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익

金在益
1938년 11월 26일 ~ 1983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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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당시 '경제대통령'이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능력이 있었고 80년대 한국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추진에 대해서는 많은 정치인들의 반발에 떠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다가 이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시 폭발에 사망하고 만다.

후술한 항목에도 있겠지만, 이 사람이 아웅산 테러로 목숨을 잃지 않았으면 현재의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경제적 고질병이 상당히 해소되었으리라고 보는 시각과, 일개 개인이 아무리 영향력이 있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너무 앞서나간 정책으로 인해 부작용을 양산했으리라는 평가가 갈라진다. 그리고 사실 지금관점에서 보면 시행되지 않은 것이 다행인 잘못된 정책도 몇개 있긴 하다.

2 학력

  •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1973년 박사학위 취득)
  •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 통계학 석사 (1968년 ~ 1972년)
  •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1966년 ~ 1968년)
  •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 석사 (1965년 석사학위 취득)
  •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외교학전공 (56학번)
  • 경기중, 고등학교

3 이력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원래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었다. 경제에 전혀 문외한인데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풀어 이해시키는 그의 능력에 전두환이 감탄하여 취임 직전 그를 불러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김재익은 단지 얼굴 마담격으로만 이용되지 않을까 싶어 전두환에게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수 있게 해주신다면 일하겠습니다"[1]라고 했고, 그러자 전두환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승낙. 이후로 경제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권한을 맡겨서 마음대로 일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하며 이 시점에서 알려진 1980년대 경제개혁이 막을 올렸다.

그에게서 시작한 시책들을 보면 물가안정화[2], 정보화, OECD가입, 수입자유화, 금융실명제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물가 안정화 분야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1980년에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 였던 것을 1982년에 7%로 줄여버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83년 부터는 아예 3.5%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를 유지하게 된다. 경제 성장율 역시 80년에 -3.7% 였던 것을 1983년에 12%대로 올린것을 기점으로, 이후 평균 10%대의 성장율을 기록한다.[3] 2012년인 현재 기준으로 봤을때 그가 미래를 위해서 추진했던 사업들중에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바로 정보화산업에 대한 투자로,[4] 현재 대한민국이 IT산업에 한해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흠좀무...다른 것은 몰라도 금융실명제와 정보화라는 개념은 시대를 앞서나간 생각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후 한국의 성장동력중 하나에 시동을 걸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금융실명제 같이 금융계의 고질적인 부패를 척결하고 지하경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정책을 시도하다가 전두환 측근들한테 찍혔다. 특히 금융실명제의 경우, 전두환이 최종적으로 승인을 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측근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들의 비자금 조성에 크게 방해가 되자 측근들이 난리를 쳤고, 결국 전두환이 생각을 바꾸면서 시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에 대하여 전두환은 별 생각이 없었다.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하여 여론이 악화되고 정권이 불안해지자 금융사기를 방지할 방법 중 하나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려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측근들이 "근데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 정치자금도 못 주고받게된다"는 식으로 설득하자 그제서야 전두환은 "아 그런가?"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결국 포기한 것. 그나마 시행 직전까지 간 것도 실은 전두환을 설득했던 측근[5]들이 당시 전두환에게 밉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더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면이 있었다. 만약 측근들이 밉보이지 않았더라면 바로 취소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는 1990년대 김영삼 정부때 시행되었다.

4 논란

사실 그도 인간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실수나 잘못 역시 존재한다. 그의 실수가 될 뻔한 정책을 몇가지 들자면, 중화학산업의 포기와 농업지원 정책 포기이다. 중화학산업 포기의 경우는 해당 물품들을 외국에서 싸게 수입하면 된다는 것이 논지였으나[6] 이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효자산업인 자동차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뻔 했고, 농업지원정책은 우리나라 농업은 시장성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은 타국과 FTA 맺을때 조금이라도 식량 부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7]

지금 기준에선 실책처럼 보이지만, 김재익의 당시 주장에 대해 쉴드치는 의견도 있긴 있다. 일단 박정희 시절에 중화학 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워서 그 쪽 산업 의존도가 당시 기준에서는 쓸데없이 높아져 개도국 주제에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을 한 점도 있었고 그 당시에 중화학 공업은 적자덩어리였다. 지금에야 고용과 황금낳는 거위이지. 어차피 대한민국 시장경제상 중화학의 자립도가 높은 수는 없고, 정보산업이나 첨단가공등 다른 쪽에 집중투자하여 그 의존도를 상쇄하면 그만이고[8][9][10], 농업지원정책 포기에 대해서도 수매제도 등의 지원정책이 이농현상등의 농촌 붕괴를 상당히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덕분에 생산물의 다양화와 시장성 개척에 실패한 것[11] 아니냐며 농업 지원정책의 효과가 별로 훌륭치 않다는 의견이 있다.

한편 2010년대 들어서서 두드러지는 조선업계의 불황,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중공업 분야 대기업들의 노동자 비 유연성, 그리고 중국의 업종 내 성장 등을 근거로 김재익의 중화학공업 포기 주장이 옳았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조선업계 등의 중화학 공업이 김재익의 주장이 나왔던 때 이후에도 약 30년 가까이 한국의 주력 산업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화학 공업을 넘어서는 신종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 육성이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가 선택해야 할 길임은 분명했지만,[12] 김재익이 활동했던 1980년대에 당장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든 김재익이 5공 인물들 중 유달리 유명해진 이유를 크게 두가지 들자면, 경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전두환을 보필해 그나마 80년대에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이룩했다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그 뜻을 다 펴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전두환이 급브레이크를 걸어서 실수가 될 뻔한 정책 몇 가지가 멈춘 것도 있으나(금융실명제는 실수가 아니었긴 하지만...) 실책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편.

하지만 전두환이 방해한 것도 있지만서도, 동시에 김재익씨가 저렇게 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중에는 전두환이 그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순수한 경제학자가 당시 무소불위의 독재자를 조종해서 자신의 경제적 이상을 관철시켰다는 것 때문에 경제학자나 경제학의 방법을 받아들인 학파들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좋다는 것도 그가 유명한 한가지 이유이다.[13] 삼국지로 치면 곽가 포지션.그러면 전두환조조?

5 기타

친아들이 "아버지는 독재자를 돕고 있어요!"라며 항의하자 거기에 "경제의 국제화는 독재 정치를 어렵게 하고, 내가 시장 경제를 도입하면 정치의 민주화는 당연히 따라온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4] 또 친구들이 그를 김일성 밑에서도 일할 친구라고 비유하며 군사 독재자 밑에서 일하는 것을 돌려서 까자 "만약 내가 김일성 밑에서 일해서 그 사람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라고도 했다고 한다. 결국 어느정도 맞는 말이 되었다. 당장 남한은 제한적이지만 꾸준히 국제화의 길을 걸으면서 지구촌의 일부가 되었으며, 경제발전으로 형성된 중산층의 의식성장으로 민주화 열망이 높아졌는데[15], 북한은 극단적인 폐쇄정책으로 점점 나락에 빠져들었다. 김재익의 주장대로 경제의 국제화는 시장 경제의 확대를 일으켰고 이것은 독재를 무너트리는 간접적 계기가 되었다.

여담으로 가족사가 험난하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근현대사 이념 갈등 속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 상당수가 해를 입었다. 맏형 김재룡은 40년대 후반 서울대 유일의 서양사 전임 강사로 재직했는데(간단히 말해 그 말고는 서양사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좌익 활동 혐의로 6.25전쟁 직전 체포되었다가 전쟁 발발 직후 불법적으로 한강변에서 처형됐다. 그리고 아버지는 대전에 있다가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도주할 때 반동이라며 살해 당했고, 위의 두 형은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 역시 이념 갈등이라 할 수 있는 아웅산 묘소 테러로 죽었으니....

인사청탁이 들어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인사청탁을 부탁하는 편지가 들어오면 그냥 알아서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수석비서관일 때 그의 밑에서 과장급으로 실무를 하며 나름 유능하다고 소리를 듣던 사람이 강만수였다. 헌데 나중에는 맛이 가버린건지 병크 일색이었다. 청출어람은 강만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김재익이 리엔필드면 강만수는 SA80

손아랫동서 한승주는 유명한 정치외교학자로서 김영삼 대통령 시절 외무부장관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주미 대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전공이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외교학인데 전공 때문인지 권력 게임에도 능했다는 견해도 있다.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12.12사태의 주역인 육사 17기를 청와대에서 축출한 것도 전두환의 신임을 제대로 갖고 온 그의 작품이라는 시각도 있다. 본래 한은 출신으로 재무부 관료가 아님에도 경제 정책의 핵심에서 기회를 잡은 것은 남덕우 전 국무총리와의 인연 덕분이다. 둘은 이전에도 학술적인 교류가 있었지만 스탠포드 유학 중에 둘이 만나 남덕우 전 총리가 김재익씨에게서 수학적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남 전 총리는 그의 스마트함을 눈여겨 봤다가 귀국 후 경제부총리에 자리에 있을 때 그를 경제기획국장이라는 요직에 특별히 발탁하였다. 당시에 경제기획원에서 강경식 등과 함께 경제 자율화론자로서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이후에 이 둘은 전두환 정부 초기에 각각 경제 수석과 재무부 장관으로 5공 경제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강경식은 1997년 재경경제원 장관이 되어 IMF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시기 그가 한 특별한 일 중에 하나가 부가가치세 도입이다. 이 도입과 관련하여 김종인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직접 서독을 답사하고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연이 되어 당시 노총각이던 김종인 교수에게 중매를 서주기도 했다.)
  1. 또한, 자신에게 정치자금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논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2. 3저호황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평이 있지만 김재익이 물가를 안정시킨 시기는 3저호황이 오기 전이다.
  3. 세계 경제에 상당히 민감한 한국 경제 특성상 김재익 개인의 성과라고만 보기는 힘들지만 어느정도 영향을 준것은 맞다.
  4. 주요 투자로는 국내 전화 교환기 형식을 기존의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전면 교체하였다. 덕분에 전화망을 이용한 인터넷 회선 구축이 상당히 손쉽게 가능했고, 이를 토대로 한국의 인터넷 회선망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오르게 된다. 다만 전자식 교환기 도입은 당시 오명 체신부 장관의 강력한 의지로 시작된 사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5. 주로 허화평 정무제1수석비서관,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 등
  6. 근데 이건 원유가 마구 나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소비 위주의 기축통화국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로 외국에서 수입을 하려면 우리도 다른쪽에서 수입을 해야하는데 대안이 없으면 시행되기 힘든 정책이다.
  7. 사실 이 또한 국내 농업생산품이 시장성이 없음을 반증한 셈. 이미 가격경쟁, 유통량은 물론이거니와 질적수준마저 뒤쳐진지 오래인게 현실.
  8. 다만 이 경우는 실업률 증가는 각오해야 한다.
  9. 참고로 김재익이 구상했던 방식의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가 바로 중화민국이다. 그런데 정작 오늘날 대만에선 한국의 발전된 중화학산업을 매우 부러워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확실히 당시 중화학산업 포기는 실수였던 셈.
  10. 중화학공업이라고 하면 거창한 걸 떠올리기 쉬운데 우리가 흔히 쓰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하물며 장판처럼 겉으로는 경공업쪽일것 같은 물건들도 이 섹터에서 나왔거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다른 산업분야를 위해서라도 꼭 필요했던 산업이었던 것.
  11. 쌀만 미친듯이 생산하는 탓에 다른 농산물의 수입의존도가 높아졌으며, 새삼 명품농산물을 만들어 차별화를 하려 해도 이게 하루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니...
  12. 게다가 한국이 자동차, 조선, 석유 등의 중화학 공업에만 매달렸던 것도 아니다. 반도체, IT 기기 부문에서 한국이 투자 및 달성한 것을 생각해 봐도, 이 점은 충분히 설명이 된다.
  13. 경제학에서는 정책결정과정(한마디로 정치)이나 정책결정기구을 불확실하고 변수가 많으며 정쟁때문에 시장보다 반응이 느리다며 까댈 뿐 믿지 않는다. 때문에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김재익 같은 관료가 어느 정도 로망이기도 하다. 물론 경제학이 독재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조종하다 직접 집권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끝판왕이네
  14. S.M.립셋, 새뮤얼 헌팅턴 등 근대화론자들의 입장이다.
  15. 1987년 6월 항쟁을 결정지은 것은 바로 넥타이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