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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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春
1927년 6월 4일 ~ 2014년 1월 2일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정치인이다. 호는 인산(仁山)이다. 종교불교다.

1927년 경기도 김포군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정승화와 동기이다.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였다.
5.16 당일 계급은 육군 대령으로 혁명군의 지휘소로 정한 제6관구사령부 참모장이었다. 장도영 참모총장의 지시를 받아 체포하러 온 육군 헌병차감 이광선과 헌병병력을 설득 시켜 체포를 중지하고 사령관실에 대기시키고 자신의 동지들은 참모장실에 대기시켜 체포를 막아 시간을 벌려 놓았다. 박정희가 6관구사령부에 도착한 뒤에는 이광선과 헌병대병력도 5.16에 가담 했다. 김재춘이 지략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5.16이 실패했을 확률이 크다.
정변 성공 후 주체 육사 5기생의 리더로서 김종필.김형욱을 위시한 또다른 주체 육사 8기생과 권력 다툼을 하였다. 이후 방첩부대장을 지내고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제3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였다. 중앙정보부장 재직시 공화당 창당 작업에도 일부 관여 했으며, 이른바 7.6 친위 쿠데타 미수사건이라 명명된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등의 철없는 불장난을 봐주다가 16년 뒤 12.12 군사반란이라는 어마 어마한 대형 산불로 재발 하였다. 이때 담당 사건 방첩대장이 정승화 준장이었는데, 이때의 직무 유기로 16년 뒤 이들에 의해 17계급 강등, 남한산성 유람을 다녀 오셨다.

중앙정보부장직 경질 이후 야인 생활을 하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강화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2년 5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유탁민주공화당 복수공천을 받아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오홍석 후보와 민주공화당 김유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군 보좌역으로 지지를 했다. 이 일로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과천시 땅의 자신의 농지가 과천청사 부지로 강제로 뺏기다시피 하는 굴욕을 당했다.

2014년 1월 2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

제3공화국, 코리아게이트에서 송기윤씨가 그를 연기하였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선여부비고
1971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민중당-당선
1973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군)민주공화당-당선
1978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김포군-강화군-고양군)무소속-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