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윤

오서 「제갈등이손복양전(諸葛滕二孫濮陽傳)」
제갈각등윤손준손침복양흥

滕胤
(?~256)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문관으로 자는 승사(承嗣). 북해 극현 출신으로 손일의 매부이며, 제갈각의 아들 제갈송과 오찬[1]의 장인이다.

2 생애

2.1 손권 시절

백부 등탐과 부친 등주가 유요와 같은 고향 출신이라 대대로 교제하면서 후에 전란을 피해 유요에게 의지하게 된다. 손권이 등탐, 등주를 모두 등용하지만 모두 요절했는데, 221년에 손권이 오왕이 된 후에야 등윤은 도정후로 봉해졌다.

장소, 손소, 정례와 함께 주나라와 한나라의 조정의 의례를 채택해 선정했으며, 어려서부터 절개와 지조가 있으면서 의표가 아름다운 것으로 이름을 알려 20살에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30세에는 단양태수가 되었으며, 그 후에는 오군과 회계군에서 일을 해 부임 받은 곳마다 칭찬을 받았다.

이궁의 변 때는 손화파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251년에 손권이 질병으로 누워있을 때 경도로 와서 태상에 임명되어 제갈각과 함께 정치를 보좌했다.

2.2 제갈각 정권 시절

252년에 손량이 즉위하자 위장군이 더해졌다. 제갈각이 전군을 동원해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할 때 그를 말렸지만 제갈각은 그를 안락함만을 챙기는 자라 욕하면서 등윤을 도하독으로 임명해 본국에 남아 남은 일을 통솔하도록 했으며, 등윤은 낮에는 빈객을 접대했다가 밤에는 문서를 열람해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했다고 한다.

253년에 제갈각이 패하고 돌아오자 섭우는 이미 제갈각이 죽을 것을 알고 등윤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세력이 강성할 때는 냇물과 산의 근본을 뽑을 수 있지만, 하루 아침에 실패하여 곤경에 처했을 때는 사람들의 감정이 각양각색이 됩니다. 이런 일을 말하면 슬퍼 탄식하게 됩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손준은 제갈각을 죽이기 위해 자리를 꾸몄는데, 제갈각에게 온갖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데다가 자신의 심복 장약과 주은이 밀서로 입궐을 말리지만 복통을 핑계로 돌아가려고 하자 이 때 등윤이

당신은 행군에서 돌아와 아직 만나지 않았으니 오늘 주상께서 주연을 베풀어 당신을 초청했고 당신은 이미 문까지 이르렀으므로 마땅히 힘을 다해서 가야 합니다.

라고 하니 등윤이 말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제갈각은 입궐했다가 살해되었다.

2.3 손준 정권 시절

제갈각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등윤은 제갈각의 아들 제갈송의 장인이라 손준에게 알려 사직하려고 한다. 그러나 손준은

곤과 우의 죄는 서로 미치지 않았는데 등후께서는 어찌 그러십니까?

라며 말리자 그 둘은 속으로는 어떤 은혜도 없었지만 겉으로는 서로 포옹했다고 하며, 이 일로 등윤은 승진해 고밀후가 되어 손준과 이전처럼 같이 일하게 된다.

255년에 촉나라 사자가 와서 방문했을 때 손의, 장이, 임순 등이 손준을 죽이려고 하다가 들통나 손의가 자살했을 때 등윤은 그의 형제 손자[2]를 죽였으며, 같은 해에 손준은 광릉에 성을 쌓자는 제안을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 곳에 성을 샇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준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할 때 혼자 나서서 손준을 막으려고 했지만 듣지 않아 그대로 실행했다가 예상대로 실패해 애꿎은 인력과 자재만 낭비했다.

256년에 관구검문흠의 반란에 합세하고자 출병했을 때 등윤과 손준은 석두까지 가서 출정 부대를 떠나보내면서 함께 여거의 진채를 들렸는데, 여거를 싫어하는 손준은 가슴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떠났다가 며칠 후 제갈각에게 공격당하는 꿈을 꾸고 두려워하다가 병으로 죽는다.

2.4 손침 정권 시절

256년 9월 19일에 여거, 문흠, 당자 등이 표를 올려 등윤을 승상으로 임명하도록 하자 손침은 30일에 등윤을 대사마로 임명했으며, 9월 16일에 죽은 여대의 자리를 대신해 무창에 주둔하도록 했다. 여거는 이 일에 드디어 참지 못하고 분노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등윤에게 협력할 것을 요청하면서 손침의 폐출을 시도했으며, 이에 손침은 화융, 정안을 등윤에게 보내 여거를 체포하도록 했다.

하지만 등윤은 반대로 화융과 정안을 체포한 다음에 군사들에게 수비 태세를 갖추도록 하면서 양숭과 손자를 불러 손침이 난리를 일으켰다고 보고한 다음 화융 등을 압박해 편지를 써서 손침을 힐난하도록 했다. 이런 등윤의 행동에 손침은 반대로 등윤이 모반했다고 보고하면서 유승에게 작위를 약속해 등윤을 포위하게 한다.

등윤은 또 다시 화융 등을 압박해 조서로 병사를 일으키게 했지만 듣지 않자 화융과 정안을 살해했는데, 이 때 등윤의 안색은 변하지 않으면서 평상시와 같이 웃으며 말을 했다고 한다. 하라구로

이 때 어떤 사람이 창룡문으로 등윤이 나가는 것을 장사들이 본다면 그들이 모두 손침을 떠나 등윤에게 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당시 밤이 이미 깊어 아직 군대를 일으켜 궁궐로 향하는 것은 위험했으므로 등윤은 여거와 약속한 때를 기다리면서 수하의 병사들에게 경계를 강화하도록 명령한다. 부근의 길에 주둔하던 여후와 싸울 때 모두 등윤을 위해 사력을 다해 떨어져 흩어지는 자는 없었지만 태풍이 불고 날이 샐동안 결국 여거는 오지 않았으며, 손침은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와 등윤과 그의 장사 수십 명을 죽이고 등윤의 삼족을 멸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일족이 멸족 당할 때 손호의 아내 등방란과 그녀의 부친 등목은 등윤과의 사이가 소원해 변방으로 유배갔다가 대사면 때 돌아왔으며, 손일이 위나라로 항복할 때 데리고 간 등윤의 처자식 중에서도 몇 명은 살아났다고 한다.

등윤 사후 258년에 손휴가 손침을 죽일 때 손침이 유배나 노비로 만드는 것 등으로 묵숨을 구걸하자 등윤과 여거에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예시로 들면서 손침은 죽임을 당했다.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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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가 제일 높은 문관형. 그래도 특출나진 않아서 존재감이 없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34/40/76/78. 누선,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32/41/71/76/64에 특기는 농업, 유인 2개 뿐. 농업 셔틀로 쓰라고 만들어 준 듯한 무장.

삼국지 11에서의 일러스트는 왠지 독일의 어떤 분과 흡사하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대전판에 등장.
  1. 오경의 손자인 오찬
  2. 손의와 손자는 손교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