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姜禹一
Peter Kang U-i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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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문장의 사목표어인 '네 생명 주께 맡기고 그를 바라라'시편 37장 5절 말씀으로,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온전히 맡겨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대 천주교 제주교구장
2대 김창렬 바오로 주교3대 강우일 베드로 주교현직

1945년 생이며, 한국 가톨릭의 제3대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1 생애

서울특별시 출신. 외할아버지 오위영은 정치가, 막내이모 오현주 베르나데트는 1959년 미스코리아 진이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집안 전체가 일본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일본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중에 신부가 될 결심을 하고 일본 도쿄조치 대학 신학부에 입학했으며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74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가 되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중림동 약현성당명동성당 보좌신부를 지냈고 1977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교구 교육국장과 홍보국장을 지냈으며 1985년 난곡동 성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난곡동성당 주임신부로 소임을 하던 중에 1985년 12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1986년 2월 4일에 주교서품을 받았다. 당시 강 주교의 나이 만 40세로 한국 천주교 내에서 굉장한 파란으로 여겨졌다.

주교가 된 이후 1987년부터 1996년까지 주교회의 전례위원장을 맡아 미사경본 개정 작업과 함께 삼위일체의 3번째 위격인 sanctus spiritus의 번역을 성신(聖神)에서 성령으로 바꾸는 등 한국 천주교의 개혁에 앞장섰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는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한 가톨릭대학교의 초대 총장을 지냈다. 한국 천주교 내에서 주교급 성직자가 대학 이사장이 아닌 총장을 맡은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고[2][3] 통합 이후의 학교 내부의 혼란의 해결과 학교운영에 대한 서울대교구의 의지를 보여줬다. 강 주교는 대학발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인 '2005 플랜' 을 세우고 새 교과과정을 실시했으며, 해외 각 대학들과의 공격적인 교류 확대를 이루어 내는 등 학교 운영을 매우 잘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1999년부터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을 맡아 북한과의 교류를 다각적으로 시도했으며, 2001년 12월부터는 교구의 거의 모든 살림을 맡아 하는 서울대교구 총대리 겸 교구청장으로 임명받아 충실히 수행하여 차기 교구장과 대주교 더 나아가 차기 추기경으로 각광과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2002년 7월 2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강 주교를 천주교 제주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전보발령하였고, 10월 8일, 교구장 착좌식과 동시에 제주교구장으로 공식 취임하였다. 사실상 좌천으로, 아무리 제주도 교구가 한 교구라고 하더라도, 신자와 돈이 없어서 따른 교구들에게 돈을 지원받을 정도로 신부 입장에서는 별로 메리트가 없는 자리인데다가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우일 주교는 서울대교구의 중요한 직책들을 거친 소위 '엘리트 신부'였으며, 가톨릭대학교의 초대 총장이였으므로 김수환 추기경 은퇴 이후, 서울대교구 교구장직을 이어받으며 가톨릭대학교 이사장직을 이어받을 것으로 예측되기도 하였다.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은퇴한 2012년에도, 커리어상 가장 서울대교구 대주교직에 근접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4], 염수정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직을 가져간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부의장과 2008년부터 2014년 10월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맡아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하고 있으며, 신자들에게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하나로, 진보 성향의 신자들은 차기 추기경 후보로 항상 내세우고 있으나, 한국에는 현재 추기경이 이미 2명이나 있고 추기경 서임은 나라별로 자리 배당과 서임 날짜가 굉장히 가변적인 데다, 현 강우일 주교의 나이도 70대가 넘었을 뿐더러 사실상 서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강우일 주교를 서울대교구에서 제주교구로 발령한 것 자체가, 이미 교황청에서는 강우일 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고도 볼 수 있다.[5]

2014년 8월 14일 ~ 8월 18일까지 진행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추진위원회장을 지냈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강우일 주교의 덕분이라고 전해진다. 대전교구장인 유흥식 라자로 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과 더불어 이번 방한에 공헌을 많이 했다.

2 여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종 5일 후인 2009년 2월 20일 거행된 장례미사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인물 중 하나였는데, 많은 이들의 감동을 자아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저도 지난 2년여 동안 추기경님이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 하시고 급속도로 체력이 약화되시다가 7개월 전부터는 퇴원도 못하신 채 계속 병실에 붙잡혀 계시니 참으로 애처로웠습니다. (중략) 저는 이런 추기경님 모습을 뵈면서 하느님께 투정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우리 추기경님 무슨 보속할 것이 그리도 많아서 이렇게 길게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 정도로 족치신다면 나중에 저희 같은 범인은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려는 것입니까? 겁나고 무섭습니다.' 몇 주일 전에는 '주님, 이제 그만하면 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추기경님 좀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추기경님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지금 추기경님은 당신의 투병생활과 죽음을 통하여 경제위기와 사회불안으로 깜깜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국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중략) 추기경님의 고난이 있었기에 추기경님의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시며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추기경님 말씀을 음미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은 이제 혜화동 할아버지가 아니라 한국의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추기경님, 저는 믿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내 사랑하는 바보야! 그만하면 다 이루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평안히 가십시오, 추기경님.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당신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사랑하셨던 우리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여 주십시오."

그의 이모가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굉장한 미남이었고, 미노년이다. 실제로 뵈면 미노년 간지와 근엄이 넘치신다.
  1. Peter라는 영문 이름은 세례명베드로에서 딴 것이다.
  2. 당시 이사장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었다.
  3. 1995~1997년까지는 그래서 이사장이 추기경, 총장이 주교, 부총장이 신부와 수녀인 흠좀무한 라인업이 등장했었다.
  4. 사실상 서울대교구 대주교직과 가톨릭대학교 이사장만 안 해봤지 이 시점에서, 만 40세 젊은 나이에 주교서품부터 시작해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까지 거의 한국에서 신부로써 찍을 수 있는 최고의 커리어를 찍었다 해도 무방하다.
  5. 통상 다른 국가만 봐도 해당 국가 대표 교구의 장은 추기경으로 서임된 사례가 많다. 서울대교구는 조선교구로부터 이어진 우리나라의 대표 교구이므로, 교구장이 되면 십중팔구는 이후 추기경으로 서임된다 봐도 무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