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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밀루틴 이브코비치 (Mилутин Ивкoвић / Milutin Ivković) |
생년월일 | 1906년 3월 3일 |
사망년월일 | 1943년 5월 25일 |
국적 | 유고슬라비아[1] |
출신지 | 베오그라드 |
포지션 | 라이트 풀백 |
신체조건 | 182cm / 78kg |
등번호 | -[2] |
소속팀 | SK 유고슬라비아(1922-1929) SK 소코/바스크[3](1929-1938) |
국가대표 | 39경기 / 0골 (1925-1934) |
1 생애
1.1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인 요반 이브코비치는 왕실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 밀라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설적인 군인 라도미르 푸트니크[4]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근무지인 니수와 크라구예브수에서 보냈는데 이브코비치의 집안은 그리 풍족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대령이었던 아버지가 45살의 다소 젊은 나이에 군에서 나온 이후 총 3명의 누이와 2명의 남동생 등 대가족을 먹여 살릴 방도가 마땅치 않았던 것. 아버지 요반은 전역 이후에도 세르비아의 농업 협동조합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브코비치는 생활에 일찍 눈을 떴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그로 인해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한 소년이 되었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애국심과 함께 정의감과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고 더욱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도우면서 애국심 역시 크게 키우게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가 제창을 거부하면서 처벌을 받기도 했다고. 12살 무렵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의해 잡혀갔던 사람들을 마중하러 나가기도 했었다.
1.2 초기 선수 생활 그리고 월드컵
밀루틴 이브코비치는 전쟁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축구에 빠져들었다. 오블리치라는 클럽에서 처음 축구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고, 16살이 되던 1922년. SK 유고슬라비아에서 성인팀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그 때 이미 이브코비치는 충분히 성인 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지고 있고 피지컬적으로도 강하다는 평가가 나왔다.[5] 1922년 11월 19일에 데뷔한 그는 1929년까지 총 235경기를 뛰었고, 1929 시즌을 끝으로 보드진과의 견해 차이 때문에 새로운 팀을 구했다. 새로운 팀은 SK 바스크이고 은퇴할 때까지 그 곳에서 활약하였다.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도 활약하면서 그는 1928년 올림픽과 초대 월드컵에도 참가하였다. 올림픽에서는 포르투갈에게 발목을 잡히며 16강에 머물렀지만, 월드컵에서는 블라고예 마르야노비치, 밀로반 약시치 등과 유고슬라비아의 간판선수로 활약했다. 그의 활약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유럽팀 중 유일하게 준결승까지 진출하였고, 이브코비치는 대회 베스트 11 풀백 부분에 호세 나사치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총 39경기를 출전했고, 그 중 18경기에 주장으로 참가했다.
그 이후에도 저는 우리나라(유고슬라비아)든 외국이든 우리 대표팀이 최고의 시합을 펼치는 것을 보았지만 이렇게 몬테비데오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한 경기만큼 성공적인 수비진을 본 적이 없어요. 브라질 선수들의 게임 지배 능력은 정말 대단했지만 우리 수비진의 저항이 한 수 위였죠.
- 미하일로 안드레예비치
1.3 이후
이브코비치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과 동시에 공부도 열심히 했다. 당시 축구계가 프로화가 되어 있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그는 축구 선수인 동시에 대학생이었는데, 선수로 뛰면서 그는 베오그라드 의대[6]에서 수학하였고 1931년,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베오그라드의 군병원에서 군생활을 했다.
1934년 선수 생활을 마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피부과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활동도 하며 진보성향을 띠었다. 그 때문에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1938년부터는 믈라도스트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공산당 청소년 축구 리그를 만들고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에 협력하는 등 여러 사회 활동도 하였다. 그러면서 스포츠의 프로화와 정치화도 비판하였다. 그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경찰에게 믈라도스트가 폐간되기도 하였다.
1941년 3월에는 유고슬라비아 육군의 예비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더욱 사회주의에 매진하였다. 이로 인해 이브코비치는 당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했던 나치 독일에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나치 독일은 그를 수배했고, 게슈타포가 그를 찾아다녔다. 그는 신변이 위험한 것을 알았지만 그의 가족들 때문에 멀리 떠나지는 못하였다.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로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토에서 일어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더욱 탄압하였다. 반 나치적인 유고슬라비아인들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브코비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이브코비치는 1943년 5월 6일에 BSK 베오그라드의 40주년 기념행사에 잠시 등장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1943년 5월 24일 밤 11시 45분. 이브코비치는 베오그라드 인근의 야인치에서 나치군에 체포되었고 6시간 후 바로 총살형에 처해졌다.[7]
트럭이 출발할 때, 손은 줄로 묶여있었다. 당시 미움 받던 베오그라드 경찰의 우두머리 부코비치의 옆을 지나칠 때 그는 이브코비치의 얼굴, 맨발, 배에 침을 뱉었다. 그것이 유명한 선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베오그라드의 군중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들이 사랑하던 밀루틴카(이브코비치의 애칭)의 죽음에 꽤 긴 침묵을 지켰다.
- 드라고슬라프 라코냐치(이브코비치의 마지막 순간 목격자)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에서는 1951년 JNA 경기장[8]과 레드 스타 경기장[9]에 동판을 만들어 기념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유고슬라비아 역대 최고급 수비수로 꼽히는 선수. 운동선수로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녔고 상대를 항상 존중할 줄 알았다.
3 결혼 생활
이브코비치는 1930년 10월. 노봄 사두에서 엘롬 팝스와 결혼했다. 엘롬 팝스는 베오그라드의 유명한 변호사인 프리디리하 팝스의 딸로 3개 국어를 말하고 피아노를 매우 잘 치는 재원이었다고 전해진다. 엘롬 팝스와의 사이에서 고다나와 미리아나. 두 딸을 두었다.
하지만 1938년, 아내를 결핵으로 잃었고 두 딸은 할머니 밀라가 키웠다.
4 뒷이야기
- 이브코비치는 그의 큰 체구로 인해 레슬링 잡지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레슬링 챔피언이던 한 흑인이 있었는데 잡지에서는 챔피언을 꺾는 사람에게 큰 상금을 주겠다고 광고를 했다. 그런데 이브코비치는 망설임 없이 그와 맞섰고 챔피언을 꺾었다. 그리고 상금은 전부 기부해버렸다.
무슨 이만사마도 아니고 - 이브코비치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의 상대는 프랑스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이 경기에서 총 4골을 넣었는데, 2골은 자책골이었다.
5 수상
5.1 클럽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2회: 1924, 1925(이상 SK 유고슬라비아)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26(SK 유고슬라비아)
5.2 개인
- ↑ 현재 국적으로 따지면 세르비아이다.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1933년 팀명을 바스크로 변경.
-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 왕국의 육군 원수였다. 캐나다의 앨버타 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산이 있을 정도.
- ↑ 182cm에 78kg이면 충분히 당시로서는 큰 체구이다. 위키의 기록으로는 188cm/95kg에 달한다는 문서도 있다.
- ↑ 베오그라드 국립대는 현재도 세계 대학 랭킹 150위권에 들어가는 꽤 좋은 학교이다
- ↑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사망일을 5월 23일로 적고 있지만 정작 체포일은 5월 24일로 적고 있다. 오류인 듯하다.
- ↑ 현재의 FK 파르티잔 경기장
- ↑ 이브코비치의 데뷔팀인 SK 유고슬라비아의 옛 구장터가 있던 곳. 현재는 라이코 미티치 경기장으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