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을 아는 발라더[1], 모든 앨범의 전곡을 작곡한 싱어송라이터[2]
그리고 신승훈, 윤종신을 잇는 감성 발라드 싱어송라이터.[3]
金東律 / Kim Dong Ryul[4]
x330px | |
이름 | 김동률(金東律) |
출생 | 1974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청담동[6] |
신체 | |
가족 | 1남 2녀 중 첫째 |
학력 | 휘문고등학교 버클리 음대 작곡, 영화음악 학사 연세대학교 건축학과 중퇴 |
데뷔 | 1993년 MBC 대학가요제 '꿈속에서' |
소속사 | 뮤직팜(2008~) |
그룹 | 전람회[8], 카니발, 베란다 프로젝트 |
별명 | 률옹, 베토벤을 아는 싱어송라이터, 뉴리 |
사이트 | 공식사이트, 페이스북, 트위터[10] |
1 소개
대한민국의 발라드 가수, 싱어송라이터, 음악 PD.
서정적인 비브라토의 선구자라고 할 정도로 대한민국 발라드 가수 중에서 상당히 다양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이다.
2 약력
2.1 어린시절
김동률은 1974년 서울 성동구(지금은 강남구)에서 치과의사(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후 역삼초등학교와 단국대학교 부속중학교를 거쳐 서울 사학 명문 중 하나인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에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11]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부친의 직업은 치과의사로서, 저소득 노인 대상으로 무료 진료도 하시는 분으로, 본인이 가수 김동률의 아버지로 밝혀지는 것을 무척 꺼리신다고 전해진다(관련 기사에서 유명가수 K의 아버지라고만 나왔다). 김동률이 비교적 괜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음악으로 먹고 살겠다고 하니 "음악이 이제껏 너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었을텐데, 그걸 직업으로 하면 더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 것이 될텐데 괜찮겠냐?"라고 조용히 물으셨다고 한다. 덕업일치의 어려움을 고려한 부친의 조언은 그의 직업적 통찰을 엿보게 한다.
집안 분위기가 학구적인데다가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위해 다른 것들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피아노 치는 것만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김동률의 유일한 취미는 피아노 연습이었는데, 다른 애들이 오락실 다니고 만화방 다닐 때 피아노 가지고 놀았으니 음악에 대한 이해가 빠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휘문의 김동률" 하면 공부 잘 하고 음악이 아주 뛰어난 학생으로 지역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12]한 마디로 될성부른 나무.
2.2 1993년~1996년: 대학가요제 입상 및 데뷔
대학 입학 직후 서동욱(기업인)과 만든 그룹인 '전람회' 로 93년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대상과 특별상을 모두 따내는 대박을 치면서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콘서트 등에서 당시 이야기를 할 때면 꼭 대상과 특별상을 받았다며 상 두 개 받은 것을 강조한다. 당시 본 무대 이전에 팀별로 리허설을 한 번씩 했었는데, 전람회의 곡을 들은 다른 팀들이 "올해 대상 타기는 글렀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일화가 있다.[13]
김동률은 사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가지고 놀긴 했으나 오로지 클래식만 다뤘기 때문에 대중가수로서의 자신감은 크게 없었다고 하는데, 대학가요제 대상이 그에게는 대중가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을 부여한 셈이다. 요즘 같은 기획사 시스템이나 오디션 시스템이 전무했던 당시의 대학가요제는 기성 음악계에 기존에 없었던 형태의 충격을 주는 역할을 해왔는데, 굳이 따지면 대학가요제 대상 출신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아티스트로 인정받은 것은 사실상 김동률이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듬해 1994년에 대영AV[14]에서 유재학과 신해철이 프로듀서를 맡아 전람회 1집 <EXHIBITION>을 내놓았고[15], 앨범 타이틀곡인 '기억의 습작' 이 첫 히트곡이 되었다. 1994~96년에는 방위병으로 근무했다. 당시 감기에 심하게 걸려서 지하철 안에서 연신 코를 훌쩍이고 있었는데, 맞은 편에 앉아있던 팬이 '그때 휴지를 드리고 싶었는데 용기를 못내서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냈다나.
전역 후 2집 'Strangers…'을 발표했다(2집 제목이 그냥 'Exhibition 2'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이 앨범에서는 '취중진담' 이라는 두 번째 히트곡이 나왔지만, 동시에 '유서' 라는 곡이 히사이시 조 작곡의 '천공의 성 라퓨타' OST에 나오는 음악과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 논란이 일어났다. 지금처럼 일본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한국 대중음악계의 '왜색' 문제를 거론할 때면 지금도 종종 언급되는 에피소드다. '유서'의 후렴(1분 20초~1분50초)과 라퓨타의 반복되는 메인테마와 가락이 상당부분 일치한다. 이 논란 때문인지, 이후 김동률은 이 노래를 어디에서도 부르지 않고 있다.
2.3 1997년: 전람회 해체, 그리고 카니발 결성
전람회 활동은 멤버인 김동률과 서동욱 중 서동욱이 전업 음악인의 길보다는 공부에 전념하려는 의지를 보이면서 1997년 1월 전람회 3집 '졸업'을 발표한 뒤 2월까지 마지막 콘서트를 연 뒤 해체되었다. 해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루머가 있었는데, 2008년 김동률 5집 발표 즈음의 가수 인터뷰에서 전람회를 해체했던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나는 음악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서동욱은 할 수 있는 게 매우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했다. 해체 이후에도 서동욱과 김동률은 간간히 만났으며 2001년 김동률 3집앨범에도 참여했다. 2008년 모놀로그 콘서트 때도 서동욱이 잠깐 짬을 내어 찾아왔는데, 서동욱은 공연만 보고 바로 돌아가야 해서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왔지만, 기사가 엄청 나는 바람에 가족들에게 들켰다. 그리고 영어로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어머니께서 싸늘한 목소리로 전화하셔서 "너 한국에 있니?"라고 하셨다나. 자세한 내용은 서동욱(기업인) 항목 참조. 김동률 5집 속지를 보면 서동욱에게 전하는 전람회 20주년 앨범 내자는 말이 있는데, 전람회 데뷔 20주년인 2014년에 발매된 김동률 6집에는 아쉽게도 서동욱이 참여하지 않았다.
전람회 해체 후 약 반 년동안 KBS 2FM의 라디오 프로그램 'KBS 김동률의 인기가요' 를 진행했다. 마지막 방송은 1997년 11월 2일이며, '통학 버스'에 비유한 마지막 방송 엔딩은 지금도 인터넷에 많이 검색될 정도이다. [16]
이적과 함께 프로젝트 듀오인 '카니발' 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카니발 앨범에서 유명한 곡이라 한다면, 인순이가 나중에 리메이크해서 더 유명해진 '거위의 꿈'이 있다. '그땐 그랬지'도 유명하다. '비누인형'은 중학교 교과서에 나왔다고 한다.[17]
2.4 1998년: 정규 1집 발매 및 솔로 활동
1998년 '망각의 그림자(The Shadow of Forgetfulness)' 라는 타이틀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했고, 그 해 12월 24~26일에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첫 솔로 콘서트를 개최했다. 한 때 이 콘서트 내용을 무단녹음한 파일이 넷상에 돌아다녔는데, 가수 본인이 속상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다. 지금은 다행히 소멸된 듯 하다. 이 앨범에서는 기존의 전람회 스타일에서 김동률 본인의 음악적 색깔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나는데, "Cosmos" 같은 곡은 윤상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듬해 미국의 버클리 음대에 입학해 작곡, 영화음악 작곡을 복수전공했다.[18] 버클리 음대 입학 후 한동안은 상당히 해맸다고 한다. 본인 나름대로는 음악에 어느 정도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공부하는 동기생 중에 고수가 너무 많아 좌절했다고. 특히 재즈 피아노 전공의 우에하라 히로미(上原ひろみ)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괴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히로미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4~5분 내의 곡 내에서 도입과 전개, 절정, 결말을 다 포함시키는 네가 더 괴물처럼 보인다"라고 답하여 김동률은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지금도 김동률은 히로미는 막역한 관계인데, 히로미의 결혼식에도 초대되었다. 일본에선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청첩장을 보내기 때문에, 친한 건 분명한 듯. 김동률은 히로미가 내한할 때마다 공연을 꼬박꼬박 관람한다. 히로미가 최근 내한했을 때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동률과는 무슨 사이냐는 질문을 받자 음악적 동반자라고 답하면서도, "제발 김동률과 남녀관계 아니라고 써주세요~ 테러 당하기 싫어요~"라고 하기도.
버클리음대 재학 중 2000년 2집 '희망'을 발표했고, 졸업 직전에 3집 '귀향'을 발표했다. 2집 앨범의 경우, 본인 말로는 실패작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 듯. 콘서트 때 1집 수록곡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반면 2집 수록곡은 '희망' 정도만 나오는 걸 보면, 본인이 그다지 애정하는 앨범은 아닌 듯 하다. 확실히 다른 앨범과 비교하면 음질이 떨어지는 문제는 있다. 하지만 타이틀곡 '2년만에' 도 그렇고, 마지막 곡인 '희망'도 그렇고, '염원'같은 곡도 팬들 사이에서는 무척 사랑받는 곡이니, 너무 흑역사로 취급할 필요는 없을 듯.
이들 앨범에서는 버클리 재학 중 만난 편곡자 케빈 캐스카 등의 조력으로 좀 더 스케일이 큰 형태의 곡들이 많이 담겼고, 영국의 대표적 관현악단인 런던 교향악단도 기용되어 화제가 되었다. 김동률은 자신이 음반 작업을 할 때 음표를 전부 컴퓨터로 찍어서 완벽한 악보를 만들어 연주를 요청하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런던 필하모닉과 같은 전문가들과 작업할 때는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쪽이 오히려 비용과 품이 덜 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워낙 실력이 좋아서, 악보만 정확히 찍어주면 아주 짧은 시간에 작업이 끝난다고 한다.
하지만 2집의 관현악 연주곡인 '윤회' 같은 경우에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스타일에 너무 경도되었다는 비판 여론도 있었다. '한 여름밤의 꿈'이나 '악몽' 같은 경우 전반적으로 뮤지컬 풍의 편성이 느껴지고, '염원'에서는 뱃노래와 사물놀이를 활용하기도 했다. 마지막 곡인 '희망'의 서정성은 유명하다.
3집 '귀향'의 타이틀곡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는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노래로 MBC 생방송 음악캠프 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공중파 순위프로그램 1위를 거머쥐게 된다. 몇주 1위후보에 올랐지만 계속 2위만 하다가 3집 활동의 마지막 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2.5 2003년~2007년: 졸업, 4집, 그리고 방송 활동
2003년에 학사 학위를 따서 졸업했고, 졸업 당시 보도에는 김동률이 최우등 졸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에서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김동률이 최우등 졸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침도 뱉었다는(...) 유희열에게 학점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나 최우등 졸업은 와전이 된 얘기라고 얘기했다. 참고로, 이 방송에서 김동률은 자신의 성적은 A가 아니면 F라며 C를 받는 법을 모르겠다고 해 유희열에게 'shut up!'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귀국 이듬해인 2004년 4집 '토로' 를 발표했다. 같은 해 8월에 두 번째 솔로 콘서트를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했고, 이 중 서울 공연의 실황을 편집한 더블 라이브 앨범인 '招待(초대)' 가 2005년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CD만 들어있는 통상판과 DVD 포함 하드커버 장정 형태인 한정판 두 가지 형태로 나왔는데 둘 다 지금은 절판 상태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MBC 텔레비전의 음악 프로그램인 '김동률의 For You'나 KBS 2FM의 '김동률의 뮤직 아일랜드'[19] 같은 방송 출연을 위주로 활동했고, 방송 활동 정리 후 베스트 앨범인 '감사' 를 발표했다. 이 앨범 발매 당시, 베스트 앨범을 발매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혀, 발매와 관련된 어른의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 앨범은 전람회 1집부터 솔로 4집까지의 곡들을 정리한 더블 앨범이며 1번 CD에는 전람회 시절의 음악이, 2번 CD에는 솔로 시절의 음악이 수록되어 있다. 1번 시디 1번 트랙에는 특별히 새로 작곡해 녹음한 '감사'가 수록되었는데 이 곡으로 제9회 KBS 바른언어상을 수상했다.
2.6 2008년: 정규 5집 <Monologue>
솔로 5집 이래 소속사는 뮤직팜으로, 이적, 체리필터 등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 이상순 역시 같은 소속사에 있다.
2008년 1월 25일에 5집인 'Monologue' 를 발표하면서 음악 활동을 재개했는데, 13만장을 판매하여 그 해 나온 가요 앨범 중 최다 판매량을 기록한 앨범으로도 꼽혔다. 4~5월 사이에 고양과 성남에서 'Prologue I/II', 서울에서 'Epilogue' 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2004년 초대 콘서트와 마찬가지로 2008 콘서트 역시 CD와 DVD가 나온다는 루머가 있었다. 김동률은 당시 라디오에 출연하여 "녹음은 해놨는데 잘 모르겠어요"라고 발언. 결국 2009년 5월에 트리플 CD 앨범으로 나왔다. 이전 라이브 앨범과 달리 DVD는 나오지 않는데, 김동률 본인은 이미 초대 콘서트 앨범 발매 당시 "초대 콘서트 DVD 만들다가 죽을 뻔 해서 앞으로 DVD는 절대 안만들 꺼에요"라고 밝힌 바 있다.
카니발 10주년을 맞이하여 2008년 12월의 콘서트를 열었으며, 2009년 10월에는 앵콜 형식으로 솔로 콘서트인 'Prologue III' 를 서울에서 다시 개최했다.
2.7 2010년: 베란다 프로젝트 활동
김동률은 2002년께 사진 동호회에서 그룹 롤러코스터의 멤버 이상순을 알게 되었다. 2009년 모놀로그 앵콜공연까지 마친 김동률은, 친구 이상순이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난다. 사람들은 네덜란드 다녀오겠다는 김동률의 글을 보고 그냥 놀러갔다고 생각했고, 김동률 본인도 그냥 편하게 놀러간 거였으나, 그냥 녹음기 틀어놓고 이상순과 네덜란드 골방(...)에서 막 생각나는대로 노래를 부르다, 이거 음반으로 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베란다에서 기타치고 노래하다 프로젝트 그룹 '베란다 프로젝트'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김동률이 먼저 한국으로 들어와 음반 작업을 시작하고, 이상순과 앨범을 완성하여 2010년 5월 18일에 음반이 출시되었다. 앨범 타이틀은 'Day off'. 발매 직후 실시간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당시 원더걸스와 엠블랙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한다.# 8월 집계에서는 2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2010년 발매 앨범 중 판매순위에서는 12위다.
베란다 프로젝트의 향후 구상에 대해서는 '그냥 잘 모르겠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같이 작업한 것이라 미래에 대해서도 너무 깊게 고민하지는 않는 듯 하다. 다만 김동률은 베란다 프로젝트 작업을 하면서 전람회 시절과 카니발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고. 함께 하니까 좋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2.8 2011년: EP(5.5집) <KimdongrYULE> 발매 및 솔로 활동 계속
2011년 6월 27일[20],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서 정재형과 유희열에게 디스를 당했다. 노래부를때 입 크게 벌려서 싫고(...), 쓸데없이 가사로 까이고(...) , 이 날 방송의 백미는 청취자와 유희열이 한 몸이 되어 김동률을 깐 것(...) 그리고 김동률은 복수를 계획하는데...
청취자 : 김동률은 이빨이 너무 커요.
2011년 7월 20일 이효리와의 열애설도 아닌 '결혼설'이 터졌다. 당연히 양측 다 부정. 그리고 김동률은 동료 뮤지션들에게 난데없이 까이고 있다. 자신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이 사건 이후로 트위터에서 이효리를 '자기'라고 불렀다. 시기 상으로 볼 때 베란다 프로젝트로 이상순과 함께 하던 시기와 한창 이상순과 이효리의 열애 시기가 겹치는데, 이상순을 만나기 위해 베란다 프로젝트의 활동 영역에 자주 방문하던 이효리를 보고 연애 대상을 이상순이 아닌 김동률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만 해도 이상순은 못친소 출연 이전 조정치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뮤지션이었으니까. 이후 라디오스타 200회 특집에 출연한 이적은 해당 루머가 김동률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으며 옆에서 듣던 정재형은 물개박수를 쳤고, 존박은 웃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다.
2011년 11월 15일에 EP 'KimdongrYULE'[22]을 냈고, 12월 24~26일에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발매 기념 콘서트를 개최했다. 본 EP 앨범은 오랜만에 여성가수와의 듀엣곡('새로운 시작')이 포함되었다. 이 곡은 원래 듀엣을 생각하고 만든 노래는 아니라서 먼저 김동률 솔로곡으로 녹음을 하고, 너무 밋밋한 느낌이 들어서 듀엣을 할 여가수가 누가 없을까 하다가 안테나뮤직에 소속된 박새별에게 듀엣을 부탁했다. 참고로 김동률과 이적은 2010년 안테나뮤직에서 개최한 대실망쇼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박새별의 노래를 듣고는, 저렇게 훌륭한 노래실력을 가지고 있는 가수가 안테나뮤직에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그날 나온 정재형, 유희열, 루시드폴, 페퍼톤스를 한 번에 묶어서 깐 적이 있다. 박새별은 김동률이 부르니까 무작정 가서 시키는대로 녹음을 했는데, 김동률은 박새별에게 별다른 언질 없이 솔로버전과 듀엣버전 중에 고민을 하다가 듀엣버전을 앨범에 넣었고, 박새별은 자기 목소리가 김동률 앨범에 들어갔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이에 대해 김동률은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제가 정말 나쁜 놈이에요"라며 스스로를 디스했다. 그리고 이 콘서트에서 박새별은 듀엣을 하러 나와 심하게 떠는 바람에 무대를 혼자 힘으로 대차게 말아먹었고 김동률은 무대 위에서 박새별을 갈궜다(...).
앨범을 낸 11월 15일 당일에 성시경의 FM 음악도시에 출연했다.[23] 종전 유희열과 정재형이 디스한 것의 반격(?) 차원에서인지 성시경과 함께 유희열을 위 아 더 월드로 함께 깠다. # 성시경에 따르면 유희열은 과장의 달인이라 카더라 유희열&정재형 vs 김동률&성시경 김동률에 따르면 가래요정 정재형과 유희열이 라디오에서 자신을 디스한 것을 복수하고 싶었다고 한다(...)
청취자: 조무래기 김동률에게 가래요정 정재형과 나부랭이 유희열이란?성시경: 두 분에 대해 일자평으로 하신다면?
김동률: 안테나 것들?
성시경: 정동인 씨[24]가 욱하시겠는데요.
당시 음악도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양 쪽에서 들렸다고 카더라(...)
파일:/image/038/2011/12/27/20111227100254 1 rstarlhy.jpg
2011년 12월 한솥밥을 먹게 된 존박과 같이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때 이후로 김동률이 몇 번 존박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교류가 있었는데, 서로가 만나기 전 존박은 김동률이 너무 무서웠고, 김동률은 미국에서 자란 존박이 잘 따라올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작업해보니 너무 잘 맞았고, 김동률은 존박을 반듯하게 자란 청년이라고 극찬했다.
2.9 2014년: 정규 6집 <동행> 발매 및 토이 객원보컬 참여
이 해는 김동률 데뷔 20주년이었다.[25]
2014년 10월 1일 3년 만에 정규 앨범인 6집 '동행'을 발표하여,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달렸다. 11월 1일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6집 앨범 발매 기념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 '동행'을 개최한다.[26] 타이틀곡 '그게 나야'는 10월 10일자 뮤직뱅크에서 1위 후보에 올랐으나 에일리의 '손대지마'에 아쉽게 밀렸다. 그러나 10월 12일자 SBS 인기가요에서는 1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10월 17일자 뮤직뱅크에서는 지난주에 고배를 마시게 한 에일리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아쉽게도 직접 출연은 없었다.
인기가요와 뮤직뱅크 1위 이후 DC인사이드 김동률 갤러리 갤러들이 1위 가수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후 김동률은 자신의 SNS를 통해 뮤직뱅크 1위 트로피와 조공 받은 것을 인증했다.
2014년 11월 18일 발매된 토이(유희열) 7집 <Da Capo>에 객원보컬로 참여했다. 곡은 "너의 바다에 머무네". 성시경이 보컬을 맡은 타이틀곡 "세 사람", 이적이 맡은 "Reset" 다음으로 음원 차트 상위권을 쓸고 있다. 김동률과 유희열이 꽤 친함에도 이번 토이 앨범 참여는 처음인 셈. 대신 곡이 평소의 김동률 곡과 달리 미묘하게 높다(...) 참고로 해당 곡은 유희열이 가족들과 바다에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을 때 썼던 곡이라고.
2.10 2015년: 세 번째 라이브 앨범 발매
8월 6일, 2012년 <감사> 콘서트와 2014년 동행 콘서트에서 불렀던 곡을 묶어 라이브 앨범 <KIMDONGRYUL LIVE:2012 감사/2014 동행>을 발매했다. 2004년 <招待> 콘서트, 2009년 <2008 Concert, Monologue> 이후 세 번째 라이브 앨범인 셈. 앨범 표지가 상당히 독특한 게 특징(...)
3 앨범 목록
- 각 앨범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김동률/음반 목록 항목 참고.
김동률의 음반 목록 | ||||
그룹 앨범 (전람회 / 카니발 / 베란다 프로젝트) | ||||
1집 EXHIBITION (1994) | 2집 EXHIBITION 2 (1996) | 3집 졸업 (1997) | Carnival (1997) | Day Off (2011) |
솔로 앨범 | ||||
정규·EP 음반 | 1집 The Shadow of Forgetfulness (1998) | 2집 希望 (2000) | 3집 歸鄕 (2001) | 4집 吐露 (2004) |
5집 Monologue (2008) | 5.5집 KimdongrYULE (2011) | 6집 동행 (2014) | ||
비정규 음반 | 招待 (2004) | Thanks (2007) | 2008 Concert, Monologue (2009) | 2012 감사, 2014 동행 (2015) |
4 수상 경력
- MBC 대학가요제 대상 겸 특별상 (1993. 서동욱과 공동 수상)
- 대한민국 골든디스크 본상 (1997, 2008)
- KBS 바른 언어상 노랫말 부문 (2007)
- 엠넷 KM뮤직페스티벌(MKMF) 작사상 (2008)
- 한국대중음악상 팝 음반 최우수상 (2009)
5 음악 성향
주로 '발라드 가수'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고, 가수 본인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라드 가수'에 두고 있다. 다만 발라드라는 큰 틀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고, 이에 대해 팬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힌 적이 몇 차례 있다. 김동률의 음악을 유명한 몇 곡 위주로 알고 있는 일부 사람들이 쉽게 '김동률의 음악은 비슷하다'고 얘기하는 것에는 다소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고음 보다는 중저음에 특화된 가수로도 인식되는 듯. 유희열은 스케치북에서 김동률을 "저음 바이브레이션의 대가"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흉내냈다 어떤 이들은 김동률이 '고음불가'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로 높은 음을 소화해낼 수 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로 폭넓은 음역대를 소화하는지 여부이고, 소화 가능한 음역대의 폭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창영역에서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는지의 여부이다. 김동률의 보컬을 이 기준에 대입하여 본다면, 다른 가수들보다 특정 이상의 고음을 소화하기 힘들어 할 지는 모르나 소화 가능한 음역이 결코 좁은 편이 아니며, 그 부분의 소화력 역시 다른 가수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 그가 작곡한 곡의 경우, 자신이 소화 가능한 영역을 최대한 살리며 작곡하는데 최저음부터 최고음까지의 폭을 보면 소위 '부르기 힘든 노래'들과 비교해도 그 폭이 매우 넓은 편이다. 대표적인 노래가 4집의 '잔향'인데, 이 노래를 일반인들이 부를 경우, 낮은 음이 가능하면 높은 음에 접근이 어렵고, 높은 부분은 그럭저럭 부르겠는데 낮은 부분은 낮아도 너무 낮아서 어렵다는 문제를 호소한다. 베스트 앨범의 타이틀곡 '감사'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최고음이 2옥타브 솔샵이지만 최저음을 기준으로 음역대를 본다면 3옥타브가량을 사용하는 곡이다.
서정적이고 진솔한 노래가 많다보니 노래방 애창곡에 올라간 노래들이 많다. 게다가 노래들이 대부분 쉽지 않고, 가수 본인도 상당히 독특한 발성을 하는 편이라 너무 잘 부르려하기 보단 가사에 맡겨 진솔하게 하는게 중요하다. 가수의 발성을 따라하기보단 각자의 방법대로 부르는 것이 낫다. 방송에서 김동률의 음악을 부른 사람들을 보면,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라도 가수 본인의 발성을 따라하려고 하면 거의 반드시 망한다. K팝 스타 방송에서 백지웅이 그랬고,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이정도 퍼펙트싱어에서 심하게 망했다. 반면 그냥 자기 좋을대로 취중진담을 부른 존박이라던가,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기억의 습작을 자신의 방식대로 부른 성시경의 경우 의외의 호평.
김동률이라 하면 제일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의 비브라토이다. 목소리에 떨림이 많음에도 타고난 저음으로 떨림을 잘 가려주어 매력적인 음색이 완성된다. 김동률의 창법은 자유자재로 잘 소화하면 매력적인 비브라토로 표현될 수 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데 괜히 따라하는 경우에는 염소처럼 들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사실 이건 음색을 타고나야 하는 듯). 이와 관련된 트리비아가 있는데, 김동률의 노래를 약간 배속 조절을 하거나 음정조절을 하면, 그로 인해 목소리가 변질되고, 숨어있던 목소리의 떨림이 드러난다. 이렇게 들어보면 김동률의 발성이 얼마나 특이한지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의 콘서트나 라이브 무대에서는 역시 무리가 있는지 몇몇 곡들의 조성(키)을 낮추거나(키를 낮추는 노래스타일은 김동률보다는 이적 스타일에 가깝다. 실제로 콘서트를 가보면 김동률은 원키를 사용하는 반면, 이적은 몇몇곡의 키를 낮춰서 노래를 부른다.대표적으로 밑에 서술한 "축배",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등.) 고음역 부분을 아래로 꺾어서 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가령 이적과 부른 '축배' 의 경우, 2004년과 2008년 라이브를 들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2008년 것이 낮춘 버전. 김동률보다 이적이 훨씬 더 낮춰불렀다. 2004년 콘서트와 2012년 감사 콘서트에서 불렀던 '새'의 경우에도 원곡에서 가성으로 부르는 부분을 새롭게 편곡하여 불렀다. 기본적으로 김동률은 음반을 녹음할 때 실제로 라이브로 부를 때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중에 라이브를 할 때 자기가 왜 노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후회하는 경우가 있다고. 가장 후회한 곡은 크리스마스 앨범[27] 타이틀곡인 'Replay'.
작곡한 곡들을 보면, 전람회 1집의 '여행' 같이 경쾌한 스윙 템포의 곡도 있고, 전람회 2집의 히트곡 '취중진담' 도 엄밀히 따지면 블루스 풍이기 때문에 발라드 곡은 아니다. 솔로 앨범에서도 2집의 '모험' 이나 4집의 '신기루' 처럼 빠른 템포의 곡이나 브라질 삼바의 리듬을 도입한 흥겨운 곡을 간간이 넣고 있다. 카니발 앨범에서는 이적의 다소 신랄한 가사 센스 덕에 '그땐 그랬지' 같은 곡들도 나와 신선한 느낌을 던져주기도 했다.
때로는 이전 곡들을 완전히 새롭게 편곡해 콘서트 무대에 올리기도 하는데, 2004년 라이브 때의 '님'을 걸쭉한 밤무대 트로트로 탈바꿈시켜 뭇 팬들의 대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목소리 간드러지는 거 보송 반짝이 옷을 입고 나와서는 연주 전 멘트 내용부터 '이제 여러분이나 저나 늙어가니 전통가요로 승부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2008년 라이브 앨범에 실황과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된 '배려' 의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아르헨티나 탱고 누에보의 대표적 작곡가인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푸가타(Fugata)' 라는 작품의 후반부를 인용하고 있다. 인용부 외에도 전곡에 걸쳐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의 아이콘 악기인 반도네온을 사용하고 있다. 푸가타를 듣다가 이걸 자신이 만든 배려 뒷 부분에 붙여보면 좋겠다고 해서 시도해봤는데 결과물이 좋았고, 피아졸라의 미망인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면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04년 이후 편곡 버전만 다루다보니, 정작 원곡이 뭐였는지 잘 생각이 안날 때가 있다고.
명품 콘서트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의 콘서트는 굉장히 웅장하면서도 세세한 면에 신경을 쓴 것이 보인다. 이는 김동률 자신의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일할 때는 자기도 자기가 왜 그렇게까지 강박적이 되는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완벽을 추구한다고 한다. 지휘부터 편곡, 관현악 부분 전반에 관여하는 이지원(둘은 버클리 동기이다) 역시 일을 할 때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둘이 앙상블을 이루면 강박의 끝을 보여준다고. 이 때문인지 콘서트 티켓값이 외국 아티스트 내한공연 수준 임에도 불구하고 티켓오픈 5분~20분 안에 항상 매진되곤 한다. 그런데도 소속사의 말에 따르면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수준이라고. 2008년 모놀로그 콘서트(특히 에필로그)는 콘서트에 대한 찬양기사가 쏟아져나올 정도로 탈아시아급 위용을 보여주었다. 마지막곡 'Melody'의 경우 연주에 동원된 인원이 합창단 포함 총 인원이 100명에 육박한다. 김동률이 뉴욕에서 해리 코닉 주니어의 공연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공연을 해보자는 생각을 항상 품고 있었고 그것을 최대한 시도해본 것이 에필로그 공연이라고 한다. 콘서트 때 음악 뿐만 아니라 조명의 사용에 무척 신경을 쓴다. 가히 빛의 향연이라 할 만 한데, 공연 때 조명팀에 대한 감사를 빼놓지 않는다.
한 음악사이트에서 조사한 '최고의 혼성 듀오'로 김동률과 이소은이 뽑히기도 했다. 이 둘이 함께 부른 노래는 1집 '기적'과 4집 '욕심쟁이'인데, '기적'을 녹음할 당시 이소은은 중3이었다고. 이소은은 2008년 에필로그 콘서트에서 자기가 '기적'을 처음 부를 때는 정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몰랐다고 한다. 어린 애한테 이런 노래 부르게 했다며 김동률을 깠다. 실제로 이소은이 정식 데뷔한 게 바로 이 '기적'이다. 그 후 몇 달 뒤에 정규 1집 발매.
가수 본인은 이소라의 음악도시에서 "가수와 프로듀서 중 하나를 택하라면 프로듀서를 택하겠다"라는 말을 했었다. 이에 DJ 이소라는 의외라며 매력적인 음색 등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지만 음악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만드는 것이 자기에게 어울린다 했다. 물론 유학 중인 2003년도에 했던 말이었고 지금도 같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존박을 프로듀싱한 결과물을 보면 허언만은 아닌 듯 하다.
클래식 등 타 장르의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솔로 1집부터 스트링 앙상블이나 관현악단을 앨범 녹음용 세션이던 라이브 콘서트에건 계속 기용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국내에서 스트링을 이용한 편곡은 유재하가 시작했고 김동률이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아니스트 김정원이나 첼리스트 송영훈 같은 연주자들을 게스트로 불러서 같이 공연하거나, 해당 연주자들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불려가 공연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 해당 연주자들은 콘서트 외에도 앨범 작업에까지 참가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신의 곡 '배려'에 탱고 음악을 접목시켜 새로 편곡하기도 했고, 반도네온 같은 악기도 적극적으로 자기 음악을 만드는데 사용했으며 하림이 다루는 여러 제3세계 악기 소리도 자주 쓰고 있다. 2집 앨범 당시에 우리가락을 '염원'에 써서 완성도 높은 곡을 만든 적도 있다. 김동률 본인이 말한 바와 같이, 발라드의 큰 틀 안에 있지만 그 안에서 여러 변용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노래 대부분이 페이드 아웃으로 끝나는건 덤
6 다른 음악인과의 교류
다른 가수들의 곡도 꽤 여럿 써준 바 있는데,이소라2집에 수록된 '너무 다른 널 보면서', 김원준의 'Show' 나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 이승환의 '다만' 과 '천일동안', 박효신의 '동경' 같이 해당 가수들의 히트곡이 된 경우도 종종 있다. 2010년에는 BoA에게 '옆 사람' 이라는 곡을 써줬고, 알렉스 개인 앨범의 '같은 꿈'을 작곡했으며, 2012년에는 같은 소속사인 뮤직팜에 들어온 후배인 존박의 첫 미니앨범을 위해 '왜 그럴까', '이게 아닌데', '그 노래' 세 곡을 만들었다.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작곡했을 때, 원래 김동률은 오케스트라를 쓴 웅장한 편곡을 원했는데, 프로듀서인 김현철이 피아노 위주의 편곡을 하자고 김동률을 설득했다고 한다. 김현철은 오케스트라를 쓰면 지금은 웅장하고 멋지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래오래 들을 음악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을 김동률이 받아들여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이승환과는 휘문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음악계에 막 발을 디딘 김동률의 곡을 채택하여 히트작을 만들었다. 다만 김동률 본인은 "천일동안"의 편곡이 지금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은 것 같다. 한 음악프로에서 장난처럼 "편곡을 왜 그렇게 했대"라고 이승환을 깠다(...). 여담으로 이승환은 향후에도 김동률과 작업할 계획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동률이는 저와 이제 가는 길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동률이는 음악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다시 공동작업을 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라고 했다.[28] 보아가 음반을 계획하면서, SM에서 김동률에게 곡을 하나 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김동률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수락했다고. 녹음을 할 때 보아가 너무 노래를 잘 해서 놀랐다고 하는데, 다만 보아가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해 자신의 한국어 발음에 대해 다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녹음을 할 때 너무 정확하게 부르려고 노력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김동률은 너무 발음을 잘 하려고 하는 것보다 느끼는 대로 부르는게 좋지 않을까 조언을 했고 이 조언이 적중했다고.
다음은 김동률이 다른 가수에게 작곡해준 곡들. 리메이크는 제외.
박효신 2집 '동경'
장혜진 3집 '1994년 어느 늦은 밤'
이승환 4집 '천일동안', '다만'
황호욱 1집 '너무 다른 널 보면서'[29]
김혜림#s-2 7집 '잊은 그 후에'
류시원 1집 '젊은 날의 단편'
원미연 4집 '다시는 내게', '잊혀지는 것과 잊는 것'
강수지 7집 '늘 함께였으면'
김원준 5집 'SHOW'[30]
이소은 3집 '그대이길 바래요'
알렉스 2집 '같은 꿈'
존박 미니앨범 '이게 아닌데', '왜 그럴까', '그 노래'
BoA 6집 '옆 사람(Stand By)'
그밖에 전람회 1집과 솔로 2집 때 각각 프로듀서와 공동 프로듀서를 맡아준 신해철을 위해 영화 '정글스토리' 에서 스트링 편곡을 맡았고, 1997년 유재하 사망 10주기 기념으로 제작된 추모 앨범에서는 특별히 작곡된 추모곡에서 객원 보컬도 맡았다. "우리는 꿈을 꾸죠, 다시 그대를 보는 꿈" 부분이다.
이외에 김윤아나 하림이나 이소은, 정재일, 클래지콰이의 알렉스, 마이앤트메리의 정순용(토마스쿡)[31] 같은 음악인들과도 친한 것 같다. 김윤아와는 함께 Way Back Into Love를 부른 적이 있고, 김동률이 씨네21 인터뷰에서 이소라와 함께 마음에 드는 여자 가수라고 언급을 하기도 했다. 김윤아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두 번째 이후의 솔로 콘서트들에서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하림의 경우 2004년 콘서트 때 아무 대가 없이 게스트로 불려왔다고 투덜대면서 은근히 김동률을 갈구기도 했다. 츤데레가 분명한 게 2008년에도 끌려왔고, 2012년에도 끌려왔다. 그리고 올 때마다 투덜거린다. 2012년 감사 콘서트 때, 연주하다가 웃어서 김동률한테 갈굼당했다고 다음날 관객들 앞에서 폭로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부르면 온다.
유희열과도 매우 친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토이 앨범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2014년 발매된 토이 7집 <Da Capo>에서 "너의 바다에 머무네"라는 곡의 객원보컬로 처음 참여했다.
7 논란
서두에서 미리 밝혀두지만 두 논란 모두 김동률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김동률의 (그리고 이적의) 노래와 관련해 타인이 일으킨 논란이다.
7.1 무단 리메이크 하소연 사건
2007년 8월, 김동률 공식 홈페이지에 가수 본인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파일:NGcZu7x.jpg
너뎃곡이 아니라 너덧곡 or 네댓곡
몇몇 사람들은 서태지가 선배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고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저작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저작권은 크게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으로 나뉜다. 저작인격권은 저작자 개인의 인격적인 권리를 의미하며 이는 저작자 개인과 뗄 수 없는 권리로, 따라서 타인에게 양도가 불가능하며 저작자 본인만 권리행사를 할 수 있다. 우리 저작권법에서는 저작인격권으로 공표권(저작물을 언제 세상에 내놓을지를 정하는 권리), 동일성유지권(저작물의 동일성을 해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을 권리), 성명표시권을 정해두고 있다. 저작재산권은 저작물에서 발생하는 각종 재산적인 이익을 의미한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오면, 당시 문제가 된 노래가 무엇인지 김동률은 적시하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 이은미가 리메이크 앨범을 발매한 상태였고, 리메이크 앨범에는 김동률의 '사랑한다는 말' 리메이크 버전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인데 김동률이 만든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 역시 수록되었다. 당시 저작권법 규정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규정을 종합해보면 원곡의 동일성을 해치지 않는다면 원저작자의 허락 없이도 협회의 허락 만으로 리메이크가 가능했다. 가사를 무단으로 바꾸는 등의 행위로 저작인격권인 동일성유지권을 해치지 않는다면, 협회의 허락 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형태의 리메이크가 가능한 이유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협회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가수의 저작재산권 전부를 협회에 신탁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저작재산권을 협회에 신탁할 경우,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저작인격권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협회에 전부 신탁되어 있는 저작재산권 부분은 협회의 허락 만으로 아무나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리메이크에서 문제되는 저작인격권은 동일성 유지권 정도이므로, 결국 원곡의 가사를 바꾸지 않고 원곡을 심각하게 수정하지 않는다면 협회에만 얘기하면 원작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리메이크가 가능하다. 이 부분이 납득이 되지 않았던 서태지는 결국 협회를 탈퇴하고 오랜기간 협회와 소송을 통해 대립했다.
엄밀히 법적으로는 저작자가 저작재산권을 무조건 협회에 신탁할 의무도 없고, 혹여 신탁하게 되더라도 리메이크에 대한 권리 등을 일부 유보하며 신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작권과 관련한 협회가 1개에 불과하던 당시, 저작재산권 전부를 신탁하지 않으면 협회에 가입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힘없는 한 명의 가수가 협회의 규정을 일부 수정하는 거래를 시도하거나, 혹은 협회에 가입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사실상 협회에서 개인의 저작재산권을 강탈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협회에 가입을 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자신의 저작물을 사용했을 때 사용료와 관련된 문제를 모두 저작자 개인이 처리해야 한다. 사실상 저작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과 동일하다.
상황이 이렇게 원작자 개인에게 불합리하게 조성되어 있다면, 리메이크 시에 상호간의 합의는 도덕 혹은 예의의 영역이 된다. 김동률이 저 글을 작성한 이후(강조하지만 김동률은 자신을 속상하게 한 곡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이은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화를 했지만 김동률이 받지 않았다"며, "본인이 원치 않으면 CD를 회수하여 전부 파기하고 해당 곡을 뺀 나머지 노래만으로 음반을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위계가 확실한 가요계에서, 선배의 음반을 전량 회수하여 파기하고 자기 노래를 제외하고 음반을 새로 찍어내길 원한다고 나설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저런 하소연이 필요치도 않았을 것이다. 이은미 본인이 정말 진심으로 음반 폐기를 고려했는지, 아니면 후배 가수가 더 이상의 의견개진을 하지 못할 것을 고려하고 저런 발언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이은미는 자신의 리메이크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 자신의 베스트 앨범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수록했다.
현재는 새로운 음악 저작권 유관 협회가 생겨 음악 저작권 보호사업이 경쟁체제에 들어갔으며, 기존 협회의 규정도 바뀌어 이런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상당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일본드라마 리갈 하이의 1시즌 2화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이 사건을 떠올린 사람이 많았다 카더라.
7.2 '거위의 꿈' 선거홍보곡 사용논란
카니발 1집에 수록된 '거위의 꿈'은 이적이 작사하고 김동률이 작곡한 공동작업의 산물이다. 이적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술자리에서 선배들에게 "왜 대학에 왔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만취한 채로 "대학가요제 나갈라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후로 대학가요제 출연이나 가수활동 등에 별다른 진척이 없어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 냉소 섞인 조롱을 받아 그때의 기억이 가사로 만들어진 것이 '거위의 꿈' 가사다.
2007년에 인순이는 이 곡을 리메이크 하였고, 대선배임에도 위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유일하게 원작자인 김동률과 이적에게 별도의 허락을 받았다. 인순이가 리메이크곡 홍보 당시에 "이 노래는 내가 불렀어야 되는 곡"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어 원작자의 팬들에게 다소 안좋은 인상을 준 적이 있지만, 곡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로 한 발언이라 별 문제없이 지나갔다.
이 인순이의 리메이크 버전을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선거홍보곡으로 사용했다. 후보 측에서 저작권협회에 사용료만 지불하면 곡을 선거 홍보용으로 쓰는데 법적인 문제가 없어서, 원작자의 동의 없이 선거홍보용으로 '거위의 꿈'이 이용되었다.
이에 대해 인순이는 "제 노래인 '거위의 꿈'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지지 동영상에 사용되고 있지만 상관없습니다. 이 전 시장뿐만 아니라 꿈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거위의 꿈'을 사용해도 됩니다."라고 발언하며 이명박 후보 측의 이용이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
하지만 이 곡의 저작권자는 작곡가인 김동률과 작사가인 이적이다. 곡에 대한 권리는 이들이 가지고 있으며, 리메이크 당사자인 인순이는 저작인접권자(실연자)에 불과하다. 자신이 부른 노래라는 이유로 '제 노래'라는 표현을 썼을 수는 있지만, '거위의 꿈'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을 할 권리는 기본적으로 실연자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상황에 대해 작사가인 이적은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는 노래가 정치인 홍보에 쓰이는 것은 유감"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
물론 인순이라는 가수는, 대선배 입장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자의 허락을 얻은 후에 리메이크를 추진할 정도로 후배 가수의 권익을 지켜주는 입장의 가수이고, 따라서 그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정치적인 사용을 방관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원작자의 권리를 허투루 보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원저작자에게 동의를 구하며 리메이크를 진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저작권자 본인이 결정해야 할 문제를 실연권자가 섣불리 개입한 부분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8 트리비아
1집 앨범의 '동반자'가 자기가 만든 최초의 본격적인 사랑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는 실제 본인의 이야기라고 하며, 헤어진 연인에게 직접 찾아가 노래를 만들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만든 곡이라고. 당시 헤어진 연인은 웃으면서 "한 번 마음대로 해봐라"라고 했다고 한다. 결과물을 들었을 때 무슨 느낌이었을까. 이런 배경 때문인지, 김동률은 '동반자'가 감정적으로 참 부르기 어려운 노래라고 평가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이 연세대학교이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음악이 김동률의 곡이라는 것 때문에 영화와 김동률의 연관 관계가 화제가 되었으나, 정작 감독 이용주는 연세대 건축공학과 재학 당시 김동률을 몰랐으며, 배경음악을 고를 때도 김동률이 동문이라는 사실은 뇌리에 없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학번이 4개나 차이가 나는 이유도 있을 듯.
워낙 모범생으로, 저항하지 않고 순종하며 자란 탓에, 음악을 하는 사람이 너무 순응하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음악을 직업으로 삼지 말기를 권유했을 때도 그대로 따랐고, 청소년 시절 피아노만 치게 했을 때도 군말없이 따랐지만 내심 안타까운 부분이 없지 않았던 듯. 가까이 지내는 이적 등 주위 뮤지션들이(이를테면 패닉 2집 등에서) 보여주는 모습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듯 하다. 루시드폴도 은근히 강하고.
유학도 아버지의 권유로 떠나게 되었다. 아직 연세대 재학생이던 때,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싶으면 음악 전공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에 자퇴하고 버클리로 떠났다. 김동률은 악기를 매고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을 보며 유학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노래를 타인이 잘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김동률의 For You에서 성시경과 김동률이 서로의 노래를 살짝 바꿔부르고는 서로 기분 나빠했다. 둘 다 썩은 얼굴로 자기보다 낫다고 했는데 대놓고 진심이 아니다 2012 '감사' 콘서트 앵콜 공연 때 멘트 하면서도, 자기보다 코러스가 '감사'를 잘 부른다며(정확히는 자기가 힘들어하는 높은 음이 무리없이 올라간다며) 기분 나빠했다.
후배 아이돌 가수들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걸 그리 탐탁치는 않아 하는 것 같다. '오래된 노래' 같이 개인의 경험담임이 분명한 곡을 후배 가수들이 부르고 하는 것이 그리 유쾌하게 다가오지는 않은 듯. 이런 얘기를 할 때면 '그들도 슬프겠죠'라며 약간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다.
가사 중에 '설레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김동률 본인이 좋아하는 단어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런데 문제는 설레임이 표준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표준어는 설렘이다.
본인의 노래 '기억의 습작'을 들으면 오그라든다고 한다. 이 노래를 녹음할 때, 김동률은 녹음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처음 들어가서 끝까지 불렀는데 프로듀서가 OK해서 그대로 앨범에 실렸다. 그리고 콘서트에서 이 얘기를 했다가 관객들에게 잘난 척 한다고 야유를 들었다 문제는 제일 첫 소절 '이젠~'하는 부분이 플랫이라는 것. 지금도 노래를 들을 때마다 플랫이 신경쓰인다고.
KBS 라디오 '김동률의 뮤직 아일랜드'를 그만둔 이유는 '라디오를 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이다. 너무 행복하고 살면서 힘든 것들이 라디오를 하면서 전부 해소되어버려서, 정작 노래를 만들려고 보니 마음에 남는 게 없더란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라고 되묻다가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사실을 전람회 1집 녹음 끝날 때까지 몰랐다고 한다. '서동욱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했다고. 당시만 해도 노래방 시스템도 없고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를 일도 별로 없어서 그랬단다. 그래서인지 어느 강연장에서 청중이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나요?"라고 묻자 "솔직히 타고 나야 돼요"라고 대답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기타를 칠 줄 모른다. 기타가 음악하는 사람의 기본 옵션으로 인식되는 까닭에, 이 사실을 알고 놀라는 경우도 있는 듯. 실력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그다지 치열이 고른 편은 아닌데, 아버지가 치과의사여서 어렸을 때 교정을 시켜주셨으나, 교정기를 자꾸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만뒀다는 일화가 있다.
가수가 된 뒤에도 여동생이 가수라고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윤상을 집에 데려오면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진짜 데려갔더니 "가수가 되긴 됐구나"라고 얘기했다고.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아게하 여사인지는 불명.
자신이 동률옹으로 불리는 것에 불만이 약간 있는 듯. 이적이 콘서트에 나와서 '축배'나 '거위의 꿈'을 부를 때면, 항상 중간 멘트에서 너는 항상 '적군'이고 나는 '률옹'이고.. 하면서 투덜댄다. 이적은 빠른 74년생이라 학년이 하나 빠르니, 호칭이 더욱 억울한 것 같다. 대신 그분은 맹꽁이라고도 불리고 있으니(...)
조카바보이다. 조카가 그린 그림을 SNS에 올려서 잘 그리지 않았냐고 팬들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조카의 미술교육을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 팬들에게 상담을 청하기도 했다.
미국식 파티를 싫어한다고 밝혔다. 무슨 재미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미국에서 가장 괴로웠던 게 파티에 가는 일이었다고 한다.
의외로 소덕의 기질이 있다(...) 탱빠인 듯. 언젠가 라디오에 출연해서 같이 듀엣해보고 싶은 여자 가수가 있냐고 하자 태연을 언급했는데, "듀엣보다는 사석에서 만나고 싶다"나(...)
노래 부르다가 안경을 올릴 때 가운데 손가락을 사용한다.
파일:NORoLIo.jpg
이적은 빠른 74년생, 김동률은 74년생으로 둘은 친구로 지낸다.[32] 그리고 서동욱도 74년생인데 서동욱은 이적의 중학교 1년 후배다.[33] 그래서 이적과 김동률은 서로 반말, 김동률과 서동욱도 서로 반말, 서동욱은 이적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고, 따라서 셋이 만나면 족보가 꼬인다. 문제는 김진표는 김동률과 존대하는 사이지만 이적과는 편하게 지낸다. 넷이 만나면 혼돈의 카오스가 펼쳐진다고 한다.
이름을 영어로 쓰면 Kim Dong Ryul인데, 한글로 읽으면 '김동렬'[34]로도 읽히기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는 동렬오빠, 동렬이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게시판에 "동렬이형 한창때.jpg"라는 제목을 클릭하면 선동렬의 해태 시절 사진이 올라오기도.
영어 이름을 이용한 공식적인 드립이 있는데, 크리스마스 앨범 타이틀 제목인 kimdongrYULE이다. YULE은 크리스마스의 영어권 古語이다. 버클리에 유학을 갔을 때 같은 클래스의 친구가 자신을 자꾸 '크리스마스'라고 불러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kimdongrYULE 앨범 타이틀곡 'Replay'을 들은 엄정화는 김동률에게 전화를 걸어 "크리스마스 앨범이라면서 왜 이렇게 슬퍼!"라며 김동률을 비난했다고 한다(...).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를 듣고 삼촌팬의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일부 팬들은 김동률이 리메이크를 칭찬한 것에 놀라는 상황.
파일:TkQHHwP.png
디시인사이드 김동률 갤러리에 올라온 글에 따르면, 과거 지인이 어떤 남자에게 뉴욕의 자기 방을 단기임대 해주었는데, 한 달 뒤에 집으로 돌아가보니 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침대 위에 빨간 장미꽃 한송이와 고맙다는 편지, 그리고 음반이 한 장 있더란다. 음반은 전람회 2집이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성은 김동률이었다고. 해당글 링크
약간의 징크스(?)라면 앨범의 메인 타이틀 곡보다 다른 수록곡이 더 뜨는 경우가 많다. 전람회 2집의 '이방인' 과 '취중진담', 카니발 시절의 '그땐 그랬지' 와 '거위의 꿈'[35], 솔로 1집의 '배려' 와 '기적', 솔로 4집의 '이제서야' 와 '욕심쟁이', 솔로 5집의 '다시 시작해보자' 와 '아이처럼' 까지..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문제인데다 그냥 본인도 약간 해탈한 듯. 다행히 6집은 타이틀곡 '그게 나야' 가 히트를 쳤다.
- ↑ 그 특유의 빅 발라드 장르 덕분에 붙은 별명이다.
- ↑ 작사 역시 이적, 박창학, 서동욱이 써준 몇 곡을 제외하곤 모두 스스로
- ↑ 이후로는 루시드폴-성시경-정준일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김동률의 커리어까지 가기엔 애매하지만...
- ↑ 특이하게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Kim Dong-Ryool로 되어있고 본명은 리다이렉트 처리된다(...)
- ↑ 1993년 대학가요제 당시에는 김동율이라고 표기된 바 있다.
- ↑ 당시 출생지가 현재 행정구역에서는 강남구. 강남구의 분구는 1975년에 이루어졌다.
- ↑ 프로필 상 키다. 하지만 은근 마른 편이라 장신으로 보인다(...)
- ↑ 1993~1997
- ↑ 정재형의 말 인용.
유희열은 나부랭이안테나 것들? - ↑ 간단한 사진은 트위터, 긴 글은 페이스북 위주로 올라오고 있다. 페이스북 제목은 '김동률의 Monologue'
- ↑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는 타 대학의 건축학과와 건축공학과가 합쳐진 형태다. 세부전공으로 건축학 전공과 건축공학 전공이 나뉜다.
- ↑ 수학여행 때 학년 대표로 노래 부르는 건 기본으로 거의 교내 가수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동기 서장훈도 수학여행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진짜 노래 잘한다."며 감동했다고 한다.
- ↑ 비슷한 일화로 1988년 대학가요제 당시 마지막으로 나온 무한궤도의 곡 그대에게가 도입부를 하는 순간부터 참가자와 심사위원들은 모두 "아 얘네가 1등이구나..."라고 생각했다.
- ↑ 당시 신해철과 윤종신이 소속사 선배 뮤지션이었다.
- ↑ 이때 신해철이 했던 말은 다시 하라는 말 밖에 없었다고 한다. '90년대를 빛낸 명반 50'(2006)에서 신해철 인터뷰 중
- ↑ 자리라는 건 어차피 통학버스 빈 좌석처럼 개인의 자리는 될 수 없어서요. 내릴 때가 됐다 싶으면 서있는 누군가에게 양보를 해야하는 거죠. 아무리 자리가 욕심이 난다고 해서,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면서까지 앉아 있다라는 건 생각할수록 무의미한 이기심이라는 얘깁니다. 졸면서가든, 놀면서가든, 어차피 종점까지 간다고 해도요. 다음날이면 다시 남의 자리가 되어 있을게 뻔한데, 굳이 사사로운 자리 욕심땜에 눈총을 받아가면서까지 시간낭비를 한다라는 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란 생각도 듭니다.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동안 되도록 이면 여러분이 무겁게 들고 있는 가방을 다 받아 들이려고 했는데 그게 어느정도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제 맡았던 가방들은 다 나눠 드리겠습니다. 혼자 무겁게 들고 서있지 마시고요. 다음에 앉는 분한테도 조심조심 맡길 수 있었으면 하네요
- ↑ 해당 노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요즘 학생들은 모를수도 - ↑ 연세대학교 건축학과는 자퇴했다. 이미 카니발 인터뷰를 하던 1997년에 복학할 생각이 없었다고 밝힌 바 있었으니...
- ↑ 1997년 4월 7일부터 11월 2일까지 진행했던 KBS FM '김동률의 FM인기가요' 이후 약 8년 만의 복귀였다.
- ↑ 해당 방송 36분 부터
- ↑ 해당 방송 55분 부터
- ↑ 종전에는 이 앨범이 정규 6집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꽤 의견이 분분했으나, 최종적으로 2014년, 정규 7집이 아닌 정규 6집이 나왔으므로 정규앨범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굳이 세면 5.5집이다.
- ↑ 당시 음악도시가 부활한 지 반 년도 안 된 때였다.
- ↑ 유희열의 매니저이자 안테나 뮤직 대표
- ↑ 정확히 말하면 1993년으로 꼽으면 21년이긴 하겠으나...
- ↑ 참고로, 김동률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 공연이나 6집 앨범이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았다.
- ↑ 전술했듯 초창기에는 6집으로 알려진 경우가 있었는데, 정규 앨범이 아닌 EP이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앨범에는 정규 넘버링이 되어 있지 않다. 굳이 따지면 5.5집 쯤으로 된다.
- ↑ 비슷하게 이승환과 작업이 줄어든 케이스가 유희열.
- ↑ 이소라의 노래로 알려졌지만 이 곡은 원래 황호욱의 데뷔곡이었다. 하지만 황호욱은 이 곡을 발표한 뒤 입대,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고 만다. 김동률은 이소라에게 이 곡의 리메이크를 허락했고 노래는 뒤늦게 빛을 봤다. 훗날 김동률은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에서 황호욱의 여자친구였다는 이에게서 온 사연 하나를 받게 된다. 죽은 남자친구의 노래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불리는 게 싫다는 내용이었다고. 이 일로 김동률은 자신의 곡 리메이크를 쉽게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 ↑ 김동률이 고등학교 시절 김원준을 생각하며 만들었다는 곡. 김원준이 정말 부르게 돼서 본인도 신기했다고.
- ↑ 김동률이 처음으로 다른 가수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던 것이, 2011년 토마스쿡의 2집
- ↑ 이적은 2월 28일생, 김동률은 3월 15일생이라 따지면 보름 밖에 차이 안 난다.
- ↑ 서동욱은 4월 1일생이라 한 달 정도 차이다.
- ↑ 물론 국내 정식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동렬은 "Dong Ryeol"이야 써야 하긴 하다. 다만 개인의 이름은 굳이 이 규칙을 적용시킬 필요 없으니...
- ↑ 이 경우는 후일 인순이가 리메이크하면서 잘 알려지게 된 케이스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