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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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元吉
1943년 01월 02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정치인, 기관단체인이다.

1943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대한전선 부사장, 청보식품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평화민주당 이철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반대로 이철용과의 공천 경합에서 승리하여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99년 국민연금 정책 관련 혼선으로 경질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하였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결과가 노무현으로 정해지자 이에 불만을 품고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오영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사법처리되었다. 이후 1999년부터 대리로 맡고 있던 한국여자농구연맹 총재직에 전념하였다.

김원길 총재는 다른 협회의 수장들에 비하면 능력이 있는 편이었다. 이성구 선생의 잔여임기 3년은 물론 세차례 더 연임하면서 1999년부터 2012년 4월까지 재직한 김원길 총재 아래서 한국여자프로농구 는 최소한의 생존 가능성을 살리는데 성공했다. 발전기금을 모으고, 스폰서나 경품 협찬을 땡겨오고, 리그 운영의 원칙을 세웠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대회 타이틀 스폰서를 가맹 팀들이 돌아가면서 맡는 원칙이 세워졌고, 선수들의 연봉과 FA가 틀이 잡혔으며, 여자 농구 유망주 육성을 위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WKBL 회관을 만들었고, 자체 방송국인 WKBL TV도 만들었다. 시즌 때 말 그대로 매일 농구경기 관람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고. 남사스럽게 시상식때 전주원 입술 가까이에 뽀뽀할정도로 전주원 광팬이기도 하다 [#

그리고 무엇보다 김원길 총재 체제의 가장 큰 업적은 구리 KDB생명 위너스 농구팀을 만들어 팀을 여섯 개로 늘리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로서 멸망 직전까지 갔던 여자 농구는 극적으로 회생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김원길 총재는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구단에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고, 7구단 창단이 유력했던 교보생명 창단에 실패했다. 게다가 장기집권으로 인한 피로도가 누적되며 슬슬 교체여론이 힘을 받고 있었다. 결국 신세계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과 이를 전혀 수습하지 못하고 우왕좌왕대는 모습을 끝으로 2011년 쓸쓸하게 퇴장하고 만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무소속-낙선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도봉구 을)민주당-당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강북구 갑)새정치국민회의-당선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강북구 갑)새천년민주당-당선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강북구 갑)한나라당-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