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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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John McNaugh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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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표어는 UT OMNES UNUM SINT (모든 이가 하나 되기를).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 한국 천주교의 주보인 성모 마리아, 한국 천주교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그리고 인천 항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역대 천주교 인천교구
초대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주교2대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한국의 마지막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의 초대 인천교구주교으로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식 이름은 나길모(羅吉模)이다.

192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로렌스(Lawrence)에서 출생. 1944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953년 동(同)회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예일 대학에서 1년간 한국어를 공부한 후 1954년 한국에 입국하였다.

충북 청주교구의 장호원 감곡성당에서 보좌신부사제 생활을 시작, 장호원, 북문로, 내덕동 성당에서 사목을 폈다. 그러다 1958년 인천지역이 감목대리구로 설정되고 3년 후인 1961년 6월 6일 인천감목대리구가 인천대목구로 승격되자 같은 해 8월 24일 교황청으로부터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 성성식은 그해 8월 24일 고향인 미국 로렌스 시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주교 성성식에 이어 1961년 10월 26일 오전 11시, 주피(Xavier Zupi) 주한 교황 사절의 인천교구 설립식과 주교 임명장 수여식이 답동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 주교의 주교서품 당시 나이는 만 35세로 이는 한국 천주교 최연소 주교서품 기록이다.[1]

나 주교는 교구장에 취임하자마자 신설 교구의 혼란을 진정시키고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한 복음선포 사업에 중심을 두었다. 당시 인천교구는 박문초등학교, 박문여자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만 운영하고 있었으나, 동구 화수동에 있었던 인천영화중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인천대건중고등학교로 새 출발을 시켰다. 운영권이 노틀담 수녀회에 있던 박문학교와 달리, 대건학교는 교구 직속에 두면서 미국인 교장(조셉 기본스 신부)을 임명하고 철저하게 미국식 사립학교 체제를 도입하여 학교 수준을 매우 끌어올렸다.

1966년 한국 천주교가 사회 참여에 돌입하는데 본격적인 계기가 된 강화 삼도물산 사건이 일어나자 해당 교구장 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였던 마산교구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와 함께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1970~80년대의 독재시기 때도 이어져 서울대교구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수원교구장과 광주대교구장을 역임했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원주교구지학순 다니엘 주교, 안동교구프랑스인 두봉 주교, 전주교구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이름을 떨친다. 특히 인천교구가 당시의 신흥 공업지역이었던 인천, 부천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 사목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또한 인권문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져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으로 봉직하였다. 노동자 사목, 양심수 석방운동, 독재 투쟁 활동 등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으로 인해서 독재 정권의 요주의 인물로 언제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참여에만 몰두하지 않고 인천교구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초기 9개 성당과 약 23,000명의 신자들로 시작했던 인천교구를 은퇴 시에는 10배 정도 확장시켰다. 현재까지도 인천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서 천주교 신자 비율이 높은데, 이는 나 주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2년 4월 24일 교구장직을 은퇴하였다. 은퇴 시에도 여러 가지 기록을 만들었는데, 한국 천주교에서 남아있던 마지막 외국인 선교사 출신 교구장이었으며 41년간 교구장직을 수행하여 최장 임기 교구장 기록을 세웠다. 나 주교가 은퇴는 한국 천주교가 그동안의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에서 완벽하게 독립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이었다. 후임 교구장으로는 부교구장이었던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가 승계하였다.

은퇴 뒤에는 고향인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5남매의 장남이었던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은퇴 뒤에는 고향에서 살기 바란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얼마간은 자신의 본 수도회인 메리놀회 본부에서 소임을 하였고, 미국 여러 교구 성당들을 돌면서 견진성사를 집전하였으나 구순에 가까워 가는 나이로 인해서 2010년에 들어서는 수도원에서의 주일미사를 집전하거나 양로원에서의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소임을 하고 있다. 또한 은퇴 이후에도 종종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나 주교는 1961년 초대 인천교구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24일 35살의 젊은 나이에 주교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91년에 주교 서품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金慶祝)[2]을 맞아 금경축 기념미사 참석차 8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인천 깍쟁이 美신부님' 주교 50주년

여담으로 답동성당 인근의 신포시장에서 파는 만두를 엄청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 스스로 '만두 중독자'라고 하셨을 정도.
  1. 한국 천주교의 최연소 한국인 주교서품 기록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가지고 있다. 만 39세.
  2. 한국 주교단 가운데 금경축을 맞는 것은 나 주교가 처음이다. 나 주교는 미국인이지만 한국 교구의 주교로 임명됐기 때문에 한국 주교단에 속한다. 2016년 현재 한국 주교단 가운데 주교품 금경축 수품자는 나 주교 이외에 부산교구 최재선 주교와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 (2013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