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사회 운동 관련 정보
1 개요
1964년 대한민국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강력히 반대하여 대학생 및 일반시민 그리고 재야인사들이 주도하여 일으켰던 반일 성향의 항쟁. 이 당시 기준으로 광복 2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시점이었고 35년간의 일제강점기로 인해 한국 국민들의 반일 및 혐일 정서가 높았던 시절이라 어느 때보다 반일에 동참하는 이들이 대거 참가하였던 항쟁이기도 하였다.
1964년 대통령 박정희는 한국 경제의 활성화와 부흥을 목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 사실상 국교가 단절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비밀리에 추진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해방 20년과 일제 패망 20년 만에 이렇게 한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게 된 것은 1960년대 한국 경제의 부흥과 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서는 1950년 한국에서 일어난 6.25 전쟁 때 경제부흥으로 발전하게 된 일본과의 기술협력과 경제협력 등이 필요하였고 과거사도 중요하지만 헐벗고 가난한 대한민국의 경제를 부흥하기 위해서는 선진국 일본과의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그의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한일 외무장관 등을 통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일본측과 합의하기로 하고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도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일본과는 초기부터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었고 특히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반일 및 혐일 성향과 일제강점기를 35년이나 겪어온 국민들의 과거사적인 정서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혐오과 반감이 매우 깊었던 시절이라 일본과는 해방 이후 20년 동안 정치외교적인 교류를 가지지 않았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이어서 출범한 윤보선 정권 역시 당시 대통령 윤보선의 반일 노선과 아래에서 언급하는 것과 같이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았을 정도로 일본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이라 마찬가지로 일본과는 정치외교적 교류나 관계복원도 하지 않았다.[1]
2 국민들과 재야인사들의 반응
그러나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의 한일 국교정상화 방침에 대해서 국민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해방된 지 20년이나 되었는데 이제 와서 왜놈들의 칼부림 속에 살으란 말인가', '왜놈과 국교정상화는 제2의 경술국치이자 을사조약이다', '피 흘려 나라를 지켜낸 호국영령과 애국자들이 크게 통곡한다', '국민과의 합의도 없는 왜놈과의 국교정상화는 친일 매국 정권의 독재다' 는 등의 반대입장을 밝혔다.
특히 그 당시 해방 20년인 점을 고려해보면 일제강점기 치하에 살아온 세대들이 주를 이루고 해방 이후 태어난 세대들도 부모님의 영향 등으로 인해 반일 및 혐일 인식이 깊었던 시기인 데다가 일제강점기의 모진 악몽과 과거사 반성을 할 줄 모르는 왜놈들과 무슨 국교정상화냐며 반대인식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특히 현재 수요집회를 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 당시에는 젊은 시절이라 강력히 반대하고 있으며 학도병 및 징집병 출신 노인들도 반일 및 혐일 인식이 짙었기 때문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게다가 그 당시 일본 측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어떻게 사과와 보상을 할 것인지 한국 언론에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국교 정상화 논의를 하면서 의제로 다루어 양국 간의 협의를 이루겠다고만 밝혔을 뿐이다. 안 그래도 반일감정이 폭발하는 마당에 일본이 보인 이러한 태도는 항쟁을 격화시키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인 윤보선은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박정희 정권의 이같은 만행은 한국 역사에 커다란 치욕을 남길 오명의 사건이 될 것이며 역사는 박 정권의 친일 매국에 준하는 이 같은 행위를 호국영령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장택상 역시 현대판 한일병합에 비유하며 반대하였다.
여기에 공화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의기투합하여 윤보선을 위원장으로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및 철회운동과 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반일 및 혐일 인식이 짙은 일반 시민과 대학생들도 이에 동참하여 투쟁에 돌입하였다. 종교단체와 호국보훈단체들도 이에 동참하여 대일외교굴욕 철회운동을 하게 되는 등 해방 20년 만에 최대의 반일 시위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3 시위현황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은 교정에서 일장기를 불태우고 박정희와 한일 정상화에 동참한 김종필 인형의 화형 의식과 성토 의식 등을 열고 박 정권의 친일 매국 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민족적 민주주의' 의 장례식도 거행되었는데 이는 박정희 집권 당시 내세운 명목이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국식 ㅇㅇㅇㅇ은 쓰래기였군...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출신 김덕룡은 선언문을 낭독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이에 윤보선은 서울대를 찾아 그를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그 외 각 대학에서도 반일인식을 가진 대학생들이 일장기와 일본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국교정상화에 동참한 매국노 화형식을 거행하며 투쟁에 나섰고 일부는 박정희, 김종필 등 이른바 친일 매국노 및 민족반역자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각지에서 잇딴 반일 및 정상화 반대시위가 격화되었다.
결국 이 시위는 단식농성을 넘어 거리시위로 격화되었고 대학생과 시민 그리고 재야인사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서 '친일 매국 박정희 정권은 왜놈과의 국교정상화를 철회하라', '해방 20년 만에 제2의 경술국치의 치욕을 안겨줄 텐가', '국민을 무시하고 일제의 칼부림을 방조하는 사대매국정권은 물러가라' 고 외치며 반일 및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거리 앞에서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일본 수상인 이케다와 일왕 히로히토 인형을 불태우고 일장기를 불태우거나 찢어버리는 등 과격시위로 격화되었으며 박정희는 역사의 죄인이자 사대매국을 저지른 민족반역자이자 호국영령들의 충정을 무시한 사악한 인간이라며 비난까지 하였다.
4 계엄령 선포
반대시위가 점차 반일 및 반정부 시위로 격화되자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들을 출동시켜 진압조치에 나섰다. 이로인해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권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대거 체포되었고 이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역임하게 되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 이명박, 중앙대학교 학생 이재오, 서울대학교 학생회장 김덕룡, 한광옥 경기고등학교 학생 손학규 등 주도자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2]. 나머지 재야인사들도 반정부 혐의로 체포되는 등 진압도 강경해지게 되었다. 이후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은 6.3 시위를 주도했단 이유로 찍혀 취직이 어려워지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정을 호소했고 박정희는 현대에 자리를 알아봐주며 정주영에게 특별히 부탁했는데 운동권인 그를 경계하여 정주영 보고 확실히 감시하라는 의도였다는 설과 이명박을 좋게 보고 자리를 알아봐준 것이란 말이 공존하고 있다.
대통령 박정희는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서 "대학생 여러분들은 반정부 시위를 중지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 학문에 충실하기를 바랍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는 대한민국 경제 부흥과 활성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조항입니다. 일본이 미우면 일본이 밉다고 시위를 할게 아니라 일본을 능가하는 실력을 키워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시오." [3] 라고 발표하였지만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국민들 사이에서도 해방 20년 만에 반일 및 혐일 인식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계엄령이 해제되고 1년 후인 1965년 12월 한국과 일본은 마침내 국교정상화에 합의하여 해방 20년 만에 외교 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한일기본조약이 성립됐다.
5 이후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관심과 반대여론이 끊이지 않자 정권이 사건을 조작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는데 그게 바로 인민혁명당 사건이었다.
6 평가
6.3 항쟁은 해방 20년만에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반일 및 혐일 인식이 짙었던 국민들의 반발에서 나오게 된 항쟁으로 끝내 한국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되면서 성공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지만 해방이 된 지 20년 만에 민중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 반일 항쟁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한국 국민들 간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혐오적인 인식이 돋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1998년 일본 문화 전면개방까지 한국 내에서 일본 문화 등에 대한 배척 대상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라는, 일본인 문세광이[4]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 영부인 육영수가 사망한 사건은 더욱 반일 감정에 불을 지폈고, 지금 진보계/중도보수계를 구성하는, 80년대에 주 활동하던 운동권들 역시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그 당시 한국의 지상파에서 방영하였던 일부 아동용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대부분 일본적 분위기가 철저히 배제되고 한국적인 분위기로 개정되거나 수정되어 나오게 된 것도 이때의 영향이 있는 편이다.
당시 시위에 참가한 이들 대부분은 현재의 60대~70대로 지금도 일본 문화를 저질 문화, 하급 문화이자 어린애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불온한 존재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당시 대학생들이 이후 사회 유력 인사들이 되었고 정치계에 진출하여 대통령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점이 있기 때문에 일본 문화 진출을 부정적으로 보고 진입장벽을 높이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1998년 일본 문화가 한국에 대거 유입되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이 항쟁을 겪은 세대들은 일본 문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짙은 편.
1998년 일본 문화가 한국에 대거 유입한 이후로 오늘날의 대학생 및 젊은이들이 일본 문화에 대해서 이전 세대보다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짙고 일부에선 긍정적으로 보거나 호감을 가지는 것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수준이다. 이러한 차이를 보이니 일본 현지 일부에서도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친일(1번 항목)이 많고 기성세대들은 반일 및 혐일이 많다" 라는 말까지 나온 수준이었다.
특히 오늘날 10대 청소년들이 1998년 일본 문화 전면개방과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의 급속한 발달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쉽게 접할 수 있었거나 일본 만화 코스프레 등을 하는 것에서 본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일반화할수 없는 문제로 젊은이들도 일본 싫어하는 사람들 많다.
특히 지금의 기성세대들 특히 이 항쟁에 참가하였거나 겪어본 세대들 일부는 지금도 반일 및 혐일 인식이 짙어서 일본 문화를 좋지 않게 보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일본어 한마디를 해도 눈을 부라리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