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에서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
1 발생과 현황
남침유도설은 사실상 이 설의 거두라는 소리를 들었던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주장 이전에도 발생한 것이다.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좌파언론인 I. F. 스톤의 이론.
I. F. 스톤은 한국전쟁 진행중인 1952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에서 미국과 유엔의 공식 자료를 분석하건데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았던 것을 봐서 커다란 국가적인 음모가 개입되어 있고 이것은 몰락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 미국의 대 공산권 봉쇄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 벌인 거대한 음모라고 정의했다. 다만 1949년에 벌어진 몽금포 전투 때문에 남한북침설이 생기는걸 염려해 미국은 한국에게 정보차단을 요청하고 이에 한국은 참전병들의 입을 막았다는 증언이 있다.
문제는 이런 맹점에도 불구하고 스톤의 이론이 미국의 공산권 봉쇄정책을 비판하고자 하는 학설이 힘을 얻으면서 그것이 사실처럼 받아진 것이다.
스톤의 이론 다음으로 남침유도론을 한걸음 더 발전시킨 건 1960년대 초반 데이비드 W. 콩드였다. 콩드는 1945년 해방부터~1960년대를 다룬 논픽션 <조선 그 불행한 역사>[1]에서 좀더 조직적인 이론을 내새웠다. 이 이론대로라면 38선 분쟁에 발 맞추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남침과 확전을 유도했고 당일날 미국 군부는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역시 증거는 거의 없다고 보는 바다.
흔히 남침유도설의 선구자로 알려진 사람이 미국의 대표적 수정주의 사학자이자 한국학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관련 서적을 집필했을 때에는 소련이 아직 건재했던 냉전 시절이며, 당연히 소련의 기밀문서따위는 입수할 도리가 없었다고 보았으며 일부 밝혀진 여러 공산권 자료들은 모두 미국이나 남한 정권이 조작한 것으로 치부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런 정보의 제약 속에서 서방측에서 가지고 있던 정보만을 토대로 그의 대표작인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커밍스 자신은 기본적인 토양은 스톤의 이론을 긍정하나[2] 이런 저런 음모론 대신에 한국민족의 내적인 역량과 해방 이후 벌어진 혁명적인 움직임과 남한 권력자들의 탄압, 그리고 그러한 순수한 내전을 탄압하는 세력과 미국의 봉쇄주의자들의 결합이 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벌어지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커밍스의 논지는 이전의 남침유도주의자들과 달리 미국과 남한이 유도했네가 아니라 남북한의 순수한 의미에서의 내전을 국제적인 분쟁으로 격화시키려는 움직임에 촛점을 두고 있어서 전쟁을 누가 시작했고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것이 중점이다.
사실 브루스 커밍스는 남침유도설을 명확하게 주장한 적은 없고[3], '한국전쟁의 기원' 초판에 실린 내용은 1950년 6월 우발적으로 벌어진 소규모 국지전이 규모가 커지면서 국가간 전면전으로 비화됐다는 교전확대설에 가깝다.
즉, 흔히 말하는 정교한 남침유도설은 커밍스의 작품이 아니라 이전 사람들의 이론에 유도론자 자신들의 뇌내망상을 결부시켜서 음모론 수준으로 짜맞춘 것이고, 이것이 대한민국 국내에선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학생운동권에 친북/반미 정서가 휘몰아칠때 대대적으로 유포된 것이다.
현재는 공산권 문서 자료 공개 때문에 말 그대로 음모론의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사실상 학계에서는 퇴출되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는데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넘겨주기 전에도 이미 일부 학자들이 그 문서를 열람하고 연구했었다. 브루스 커밍스 역시 그 중 하나. 그러나 이 자료들을 가지고 북한의 전쟁도발의 의지를 주장했던 웨더스비 부부의 의견에 대해서 자료의 취사조작이나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로 깐 사람이 바로 커밍스이다. 즉 커밍스도 이 자료를 이용했지만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으로 한국전쟁에 관해 권위자로 손꼽히는 박명림 교수는 이런 태도에 대해서 "왜 연구자들은 북한이나 소련발표 자료는 믿으면서 남한에서 제시한 자료는 조작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라면서 일침을 가한적도 있다. 혹시 박명림을 수꼴이라고 오인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부연하는데, 박명림은 대학원 박사과정 시절 지금도 국내 진보/좌파 계열에서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한국전쟁 부분을 집필한 경력이 있다.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철저하게 실증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이다.
정병준 교수는 한국전쟁(2006)에선 오히려 60년대 국방부에서 낸 책들을 호평한 바도 있다. 교차검증을 해본다면 북한 측 저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사실을 담았다고 평가했다.예로 북한과 다르게 국방부 측 책에선 38선 국지전 당시 한국군이 선제공격한 사실도 담겨있다. 그뿐 아니라 해방 후 좌우분쟁도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히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다뤘다.물론 한국 측도 왜곡한 내용은 있고 정병준 교수도 책에서도 이점은 분명히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러나 소련 문서 자료를 다루지는 않고, 주로 기존의 자료들을 위주로 반박을 펴고자 한다.
한마디로 오랜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주류에 대한 반감과 왜곡된 그리고 부실한 역사교육이 불러온 희대의 해프닝이다. 이미 다 논파되었고 차후 제대로 된 역사관을 정리하면 된다. 사실 남침유도설이라는 것이 기존의 역사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관점이라서 왠지 그럴 듯해보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다. 특히나 한국 사회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북한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불가능했으니 더더욱 그렇다. 아닌 게 아니라 한겨레21에서도 학계에서는 남침유도설이 유력하다는 어이없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었다.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에서 폐기처분된 이 설을 묘사했다.
2013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커밍스는 이 설을 말한적 없다고 부인했다. 과거의 이론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일부에서 자신의 의견을 곡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을 말하다 인터뷰에서도 재차 강조하고 있듯이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의 핵심은 '한반도는 1945년부터 사실상 내전상태였고 1950년 6월 25일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이후의 전쟁도 남침유도설 보다는 교전확대설에 무게를 두고 있었으며, 지금도 교전의 연속을 통한 확전이라는 주장은 유지하고 있다. 루스 커밍스가 남침유도설을 확정적으로 서술한 것처럼 퍼진 것은 냉정하게 말해서, 국내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 남침유도설의 주장과 반박
2.1 미국의 빈약한 군사원조
6.25 전쟁 당시에 대한민국 국군의 전력은 조선인민군에 도저히 미치지 못했으며, 이는 개전 며칠만에 서울이 함락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남침유도설에서는 이를 근거로 하여 미국이 의도적으로 한국군에 지원을 해주지 않아 한국군의 전력이 약해졌고, 그 결과 북한이 공격을 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럼 왜 미국은 군사원조에 소극적이었는가?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 대규모 군축에 들어가며 잉여 군사장비가 말 그대로 넘쳐 흐르던 시절이라 한국이 요청하는 군사원조 정도는 별 무리 없이 지원이 가능했다. 때문에 남침유도설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당시 미국은 한국이 북침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한국 대통령 이승만은 허구한 날 북진통일을 외치고 있었고, 군부도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외치는 중이었다. 실제 1948~49년에 걸친 38선 무력충돌을 살펴봐도, 남한쪽의 선제공격이 상당 부분 있었다. 한국 정부가 북진통일의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현재 의견이 엇갈린다. 내부 정치적 목적 및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설과 실제 북진을 하려고 했다는 설이 양립한다.
거기다 한국은 미국에 실로 얼토당토 않은 군사원조를 요구했다. 전차와 전투기 각 수백대에 구축함급 해군 함정 상당수를 요구했는데, 미국이 보기엔 암만 봐도 이정도의 군사장비 원조 요구는 북진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은 조금이라도 무기를 더 타내려는 뻥카였지만….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군사원조 요구를 수용하기는 커녕, 한국정부 자체 예산으로 시도하는 무기도입에도 태클을 걸었다. 덕분에 공군은 멀쩡한 전투기 놔두고 캐나다에서 연습기 사와야 했고, 해군은 퇴역해서 스크랩 처분 기다리던 연안초계함 사들고 와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다. 서울은 3일만에 함락당했고, 전쟁 2달만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몇몇 국군 부대의 결사적인 저항과 주일미군을 선두로 유엔군의 참전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유엔군 참전에는 정말 기적적인 행운이 숨겨져있었다. 국공내전 패배로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쫓겨나자 소련은 중국 정통정부의 권한(상임이사국)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이동시켜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 국가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소련은 유엔 회의에 보이콧을 선언했고 마침 그 사이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엔은 곧바로 파병을 결의한 것이다. 물론 소련이 UN 회의에서 반대를 표명했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참전했겠지만, 그 사이의 지연이 전황을 어떻게 바꿔놓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었을 전황은 절대 남한과 미국에게 유리했을 리 없다.
즉, 미군의 대비는 '남침유도'로 보기에 과도할 정도로 빈약했으며, 침략에 대한 대비는 사실상 되어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최소한 남한이 남아있어야 북한에 반격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정작 실제 모습은 미군이 참전하고도 인천 상륙작전 전까지 버틸 수가 없다였으니.
2.2 국제적 동향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태평양-아시아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설명하며 그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를 제외시켰다. 소위 애치슨 라인이다. 때문에 남침유도설을 지지하는 쪽에선 미국이 의도적으로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하여 북한의 침공을 유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당시 미국의 핵심 전략과 가상적국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당연히 소련이다. 미국의 대소련 전략에서 핵심 구상은 유럽전역에서의 방어전과 이후의 역습이었다.
미국과 그 동맹국은 소련에 비해 육군 규모가 작아서 지상전 전선은 최대한 축소해야 했고, 반면 해상전력은 압도적으로 우월해서 육로로 연결되지 않은 곳이거나 비중이 낮은 곳은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은 유럽이었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선 해군으로 방어가 가능한 해상작전 중심의 전선만 유지하면 충분했으며 그곳이 바로 일본이었다. 육로로 연결된 한국은 관심외 대상이자 애시당초 소련과의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포기할 동네였다.
또한 미국의 군사 산업 증강을 논한 NSC-68을 들고 와 남침유도설의 근거로 삼기도 하는데, 이 문서는 애치슨 선언보다 후에 결의된 것이다.(1950년 4월 14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군수 장비를 증강하는 안을 결정하고 전쟁을 유도해야 할 텐데 실제는 정반대이다. 거기에 더해 1949년 12월 30일(애치슨 선언에서 겨우 2주 전이다!) 발표된 NSC-48에서는 오히려 소련의 공세에 대해 더욱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여기서는 남한을 포기하는 안이 계획되어 있다. 오죽하면 스탈린이 이 문서를 스파이를 통해 몰래 입수하고 전쟁에 동의했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이니…. 즉, 애치슨 선언을 남침유도의 목적으로 보는 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이다.
2.3 미군의 신속한 개입
미군 선발대인 스미스 대대는 7월 초에 한국에 전개했고, 본대인 24사단도 곧 한국에 도착했다. 의도적인 남침유도였기 때문에 미군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남침유도설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미군 점령하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일본에 미군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들이 옆동네인 한국에 신속하게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24사단은 제대로 된 중장비도 없이 거의 몸만으로 한국에 전개했다.
무엇보다 이들 미군은 북한군에게 털렸다. 미군에겐 T-34에 맞설만한 대전차무기도, 맞상대할 전차도 없었다. 군수 장비를 팔겠다면서 정작 '팔아야 할' 군수 장비는 갖춰놓지 않은 것이 말이나 될까? 게다가 장비 이전에 사단 병력 확보도 안 되어, 영창에 수감 중이던 애들까지 다 꺼내오고 구석에 박아놓은 전차도 수리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남침을 유도한 미국이 이렇게 어설픈 애들을 초반에 파견해서 개털리고 자국군 희생을 키울까?
3 공산권의 주장
3.1 중국
중국에서는 대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미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한반도의 인민을 도우러 의용군을 보냈다는 식으로 가리키며 누구 책임인가는 교묘하게 언급 안 한다. 그러나 2013년 기준으로는 중국에서도 가방끈 긴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알고 있다. 1996년 국방일보에선 1면으로 중국이 남침유도설을 북한의 남침으로 역사 교과서에서 바꾼다고 기사를 냈다가 언론으로 알려지면서 중국대사관의 항의를 듣고 국방일보답지 않게 정정 기사를 싣은 바 있다.
중국에서 6.25 전쟁 참전을 합리화하는 명분은 '남한군과 미군이 북한의 침략을 받은 다음 반격하여 38도선을 넘어 점령했기 때문에 이는 방어전쟁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침략이 되었으므로 중국군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어이가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식이면 소련은 동프로이센 앞까지 진격한 다음부터는 소련 스스로도 인정하는 독일 영토니 그 전까지의 피해가 얼마나 심하건, 히틀러가 어떤 인간이건 간에 나치 독일과 휴전했어야만 한다.
어찌되었든 미국과 한국이 듣기엔 흠좀무하긴 하지만, 주로 중국 측의 주된 주장은 '미국이 잘못했으니 그래서 우리가 싸우러 갔다' 쪽이고, 남한과 북한 간에서는 '북한이 남한을 먼져 쳤다' 는 점은 이미 냉전 기간부터 가르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엔 소련,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도 '남한이 먼저 잘못했다' 라고 누명 북한의 입장을 따랐으나, 사실 공산권 쪽에서 김일성이 남침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바득바득 우겨댄 걸 본인들도 잘 알고, 억지스러운 주장이니.. 결론적으로 중국 측은 이 전쟁에 대해선 미국의 개입 건을 문제삼아 계속 태클을 걸고 있긴 하지만, 북한이 선제공격을 했다고 가르친다.
3.2 북한
6.25 전쟁의 발발과 경과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이러하다. "미국이 남한군을 철저히 강화한 다음 남한군을 사주하여 북한을 침공, 북한은 여기에 반격하여 미국을 참패시키고 승리하였다, 정전협정은 미국의 항복문서이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북침에 반격한 것이 6.25 전쟁이라고 가르친다. 북한의 주장은 남침유도설이 아니라, 그냥 '북침설'이며 게다가 정전협정은 '미국의 항복문서'이고 '북한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서는 '남침유도설'조차도 입 밖에 냈다가는 반동으로 몰리게 될 듯 하다. 브루스 커밍스 역시 북한에서 별로 자기 의견 지지하지도 않으며, 자신을 친북으로 몰아붙이는 시각들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북한은 현재 유일하게 북침을 주장하고 있고, 중국이나 소련 등 공산권도 북한 편 들겠다고 북침을 주장한 건 50~60년대 뿐이었다. 전쟁 당시 다른 국가들도 당시 다 북한이 쳐들어오는 걸 분명히 듣고 알고 있었고.. 워낙 어이가 없는 억지이니 공산권 국가들 모두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걸 이미 오래전에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