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형석(金炯錫) |
생년월일 | 1962년 8월 18일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학력 | 신일고 - 중앙대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85년 OB 베어스 1차 지명 |
소속팀 | OB 베어스(1985~1997) 삼성 라이온즈(1998) |
수상 기록 | ||||
1995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 ||||
1993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
OB 베어스 등번호 29번 | |||||
선우대영(1982~1984) | → | 김형석(1985~1997) | → | 신동수(1998) |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9번 | |||||
안윤호(1997) | → | 김형석(1998) | → | 임창용(1999~2001) |
OB 베어스 역대 주장 | ||||
김광수 (1988~1990) | → | 김형석 (1991) | → | ? |
1 소개
전 한국프로야구 OB 베어스의 선수. 등번호 29번(OB) - 39번(삼성).
2 선수 시절
신일고 - 중앙대를 졸업하고 1985년 OB 베어스에 입단하였으며 1998년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하여 그 해 말 은퇴했다.
185cm의 훤칠한 키에 이국적인 외모. 호쾌한 스윙 폼으로 두산 베어스의 원조 미남이자 1990년대까지 미스터 OB로 불리우던 선수. 2할 8~9푼 사이의 타격에 매년 평균 1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면서 암흑기 OB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상대 팀을 위협하는 타자였다. 1987년에 승리 타점 1위[1], 1993년에 최다 안타 1위(147개)를 차지했으며 1995년에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중장거리 타자로 통산 119홈런을 기록했으며 긴 팔다리를 쭉 뻗어 힘차게 휘두르는 스윙 폼은 1984년 LA 올림픽에 갔을 때 미국 국가대표팀에 참가했던 마크 맥과이어도 칭찬했을 정도.[2] 포지션은 우익수와 1루수였으며 우익수 시절엔 대표적인 강견으로 해태의 김종모, MBC의 신언호와 함께 멋진 송구로 진기명기에 자주 나오기도 했다.
1986년 9월 시즌 최종전에서 9회 말 최동원을 상대로 때린 동점 투런홈런은 이른바 '운명의 한 방'으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회자된다. 이 홈런 한방으로 두 팀과 두 선수의 한 시즌 농사가 바뀌었는데, 이날의 역전승으로 OB는 그날 광주에서 해태를 상대로 먼저 승리를 거둔 MBC 청룡을 반 게임 차이로 제치고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3], 김형석에게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된 최동원은 프로야구 최초의 3년 연속 20승을 눈 앞에서 놓쳤고(아직까지도 3년 연속 20승을 기록한 국내 선수는 없다), 이날 OB의 선발 투수인 최일언이 패전을 면하면서 승률왕 타이틀을 차지함에 따라 승률에서 뒤진 해태의 선동열이 자신의 프로 첫 트리플 크라운이 될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었다.[4]
전성기는 1989년~1993년 사이로 이후에는 점차 하락세를 보였으며, 1997년 외환 위기 때 야구단의 긴축 경영으로 방출당했다.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역으로 프런트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선수시절 OB의 간판이었음에도 다시는 구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3 기타
- 암흑기의 OB를 지킨 버팀목과 같은 선수였음에도 최근의 젊은 두산 베어스 팬들에게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비운의 선수.[5][6][7] 아무리 좋게 헤어지지 못했다지만 이 정도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선수를 시구 한 번 불러주지 않는 두산 베어스 구단의 옹졸함이란... 그래도 1990년대 OB 프랜차이즈 선수였던 박철순과 김상호가 시구했으니 기대는 해 볼 만하다.[8]
- 구리인창고와 상무 코치 시절의 제자들인 윤석민, 김태영, 이종욱과 함께. 여전히 훤칠하시다.
우연히 같이 사진을 찍은 셋은 다음 년에 모두 팀을 떠났다. 형석매직?지금은 윤석민은 넥센, 김상현은 KIA, 이종욱은 NC에...
- 여담으로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 김세진 감독의 전 부인인 구나연 씨 사이를 이어줘 1999년에 결혼까지 하게 도와줬다. 그러나 결국 2004년에 이 둘은 합의이혼을 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출루율 | 장타율 | |||
1985 | OB 베어스 | 91 | 225 | 0.302 | 68 | 14 | 5 (3위) | 7 | 24 | 29 | 3 | 0.364 | 0.502 | |||
1986 | 107 | 364 | 0.286 | 104 | 8 | 5 (3위) | 8 | 47 | 44 | 8 | 0.331 | 0.401 | ||||
1987 | 81 | 301 | 0.316 | 95 | 16 | 5 | 3 | 45 | 34 | 7 | 0.367 | 0.432 | ||||
1988 | 36 | 114 | 0.219 | 25 | 3 | 0 | 0 | 8 | 5 | 2 | 0.256 | 0.246 | ||||
1989 | 117 | 423 | 0.286 | 121 (2위) | 22 | 2 | 10 | 57 | 44 | 5 | 0.350 | 0.418 | ||||
1990 | 120 | 429 | 0.280 | 120 (5위) | 18 | 3 | 12 | 61 | 49 | 5 | 0.341 | 0.420 | ||||
1991 | 126 | 473 | 0.288 | 136 (3위) | 19 | 9 (3위) | 11 | 71 | 62 | 3 | 0.355 | 0.436 | ||||
1992 | 126 | 459 | 0.281 | 129 | 27 (5위) | 5 | 16 | 71 | 61 | 3 | 0.357 | 0.466 | ||||
1993 | 126 | 480 | 0.306 (4위) | 147 (1위) | 23 (5위) | 4 | 10 | 62 (5위) | 47 | 2 | 0.366 | 0.433 | ||||
1994 | 114 | 393 | 0.262 | 103 | 13 | 0 | 6 | 51 | 37 | 3 | 0.333 | 0.341 | ||||
1995 | 121 | 423 | 0.270 | 114 | 29 (3위) | 2 | 10 | 68 | 50 | 2 | 0.318 | 0.418 | ||||
1996 | 120 | 434 | 0.244 | 106 | 16 | 4 | 14 | 48 | 46 | 2 | 0.303 | 0.396 | ||||
1997 | 111 | 321 | 0.234 | 75 | 13 | 0 | 12 | 43 | 38 | 0 | 0.308 | 0.38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출루율 | 장타율 | |||
1998 | 삼성 라이온즈 | 20 | 27 | 0.074 | 2 | 0 | 0 | 0 | 0 | 2 | 0 | 0.107 | 0.074 | |||
KBO 통산(14시즌) | 1416 | 4866 | 0.276 | 1345 | 221 | 44 | 119 | 656 | 548 | 45 | 0.338 | 0.413 |
- ↑ 결승타. 결승타라는 것이 아무래도 일반적인 타점보다도 훨씬 운에 좌지우지하는 스탯이다보니 1989년을 끝으로 승리타점 타이틀은 폐지. 1990년부터 최다 안타 부문을 시상하기 시작했다.
- ↑ 1984년 LA 올림픽에 한국 대표팀과 미국 대표팀으로 각각 출전했다. 당시 야구는 정식 종목이 아니라 시범 종목이었다. 그 때 국가대표로 갔던 선수들이 강기웅, 류중일, 선동열, 이순철 등이 있다.
- ↑ 정확히 말하면 해태 타이거즈와 동률이었지만 후기리그 1위결정전을 통해 우승을 차지
- ↑ 당시엔 탈삼진 타이틀은 따로 시상하지 않았으며 다승, 승률, 방어율 타이틀을 트리플 크라운의 기준으로 삼았다.
- ↑ 두산은 김경문 감독 체제 전후에 , 특히 베이징 올림픽 이후 신규 유입된 젊은 팬들의 비중이 높아서 올드 팬과 김경문 이전의 두산을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팬들 사이의 심리적인 괴리가 큰 팀이다. 두산 뿐만 아니라 다른 KBO 리그 팀들의 팬들도 비슷하다. 두산의 신규팬 비중이 높아서 그런것.
- ↑ 이것은 전통적으로 프랜차이즈 출신 노장들을 홀대하는 팀 운영에도 원인이 있지만, 김인식 감독 시절의 주축 선수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김경문 감독의 의도적인 세대교체도 한몫했다. 한때 김상진을 모르고 그저 SK 코치라고 욕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 ↑ 1994년 항명 파동에 참가했던 선수들은 결국 두산에서 모두 쫓겨났고, 대부분 팬들에게도 잊혀졌다. 십수년에 걸쳐 이들을 견제하고 팀에서 밀어내면서 조금씩 흔적을 지워간 두산 프런트의 집요함이란...
- ↑ 심지어 이 선수들은 항명 파동 때 주동자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