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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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최두선9대 정일권10대 백두진
역대 대한민국 국회의장
8대 백두진9대 1기 ~ 9대 2기 정일권10대 1기 백두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4대 채병덕5대 정일권6대 이종찬
7대 백선엽8대 정일권9대 이형근
대한민국 국군합동참모의장
초대 이형근2대 정일권3대 유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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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一權
1917년 ~ 1994년

대한민국군인, 정치가, 국무총리그리고 친일파. 역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중 최장 재임 국무총리이다. 1964년 5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6년 7개월 남짓 재임했다.

1 일생

1.1 일제강점기

1917년 11월 21일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 경원군. 호는 청사(淸史)이다. 그의 여러 행각 때문에 어떤 분들은 탁사(濁史)라고까지 하는데 본관은 나주 정씨로 아버지는 제정 러시아의 극동군 통역장교였다.

1935년 중국 만주간도에 있는 조선인학교인 광명중학교를 거쳐, 봉천군관학교 5기로 입학하여 1937년에 졸업했다. 김석범에 이어 졸업 성적 우수자로 추천되어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하게 됐는데, 보병에서 기병으로 병과를 바꿈에 따라 1년간 만주군 기병훈련소를 거치느라 동기인 김석범, 석희봉보다 한 기수 늦은 55기로 편입하여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만주군 헌병 장교로 근무하였고 1942년에는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하여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이 덕분에 신경군관학교 1기에 광명중학교 출신이 11명이나 된다).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진급한 후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근무하다가, 고등군사학교[1]에 입교하여 졸업 직전 일제의 패망을 맞이했다.

소련군이 신경에 입성하자 만주군과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군인 400여명을 모아 '신경보안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았다. 후에 김석범에게 사령관 직을 넘겼으나 소련군 KGB본부로 연행됐다. 모스크바로 가서 6개월간 재교육을 받고 북한으로 가 군대 창설에 종사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감옥에서 소련군을 비방한 것이 발각되어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되었다. 기차를 타고 소·만 국경으로 이동하던 중에 탈출하여 하얼빈, 평양, 개성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1.2 미군정

1945년에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46년 1월 그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한국육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정위(대위에 해당함)로 임관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 중에서 기수빨로 따지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높은 편이였다. 이 때문에 만주군 출신 장교들의 대부로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만주군관학교 후배인 박정희를 위기 때 구해 준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만주군관학교 봉천학교 9기로서 후배인 백선엽은 정일권 아래로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이후 만주군 장교들을 이끄는 독자적인 파벌을 형성하는데, 미국 대사의 한국군 동향 보고에 의하면 한국군 내 파벌에서 정일권은 함경도 파벌을 이끌고, 백선엽은 평안도 파벌을 이끌었다고 한다. 여기에 후배인 일본 육사 56기의 이형근이 장인인 이응준(일본 육사 26기)의 빽으로 군번 1번을 받으면서 초반부터 일본군 학병 출신인 11대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이전까지는 만주군의 정일권(봉천학교 5기, 일본 육사 55기), 백선엽(봉천학교 9기)과 일본 육사 47기인 이종찬, 채병덕 등과 돌아가면서 하는 등, 각 파벌 수장들의 각축전이었다.

1.3 대한민국

1948년 8월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짧은 기간중에 급속히 진급, 1949년 2월에 육군 준장이 되었고 그 해 12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장이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 육해공군총사령관서울특별시 함락 등의 책임을 물어 해임되자, 1950년 7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이후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물러났다.

51년 7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증인으로 나왔을 때 한 답변이 걸작인데 검찰관이 정일권 전 소장에게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하고 묻자 정일권은 "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 "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하도 어이가 없어 김석원 준장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이봐! 오늘 답변 그게 뭐야! 당장에 계급장을 떼어버려"라고 하였다.[2]

이후 참모총장은 참군인 이종찬 소장이 임명되었고 정일권은 잠시동안 사단장으로 저격능선 전투를[3] 지휘했고[4][5] 1954년 이형근장군과 같이 2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그 해 6월에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되었다. 예편한 뒤에는 외국의 여러 국가에서 외교관을 지냈다.[6]

1963년 12월 박정희 정권의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며, 5개월 뒤인 1964년 5월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한일회담 당시에 외무부장관까지 겸임하며, 그의 국무총리 재임시절에는 이른바 '불도저내각','돌격내각'으로 불릴정도로 한일기본조약 맺는데 앞장섰다.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에게 똥물(국회 오물 투척사건)을 맞았다. 그 후 1970년 12월 정인숙 살해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1년 7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 2월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79년 초까지 국회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1979년 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초-인제-고성-양양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5.17 내란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 자유수호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고, 1989년 2월에는 한국자유총연맹의 발기인 및 총재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 1월 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으며,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2 친일파 행적

일제강점기 말기에 만주군 헌병으로서 간도헌병대 대장으로 복무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군 분야에 수록되었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그 만주군이 다른 곳도 아니고 간도특설대라고 여겨지는 정황들이 많아 더 큰 논란이 있는데,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명백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분류된다.만주군 헌병대 대장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지위'에 있었는데...[7]

3 사생활 논란

정인숙 살해사건에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로서는 귀의 모양등으로 그분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얼굴을 보면 정일권과 도장(...)인 정인숙이 낳은 아들이 이분의 사생아라는 것. 그 외에도 사생활이 매우 문란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그 자식의 수는 자기 자신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29세 연하의 여성과 재혼했는 데, 딸의 친구였다고 한다. 역시 이 재혼녀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처첩을 여럿 거느리다 보니, 자연스레 한약(보약)을 즐겨 복용하였는데, 늦둥이를 봤고 총리 임무까지 수행했으니 가성비가 괜찮았던 듯. 그 한약 이름이 뭘까 드링크제로 내놓으면 대박날듯

이 아들 부분이 정인숙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인데 재미언론인 문명자 등 일부에서 주장하기를 정일권은 정관수술을 받아서 고자이기 때문에 정인숙과 사이에서 아들을 얻기가 어려우니 제일 높으신 궁정동의 그분(...)이 아버지라는 이야기,위키가 위험하다... 하지만 본문 내용처럼 정인숙 사건 이후에 정일권도 아들을 낳았다.

4 평양 숭실고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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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가운데는 문익환 목사, 뒷줄 오른쪽은 윤동주 시인이다. 이 사진에서, 뒷줄 좌측이 장준하, 앞줄이 정일권이라는 설명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의하면 앞줄에 앉아있는 분은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이영헌이라는 분이고, 뒷줄 좌측은 문익환 목사의 은진중학 동창이며 숭실에 같이 다닌 친구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고, 장준하 선생의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은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며, 이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이 아니라고 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참고함.)

공교롭게도 정일권은 문익환 목사와 같은 날에 사망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면서 수 차례의 옥고와 고문 후유증을 겪었던 문익환 목사와 달리, 정일권은 친일 논란에 군사정권에 기여하기도 했고 정인숙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후에도 계속 정계활동을 하면서 처세의 달인이라고 비판을 받아왔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대비되는 인물들이 같은 날에 사망한 것도 기묘한 우연인데, 그 둘은 같은 해에 태어난 중학교 동문이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둘의 장례식에서도 상반된 모습이 보였는데, 정일권의 경우엔 국립묘지에서 정치인들이 참가했고, 문익환 목사의 경우엔 수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가한 노제가 치뤄졌다.

5 기타

유언으로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는데. 출처가 필요하다.

회고록을 두편 남겼는데 6.25 전쟁 부분은 동아일보에서 간행했고 이후 확장 증보판으로 정치계 입문 이후를 추가한 부분을 청사 정일권 일대기라고 해서 양장판으로 출간했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정승현, 제4공화국에서는 최정훈이, 야인시대에선 최범호(군인), 김건호(국무총리)가 정일권 역을 맡았다.
  1. 1943년 신경에 설립된 고급장교 양성기관. 제2기 합격생 25명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2. 정일권은 소장 김석원은 준장으로 한때 징계설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과거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김석원은 일본군 대령이여서 그냥저냥 무마되었다.
  3. 저격능선 초반 전투가 바로 중국군이 아직도 승전으로 여기는 상감령 전투이다
  4. 정상적인 군대라면 야전의 실병력을 지휘하는 코스를 거친 후 참모총장이 되어야 하는데 정일권은 그런거 없었던게 문제, 정일권 자신은 이 인사 조치를 일종의 좌천으로 여겼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서는 문제없이 지나가더니, 이것에 걸려, 물러났으니 말이다.
  5. 이 때문에 사단장에 임명된 정일권은 상심해 전역을 할 생각이었는데 백선엽 등의 다른 장군들이 말려 하지 않았다.
  6. 당시에는 예편한 고위 장성들에게 대사 자리를 주어 해외에 내보내는 관례가 있었다.
  7. 어느정도였냐면, 북한군 중 중국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의 구호가 "정일권, 김백일 잡으러 가자"였다(...) 6.25때 중국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 조선족들도 정일권 잡으러 왔다고 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