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윤

강동윤
姜東潤 / Kang Dong-yun
300px
직업바둑기사
소속한국기원
생년월일1989년 1월 23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학력초졸
입단2002년
단급九단
타이젬바둑 닉네임디셈버(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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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끼가 넘치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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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익십단전 우승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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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LG배 우승 후 월간 바둑 잡지를 장식하면서.

1 개요

"바둑팬들이 저를 국내용이라고 하시던데…. 국내용이라면 국내기전에서 이 정도는 해야죠ㅋ"

-2010년 38기 명인전 본선리그에서 이세돌을 꺾은 뒤. 똘끼가 넘친다 이제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경지

"인터뷰를 재미있게 하기로 유명한데요?"(사회자)

"바둑보다 인터뷰 공부를 더 해서..."(강동윤)

한국의 바둑 기사. 실력, 재능으로 보나 커리어로 보나, 한중일의 20대 초중반의 기사들 가운데 단연 가장 앞서 있[1] 다.
천재형 기사로 평가받으며 포스트 이세돌의 가장 강력한 후보.

속기에 강하고 실리를 중요시하는 기풍으로, 본좌 이창호를 잡고 첫 메이저 기전 우승에 성공했으며 국내기전, 특히 한국바둑리그에서 이창호이세돌마저 능가하는 무적의 포스를 내뿜고 있다.

국내기전 성적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일부 팬들에게는 국내용에 불과하다는 폄하를 받고 있지만, 사실 국제기전 성적도 상당히 괜찮은 일류급 기사. 하지만 2013년 들어서는 부진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2015년커제스웨를 꺾고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에 올라가버렸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박영훈을 만나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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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바둑리그 세리머니

2 입단하기까지

형을 따라서 바둑에 입문했고, 조훈현이나 이창호, 이세돌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기재를 드러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한바연 바둑대회를 우승하고 최강부를 3회나 석권하였다.[2] 뛰어난 성적이었지만 프로기사가 되는 것을 망설여서 초등학교 3학년 때 바둑을 잠시 그만뒀다가, 별생각 없이 참가한 대회에서 또 우승하는 바람에(...) 프로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세계청소년바둑대회, 이창호배 등 메이저 어린이대회를 여러 차례 우승하며 유명세를 탔다.
양천도장 등에서 공부하며 김종수 六단의 지도를 받았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 연구생이 되었고 이듬해 수많은 프로기사를 배출한 권갑용 도장[3]에 들어갔다. 당시 여러 도장에서 강동윤을 데려가겠다고 난리법석이었는데 권갑용 도장에서만 제의가 없어 이곳을 선택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처음 권갑용 도장에 들어갔을 때는 다카가와 가쿠와 비슷한 안정적이고 무난한 기풍이었지만, 수읽기 훈련과 20~30초 바둑을 병행하면서 현재의 기풍을 완성시켰다.
강동윤의 기재를 보고 권갑용 八단이 "언젠가는 강동윤이 이세돌을 잡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그리고 진짜 꺾었다

2002년 5월 일반인 입단대회에서 8승 3패, 2위의 성적으로 입단하였다. 당시 13세 4개월의 나이는 프로기사를 통틀어 최연소였다.[4] 이미 연구생 1조 1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 입단대회가 아닌 연구생 내신으로도 입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3 기풍

기본적으로 이창호와 같은 두터움과 실리지향의 기풍이라기 보다는 이세돌, 조훈현류類의 선실리 후타개형 기풍이다. 즉 실리를 빨아들이고 엷어진 곤마를 전투를 통해 타개해 나가는 방식인데, 얼핏 보면 이세돌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세돌이 '상대와의 진흙탕 싸움을 통해 흠집을 찾아내고 그 상처를 벌려 찢어버리는 파괴적인 수읽기'를 지니고 있다면, 강동윤은 '복잡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승부수와 잽이라고 쓰고 도발, 꼬장이라고 읽는다을 날려 끈덕지게 버티면서 우위를 잡는다. 특히 상대방에게 껄끄러운 곳을 찔러가는 솜씨가 일품. 상대방은 이미 실리에서 뒤처진 상태에서 강동윤의 도발에 어설프게 응수했다가 패배하게 된다. 속기바둑에서 강동윤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통의 수읽기로는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게 응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프로기사 가운데에서도 돋보이는 형세판단, 균형감각과 끝내기 실력은 덤.

다만 수읽기의 '속도'에 비해 '깊이'가 없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아마도 장고바둑인 국제기전에서 상대적으로 부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다음은 스승 권갑용 九단의 코멘트.
"수를 빨리는 보는데 깊이는 있지 않아 보인다. 재능으로, 임기응변으로 버티는 거지. 인터넷바둑을 많이 둔 것이 속기전에서 힘을 내는 밑거름이 된 게 사실이지만 뒤집어 보면 지나칠 정도의 인터넷대국이 이러한 단점을 고착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세계대회를 우승하고 초일류로 뛰어오르려면 제한시간이 긴 바둑에서도 본령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4 주요 커리어 (개인기전)

최연소 기사로 입단했지만 기대치에 비해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입시학원에 등록하는 등, 한동안 방황했다고 한다.
그러나 입단 3년차인 2005년에 농심신라면배 대표선발전을 통과하고[5] 오스람코리아배 신예연승최강전에서 우승하며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2002년 입단

2005년 오스람코리아배 신예연승최강전 우승(vs 이영구)

SK가스배 신예프로10걸전 우승(vs 고근태)

2007년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vs 이창호)

첫 본격기전 우승. 이후 이창호의 천적으로 급부상하면서 백만 안티를 양성하였다.
- 이세돌 : "내가 10여년간 쌓은 안티를 강동윤 九단이 일년동안 싹쓸이 해갔다."
오스람코리아배 신예연승최강전 우승(vs 백홍석)
박카스배 천원전 준우승(vs원성진)

2008년 세계마인드스포츠 남자 개인전 금메달

예선부터 10연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은 이창호의 불참, 이세돌과 최철한의 단체전 참가로 남자개인전 금메달이 불투명한 상황. 반면 중국은 자국 1인자 구리를 남자개인전에 배치하면서 안방에서 대놓고 금메달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강동윤이 8강에서 367수까지 가는 혈전 끝에 2집반 차로 구리를 따돌리고 결승에서 박정상을 꺾으며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하이원배 명인전 준우승(vs이세돌)

2009년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vs이세돌)

08년 12월에서 09년 2월에 걸쳐 이세돌과 강동윤의 명인전+천원전 10번기가 벌어졌다.
이세돌이 명인전을, 강동윤이 천원전을 가져가면서 1:1의 결과가 나왔지만, 아무래도 국내 최대기전인 명인전을 가져간 이세돌의 판정승. 이세돌이 후배한테 타이틀 하나 준거임
후지쯔배 우승(vs이창호)
이야마 유타, 박문요, 박영훈에게 승리하고 결승에서 이창호를 만났다. 중반에 불리한 바둑이었지만 끝내기에서 역전하며 또다시 이창호의 발목을 잡았다.
이창호는 07, 08년에 이어 대회 3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지만[6] 05년 춘란배 이후로 국제기전 7연속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아쉽게도 2009년부터 후지쯔배 우승/준우승자에게 주는 병역면제 혜택이 아시안게임으로 옮겨가면서 군대 면제를 받지는 못했다.

2010년 KBS바둑왕전 준우승(vs이창호)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 금메달
대표선발전을 마지막으로 통과하며 간신히 대표팀에 합류했다. 대표팀의 구멍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 기대했던 이세돌이 콩지에를 상대로 2패하는 동안, 강동윤은 예선 풀리그에서 구리에게 묘수를 터뜨리며 불계승. 결승에서는 류싱을 꺾었다.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조한승, 박정환과 함께 병역면제 성공. 면제로이드

강동윤 九단이 구리 九단을 상대로 터뜨린 희대의 묘수. 4분 14초부터 보면 된다.

2016년 제 20회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vs 박영훈)

8강 전에서 커제 [7], 4강전에서 스웨 [8]를 기어코 잡더니, 결승전에서 2-1로 우승을 했다. 참고로 강동윤은 우승했으면 7년만의 우승이고 만약 박영훈이 우승했으면 9년만의 우승이었다.

5 리그괴수리그용

개인기전에서의 활약도 정상급이지만, 한국바둑리그에서는 리그를 씹어먹는 괴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바둑리그인 2004 한국바둑리그에서는 입단 3년차에 불과했지만 한게임바둑에 두번째로 지명되어 이세돌과 함께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개인성적은 승률 50%를 조금 넘기는 데 그치면서 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2005년에는 리그에 참가하지 않았고, 2006년에 파크랜드 팀의 3지명으로 참가했지만 팀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 하지만 이때부터 리그용 선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데 팀성적과는 별개로 8연승이 포함된 10승 4패를 거두었다. 8연승을 기록하면서 연승상도 수상. 기세를 이어가 2007년에는 팀성적 3위(울산디아채 2지명)에다 12승 1패(9연승 포함)로 다승상을 수상하였다.

소속팀 울산디아채는 07년의 성적을 믿고 2008년에도 강동윤을 2지명 보호선수로 묶어두었는데...2008년의 강동윤은 개인적으로는 최전성기였지만(마인드스포츠 금메달, 명인전 준우승, 천원전 우승, 농심신라면배 5연승에 한국랭킹 2위까지 올라갔다.) 그 때문인지 리그에서는 8승 6패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듯 말 그대로 시망.

08년의 부진에도, 09년 리그에서 신안천일염에 주장으로 지명되었다.[9] 그러나 성적은 6승 5패, 승률 55%로 반타작에 턱걸이하였다.

08/09의 성적만 본다면 이게 무슨 리그용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10/11의 강동윤은 07년 리그 괴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10년 리그에서 한게임은 2년 연속으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둔 강동윤을 1지명하는 모험을 감행하는데, 결론은 성공이었다. 11승 4패의 성적으로 팀의 정규리그 1위를 이끌었지만[10] 팀은 아쉽게 챔피언결정전에서 이세돌의 신안천일염에게 패배.

이듬해 2011년의 한국바둑리그는 강동윤에게 최고의 대회였다. 8연승을 포함한 12승 2패를 거두고 팀 포스코 LED도 정규리그 1위에 올라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했으며, 결승에서 하이트진로를 꺾고 우승. 강동윤은 팀 우승/시즌 MVP/다승상/1지명 랭킹상[11]의 4관왕에 올랐다.

바둑리그 통산 성적

2004 4승 3패 57%
2005 불참
2006 10승 4패 71%
2007 12승 1패 92%
2008 8승 6패 57%
2009 6승 5패 55%
2010 11승 4패 73%
2011 12승 2패 86%
포스트시즌 통산 4승 0패 100%

우승 2회(2004/2011), MVP 1회(2011), 다승 1위 2회(2007/2011), 연승 1위(2006/2007)

통산 7시즌 93전 69승 24패 74.2%
통산 승률 1위(2위 이세돌 92/66/26 71.7%)이며,
한 시즌을 덜 치뤘으면서도 통산 다승 2위에 올라 있다.(1위 이영구, 최철한 76승)
04/08/09년의 성적은 실망스럽지만, 바닥을 치더라도 최소 50% 이상이며 이 해에 까먹은 성적을 다른 해에 메꾸면서 이세돌과 이창호를 능가하는 리그 본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바둑리그에서 이창호를 여덟 번 만나 여덟 번 모두 승리. 이창호 잡는 기계

2011년에는 중국 을조리그 저장 팀에 용병으로 참가했는데, 중국에서도 6승 1패를 거두고 팀의 리그 우승과 갑조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정리하자면 리그에서의 본좌급 성적, 그리고 국내기전에서 최소 4강 내지 8강은 꾸준히 올라가지만, 장고대국인 국제기전에서의 성적이 부진[12][13]하기 때문에 국내용, 리그용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국제기전 우승 경험이 있고 군면제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기사.

6 인터뷰

보통 '바둑계 인터뷰'하면 이세돌을 떠올리지만, 강동윤도 이세돌에 못지 않다. 2010년 이후로 결혼 생활에 이세돌 인터뷰가 순해지면서 강동윤은 인터뷰에서 안티 지분을 독점하는 중. 아래는 강동윤의 인터뷰 일부. 똘끼가 넘친다.

-2010/07/22 명인전 본선리그에서 이세돌에게 승리한 직후
Q. 본선리그를 4연승으로 통과하고 결선에 진출했는데?
A. 바둑팬들이 저를 국내용이라고 하시던데…. 국내용이라면 국내기전에서 이 정도는 해야죠ㅋ

-2011/12/21 한국바둑리그 챔피언 결정전 우승 직후 (4관왕 수상)
Q. 상복이 터졌다. 소감이 어떤가?
A. 매년 개인적으로 이 정도는 했던 것 같은데 팀을 잘 만나 우승한 것 같다.

-2011/01/06 한국바둑리그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
A. 이영구 선수와 진시영 선수는 성적으로 보답했고, 그 외의 선수들은 팀 분위기를 살렸고, 저는 팀의 비주얼을 맡았기 때문에...

-2011/10/27 다음과의 인터뷰 기사

Q. : '국내용'이라는 별명 때문에 더 조급했겠다.
A. : 그야 당연히 세계 대회 성적이 안좋았으니까 그런 말을 들어도 마땅하죠. (웃음) 뭐, 그 전에도 욕을 많이 먹어서요. 하하. 신예 대회와 세계 대회는 격차가 커서 그렇게 쉽게 우승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름대로 빨리 우승했다고 생각해요. 우승하고 난 후에 잘 못해서 마음이 좀 그렇죠.

Q. : 바둑 기사 중에 가장 안티가 많다는 소문도 있다.
A. : 네, 세계 대회만 나가면 맨날 져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 이창호 九단의 천적이라는 기사가 많아서 그런것 같기도 하고요. (웃음) 요즘은 이창호 사범님한테 잘 못이겨요. 그래서 안티가 줄어든 것 같아요. 하하.

Q. : 전에 이세돌 九단이 '내가 10년간 쌓은 안티를 강동윤 九단이 1년 동안 싹쓸이 해갔다'라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웃음)
A. : 네. 그런 말을 들으면 제가 착한 일 한 것 같기도 해요. 하하. 어그로 탱킹 능력

-2015/11/18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진출을 확정하고 나서.

Q : 형제대결이 만들어졌다.
박영훈 9단 “강동윤 9단은 워낙 잘하니까 나만 잘하면 형제대결이 되겠구나 했다.”
강동윤 9단 “한참 대국하고 있는데 옆 대국에서 영훈이 형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형제대결이 어려워지나 싶었다. (둘 다 웃음)”

Q : 스웨 9단과의 대결 어땠나? (강동윤 9단에게)
A : “중반에 바둑이 어지러워서 나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상대는 다 알고 두는 듯이 보였다.”[14]

Q : 중앙에서 상대가 들여다 보며 대마를 잡으러 왔을 때의 심경은? (강동윤 9단에게)
A :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하고 있었다.^^ 잡으러 오는 건지도 몰랐다. 상대가 들여다 본 것은 당연한 수인데, 어렵지 않게 살 줄로 보고 깊게 수읽기를 하지 않았다. (실전은 강동윤 9단이 바꿔치기를 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Q : 8강전 때 몸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4강전 대국은 괜찮았나? (강동윤 9단에게)
A : “어제 잠을 잘 못자서 스웨 9단과 대국하면서 힘들었다. 커제 9단과 대국하던 8강전 때는 대국에 지장은 없었다. 그 전날 머리가 아팠지만 푹 잔 뒤에 나았기 때문이다.”

Q : 결론적으로 중국랭킹 1·2위를 꺾었다. (강동윤 9단에게)
A : “오늘 4강전은 이겼다고 말할 수 있겠나 싶다.”

Q : 결승 상대는 박영훈 9단으로 결정됐다. (강동윤 9단에게)
A : “영훈이 형은 공격력이 강하다. 결승전은 영훈이 형의 공격과 나의 타개 구도가 될 걸로 예상한다 ^^

한국 우승도 중요하고 나의 우승도 중요하다. 조금 있으면 몽백합배가 벌어진다. 영훈이 형이 몽백합배에서 우승해 한국 우승을 이뤄주길 바란다. 그런뒤 LG배 우승은 나에게 양보해 줬으면 좋겠다 ^^참고로 박영훈커제한테 발목 잡혀서 몽백합배 4강전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LG배 결승전에서 박영훈을 떨어트려버렸다
"커제 9단에게 이기는 비법 좀 알려 주시죠?" (사회자)

"자력으로는 이길 수 없고 상대가 돌가리기를 착각해서…." (강동윤)
"인터뷰를 재미있게 하기로 유명한데요?" (사회자)
"바둑보다 인터뷰 공부를 더해서…." (강동윤)
"강동윤 9단에게 맥심커피배란?" (사회자)
"(랭킹) 점수를 깎아먹는 대회." (강동윤)
"강동윤 9단에게 인터뷰란?" (사회자)
"바둑보다 소중한 것." (강동윤)
기사 이제 강동윤 9단이 미쳐가고 있다

1국 때는 다소 허술하다고 판단했는데 2국에서 중후반부는 알파고가 대국을 이끌어 갔다고 해도 무방하다. 알파고가 대국 초반부까지 유리하게 끌고 갈 프로그래밍을 탑재하게 된다면 인간이 알파고를 공략할 틈은 없을 것 같다.

강동윤 九단 #

7 이야기거리

이창호의 천적이다. 상대전적 16승 8패.

성적이 떨어지면 삭발을 한다. 그리고 중요한 대국 전에는 손톱을 깎지 않는다고 한다. 2012년 들어서는 삭발같은 거 안 한다고 한다. 삭발하면 오히려 부담이 커진다고.
  1. 원래 본문에는 "가장 앞서 있다."라고 써 있었다. 하지만, 현상황에서 강동윤은 분명 박정환-이세돌-박영훈보다 랭킹 상 뒤에 있다. 지금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일류 기사이기는 하다. 4위에 올랐으니... 데뷔 시에 강동윤이 가장 빛났던 것도 사실이다. 이 당시 작성자의 강동윤에 대한 기대가 보이는 평. 승부의 비정함이여!(이 뒤부터 원래 있던 주석)박정환과 함께 투톱. 박문요, 김지석이나 천야오예, 리저, 저우루이양, 이야마 유타는 국제기전 커리어에서 한참 뒤에 있다.
  2. 대회 최연소 기록.
  3. 이세돌, 최철한, 원성진, 강동윤, 이영구, 백홍석, 윤준상, 김지석, 박정환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백홍석 九단은 나중에 따로 도장을 차리고 독립했다.
  4. 역대 최연소 입단 11위의 기록. 그리고 막내 프로기사의 자리는 2006년 박정환이 이어받게 된다.
  5. 이세돌과 송태곤이 있는 죽음의 조를 통과
  6. 세계기전 3연속 결승 진출은 1~3회 후지쯔배의 린하이펑, 2~4회 삼성화재배와 20~22회 후지쯔배의 이창호 등 세 차례 있었다. 이창호의 위엄.
  7. 커제는 2015년 성적이 세계대회 3관왕. 유일하게 본선에서 떨어진게 LG배이다. 현 중국랭킹 1위
  8. 중국랭킹 2위다.
  9. 신안천일염은 이세돌의 고향 신안군에서 창단한 신생팀으로, 다른 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역 프랜차이즈 스타 이세돌을 전체 1지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세돌이 갑자기 바둑리그 불참과 기사 휴직을 선언하면서 당시 이세돌 다음으로 기세가 좋던 랭킹 2위 강동윤을 지명한 것.
  10. 이해 한게임은 1지명 강동윤, 2지명 이영구, 자율지명 진시영이 나란히 11승 4패를 거두며 최고의 쓰리톱을 선보였다. 1, 2지명 리그용의 위엄
  11. 1지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둔 프로기사에게 주는 상
  12. 09년 후지쯔배 우승이 유일한 성적이며 삼성화재배나 LG배, 비씨카드배의 경우 32강이나 16강에서 광탈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창호를 이겨놓고는 다음 라운드에서 중국 듣보잡 기사에게 광탈하는 경우 그날 바둑 커뮤니티는 폭발.
  13. 금메달의 가치를 낮춰 보는 것은 아니지만 아시안게임의 경우 단체전이었으며, 마인드스포츠는 짧은 기간 안에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속기전이었다.
  14. 이 때 중앙 흑대마가 통째로 백한테 잡혀버리면서 비세에 몰렸었다. 바꿔치기를 했지만 형세는 상당히 불리했기에 마구 버티다가 스웨 9단이 좌하귀 공방에서 실착 하나를 두는바람에 가 벌어져서 팻감으로 다 죽어버린 중앙 흑대마가 예토전생하면서 대역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