991년이었고, 이나마도 60석 중 17석은 총독이 임명했다. 행정권과 홍콩 주둔 영국군의 군령권까지 가진 홍콩 총독은 반환 직전까지도 영국에서 임명해 내려보냈다. 겉모습으로는 차라리 행정장관을 간선으로나마 뽑아왔고 2017년부터 행정장관 허울만직선이 시행될 예정인 오늘날 홍콩 특별행정구의 정치체제가 더 민주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 대신 영국령 시절엔 오늘날 대륙 정부가 자행하는 방식의 언론 탄압은 없었으니 그게 그거라고 볼 수 있겠지만, 1960~70년대 영국 총독부도 홍콩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엄청나게 탄압했다.[15] 현재 홍콩은 옛날처럼 홍콩인으로 태어나서 교육받고 홍콩 내에서 일자리를 찾기 힘들다. 대륙에서 건너온 노동자들이 택시운전수부터[16] 식당종업원까지 서비스 업종부터 일자리를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중국의 경제 성장을 따라 금융과 같은 화이트칼라 직종도 대륙인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 현재 홍콩의 젊은 세대는 일부 금수저를 제외하고 순식간에 대륙인과 경쟁해야하며 당연히 삶의 질도 이에 맞추어 떨어져버린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가 암담하니 중고등학생도 거리로 뛰쳐나올 수 밖에 없는 것. 어느정도는 대륙인에 대한 제노포비아도 작용하고 있으며, 이렇기 떄문에 어느정도 경제적 기반이 있는 홍콩 중산층은 학생들의 시위에 싸늘하게 대했고, 이 운동이 실패하게 된 궁극적 원인이 된다.

9 후폭풍 - 2016 홍콩 입법회선거

2016년 9월 4일 열린 홍콩 입법회선거에서 우산혁명의 주도층인 청년 세력이 대거 당선됐다. 민주파 자체는 70석 중 27석에서 30석으로 3석이 늘어나는데 그쳤지만 직선제에서 40석 중 22석을 건지고 간선에서 뒤진 것이기에 홍콩 시민들의 표심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산혁명 시위에서 대학생 연합의 리더격이었던 네이선 로는 불과 23세(!)로 역대 최연소 입법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외에도 우산혁명의 당사자이거나 지지를 보냈던 20~30대 청년 정치인이 대거 당선됐다. 또한 이번 선거는 투표율 58%로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최고 참여율을 보였다.

우산혁명 2주년을 맞아 다시 시위가 열었다. #

10 관련 문서

  1. 시위대가 제작한 로고. 초창기에는 엄브렐러 같이 다소 섬뜩한 로고들이 보였지만, 지금은 다른 로고들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2014 홍콩 좀비 아포칼립스
  2. 비나 햇볕을 막기 위해 지참하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달리 홍콩에서는 10월이 지나도 덥고 습한 편이다.
  3.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위원장인 저우융캉(周永康)과 이름이 같은데, 공교롭게도 그 저우융캉은 시위가 다시 주목받을 시기인 2014년 12월 5일 부패 혐의로 체포됐다. 같은 듯 같지 않은 두 명의 '저우융캉'
  4. 한국의 영남대학교와 이름이 같다.
  5.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는 한국 청소년인권운동의 경우, 3년 이상 존속하는 조직이 극히 드물다.
  6. 다만 이 약조문을 실제로 선포한 사람은 장쩌민이다. 덩샤오핑은 홍콩 반환을 5개월쯤 남기고 사망했다.
  7. 국가는 아니므로 대통령이나 수상과 비교하기에는 좀 어색하다.
  8. 현지의 법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하는데 동의하며 중국 정부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9. 홍콩 중문대학교는 휴학 기간은 짧았지만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걸 고려해 일부러 수업 지도를 상당히 늦추는 등 교수들도 협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긴 센트럴 점령의 공동대표 가운데 한 명이 이 학교 사람이니.
  10. 홍콩 경찰의 최루탄 사용은 2005년 한국 농민들의 반 WTO 원정 시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
  11.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날이다.
  12. 쇼핑하다는 광동어로 買嘢(maai5 je5 마이 예 : 구어) 또는 購物(kau3 mat6 카우 맛 : 서면어, 아나운서들은 'gau3 mat6 까우 맛'이라고도 발음한다.)이라고 한다. 그런데 북경 당국은 당연히 보통화로 했기 때문에 보통화로는 購物(gou4 wu4 꺼우 우)라고 한다. 이걸 비꼬아서 홍콩 시위대는 보통화 발음을 흉내내서 鳩嗚(gau1 wu1 까우 우)라고 하여 조롱했다. 덧붙여서 鳩(gau1 까우)는 광동어 비속어이다.
  13. 정확한 명칭은 공당(工黨)이다.
  14. 그러나 그 소매 구매자인 홍콩 시민들 대부분이 시위에 지지를 보냈던 상황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15. 이당시의 시위 양상을 보려면 영화 첩혈가두를 보기 바란다. 마오쩌둥 어록을 앞세운 홍콩 시위대가 총독부 지휘 경찰과 충돌한다.
  16. 영어가 문제없이 통하던 택시기사는 십수년전 이야기고 2010년대에는 광동어도 더듬을 정도로 중국 보통화가 모국어인 택시기사를 만나기도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