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역사

1 철기 시대

본래 (濊)의 도읍지로 알려졌다. 기원전 129년에 위만조선에 속해 있었다. 서기전 128년에 예맥의 군장인 남려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배반하고 한나라에 귀속됨으로써 한나라 창해군의 일부가 되었다. 창해군은 다시 한사군의 설치로 임둔군(서기전 108)으로 되었다. 기원전 75년 낙랑동부도위가 되었다. 30년에 한나라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동예가 되었다. 서기 60년경에는 남쪽 실직국(지금의 삼척시)을 공격해서 실직국왕인 안일왕이 울진까지 피난하기도 했다.

2 삼국시대

313년 고구려에서 접수하고 하슬라(何瑟羅) 또는 하서량(河西良)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 그러나 신라와 접해 있어서 이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신라 간 충돌이 있었고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차지했다가 나중에 다시 신라가 차지하거나 했다. 한편 옥계면 일대는 고구려의 우곡현(羽谷縣), 연곡면과 주문진읍 일대는 지산현이 있었다.

신라 지증왕 때 신라의 군사적 영역 안에 속했다. 진흥왕 때 확실한 신라 영토가 되었다. 유명한 이사부가 젊은시절 강릉의 군주로 부임했던 적이 있었고 이 시절에 우산국을 정복했다. 선덕여왕 때는 신라판 광역시쯤 되는 하서소경이 되었다가 태종 무열왕소경이 폐지되었다.

3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경덕왕명주(溟州)라는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우곡현이 우계현(羽溪縣)으로 개칭되고 지산현이 명주의 속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원성왕과의 왕위다툼에서 밀려난 김주원의 후손들이 호족이 되어 이 땅을 다스렸다.

4 고려

태조왕건에서 궁예가 죽은 후 왕건에게 저항하다가 끝내 항복한 명주성주 김순식을 기억하려나...

임영(臨瀛), 동원경(東原京), 명주, 하서부(河西府), 명주도독부, 명주목,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등으로 이름과 지위가 자주 바뀌었다. 현종 때 우계현과 지산현을 병합하고 지산현을 연곡현으로 개칭하였다.

5 조선

우계현, 연곡현을 완전히 병합한 후에는 강릉대도호부였으며 전국적으로도 큰 규모의 도시였다. 그 후 1666년 강릉현, 1775년 대도호부로 승격, 1789년에는 강릉부가 되었다.

1895년 23부제 실시로 강릉군이 되어 21개 면을 관할하였다.

1906년 임계면, 도암면(지금의 대관령면)을 정선군에 넘기고 진부면, 봉평면, 대화면을 평창군에 넘기고 내면을[2] 인제군에 넘겨 관할지역이 축소되었다.

6 일제강점기

1931년 강릉면이 읍으로, 1940년 주문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7 대한민국

1955년 강릉읍과 성덕면, 경포면을 통합하여 강릉시로 승격하고, 나머지 면을 명주군으로 개칭하였다. 묵호읍이 1980년 명주군에서 빠져 나가 동해시가 되었다.

1995년 1월 강릉시와 명주군이 합쳐 도농복합시가 되었다.[3]
  1. 최남희 著 '고구려어 연구'에 따르면 이는 '가사라'의 음차이다.
  2. 지금은 (남한 한정) 전국에서 가장 넓은 읍면동단위로 그 면적은 무려 40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3. 옛 명주군청사는 현재 교동에서 시내 넘어가는쪽 우편에 "행복한 모루"라는 이름의 복합 문화센터+도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