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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민간인 학살[1]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육군에 길이 남을 수치.
2 진행
1951년 당시 한국군 11사단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에 동원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1사단장 최덕신이 토벌을 위해 휘하 부대에 보낸 방침은 견벽청야(堅壁淸野). 빨치산들이 머물 지역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발상 자체는 정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게도 이러한 견벽청야 방침에는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의 주민은 모조리 적국 국민 취급, 더 나아가 제거 대상으로 본다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 공비 토벌을 명목으로 출동한 한동석이 지휘하는 한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사단의 이러한 사단의 방침을 그대로 이행, 민간인들을 안전 지역으로 피난시킨다는 명목으로 인근 초등학교 건물로 사람들을 전부 모은 후, 군경 가족 등을 추려내고는 주민들을 전부 인근 박산으로 이끌었다. 국군이 지켜주는 피난길을 간다고 말 그대로 남부여대하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걸어간 이들에게 쏟아진 건 같은 나라 군대의 총탄. 700명 가까운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죽인 11사단 병력은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이고 매장하는 등 증거인멸에도 나섰다.
하지만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의 시체 더미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박산으로 이끌려 나가기 직전 선별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억울함을 참지 못한 살아남은 이들이 뜻을 모아 당시 거창 지역 국회의원이던 신중목에게 눈물로 호소를 했다. 신중목이 당시 악명높던 헌병대와 특무대의 협박과 추격을 피해 부산극장에서 열린 제 54회 임시국회에서 이 사건을 공개하면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긴급히 국회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거창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지역 계엄사령관인 김종원이 국회 조사단을 빨치산으로 위장한 한국군 병력으로 급습하는 짓을 저지르고, 한국군에서는 죽은 자들은 전부 빨갱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결국에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이 실제 벌어졌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전원 군사재판에 넘겨져 11사단장 최덕신은 직위 해제, 연대장 오익경은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 실제 학살을 집행한 소위 이종대는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 게릴라로 위장한 군 병력을 동원해 국회의 조사를 방해한 김종원은 징역 3년의 판결을 받았다. 김종원을 제외하면 저지른 죄에 비해 가볍기 그지없는 판결임에도, 판결 얼마 후 관련자들은 전부 특사로 풀려나 현역에 복귀했다. 다만 최덕신의 경우는 적성마을 토벌이 주민 소개 등으로도 해석 가능하여 학살로만 해석되지는 않는 점이 적용되어 부하 관리 소홀 혐의만 받은 것으로 보인다[2]. 미라이 학살 당시에도 상부의 토벌 지시는 해석하기 애매하다는 점을 들어 문제삼지 않고 실행범인 켈리 소위만 처벌했다.
4.19 이후 자유당 정권이 물러난 제2공화국 시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이 당시 학살에 협력했던[3] 면장[4]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면서[5] 사건은 다시 한번 세상의 이목을 이끌었고, 거창의 생존자들은 명확한 진상 규명과 학살당한 이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당시 기사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이들을 전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아넣고 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이 정권에서 2인자 중 하나인 정일권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고, 최덕신도 박정희 정권에서 권력 밖으로 쫓겨나기 전까지는 호의호식하였다. 물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직접적인 학살 명령을 내린 증거가 없어서임은 물론이다. 김종원도 권력은 잃었지만 조사 방해는 중죄가 아니고, 학살가담자가 아니라며 더는 처벌하지 않았다.
한편 한동석, 오익경의 경우에는 1년도 안 돼 사면되어 현역으로 복직했다는 것이 1960년 뒤늦게 밝혀졌고 이후 다시 조사를 받았다. 1980년대 말 방영된 드라마 제2공화국에 의하면 대체로 기존 수사 결과와 일치하나 일부분에 한정하여 서로 다른 진술을 했다고 하며, 그 이상으로 알려진 것이 현재로서는 없어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하다.[6]
3 여타 지역에서의 학살
거창에서도 신원면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또한, 11사단이 벌인 학살사건은 거창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산청군, 함양군, 함평군, 나주시, 고창군등 11사단의 작전지역 곳곳에서 거창과 같은 양상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일부 학살의 경우 나중에 드러나긴 했지만, 학살에 관련된 자들은 대부분 아무런 처벌 받지 아니하였다.
4 기타
게릴라 토벌 과정에서 같은 나라 국민을 아예 적국 국민으로 취급하는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적국 국민으로 취급해서 몽땅 살해에 나섰고, 그게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사단장의 방침에 의한 조직적인 활동이란 점까지[7], 여러 모로 당시 11사단이 벌인 학살은 뭔가 표현할 말조차 부족할 정도의 일이다. 이후 11사단은 전방으로 보내졌고, 대신 다른 사단이 토벌에 투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악행이라며 없는 일도 만들어내는 북한이 거창사건에 대해서는 조용한 편인데, 이는 11사단이 벌인 민간인 학살사건의 주동자인 사단장 최덕신이 1986년 월북해 김일성 곁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을 최덕신의 젊은 날의 과오 식으로 살짝 넘아가고 있다(완전 황장엽. 그런데 황장엽을 최덕신에 비유한 지만원은 황장엽이 광주학살엔 북한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대놓고 까버렸다…).
한편 이 사건의 보상에 대해서 굉장히 우여곡절이 많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으나 상당히 불비한 점이 많아서 논란이 되었다. 심지어 대한민국은 이미 시효가 지나서 국가배상의무가 소멸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8]. 이에 불복한 피해자들은 특별법이 적용된 다음부터 소멸시효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9].
이런 상황에서 2002년 일부 국회의원들이 특별조치법을 발의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들이 명예훼손 외에도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한다며 법률개정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런 일이 겨우겨우 국회를 통과한 것은 2004년 3월이었지만, 당시는 탄핵정국이었다. 그리고 고건 대통령권한대행은 '사건이 재판에 계류중이고, 625 관련 피해보상이 계속 통과되면 국가재정에 부담이 된다'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실제로 이 특별법은 16,17,18대에 걸쳐서 국회를 통과하지만 결국 정부는 모든 보상을 다 하면 최대 25조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꾸준히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위로하는 유일한 장면은 이 사건 정도가 아닐까? 문제는 이걸 발의한 의원이 친이계로 친박 때문에 재선이 가능함에도 공천되지 않아 친박 최대 흑역사를 이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용인시에서 시장과 시의장이 민주통합당이란 것을 생각하면 친이 친박 갈등은 상상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담으로, 한동석의 부대가 1차적으로 집결했을 당시, 단 한명의 빨치산도 잡지 못하자 화가 난 오익경에게 심한 문책을 당했고, 그로 인해 빡친 한동석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상 장교로써의 기본 소양도 갖추지 못했다는 이야기. 다만 이 부분은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참고로 이러한 학살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8권 및 제2공화국 드라마에서 다루어져 있다.
팟캐스트 방송 중에서 물뚝심송의 독재유산 답사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내용을 다룬 편이 방영되었다. 듣다보면 참으로 착잡한 내용과 함께 왜 이 학살이 거창 학살사건으로밖에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배경설명도 나온다.
2016년 거창 사건 65주기 추모식에서 이 사건을 처음 폭로한 신중목 전 국회의원의 공적비 건립 제막식이 열렸다. #
5 관련 항목
- ↑ 본 문서의 제목은 <양민 학살 사건>으로 되어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양민 학살보다는 그냥 거창 사건, 혹은 거창 학살 사건 등으로 표현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양민 학살이라는 단어에 있는 함의는 양민이 아닌 빨갱이들은 죽어도 괜찮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있음으로 가능하면 <민간인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추천한다.
- ↑ 아래 기사를 봐도, 피해자들의 책임자 처벌 요구를 보면, 국방부장관 신성모가 포함되어 있고, 한동석과 김종원 처벌을 요구하고 있지만, 최덕신에 대한 처벌 요구는 없다. 당시 피해자 유족들은 일단 상급자인 최덕신이나 오익경의 책임이 아니라, 일선 지휘관 한동석의 자의적 판단으로 인식한 듯하다.
- ↑ 11사단은 당시 학살을 하는 과정에서 군경가족 등 일부에 대해서는 제외시켰는데, 그걸 확인하는 권한이 면장에게 있었다. 이러면 면장은 주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에도 드러나는 사례가 있지만, 11사단 관련해서는 결정적으로 표출된다.
- ↑ 참고로 이 때 불타죽은 면장의 이름이 박영보. 상어(드라마)에서 자주 언급되는 천영보가 아무래도 이 면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 ↑ 참고로 처음부터 피해자들이 면장을 화형에 처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요구는 인정과 사과. 하지만 해당인물이 인정을 거부하고 도주하다가 잡히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고 볼 수 있다.
- ↑ 두 사람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무 근거 없는 주장
- ↑ 다만 최덕신의 견벽청야 전술은 기본적으로 게릴라 활동 지역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 처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했기에 최덕신이 명백하게 학살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단정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예를 들어 주민 소개 및 마을 소각을 지시했는데 밑에서 학살로 알아들었다면 상부에서 학살을 교사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게 되는 것이다.
- ↑ 이전 중앙정보부 시절 고문으로 사망하게 한 후 이를 은폐한 사건에서도, 피해자에 대해서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 바 있다. 이 사건은 법원도 못참아서 권리남용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의외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면서 피해자를 막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 ↑ 지방법원에서는 일부승소 판결이 내려지기도 하였지만,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간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