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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정변 당일 새벽, 여러 사단에서의 병력 차출이 계획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정변 수뇌부에서는 정변 실패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육사 2기 출신이자 박정희의 동기인 한웅진은 '이렇게 병력 동원이 지지부진 하니 차라리 야산이나 도시를 점거하고 협상해야 하는 것(플랜B)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어디 병력이라도 출동해야 협상이고 나발이고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플랜B를 시행하는 것조차도 살짝 회의적으로 보았으나, 김포에 주둔하는 해병대 제1여단 병력 1,500명이 여단장 김윤근 해병준장의 지휘로 합세한 후에 한시름 덜게 된다. 그러나 수도권 북단의 김포 최전방을 경계,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해병대 제1여단 병력을 쿠데타를 위해 빼돌리고 전방쪽을 비워둔 건 자칫 북한의 남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서울의 주요 방송국과 청와대를 접수하기 위해서 병력을 한강이남에서 한강이북으로 이동 중, 장도영이 출동시킨 육군 헌병대와 한강다리에서 위에서 교전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서로 2시간동안 대치하였으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고, 김윤근이 지휘하는 해병대 병력이 한강다리를 돌파해 방송국 등을 점거하였고, 같은 시각 문재준 포병대령이 지휘하는 육군 6군단 포병단 병력 1,300명이 육본을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해병대가 정변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포상격으로 해병대사령관이 크지 않은 해병대 규모와 상관인 해군참모총장이 중장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해군참모총장보다도 대장을 먼저 다는 특혜를 일시적으로 누리기도 했다. 게다가, 해병대 김윤근은 상관인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중장 이성호 제독 등 해군 인원들에게 아무 언질도 안 준 주제에 "해군본부를 포섭해뒀고 해군 함정들이 한강을 건너와 함포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는 생구라를 치는 병크까지 저질렀다.
장도영은 정변 정보를 입수한 뒤, 총리 장면에게 보고함은 물론 정변군 진압을 위한 육군 헌병대까지 보냈다. 그래서 한강 다리 위에서 해병대와 육군 헌병대 간의 총격전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장도영이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는 점. 육참총장으로서 그가 당장 주한미군 사령관[1]이었던 미 육군대장 매그루더와 연락했다면 매그루더의 허락하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 정변 진압이 가능했다. 매그루더는은 정변에 부정적이었음은 물론, 정변 세력이 허락없이 병력을 이동한 것은 미국 또는 유엔사령관이 가지고 있는 전작권을 침범한 것으로 심대한 월권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은헌병대 100여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고 정확한 상황에 대해 매그루더, 대통령 윤보선 그리고 총리 장면에게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장도영이 장면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긴 했지만, 정작 그는 박정희와 다섯 차례나 함께 일한 경험이 있었다. 박정희는 이미 1961년 4월 10일부터 장도영에게 정변에 대한 양해를 구했고, 장도영은 매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변 첩보를 전해들은 장면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을 때마다, 장도영은 매번 "문제없다." "진압중이다."라고만 답했다. 즉, 장면은 눈도 귀도 닫힌 채로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 셈이다. 그러나 사실 장도영도 쿠데타 관련 명단을 확보했음에도 그것이 쿠데타라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체포를 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문건은 막상 유출되지 않았으며 5.16 주체세력은 5.16이 실패할 시를 대비해 이것이 평화적인 정군운동임을 입증할 자료또한 구비해 놓았다고 한다. 장도영은 물증도 없이 체포를 시도했다가는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체포를 망살였다고 한다.
다만 육군참모총장치고 사후대처가 형편없었던 것은 사실로, 쿠테타가 발생했을 때 제2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출동된 병력은 육군 헌병 1개 중대뿐이었고, 이마저도 서울특별시청 앞에서 반란군에 접수되어 총부리를 반대로 돌려야 했다. 이와 별개로, 이광선이 지휘하는 약간의 육군 헌병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목적지는 6관구 참모장 김재춘이 장악하고 있고 박정희가 먼저 가기로 예정된 6관구사령부였다. 박정희가 그 헌병대와 대치하자 '우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즉석에서 일장연설을 했고 손을 내밀면서 "같이 합시다."라고 하자, 6관구 방첩대장 정명환 중령을 필두로 즉석에서 죄다 반란군으로 가담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변 세력은 새벽에 중앙방송국(현재 KBS)을 점령하였고 아침에 박종세 아나운서의 낭독으로 혁명공약을 방송하였다.(맨 위의 라디오 방송 링크와 같은 링크). 당시 박종세 아나운서는 박정희에게 직접 낭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혁명공약은 육군참모총장인 육군중장 장도영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김종필 중령이 초안을 잡은 것이라 한다. 장도영은 이후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다.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잠시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를 받고 미국으로 가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2012년 8월 3일 작고했다.
이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자고 일어나니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어 있었더라..." 하는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고는 한다. 이후 총리 장면은 미국과의 오랜 논의 끝에 18일 오후 1시, 중앙청에 나타나서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사퇴 성명을 발표했다.
"금번 군사혁명 발생에 대하여 우리 일동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총사퇴하는 바이니, 국민 제위(諸位)의 양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태 수습에 있어서는 유혈을 방지하고 반공 태세를 강화하며 국제적 지지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편, 1962, p.923~924
처음에 미국은 이 사태가 공산주의 계열이 저지른 반역인 줄 알고 진압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군사통제권을 미군이 지니고 있었는데 박정희가 무단으로 군대를 동원했고 이에 열받은 매그루더는 정부에 진압계획 승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반대했고 결국 진압은 무산되었다. 또한 집권한 군부도 바보는 아니어서 적극적인 친미 반공정책을 펼쳤고 미국도 반공정권이 들어서는게 이래저래 이득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의 5.16 정변을 묵인했다.
한편 5.16 정변의 소식을 들은 육군 보병대위 전두환은 정변이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진지 며칠간 주도면밀한 조사 끝에 박정희와 그 측근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육사 교장에게 사관 생도들이 5.16 정변을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교장은 생도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다면서 거부했다. 결국 전두환은 끈질긴 설득 끝에 퍼레이드를 강행했다. 이후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 되어 12.12 군사반란을 저지르는 "야, 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아!"로 유명한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해군과 공군의 경우, 박정희 세력에 포섭된 해병대 장교들을 제외하면 그 어떤 언질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해병대 1여단장 김윤근의 병크짓으로 인해 해군이 자신들에게 협조하고 있다고 믿은 쿠데타 가담 육군 장교들이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제독을 불러 약속했다고 자신들이 들은 지원을 요구했다. 당연히 내막을 알리 없던 이성호 제독은 "군인이 나라는 안 지키고 반란이라니 웬말이냐?"고 다그쳤고, 이에 열받은 육군 영관급 장교들이 해참이 말을 바꾸니 괘씸하다, 죽여버리자며 권총을 빼들고 회의장에 난입하려 했다. 이를 눈치챈 이성호 제독의 전속부관이 그를 냅다 끌고 건물 밖으로 도망쳐 관용차에 태워 해군본부로 피신시켜 해참의 목숨을 지켰고, 해군본부에서 공군 측과 전화 통화를 한 이성호 제독은 해공군으론 전세를 뒤집기 어렵다고 판단, 마지못해 쿠데타를 인정했다. 그리고 해군의 이런 처사에 열받은 쿠데타 세력이 해군을 음해하려고 전군에 대한 대규모 감찰을 실시했는데, 되려 해군이 전군에서 부패가 가장 적었다는 결론이 나와 쿠데타 세력이 데굴멍하고 해군이 쿠데타의 수장인 박정희의 눈에 드는 전화위복이 일어났다(...). 이 때문인지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이래 육군 출신임에도 해군에 비교적 큰 관심과 지원을 보였고, 육방부스러운 마인드는 가지 않았으나 기어링급 구축함을 도입하는 등 해군의 규모와 전력을 키우는 데 많은 기여를 해줬다. 반면 상관 팔아먹어 해병대사령관이 해참보다 먼저 대장을 다는 등 박정희 빽 믿고 설치던 해병대는 결국 베트남 전쟁 끝날 무렵인 1973년에 박정희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게 된다. 자업자득 꼴좋다.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병대사령관이 해군 제2참모차장으로 격하되었으며, 공식적으론 '해병대'라는 명칭조차 못썼고, '해군해병', '해군 상륙사단' 등으로 불리게 됐다.
이렇게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군사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라는 조직을 설립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정치깡패 재판. 이정재라든가…게다가 혼란스러운 사회를 일단은 안정시켰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한테는 큰 저항감이 없이 받아들여졌다. 국민들의 반응은 하단에 다시 서술된다. 그리고 후일 재야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장준하 같은 경우는 사건발발 하달정도는 저 5.16 정변을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한다. 정확히는 군사정변이 민주주의적으로 볼때는 매우 불행한 일이나 민족적(?) 위기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이를 들어 당시 장면내각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작금에 와서도 집권세력에 불만을 가지는 지식층은 좌우 가리지 않고 많은 것을 볼때 그냥 무능했다고 속단하긴 좀 이른 감이 있다. 나중에 민정이양만 제대로 했으면 얼마나 좋아? 애초에 민정이양을 할 생각이 있었을까? [2]
하지만 그 뒤, 사회가 안정을 찾고도 민정이양은 커녕 심지어 대통령 선거까지 없어지며 군사정권이 지속되자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을 비난하며 이를 무너뜨리기 위한 여론을 조성하려다 1975년 포천의 어느 야산 절벽에서 의문의 실족사를 당한다. 또한 5.16 주체 세력은 권력을 잡자마자 민주공화당 창당을 위해 중앙정보부 주도 하에 4대 은폐사건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을 저질렀다. 참고 당대에 이미 구악을 뛰어넘는 신악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는 점을 참고하자.[3] 정치하면 다 썩는거야 [4]
2 반응
2.1 지식인들의 반응
개신교인 논객이자 사상가였던 함석헌은 딱 잘라서 "혁명은 민중이 하는 거지, 군인은 혁명 못 한다."며 정변을 대놓고 깠다. (출처 임대식, 2003, p.313~314). 카네이션 혁명 같은 아주 극소수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전 세계의 신생독립국들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군부 정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외에 경향신문 한창우 사장 등이 정변을 비판했으나 금세 군사정권의 보복을 받았다.
일단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 층에선 장면 정권을 적극 수호해야한다는 분위기를 감지하기 어려웠다 즉, 일반적으로 정변을 바라보는 지식인들의 시선은 적잖이 복잡했다. 어떤 이들은 기득권이 청산된다며 기대감을 보였고, 어떤 이들은 반공 친미 노선이라고 하니 상당히 안심하기도 했다. 당시 지식인들이 이런 태도를 보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당시에는 군부의 정변에 대해 당시 지식인들은 비교적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제 3세계에서 발생한 군사 정변들이 대부분 민족주의적ᆞ개혁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의 나세르, 미얀마의 네윈, 이라크의 꽁레 등의 정변등이 그 예다. 게다가 5.16 정변의 주역들이 제 3세계 정변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소장파였다는 사실 역시 해외의 소식들에 귀기울이는 지식인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했다. (출처 홍석률, 2002, p.49~52). 또한 제3세계에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아직 덜 타락했을 시기이기도 해서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오늘날만큼 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민주화된 한국에서는 군이 정변한다면 헌정을 유린하는 반민주적이고 반국가적 행위란 인식이 강하며 군은 군에 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의식이 강하다. 그런데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군은 하나의 정치세력인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대표적 민주주의 국가인 프랑스에서도 프랑스 아프리카 주둔군이 공공연하게 정변 위협을 하면서 1961년에 알제리 독립세력과의 평화협정에 반발하여 실제로 정변을 감행하기도 했다가 드골에게 진압당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대학 진학률이 90%에 쓸데없이 높게 육박해 엘리트들이 넘쳐나지만 그때만 해도 엘리트들이 손에 꼽았고 사관학교를 나와서 군사교육이나마 제대로 배웠던 장교들은 몇 안되는 엘리트들에 해당했다. 따라서 장교들도 몇 안되는 지식인으로 인정을 받던 시기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군사정권이 정변 직후에 실시한 사회정화 정책들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일례로 지식인들의 초창기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5.16 군사혁명으로 우리들이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자기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혁명 정권은 지금 법질서의 존중, 강건한 생활 기풍의 확립, 불량도당의 소탕, 부정축재자의 처리, 농어촌의 고리대 정리, 국토건설사업 등에서 괄목할 만한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
이 글은 장준하가 1961년 6월호 사상계에 기고한 글이다. 이걸 근거로 오늘날 '장준하가 5.16 정변을 적극 지지했다'면서 정치적으로 정당화 시키는 세력들이 있다. 장준하가 군사 쿠테타 발생 당시 초기에 이들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하게 말해 장준하는 군인들의 반민주적 쿠테타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당시 만연한 사회 부패 현상을 척결하기 위해 양심적인 군인들이 행동에 나섰다는 것에 대한 기대를 말한 것이었다.
제2공화국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당內 신, 구파 싸움에 대해 장준하는 회의감이 느껴 처음에는 5.16 정변 지지 글을 기고하기도 했지만, 이내 박정희가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고 본색을 드러내며 장기집권을 추진하게 되자, 장준하는 이에 대한 반발로 곧바로 지지노선을 철회하고, 곧바로 다음달 '사상계 1961년 7월호'에 반민주적인 군사쿠테타를 비난하는 어조로 기고했다.
우선, 장준하는 독립군(광복군) 출신이라는 점에서 군인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있었다.[5] 그래서 장준하는 당시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고 있던 당시 '양심적이고 절도 있는 군인이 불량도당을 소탕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재한 이들을 처리하며, 농어촌에서 고리로 이자를 놓아 고통받고 있는 잘못을 정리'하는 데 군인이 가장 적합하다고 초창기에 생각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쿠테타를 일으킨 세력에게 사회부패를 일소하는 일들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스스로 약속한 이른바 '혁명공약'을 군인답게 실천하라고 분명하게 요구했다.
지식인층이 정변을 호의적으로 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식인들이 4.19 혁명 이후 3.15 부정선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완의 혁명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과 자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 혁명 이후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욕은 욕대로 먹고 국정은 국정대로 말아먹고, 심지어 3.15 부정선거의 원흉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지식인들은 늘 뒤 안 닦은 듯한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때 한 무리의 군인들이 정계를 접수하더니 3.15 부정선거의 주동자들을 싸그리 색출해서 통쾌하게 처벌했던 것. 그러자 지식인들은 대체로 "혁명의 주역인 우리가 못했던 일을 저분들이 대신 해주네. 부끄럽다." 식의 반응을 보이며, 5.16 정변을 계기로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아비판 하게 되었다. 즉 지식인들이 복잡한 심경으로 정변을 지켜보았던 이유는, 4.19 혁명을 끝까지 책임있게 완수하지 못한 자신들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가 그리 오래 간 것은 아니었다. 불과 1년이 지난 1962년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많이 희석되었다. 즉 5.16 군사정변을 4.19 혁명과 연관 짓기는 하되, 혁명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4.19는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1962년 4월 16일자 『연세춘추』에서 실시한 대학생 여론조사에서는 더 나아가, 앞으로 이양되어 수립될 민정의 성격 역시 군사정권의 연장이 될 거라고 응답한 비율이 65.7%에 달했다. 5.16 정변의 의의 역시 "국민의 민의" 라는 응답은 불과 9.7%였던 반면, "정치적 혼란의 결과" 라는 응답은 무려 73.3%에 이르렀다.
2.2 일반 국민 및 대학생들의 반응
동아일보에 따르면 일찍이 점령당한 대구는 군사반란을 냉정하게 보았고, 소수의 흥분하는 시민도 있었지만 대전, 속초, 강릉 등은 별 다른 관심이 없이 조용했다고 한다. 반면 광주, 청주 등은 등은 소식을 듣고 꽤 떠들썩했다고 한다.[6]
정변 직후 미 육군 제24군단 소속 첩보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10명 중 4명은 우호적, 2명은 다소 우호적이나 시기상조, 4명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1961년 5월 31일 주한 미국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서울대생들이 정변에 대해 찬성 50, 반대 50의 지지를 보이고 있다." 고 보고했다.
당시 각 대학은 정변 당일에는 모든 수업이 취소되었으나, 다음날부터 곧바로 정상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학생들은 대체로 관망적 자세를 취했는데, 장면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하나의 이유였다. 게다가 그들은 정변로 정권을 잡은 육군 내 세력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의 진의가 무엇인지 일단 알아야 했기에 당분간은 차분히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정변라는 뜻밖의 군의 움직임은 상당히 막연한 상황이었던 것도 있다.
이하의 두 인용은 정변 다음날의 서울대 및 고려대 학보 1면 헤드라인이다.
정변 성공, 학원은 평온, 당연감(當然感) 속에 사태 주시
군사혁명에 학생들은 침묵, 무표정. 사태 진전을 주시
이후 군사정권이 3.15 부정선거의 잔재를 청산하고 사회악을 뿌리뽑기 위한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먼저 서울대 학생회가 5월 23일 정변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 6월경, 서울대 학보의 「학생대담」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해서 크게 다음의 3가지를 요구했다.
- 반공 및 (4.19) 혁명의 완수
- 경제 및 민족정신 확립 이후 정권의 민정이양
- 기본적인 자유의 보장
그 외에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할 것" 이나 "선의의 독재는 필요하다" 는 등의 주장도 있었다.
정변 직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무려 83%에 달하는 학생들이 "우리나라 실정에 비추어볼 때, 서구식 민주주의는 부적합하다."고 응답했다. 이것은 그들이 4.19혁명을 이루어냈음에도, 혁명 이후 장면 정부의 무능력함에 일종의 회의를 느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박정희가 유신의 프로파간다로 "민족적 민주주의" 또는 "우리식 민주주의"를 주창했던 이유와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2.3 북한의 반응
앞서 나왔듯이 박정희가 언젯적 얘기였는진 기억 못했는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김일성은 한때 협상의 희망을 품고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이자 무역상 부상(차관급)이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보냈다. 그러나 되려 미국에 반공을 과시하기 위한 박정희의 의도에 따라 밀사만 사형당했다. 결국 다시 남북관계는 냉각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박정희를 친민족적 인물이라고 주장한 인물들은 대거 숙청당했다. 윗동네는 뭔일 있을때 숙청하는게 드라마 스토리 숙청은 거들 뿐
김종필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가 죽이라고 명령한건 아니고 김종필이 자세한건 숨기고 법적절차를 밟아서 빠르게 재판해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보고한후 반공과시로서 처형했다고한다. 죽인뒤 보고를 올리니 박정희의 표정이 굳고 "그렇게 했어..."라고 말했다고한다.
2.4 미국의 반응
미국은 5.16 정변 불과 열흘 전, 한국의 상황을 보고 한국과 한국 국민은 병이 들었다며 비관적으로 표현했고, 정부 언론 교육 종교 기업의 구조가 모두 부정부패로 연결돼 있으며 한국인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망상 속에 살고 있다며 비판했다. 여기에 미국은 무기력한 장면 정부는 위기를 대처할 능력이 없으며 조만간 민중의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미국이 한국의 개혁을 직접 조종해야 한다며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총리 장면 뒤에서 한국을 개혁해야 한다는 막후통치를 검토한 것으로 나타났다. 5개년 계획 역시 이것의 초보적 단계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여기에 동의하고 한국에 대한 막후통치안을 수립하려는 참에 5.16 군사정변이 터지고 무산되었다. #
미국의 경우, 앞서 언급되었듯이 처음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냈고, 이후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서 "미군 및 4만명 정도의 국군을 동원하여 서울을 포위해버린 다음 심리전으로 반란군을 동요시키면 총 한방 쏘지 않고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다"며 윤보선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반란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면서 그러면 서울에서 시가전이 벌어진다며 반대했다. 결국 둘은 한동안 이러쿵저러쿵 했다가 제1야전군사령관 이한림에게 진압하지 말것을 지시하면서 진압작전은 포기되었다. 나중에 12.12 군사반란이 터졌을 때도 반란군과 정면으로 부딪히면 서울이 전쟁터가 된다고 적극적인 대응을 못했다.
이후 군 전반에서 정변 인정으로 분위기가 전환되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나서서 정변 지지 시가행진을 벌이자, 미국은 정변 불개입으로 입장을 바꿨다가, 국무부의 명의로 "한국의 정변은 반미정권 등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은 신정권을 승인할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함으로 정변을 인정했다. 물론 여기에는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친미 노선을 표방한 덕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간혹 5.16 정변이 미국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한 근거자료가 없는 의혹에 불과하다. 되려 미국은 정변을 우려하는 입장이었다. [7]
# 미국 대사관 기밀 문건에서는 5.16 정변 이후 파벌 문제로 인해 또 정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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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N군 사령관,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등도 겸직한다.
- ↑ 설사 군정이 혼란기를 수습하고 민정으로 이양했어도 후대에 와서 부정적인 평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가 혼란하다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이를 바로잡겠다고 무조건 개입하는 것이 결코 옳은 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여기서 웃긴건 김종필은 2016년 발간한 김종필 증언록에서 5.16 군사정변의 이런 동기가 4.19 이후 두달이 지난 6월 9일즈음에 박정희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썼다는 점이다. 문제는 애초에 제 2공화국은 4.19 민주 혁명 이후 이승만이 악용했던 헌법을 의원내각제로 바꾸고 국회의원 선거를 마쳐서 장면이 취임한게 8월의 일이었기때문에 부패고 뭐고 할것도 없었다는점이다. 부패한건 제1공화국의 잔재였고 제2공화국은 뭘 해보지도 못하고 뒤집혔기때문에(...)
- ↑ 그러나 당대 정치자 뿐만 아니라 홀대 받은 군 간부들도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군 간부들의 처우 개선만을 기대한다면 모를까 이들 군정 세력으로부터 정치부패 척결을 기대한 것은 "5.16 주도자들이 4.19를 계승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겠지"라고 기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 ↑ 장준하는 비록 일본 육군에 입대했긴 했으나, 전쟁 중 탈영해 합류했다. 박정희처럼 종전 후 눈치보며 도망가 들어간 것과는 다르다.
- ↑ [1]
- ↑ 미국은 당시 박정희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기 전까지도 그의 형이 남로당과 연관돼 있었다는 점에서 그를 잠재적 공산주의자로 보며 상당한 경계심을 드러났다. 북쪽의 김일성이 5.16이 터지자 마자 괜히 기뻐한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