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대건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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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연수구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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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건고등학교
Incheon Daegun Highschool
仁川大建高等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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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1945년 09월 01일
교훈양심 실력 봉사
교시실력향상, 미래를 바꾸는 힘
교화장미
교목은행나무
성별남자고등학교
유형일반계 고등학교
운영형태사립
소재지인천광역시 연수구 능허대로 437
홈페이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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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소재한 남자사립고등학교이며, 1953년 인천영화고등학교로 개교했으나 1963년 천주교 인천교구가 학교를 인수한 후에 인천대건고등학교로 개칭했다. 재단은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세운 인천가톨릭교육재단이며, 같은 재단학교로 인천박문중학교와 인천박문여자고등학교, 부천의 소명여자중학교와 소명여자고등학교가 있다.

학교 이름인 대건의 명칭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이름에서 따왔다.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위치한 대건고등학교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논산대건고등학교가 대건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나 대건고등학교천주교 대구대교구, 논산대건고등학교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설립했으므로 설립 종교가 가톨릭이라는 것만을 제외하면 상관이 없는 학교이다.[1]

원래는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 화도진 공원 근처에 있었으나 1998년 1학기 종료 후 연수구 동춘동 현 위치로 이전했으며, 인천대건고등학교의 이전은 인천 구도심에 있던 학교들의 신도심 이전의 시초가 되었다.

이사장대리 겸 상임이사는 천주교 인천교구장 서리인 정신철 주교이며[2] 제13대 교장으로 이완희 신부가 재임하고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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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대건고등학교 화수동 구교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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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대건고등학교 화수동 신교사[4]

1945년에 인가를 받은 영화중학교 설립 기성회에 의해 1946년 10월에 영화중학교라는 이름으로 중학교가 먼저 개교하였다. 영화중학교 설립 기성회는 개신교 인사들이 모여 만든 교육재단이었고 교장에 성결교회 목사[5]가 취임하는 등 성결교파와 연관이 있었다. 영화중학교는 한국전쟁 이 일어나자 잠시 학교가 폐교되었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인 1951년 재개교 하였고 1953년에 영화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개교하였다. 영화중학교 설립 기성회는 전성학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학교 확장을 시작하였으나 재정난과 학교 내부의 비리로 인해서 학생들이 수업거부와 시위를 벌이는 혼란이 지속되었고 폐교까지 논의되었다.

교직원에게 줄 급료까지 주지 못할 상황과 이사장의 자금유용등이 겹쳐 더 이상 학교를 이끌어갈 수 없게 된 전성학원은 인천영화중고등학교를 넘기기 위해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천주교 서울대교구)과 1960년부터 교섭하기 시작하였고 1962년 3월에 인천영화중고등학교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인수하였으며 이사장으로 윤공희 신부[6] 가 취임하였다. 하지만 그해 4월에 교황 요한 23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 교계설정으로 인해 천주교 인천교구가 공식적으로 독립함에 따라 운영권이 천주교 인천교구로 넘어갔고 그해 11월에 인천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이 설립되자 공식적으로 운영권이 양도되었다. 또한 이사장으로 천주교 인천교구장이었던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주교(한국명: 나길모, 미국인)가 취임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 초반까지의 역사는 상당히 혼잡하였지만 굉장히 의미가 있었는데 바로 개신교 학교가 천주교 재단으로 운영이 이관된 것이며, 이러한 예는 한국 역사상 찾아보기가 힘들다.[7]

1963년 인천영화중고등학교는 인천대건중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천주교 인천교구장이자 인천가톨릭교육재단[8] 이사장인 나길모 주교는 1966년 인천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메리놀회 조세프 P. 기본스 신부(한국명: 노봉, 미국인)를 교장으로 임명한다. 노봉 신부는 1971년까지 학교를 운영하면서 미국식 사립학교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입학시 커트라인제도를 실시하여 한 학년당 20~30명만 받고 장학금을 수여할 정도로 우수학생 유치에 온 힘을 쏟았다. 매 방학 마다 덕적도 등 섬 지역에서 영어캠프를 운영하여 학생들의 영어실력 증진에 힘쓰고 우수학생들에게는 미국 연수기회를 주는 등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이고 선진적인 교육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학풍 자체를 매우 엄격하게 하였는데 노봉 신부는 학생들에게 "공부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세요!"라고 하면서 공부를 시켰다고 하며, 1970년대 중반까지 성적과 품행에 따라 학생들의 유급과 퇴학이 매우 자유롭게 이루어 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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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교장 노봉(Joseph P. Gibbons) 신부

당시 인천에서는 제물포고등학교인천고등학교가 양대 명문으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노봉 신부는 앞서 설명한 선진적이고 파격적인 학교 발전 모델로 하여 인천 내에서 바닥에 있었던 학교 위치[9]제물포고등학교인천고등학교에 버금가는 위치로 올려놓았다.[10] 또 이 시기 학급 구성이 타학교에 비해서 굉장히 적은 편이었는데[11] 그 이유는 소수정예로 좋은 교육을 시키려는 교장 신부의 의지였다고 한다.[12] 노봉 신부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대건합창단'을 조직하고 미국 순회공연을 준비하였는데, 1971년에 신병치료로 미국에 입국했던 노봉 신부가 갑자기 선종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봉 신부 사후에 인천교구에서 전적으로 학교 운영을 맡으면서 중고등학교의 시설 확장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더욱 전문적인 교육시스템 정착을 위해서 1983년 교육전문 가톨릭 수도회인 마리아회[13] 로 운영을 위탁한다. [14] 마리아 수도회는 고등학교 중심 운영을 하고자 1985년 문교부에 인천대건중학교 폐교 신청을 하였고, 1988년 40회를 끝으로 인천대건중학교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대건중학교의 학급인가는 그대로 고등학교에 넘어가서 고등학교 학급 증가에 쓰였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1990년 초에 연수구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자 답동에 있었던 재단 소속 인천박문초등학교와 함께 인천대건고등학교를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전하기로 하였으며 1998년 9월에 화수동 교사를 영풍건설에 팔고[15] 동춘동으로 이전했다. 또한 이 시기에 초록색 마이, 하얀 와이셔츠, 검은색 넥타이로 되어 깔끔했던 교복스타일이 1999년 신입생부터 자주색 부직포 자켓, 옥색 와이셔츠, 골프 바지, 빨간색 ㄷㄱ이 새겨져 있는 원색 파란색 실크넥타이로 바뀌어 학생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16]

2006년 7월에 어른의 사정으로 인하여 위탁받아 운영을 하던 마리아회가 철수하고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직영으로 운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서강대학교인천가톨릭대학교에서 교육학 교수를 역임했던 강화성당 김현태 신부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천주교 인천교구의 갑작스러운 운영위탁 철회로 인하여 학교 내부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으나 김현태 신부의 온화한 정책으로 수습이 되었다. 2007년인천유나이티드 U-18 팀이 인천대건고등학교에 유치되었으며, 본관을 증축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2014년에는 제13대 교장으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이자 인천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인 이완희 신부가 취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3 시설

3.1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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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으로 이루어진 학교의 메인건물.

1층은 교장실, 1학년 담임실, 진로상담부, 행정실, 교사휴게실, 지구과학실, 물리실, 영어교화실, 1학년 심화실이 있다. 미션스쿨 답게 고해실과 성당이 있는데, 학생들은 한두번 볼까 말까 한 장소.

2층은 멀티미디어실, 어학실, 2학년 심화실, 교지편집실, 논구술길, 도서기획부, 생물실, 서버실, 수학교과실, 영어특성화실, 잉글리시존, 정보검색실, 중앙도서관, 화학실이 있다.

3층은 2학년담임실, 교감실, 미술실, 보건실, 상담실, 수학교과실2, 영어교과실3, 예체능부, 위클래스, 제1전산실, 제2전산실, 중앙교무실, 학생부가 있다.

4층은 3학년심화실, 3학년담임실, 세미나실, 수학교과실3, 방송실 ,음악실, 이냐시오홀, 진학정보검색실, 체력단련실,학생휴게실이 있다.

3.2 생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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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구 테니스장을 밀어내고 지은 건물이다. 전 건물이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1층은 교직원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2층은 2학년 식당, 3층은 1,3학년 식당으로 되어있다.

3.3 대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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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이다. 본관 바로 옆에 붙어있으며 주로 행사를 진행하는 장소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분홍색으로 외부가 칠해져있었으나 언젠가부터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학교의 여러 행사와 큰 미사 그리고 체육수업을 이곳에서 진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학교 행사 뿐만 아니라 천주교 인천교구의 여러 행사도 이곳에서 치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교에서 조금 신경을 쓰는 곳이기도 하다.

미사준비할 때면 수백개의 의자를 나르게 되는 장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뒷쪽에 양옆으로 있는데, 창고와 풍물부 연습실이 붙어있다.

3.4 외부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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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심각한 고차로 인하여 운동장이 본관 3층 출입구를 이용하여 출입할 수 있다. 산을 깎아서 만든 운동장이어서 그런지 다른 학교에 비해 매우 좁은 편이다. 예전에는 비가오면 물도 안빠지던 모래재질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2007년 인천유나이티드 U-18팀을 유치하고 나서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잔디구장으로 바뀌었다. 축구장 1면과 농구장 1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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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장

인천대건고는 예로부터 테니스부가 상당히 유명한 학교였다. 이전에는 현재의 생명관 터에 테니스장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2010년 생명관이 테니스장에 생기자 다시 산을 깎아서 운동장 스탠드 위에 새로운 테니스장을 건설했다.

4 동아리

추가 바람

5 학교 특징

  • 가톨릭 미션스쿨이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엄한 교육방침으로 인해서 학교 분위기가 매우 엄했다. 일명 화수동 빨랫터[17] 라고 불리거나 1년에 200대를 맞지 않으면 졸업이 안된다더라고 할 만큼 교사에 의한 체벌이 자유자재로 일어나던 학교였다. 2000년대 초반에는 정년퇴임을 앞둔 체육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공하나 던져주고 학교 뒤 봉제산으로 올라가서 물푸레나무를 채집하여 손수 매를 만들어 선생님들에게 보급할 정도였다. 또한 두발에 대해 매우 엄격한 편이어서 두발규정이 대폭 완화된 2015년까지 짧은 스포츠머리를 유지하였다. 현 2016년에는 한달에 한번씩 두발검사를 실시하지만 학업에 지장이 있지 않을 정도(...)만 되면 되고 단속에 걸리더라도 깎은 티만 나면 괜찮다고 하는 등 매우 완화된 편이다.
  • 인천이 평준화 지역으로 바뀌고 동춘동으로 이전하면서 고등학교 지망에서 1지망은 항상 미달[18], 2지망에는 경쟁률이 엄청난 일명 보험으로 여겨졌다. 우수인재를 유치하기 위해서 2005년 신입생들 부터 장학금이 대폭 늘어났고 모의고사 점수와 내신 점수를 전교 1등부터 끝까지 복도에 걸어놓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 가톨릭 미션스쿨이고 교장과 일부 교사들이 신부님이기 때문에 종교색이 강할 것 같지만 종교색은 어느 천주교학교와 비슷하게 강하지 않다. 강요하지도 않는다. 학교 행사 때 미사에 참석하는 정도지만 많은 학생들은 이 시간을 수면 보충 시간으로 이용한다(...) 대부분 천주교 학교들은 학교 내에 성당을 조그마하게라도 마련해두는데 지금 학교 내 성당은 동춘동으로 이사오고 나서 몇년 지난 2004년에서야 기존의 창고를 개조하여 만들었다.
  • 아주 특별하고 전인적인 예체능 교육을 실시한다. 미술수업의 경우, 다른학교 처럼 요식행위만 하는 수업이 아니라 직접 조각을 하고, 도장을 만들거나 모형탑을 만드는 등의 수행평가를 한다. 학교 동문인 미술 선생님이 워낙 독특하시고 조소과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수행평가 자체가 매우 시간이 오래걸리는 작업이다 보니 다른 공부를 할 시간이 없어진다며 당시에는 싫어하지만 졸업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진다고 한다. 2009년 즈음을 기준으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업에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일단 완성품을 제출하는 학생이 별로 없다.) 어느정도 신경써서 노력한 티만 내면 점수를 잘 줬다. 애시당초 대입에 별 관련없다고 대충 하는것과 소신껏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하는것중 어느것이 옳은지는.... 음악수업의 경우 학생들의 협력과 참여, 창의성이 중시되는 과제를 주로 내준다.
  • 독서인증제를 인천지역에서 최초로 실시한 학교이다. 학교에서 지정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내면 인증해 주는 제도인데, 사실 독후감이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학교에서 규정한 책을 읽다보니 강제로 읽고 강제로 독후감을 쓰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2003년 당시 독서인증제 도서 난이도가 들쭉날쭉이었는데, 스티븐 호킹시간의 역사가 도서목록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 예로부터 선생님 3분의 이름(양,마,김)과 별명이 체벌과 각종 일화로 유명했다. 한분은 이미 정년퇴임하셨고 두분은 재임하고 계신다. 동문끼리 만나면 먼저 세분 선생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체벌이면 이 선생인데?.... 현재는 저 3분을 많이 언급하는 것 같지만. 4대천왕은 (양,마,김,이)로 3분은 재임하고 계신다.
  • 인천대건고등학교의 위치는 동막역 인근에 위치한다. 승기하수처리장과 동춘동공영버스차고지 그리고 인천평생학습관이 존재한다. 봄에 동막역서부터 대건고까지 가는 길의 벚꽃이 볼만하다. 동춘동공영버스차고지가 근처에 있어서인지, 63번 버스가 등하교시간에 한해 인천대건고 앞에 서곤 했으나 현재는 서지 않고 무지개아파트 앞에서 내려야 하며, 현재는 46번버스가 등교시간에 학교 앞 횡단보도 근처에서 내려 주고, 승차할때는 학교 건너편 공원 근처에서 탈 수 있게 되어있다.[19]
  • 뒷산의 이름은 봉재산인데, 동춘동 이전 당시 교장이었던 안 모 수사님이 범좌산으로 칭해서 많은 학생들이 범좌산으로 잘못알고 있다. 동춘동 이전 당시에 미사일부대가 이 산에 있어서 종종 군인들이 출몰하기도 하였다.[20] 또 산을 끼고 있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 각종 벌레들의 천국이 되며, 2000년대 중반에는 박쥐가 출몰하기도 하였다.
  • 봉재산을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고도차가 엄청나다. 운동장이 다른학교 처럼 1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3층에 위치해 있다.
  • 원래 학교는 3층이었는데, 2002년에 4층이 증축되었다. 4층 역시 좌우 부분은 증축이 되어 있지 않아 2002년부터 2007년에 재학했던 학생들은 좌우부분을 학생 휴게소로 사용했고 송도신도시의 간척과정과 발전과정을 관람할 수 있었다(...) 현재 학생 휴게소로 쓰이는 중간부분은 원래 교사 휴게소이자 물론 교사만 이용하는흡연실이었다.
  • 2016년 4월에 동계 교복 디자인 공모가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2017년 신입생들 부터 새로운 디자인의 교복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새로운 디자인도 핏빛(...)을 유지할것 같다
  1. 굳이 따져보면 3대건 중에 대건고등학교가 1946년에 개교하여 가장 오래되었으며, 논산대건고등학교가 1951년 개교하여 두번째이며 인천대건고등학교는 1953년 개교에 천주교 인수는 1963년이므로 가장 막내학교라고 할 수 있다.
  2. 이사장이었던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가 2016년 6월 갑자기 선종하여 보좌주교인 정신철 주교가 이사장 대리를 맡는다, 신임 천주교 인천교구장이 임명되어 착좌할 경우 이 각주를 삭제바람
  3.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쓰이다가 철거
  4. 1960년대에 지어져서 1998년 1학기까지 쓰임
  5. 제2대 교장 김기삼 목사, 1948~1950 재임. 한국전쟁 당시 납북.
  6. 1924~ 가톨릭대학교 교수 출신의 성직자. 1963년에 신설된 천주교 수원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며 주교가 되었고, 1973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한공렬 대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대주교가 되었다. 사회참여파 주교로 이름이 높다.
  7. 천주교 인천교구는 50여년 뒤인 2014년에 한번 더 이러한 일을 벌이는데, 개신교 학교였던 관동대학교를 무상기증 받아 가톨릭관동대학교로 만든 것이다.
  8. 박문여중고 이외에 영화중고가 교구로 편입되자 교구에서는 재단 분할을 고려했고 1963년 인천가톨릭교육재단이 발족한다.
  9. 어느정도였냐 하면 노봉 신부가 학생들을 테스트 했을 때 기초학력에 못미치는 학생이 대부분이어서 한숨을 쉬었다고 하며, 학생들은 거리에서 대건교표가 붙어 있는 교복을 입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10. 당시 전기고, 후기고 선발이었는데 인천대건고는 후기고 선발에서 언제나 1등이었다고 한다.
  11. 중학교 총 12학급, 고등학교 총 6학급. 중학교는 한학년에 4반, 고등학교는 한학년에 2반이었다. (...)
  12. 이러한 연유로 졸업생이 다른 학교에 비해 매우 적어서 한동안 인천대건고 출신들이 지역사회에 영향을 그리 많이 끼치지 못했다.
  13. 샤미나드 신부가 19세기 프랑스에서 세운 수도회. 한국에서 교육 전문 수도회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목포 마리아회고등학교를 운영한다.
  14. 이러한 시스템은 가톨릭 미션스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교구 소유의 학교가 직영으로 운영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대부분 교육전문 수도회에 운영을 맡긴다. 대표적으로 서울대교구 소속 동성고등학교는 직영인 반면 계성여자고등학교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가 위탁운영하며, 인천교구 소속인 박문여자중고등학교는 노틀담 수녀회에서 위탁운영한다.
  15. 학교 부지에 영풍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6. 교복이 현재 재질로 바뀐고 가디건이 추가된건 2003년 신입생들 부터이다.
  17. 이 별명은 동춘동으로 옮겨가 2000년대 중반까지 동춘동 빨래터로 이어진다.
  18. 연수고나 학익고, 인천고를 쓴다.
  19. 예전에는 4번버스도 섰는데..
  20. 지금은 미사일부대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