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은행

1 개요

과거에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지방은행. 본점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3동에 있었으며, 한미은행에 인수된 후 한미은행 인천영업부를 거쳐 현재 한국씨티은행 인천영업부가 이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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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빌딩이 경기은행 구월3동 본점. 1992년 당시의 전경이다.[1]

2 역사

1969년 경기도 지역을 영업 구역으로 하는 인천은행으로 창립했으며, 1972년에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하며 경기은행으로 개명하였다. 현재 기준으로는 인천에 본점을 둔 경기은행이라는 게 다소 특이해 보일 수 있지만, 이 때는 인천경기도에 속해 있어서 자연스러웠던 것. 인천시가 인천직할시경기도에서 분리된 건 1981년의 일이다.

본점이 두 번 이전되었는데, 첫 번째로 1976년 1월 5일 인천광역시(당시에는 경기도 인천시) 중구 사동 9-1번지에 입주했으나 원래 여기가 인천상공회의소 회관인 것을 일부만 분할 매입한 어정쩡한 형태였다. 이후 378억 원을 들여 1988년 6월 14일에 대지 3,315평, 연건평 14,348평, 지하 3층, 지상 20층, 옥탑 3층 규모의 본점 신축 공사를 개시, 1992년 1월 28일 남동구 구월3동 1127번지에 직접 신축한 건물을 쓰게 된다. 참고로 옛 사동 본점은 경기은행 신포지점으로 전환된 후 한미은행을 거쳐 현재는 한국씨티은행 신포지점으로 계속 영업 중이며, 수인선 신포역 근처에 있다.

3 고난과 몰락

경기도의 어엿한 지방은행으로 설립되었으나, 애초에 경기도 자체가 사실상 서울특별시와 밀접한 관계였던 터라 서울에 본점을 둔 대형 시중은행들과의 경쟁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울과 별로 접점이 없는 곳에서 잘 나간 것도 아닌 게, 이쪽은 낙후된 지역이 많은 데다가 지역농협 및 우체국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지방은행에 비해 지역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낮았다.

그나마 나름 광역시였던 인천광역시에서의 기업 여신과 고금리 신탁으로 근근히 영업하던 와중, 1997년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았다. 기업들이 죄다 쓰러지면서 부실화된 채권이 급증했고, 신탁에 지급해 줄 이자는 많다 보니 손실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

결국 1998년 6월 29일 퇴출은행으로 지정된 후 한미은행에 인수되었고, 구월3동 본점 건물은 성업공사가 갖고 있다가 1999년 6월 18일 매각대금 360억 원에 한미은행이 사들였다. 이후 2004년 2월에 한미은행미국 씨티그룹에 인수됨에 따라 현재는 한국씨티은행으로 영업 중이다. 한국씨티은행의 지점이 인천광역시에 의외로 많은 이유가 바로 경기은행의 자취다. 참고로 구월3동 본점은 한미은행 인천영업부로 개편되어 일반 지점보다는 상위 점포로 분류되며, 전산센터 역시 이 곳에 개설되어 현재는 한국씨티은행 인천영업부 및 전산센터로 운영 중이다.

퇴출 당시 점포수는 194개였는데, 정작 인수한 은행인 한미은행의 당시 점포수는 128개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새우가 고래를 잡아먹은 셈.

4 현재의 흔적

금융결제원 홈페이지 금융기관 코드 조회를 하면 경기은행의 퇴출 당시 지점망이 그대로 뜬다.[2] 엑셀 파일을 다운받아 보면 경기은행 코드인 36번으로 시작하는 한국씨티은행의 지점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 경기은행의 퇴출 직전 지점 현황을 파악할 수 있고 해당 지점명을 홈페이지에서 검색했을 때 027 코드로 함께 뜨는 지점망을 보면 현재의 흔적을 얼추 알 수 있다.

과연 이름에 걸맞게 경기도 곳곳에 지점이 있었는데 안성시[3], 여주시, 가평군, 이천시, 동두천시 등지에도 지점을 1개 정도는 갖고 있었다.[4] 그러나 한미은행과의 통합 과정에서 채산성이 안 맞다는 이유로 모두 폐쇄되었고[5] 그 결과 현 한국씨티은행은 해당 지역에 점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고객님들을 잡은건 지역농협과 우체국 현재 남아 있는 경기은행 출신 지점을 통틀어 봐도 인천광역시경기도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정말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경기은행의 자취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금융결제원 홈페이지의 금융기관 코드 조회로 노가다 확인한 결과 인천 10개(검단/구월동/송림동/신포/신현동/연수/용일/주안/학익지점/인천영업부), 경기 13개(과천/광명/구리/김포/동수원/부천중앙/샘터마을/수원종로/안산/역곡/오산/의정부/평택지점) 이렇게 총 23개 지점이 경기은행 출신 지점으로 확인된다. 다만 이는 전화번호 혹은 주소가 일치하는 경우만 모아놓은 것이며, 저 지점들 외에도 한미은행 통합 이후 전화번호나 주소를 변경한 지점이 있을 수 있다.

서울특별시의 경우에는 서울(종로), 여의도, 영등포, 강남(역삼동), 강남역 이렇게 5개 지점뿐이었으며, 당연하게도 한미은행 점포가 바로 근처에 있는지라 죄다 폐쇄. 따라서 서울 지역에는 경기은행의 흔적 자체가 없다.[6] 퇴출 당시 194개 점포 중에서 한미은행으로 정식 편입된 게 104개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현 한국씨티은행 지점 코드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경우를 경기은행 출신 지점으로 가장 먼저 추측할 수 있다. 물론 구 씨티은행도 마찬가지지만 이 경우 지점수가 전국적으로 10여개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조금만 검색하면 경기은행 출신 지점을 가려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인천영업부의 경우 421 코드를 부여받았으나 현 한국씨티은행 점포수가 200개이고 한미은행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300개를 넘은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대로 저 코드는 나올 수 없다. 물론 한미은행으로 시작한 지점의 코드도 꽤 큰 숫자가 있기 때문에 그냥 재미로 검색해 보는 게 낫다. 예를 들어 아산지점의 경우 411번이다.

5 기타

  • 강남역 1번 출구 뒷쪽 빌딩 1층에 강남역지점이 있었는데, 2007년경까지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세한 년도는 수정바람) 일단 인근에 한미은행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경기은행 강남역지점은 폐쇄되었고, 해당 건물이 장기간 임대되지 않아 그렇게 되었던 것. 2008년경부터 SK텔레콤 강남지점이 위치하고 있으며 다른 SKT 지점과 다른 입구나 창구 구조에서 은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부천대학을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 재학생들에게 적금통장을 만들게 하면서 더 이자를 준다든지 하며 손잡았다가 퇴출되면서 제대로 보상도 하지 않아 몇몇 재학생이 학교 측에서 시위하는 일이 있었다.
  • 퇴출 직전까지도 이를 막기 위한 로비가 있었는데, 퇴출되기 불과 25일 전이었던 1998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임창열 당시 경기도지사에게 서이석 경기은행장이 뇌물로 1억 원을 건네는 일까지 있었고 결국 두 명 모두 구속, 수감되었다. 아니 경기도지사가 무슨 힘이 있다고[7] 사실 퇴출시켜야 할 정도로 부실한 은행은 널리고 널렸었지만, 대형 시중은행을 퇴출시켰다가는 도저히 뒷감당을 할 수가 없었기에 당시 정권과 금융 당국은 비교적 만만한 지방은행들을 퇴출시키기로 방침을 정했었다. 그래서 퇴출설이 나도는 지방은행들은 하나같이 해당 지역의 유력 인사에게 로비를 했고, 이게 금융 당국으로도 전달이 되긴 되었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청탁 자체를 죄다 무시했고, 그 결과 여당 소속인 임창열 경기지사가 구속되었던 것. 물론 청탁이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보기도 애매한 게, 원래 퇴출 대상 5개 은행 리스트에는 충북은행이 들어 있었지만 막판에 충청은행으로 뒤바뀌었다. 둘 다 부실 정도가 심각해 도찐개찐이긴 했지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당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충북도지사를 배려해 충북은행을 살렸다는 설이 정가에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CHB로 대동단결 임창열 전 경기도지사는 나중에 사면되었지만, 서이석 전 행장은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2003년 8월 21일에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옥사하였다.
여담으로 서이석 전 행장은 1974년 경기은행에 입행하기 전에 씨티은행 서울지점에서 근무한 바 있는데, 이후 경기은행이 한미은행에 넘어가고 한미은행씨티그룹에 넘어가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다.그냥 씨티은행에 계속 있으시지 지못미
  • 퇴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직원들은 현재 한국씨티은행차장급 이상으로 재직 중인데, 특히 상고 졸업 후 바로 입행한 케이스도 상당수 있다.[8] 어찌 보면 1990년대 대한민국 경제의 마지막 수혜자.
  1. 이 건물 바로 건너편에는 인천광역시에서 가장 큰 종합 공연장인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이 있다. 지금의 관교동과 구월동은 인천의 최대 번화가지만, 이 사진이 촬영됐던 1992년은 시의 외곽지역으로 분류되던 시절이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도 이 무렵에는 공사 중이었다. 이 당시 인천에서 종합문화예술회관의 역할을 하던 곳은 주안동의 인천시민회관이었다. 관교동과 구월동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2. 조흥은행(21), 서울은행(25), 구 씨티은행(53), 보람은행(82) 등은 여전히 코드가 살아있기 때문에 뜨는 거라지만 경기은행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함께 퇴출된 은행 중에서 충청은행(33) 역시 하나은행 리스트로 뜨는 상황.
  3. 안성시 경기은행의 경우 당시 쓰였던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내부적으로는 용도가 계속 바뀌어서 은행의 흔적은 없으나, 겉모습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4. 다만 포천시, 연천군 등에는 지점이 없었다. 이게 퇴출 당시의 상황이니 그 이전에 있었는지는 불명.
  5. 한미은행이 경기은행을 즉각 통합한게 아니라 일단 한미은행 이름을 내걸고 임시적으로 몇 달간 영업하다가 비로소 전산까지 통합되었는데 바로 이 때 폐쇄된 것이다. 이런 점포의 경우 한미은행 코드가 아예 부여조차 되지 않은 관계로 금융결제원 코드 조회시 036 코드만 있는 것.
  6. 단,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는데 이는 후술.
  7. 허나 임창열 지사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경제부총리를 지낸 인물이었다. 즉 정부 내 경제 관련 부처에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집권 여당 공천으로 경기도지사에 당선될 정도면 충분히 경기은행 퇴출을 저지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경기은행 측이 가장 먼저 로비대상으로 삼았던 것.
  8. 이 당시 남직원들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직후 입행하여 약 1년 간 근무한 후 군 입대 휴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중에는 전역하고 와 보니 은행이 없어져 있고 고용 승계가 안 되어 있더라는 청천벽력같은 케이스를 경험한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