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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五
1 개요
한국의 정치인이자 MB정권 시절 실세로 불린 친이계의 좌장. 1945년 1월 11일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성장해 영양고등학교,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학생 시절이던 1964년 6.3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서울 대성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를 역임하였는데 당시 제자 중의 한 명이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국회의원이다. 이후,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1979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자격으로 경북 안동댐을 방문했다가, 현장에 박정희의 방생기념탑은 크게 서 있는 반면 안동댐 건설 공사로 숨진 노동자들의 위령탑은 초라하게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유신독재의 실체"라고 비판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속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는데, 본인은 이후 민주운동으로 인한 옥살이 5번 중 3번을 박정희 시절에 겪었다며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YS의 부름을 받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으로 입당해 19대 총선까지 서울 은평 을에서 내리 5선을 한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새누리당에서 공천탈락해 무소속 출마했으나,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후보의 당선으로 이재오 의원의 6선 도전은 좌절되었다. SBS의 선거방송 2016 국민의 선택에서는 이재오 후보의 낙선이 예상된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재 오디로?", 이재 오선?(...)라는 문구를 달았다.[1]
2 정치활동
1990년 진보정당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원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4년 김문수, 이우재 등과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이원형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같은 선거구에서 현재까지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으로 5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계파 갈등[2] 속에 치러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가, 문국현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자 이후 치러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원외 신분이던 2009년부터 2010년까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는데, 친이계 실세라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친이계 좌장으로 친박계와 다툼을 자주 벌였고, 실제 친이계가 당권을 잡은 18대 총선에선 친박계 공천학살을 주도했다는 의혹도 있다. 당연히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판하는 등 박근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2012년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자신을 제외한 측근들이 모두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이후로도 사실상 비박#s-4계랑 손잡고 19대 국회 내내 친박계와 박근혜를 비판하다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결국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비박계 김무성 대표가 당직인 파동까지 벌이며 은평 을에 대해 무공천 선언하며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고, 실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진보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이재오 의원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정의당의 김제남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강병원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강병원 후보의 당선으로 이재오 의원의 6선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재 오디로?
총선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하지 않고 최병국 전 의원과 함께 중도 신당을 만들었다. 가치는 중도와 민생우선주의. 가칭은 '늘푸른한국당'으로 정했다고 한다.
3 트리비아
저서로 '한국학생운동사'가 있다. 1984년 초판이 나왔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학생운동의 역사를 직접 활동하던 운동권 출신이 쓴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학생운동사 관련으로는 굉장히 가치가 높은 저서로 평가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워낙 의미가 있다 보니 꾸준히 재판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보수당 국회의원이 쓴 최초의 책이 학생운동사
행정구역 개편에 관심있는 정치인 중 하나라서 여러 번 자신만의 (도 폐지 뉘앙스를 지닌) 행정제도 개편안을 제안한 적이 있다. 또 내각제에 관심이 있어서 개헌 제안도 종종 했다. 이는 그가 차린 정당인 늘푸른한국당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국회 신상 발언에서 "나 같은 사람이 청춘을 바쳐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가능했던 것", "노무현 대통령은 독재하에서 경찰서 유치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로[3] 자신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2013년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후 "잊고 살았던 고문 당한 전신이 스믈스믈거리고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전신이 옥죄이면서 아파온다. 비단 나 뿐일까?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보수정당에 대해 '독재당이다, 수구보수꼴통당이다 이런 소릴 탈피하자'고 하는 걸 봐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를 신봉하는듯. 그가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친박계와 견원지간으로 지낸 것도 이런 그의 사상적 신념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2월 29일 올라온 노유진의 정치까페에 보수 여당 의원 중 최초이자 마지막 게스트로 출연해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교수와 정치 입문 계기부터 시작해서 MB 정권 시절 일들과 박근혜정부 평가 등 여러 뼈있는 만담을 나눴다. 본인 왈 야당보다도 당시 여당인 보수를 개혁하는 게 급선무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보수 정당으로 입문한 게 컸다고.
2016년 4월 6일 저녁 8시 경, 서울 은평 을에서 유세 중 한 취객에게 "(국회의원) 그만 해먹어라, 왜 자꾸 나오냐"(...)라며 가슴을 타격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사건 이후에도 이재오 후보는 별 문제없이 선거 유세운동을 진행했으며, 경찰은 경범죄 혐의로 취객을 체포했다.
2007년 10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올림픽대로에서 자전거를 탄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적이 있었다.(...) 한반도 대운하 자전거 탐방을 마치고 서울로 오던 중이었는데, 같이 자전거를 타던 관계자 13명도 함께 즉결심판에 회부됐다고.# 차기 정권 실세도 안 봐주는 경찰관 오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 민중당 | 21,716 (17.4%) | 낙선 (4위)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 신한국당 | 48,146 (43.6%) | 당선 (1위)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 한나라당 | 53,121 (51.0%) | 당선 (1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 한나라당 | 53,107 (45.3%) | 당선 (1위)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 한나라당 | 38,164 (40.8%) | 낙선 (2위) | |
2010 | 2010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18대 국회 서울 은평 을)[4] | 한나라당 | 48,311 (58.3%) | 당선 (1위)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 새누리당 | 63,238 (49.5%) | 당선 (1위) |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 무소속 | 34,318 (29.5%) | 낙선 (2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