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호/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과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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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시절 서재응과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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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팜과 함께 가장 질이 좋다는 광주 팜[1] 출신으로 광주일고 1, 2학년 때는 3루수로 뛰었다가 3학년이 되고 나자 주전 포수가 다른 학교로 전학가면서 처음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뿐만 아니라 나승현에 이은 두 번째 투수로서도 훌륭한 투구를 보여줬다. 투수로 뛰면서 기록한 방어율은 3.15. 포수, 투수, 야수 전 포지션 소화가 가능한 만화 속 캐릭터같은 야구천재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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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2학년 시절부터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던 선수였으며 200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강정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화들

사실 현대가 2차지명 1라운드에서 뽑으려고 했던 건 투수 손영민인데, 좌완투수 양승진을 뽑기로 했던 KIA 타이거즈손영민을 먼저 뽑아간 탓에 강정호를 대신 지명했다. 애초에는 현대 유니콘스 1라운드 바로 다음 픽인 2라운드 롯데 자이언츠가 뽑기[3]로 했었다. 그 후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지명 당시 고교야구 팬들은 현대의 강정호, SK 홍명찬, 두산 김재호 3명을 주목하며 한국프로야구를 이끌어갈 재능으로 성장할 것이라 크게 기대했다. 하지만 홍명찬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김재호가 치열한 주전 경쟁과 부족한 타격으로 고전하다 2013년에야 입지를 다진 반면 강정호는 크게 앞서 나가며 국가대표 유격수로 성장했다.

2 한국프로야구 시절

2.1 미완의 유망주(2006~2007 시즌)

파일:/image/109/2006/04/16/200604161442421100 1.jpg 현대 시절의 강정호.

위에서 언급했듯 강정호는 고교 시절 거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을 정도로 만능 선수였으며 지명 당시 포지션은 포수였지만, 입단한 후로는 본격적으로 내야수로 포지션을 고정하게 되었다. 입단 초기 전지훈련 때, 당시 감독이었던 김재박에게 '제2의 박진만'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크게 기대를 받았고 2006년 시즌 개막전에 1년차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주전으로 기용되어 프로에 데뷔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타격에서 기대 이하의 활약과 더불어 수비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 한 달도 못 가 2군으로 내려가게 된다. 2군에서 절치부심한 강정호는 어떻게서든 1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교시절 경험했던 포수마스크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007년 시즌 전 훈련기간에 선배 지석훈의 배팅볼을 던져 주던 중 얼굴에 타구를 맞고 기대했던 시즌을 말아먹는다. 그렇게 갓 데뷔한 신인은 1군과의 기량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군에 내려가 2006년, 2007년 2년 동안 주로 2군에서 활동하였다.

2.2 이름을 알리다(2008~2009 시즌)

2008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우리 히어로즈로 바뀐 이후 이광환 감독의 눈에 들어 본격적으로 1군 생활을 시작했다. 비단 유격수 포지션뿐만 아니라 3루수로도 자주 나왔으며 시즌 초반엔 포수로 출장한 경기도 있을 정도였다. 김동수의 노쇠화, 그리고 기대했던 강귀태의 부진으로 이광환 감독은 고교 시절 포수경험이 있고 타격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강정호를 포수로 기용하는 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포수는 만들기 힘든 포지션. 내야수 포지션 선수에게 포수 겸업은 역시나 무리였다. 시즌 초반부터 패스트볼 실책이 심심치 않게 나와 결국 포수 마스크는 벗게 된다.
우리 히어로즈 시절 포수, 1,2,3루수 수비 움짤

타격에 있어서는 시즌 초반에는 1할 후반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였으나 이광환 감독의 믿음 아래 꾸준히 많은 경기에 출장, 기용됨에 따라 기량이 크게 향상되어 타율 0.271 OPS 0.726 8홈런 47타점의 준수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4] 2008 시즌 초반엔 황재균이 주로 유격수로 출장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비력의 문제를 드러내 2, 3루를 오가던 강정호가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5]

2009 시즌 초반 팀 동료 황재균이 연일 맹타를 휘두르던 것과 반대로 2할대 초반 타율을 기록하며 멘도사 라인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5월부터 타격감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더니 이후 완전히 각성. 눈부신 맹타로 히어로즈 타선을 이끌었다. 또 전 경기 출장에 1경기를 제외한 132경기를 선발로 나와 1147.2이닝을 뛰면서도 수비에서 전혀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여 노쇠한 박진만의 뒤를 이을 차기 국가대표 유격수로 주목받게 된다.

이 시기 기록한 성적은 타율 0.286 출루율 0.349 장타율 0.508 23홈런 81타점.

팬들은 당연히 2009년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분은 강정호의 차지라고 생각했으나, 야구 안보는 한국 기자들이 팀 성적에 유명한 선수 위주로 골든 글러브를 주는 바람에 두산 베어스 손시헌에게 밀렸다. 물론 손시헌이 절대 못한건 아니지만 두 사람의 수비력 차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장종훈, 이종범(이 쪽은 30홈런), 브리또, 홍세완 이후 간만에 나온 유격수 20홈런의 메리트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다들 강정호가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즌 종료 후 히어로즈가 폭풍 세일을 단행할때도 강정호, 황재균, 강윤구 3명만은 트레이드 절대 불가라고 묶어두었다. 근데 그 중 황재균은 롯데로 팔았다. 융구를 팔지

여담으로 2009시즌 KIA의 우승을 결정지어준 타자다. 당시 기아의 투수인 유동훈의 공을 받아 쳤으나 타구는 3루 땅볼, 그리고 3루수에 의해 공이 잡히면서 아웃을 당해 그 결과로 기아가 우승할 수 있었다.

2.3 2010 시즌

시즌 전 이택근브룸바를 보내고 황재균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허약해진 히어로즈 타선을 홀로 책임졌다. 남아있는 타자들도 파워만 좋지 컨택이 떨어져 공을 제대로 고르지 못해 이래저래 어깨가 무거웠다. 다들 파워는 좋아서 제대로 걸리면 장타로 연결되지만 선구안이 엉망이라 비슷하면 무조건 휘두르고 보는 통에 팀 타율은 엉망이었다. 본래 이런 문제는 코치나 나이든 노장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히어로즈 타격코치는 코치대로 무능력하고 고참 중에서 송지만은 딱히 볼 고르는 타입은 아니며 이숭용이 선구안은 좋은 편이지만 나이가... 여기에 실력이 되는 황재균이나 강정호는 누구 가르칠 짬밥이 아니라서 답이 안 나왔다. 이런 타선의 부진 덕에 수비상황에서도 어이없는 에러를 기록하고 있었다.

시즌 초반에 4번 타순에 배치되는 일이 많았는데 부담 때문인지 판단착오가 늘었고 2009년만큼의 파괴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자청해서 7번 타순까지 내려갔다가 4월 25일 KIA전에서는 6번 타자로 출장했다. 중하위 타선으로 내려간 뒤에는 다시 성적이 좋아지더니 유한준이 해결사로 등장하면서 강정호도 덩달아 상승세를 타고있다. 5월 11일에는 윤석민에게 솔로 홈런도 뽑아냈다. 5월 말에는 3번으로도 출장을 많이 했는데 성적이 좋다. 역시나 5월이 가야 강정호의 방망이는 되살아나는건가?!

7월에 황재균이 트레이드되면서 허탈감을 느끼는 모양. '이제 경쟁상대가 없다'고 푸념하는 모습이 넥센 팬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넥센 강정호 "황재균 진짜 없네…" 덕 클락이 팀의 사정으로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되자 미니홈피에 불쌍한 클락, 힘내라는 위로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3할의 고타율과 4할에 가까운 출루율을 기록하며 손목 부상으로 장타력이 줄지만 않았다면 3-4-5놀이를 하고 있었을 공격력은 단연 돋보였지만, 시즌 초반 쌓아둔 막대한 실책 때문에 공격력에 비해 수비가 모자란 반쪽 선수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2010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301, 12홈런, 58타점, OPS 0.848 이다. 데뷔 후 처음으로 3할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2.4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현 KBO 유격수 중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가지고 있지만 2% 부족했던 수비력으로 대표에 뽑히니 마니 했었는데, 결국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원래는 주전보다는 백업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유격수 자리에 손시헌이 버티고 있기 때문.

그래서 대회 초반에는 손시헌에게 유격수 자리를 넘겨주고 벤치에 있었지만, 부진한 주전 3루수 최정 대신에 3루수로 선발 출장했다. 대만과의 결승전에서 2점 홈런 2개를 포함해 홀로 5타점을 쓸어담고 9회말 깊숙한 파울 플라이를 몸을 날려 잡아내는 호수비를 선보이는 등 공수에서 맹활약했다.

그래서 강정호가 맹활약할 때마다 이장석 사장이 미소짓고 김시진 감독이 머리를 쥐어뜯는다는 웃지 못할 농담이 돌았다. 아무튼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병역 혜택을 받는 데 성공했다. 아시안게임 최종 성적은 13타수 8안타 3홈런 8타점.

다른 팀이면 그저 기뻐하는 반응이었겠지만 불쌍한 넥센 팬들은 경기 중에는 '정호야 나대지마 ㅠㅠ' 경기가 끝나고는 '너무 나댔어', '그렇게 팀을 떠나고 싶었으면 말로 할 것이지 ㅠ.ㅠ', '안돼, 강정호 가지마 ㅠ.ㅠ' '정호 없으면 뭐 먹고 살아 ㅠㅠ' 하며 불안에 떨었다. 결국 이런 기사도 떴다... 강정호가 뜰수록 히어로즈 팬은 불안하다

어쨌든 2010년 시즌 후 데뷔 첫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수상하면서 전년도 골든글러브를 못 받은 한을 풀었다.

참고로 2013 WBC, 2014 아시안 게임에서도 대만을 상대로 홈런을 쳐내어 대만천적이 되었다.

2.5 2011 시즌

개막전부터 넥센의 4번타자로 기용되었다. 일단 타율은 2할 후반대를 찍어서, 출발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4월 24일부터 어째 무안타의 행진을 이어갔다. 4월 28일에는 주자 1,2루 상황에서 유격수 쪽으로 가는 공을 집고도 송구를 하지 못해 주자 만루 상황을 만들었고, 이 상황에서 밀어내기가 터져 문성현의 승리를 날리고 말았다. 게다가 뇌주루까지 질렀다... 그런데 한화 수비수가 송구를 이상하게 해서 결국 2루에서 세이프.

급기야 5월 1일 LG전에서는 3번 타자인 유한준을 거르고 강정호와 승부하는 어디서 본 듯한 광경이 벌어졌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강정호는 한 방을 때리지 못했다. 이 날 7타수 2안타를 기록했지만 타율은 이미 0.244...

5월 3일부터 5일까지 기아와의 3연전에서 12타석 11타수 2안타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는 등 하락세를 보인다. 그나마 안타 2개와 몸에 맞는 공 하나로 3출루를 하긴 했지만...

4번타자에서 내려간 뒤론 꾸준히 안타를 쳐주었다. 하지만 또 4번으로 나오면 계속 부진하는 데다가 5월 24일 기아전에서는 9회말 1사 1루의 상황에서 내야 플라이에 2루로 돌진하는 뇌주루를 작렬한 끝에 결국 2군(강진)으로 내려갔다.

6월 4일 한화전에서 박정진을 상대로 좌측 솔로 홈런을 쳐냈다!! 6월 9일 SK전에서는 만루 홈런을 쳐내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팀이 지리멸렬하다가 간신히 이기는 바람에 강정호의 홈런이 빛이 바랜 면이 있다.

6월부터는 6번으로 출전하는 빈도가 높아졌고 그에 따라 타율도 급상승하면서 6월 23일 기준으로 .273까지 상승하였다. 7월 19일과 20일에 연속 수비 실책으로 인하여 동점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두 경기 모두 끝내기 안타로 넥센이 승리하여서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았다. 본인 말로는 실책 순간에 죽고 싶었다고....

9월 11일 롯데와의 연장 12회말까지 이어진 경기에서는 포수(!!)로 출장했다. 경기는 2:2 무승부. 당시 동영상

2011 시즌 타율 0.282, 9홈런, 63타점, OPS 0.754를 기록하였다. 지난 시즌들에 비해 공격력이 많이 하락하면서 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도 실패하고 말아 다소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전년도에 비해 실책수를 비약적으로 줄이면서 수비로도 인정받는 유격수로 장기적으로 한 차원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대수의 3할이 아니었다면 2011 시즌에도 골든 글러브를 노려볼만한 성적이었다.

2.6 2012 시즌

시즌 초중반까지는 홈런 선두로 나서기도 했고, 넥센의 공격력을 이끌면서 유격수로 20-20을 달성하며 성공적인 한 시즌을 보냈다. 강정호/2012년 문서를 참조.

한편 이 시즌부터 넥센 히어로즈가 프로야구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강정호 매물 드립이 많이 줄어들었다.

2.7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네덜란드전에서 실책을 기록했고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마지막 대만전에서 3루수로 나와 8회말 팀을 1승 2패가 될 수도 있었던 굴욕에서 구원하는 역전 투런 홈런을 기록했다. 극심한 빈타에 시달린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홈런을 때린 타자다.

2.8 2013 시즌

초반부터 치고 나간 박병호에 비해 압도적인 페이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몫을 해주었다. 강정호/2013년 문서를 참조

2.9 2014 시즌

20140827%252030-100%2520%25EB%258B%25AC%25EC%2584%25B1.jpg 8월 27일 36번째 홈런을 때려내면서 유격수 최초 30홈런 100타점 고지를 밟았을 때

KBO리그 역사상 가장 완벽한 단일시즌 타자로 역사에 남다
그러나...

강정호/2014년으로.

3 메이저리그 진출

14시즌 시작 전부터 메이저리그 진출 전망이 있었다.
그리고 가치를 증명하듯 타고투저에 힘입어 한국프로야구 역대급 단일시즌 성적을 남기며 2014 시즌 후 포스팅을 신청, 포스팅 금액(이적료) 500만 2,015달러(약 55억 원)에 연봉 4년 11M 보장 최대 14M + 1년 팀 옵션으로 피츠버그 파이리츠행이 결정되었다. 매년 최대 75만 달러의 보너스도 있다. 자세한 연봉 내용 기사 류현진에 이어 KBO 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2번째 한국인 선수이자 첫번째 야수다.
MLB 활약 전망, 포스팅 진행 과정 등 자세한 것은 강정호/메이저리그 진출 참조.

3.1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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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KANG

해적단의 부선장으로 거듭나다

MLB 시즌 중 활약은 강정호/2015년으로.
부상 때문에 아쉽게 시즌아웃 되었지만,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리면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준 시즌.

3.2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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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활약에 힘입어 추신수를 밀어내고 THE SHOW 2016년 한국판 표지 모델이 되었다. 강정호의 위상을 알게 해주는 사건이다.

시범경기에서 잠깐 나오기는 했지만 시즌 개막 후에도 한달간 더 재활에 매진하다 5월 7일, 부상에서 돌아온 후 첫번째 경기에서 초구 병살과 무사만루 초구팝플라이 다음 또 초구를 때려서 1:0에서 3:0을 만드는 대형 2점 홈런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다음 타석에서 3:2에서 추가점을 만드는 솔로 홈런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첫 경기부터 타격감이 심상치 않다. Welcome Back King Kang!

강정호의 2016 기록은 해당문서로.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강정호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서울은 인구가 많은 만큼 야구 인구도 많아서 그렇고, 광주를 비롯한 호남 팜은 초등학교 야구부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고 한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고 또 부모님들이 자기 자식한테 야구를 많이 시킨다고. 예를 들어 광주일고 한 곳에서만 2014년 현재까지 배출한 선수들을 모아도 프로 1군팀을 꾸릴 수 있다. 그것도 올스타 급으로. 대표적인 광주 팜에는 이종범,이호준,서건창 등이 있다.
  2. 훗날 광주일고 김선섭 감독은 "처음부터 유격수를 시켰으면 프로에서 더 일찍 자리잡아 해외 진출도 빨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기사
  3. 어차피 야구판이란 게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신인지명도 1~2라운드는 암묵적인 합의(?) 혹은 양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본문에서처럼 갑자기 변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4. 히어로즈 감독을 맡았던 시절에는 심판을 향해 모자를 패대기친거 말고는 별 임팩트가 없었던 이광환 감독이나, 사실상 강정호를 프로 선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어떤 선수가 스타덤에 오를 때 주변에서 "내가 키운 선수다"라며 자기 공로를 만천하에 자랑하는 코치들이 많으나, 이광환에 대해서만큼은 강정호 본인도 대놓고 인정하는 사례... 메이저리그 진출 후 스포츠서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은사들 중 하나로 이광환 감독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감사의 마음을 드러냈으며(처음 기용해주시고 기회를 주셨던 이광환 전 감독님), 이광환이 재직 중인 서울대학교 야구부에 야구 용품도 지원해 주는 등(강정호, 서울대 야구부에 야구용품 선물) 옛 스승에 대한 보답을 틈틈이 해 오고 있다.
  5. 대신 황재균이 3루수로 고정되고, 이때부터는 2루수 돌려막기가 시작된다. 2012시즌 서건창이 나타날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