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호

dltj1300667927.jpg
▲ 맨 우측 마이크 앞에 있는 이가 박선호. 좌측의 하얀 수의를 입은 이는 김재규

1934 ~ 1980. 5. 24.


1 소개

10.26 사건의 주범으로 당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었다. 수행비서였던 박흥주와 함께 상관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박정희 암살을 도왔다.


2 이력

1934년 경상북도 청도군 태생. 대구대륜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해병대 간부후보생 16기로 임관하여 파월 청룡부대 대대장과 해병대 서울보안부대 부대장, 해병대 사령부 인사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 10월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자 박선호는 해군 보병대령[1]으로 예편, 이듬해 1974년 4월에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던 김재규의 추천으로 중정 총무과장에 임명되며 중정과 인연을 맺었다.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영전한 후 박선호는 중정 부산지부 정보과장으로 전보되었다가 1976년 초에 밀수사건 수사차 서울에서 내려온 검찰 수사팀의 동정을 도청했다는 혐의로 면직당했다.

이후 약 1년간 실업자 상태로 지내던 박선호는 또다시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의 도움으로 1977년 4월에 현대건설 안전차장으로 취직, 주베일 항만 건설현장에서 근무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한국으로 돌아온 박선호는 유류수입 업체를 운영하기도 했으나 석유파동 등의 여파로 고전하던 중, 1978년 8월에 다시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보부로 복귀했다. 그때 맡은 보직은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그때까지는 그가 맡았던 임무가 차후 얼마나 큰 풍파를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3 김재규와의 인연

김재규가 육사 2기로 임관하여 복무하던 중 1947년경 민관 체육대회에서 미군과 충돌을 일으키는 바람에 면직당해 고향에 내려와 대륜중학교의 체육교사로 잠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다. 이 때 제자로 만난 이가 대륜중학교 2학년이었던 박선호. 후일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도 김재규의 제자였다.

박선호는 김재규가 복직되어 군으로 돌아간 후에도 인연을 끊지 않고 연락을 유지했으며, 김재규가 제3군단 군단장에 재임하고 있을 때 중학 동기들과 같이 찾아가 스승님께 종종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고. 이후 박선호가 해병대를 나온 이후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공직에 있던 김재규가 취직자리를 알선해 주는 등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 외에 김재규는 박선호에게 평소 "거만하게 행동하지 말라" "책을 많이 읽어라" "검소하게 생활하라" 등등 따뜻한 조언을 자주 해주었으며 이런 김재규를 박선호는 상사이자 스승으로서 무척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4 10.26 사건

김재규의 도움으로 다시 일자리를 찾은 박선호였지만, 막상 의전과장이란 자리는 박정희의 술시중 돕는 여성들을 섭외하는 이른바 채홍사나 다름없었고 평소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박선호는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의 일에 회의를 갖고 있었다. 참다 못 해 몇 번이고 사의를 표했지만 그때마다 김재규는 "자네가 없으면 궁정동 일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 라면서 물리쳤고, 상사의 간곡한 요청에 박선호는 꾹꾹 참으며 계속 근무해왔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오후 4시 10분경, 궁정동 안가 비서실에 있던 박선호가 해병 간부후보생 동기이자 둘도 없는 막역지우였던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날 저녁 6시에 대행사, 즉 박정희와 비서실장, 정보부장, 경호실장 등이 참석하는 만찬이 열리니 준비를 해달라는 연락이었다. 곧바로 박선호는 안가 주방에 만찬 준비를 하라 지시하고 이날 시중을 들 여성을 섭외하였다. 연락을 마친 박선호는 모델로 활동중이던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을 자신의 승용차로 궁정동 안가에 데려왔고, 이 둘에게 사전에 박정희를 단독으로 모시는 방법을 알려준 후 보안서약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저녁 6시경 박정희 일행이 궁정동 안가에 도착하여 연회가 시작되었고,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서 친구인 정인형과 담소를 나누던 중 저녁 7시 쯤 안가 직원으로부터 부장이 연회장에서 나갔다는 연락을 받고 안가 마당으로 나와 김재규를 뒤따랐다. 이때 중정부장 수행비서인 박흥주 대령도 합류하였고 김재규는 이 둘을 불러 "오늘 저녁 각하와 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너희는 똑똑한 놈 세 명을 골라 나를 지원하고 경호원들을 처치하라"라는 엄청난 지시를 거사 40분 전에 일방적으로 내렸다.

이에 박선호는 "오늘은 경호원이 일곱명이나 와 있어 상황이 좋지 않으니 다음에 기회를 보자" 고 거짓말로 회유하려 했지만 김재규는 "오늘 해치우지 못하면 보안이 누설된다"며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박선호는 박흥주와 같이 김재규의 지시에 따랐고,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해병대 부사관 출신, 평소 박선호의 신임이 깊었다)와 안가 운전사인 유성옥을 암살조에 합류시켜 준비를 마쳤다. 유성옥이 암살조에 포함된 계기도 어찌보면 단순한데, 이기주와 함께 무장하던 중 자신의 운전사인 유성옥이 평소 성격이 괄괄하고 복종심이 강하다는 것을 떠올린 박선호는 대뜸 이기주에게 "유성옥이 총 쏠줄 아나?" 라고 묻자 이기주는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 입니다" 라고 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중사로 제대했으면 적어도 못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고,[2] 이날 동대문시장 에서 만찬 요리재료를 사온 후 휴게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유성옥은 엉겹결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참고로 유성옥은 혼인신고를 올리지 못한 채 동거하던 아내와 다음 달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게다가 이날 청첩장을 가져와서 안가 동료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무장을 완료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승용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 숨어 김재규의 첫 총성이 울리면 주방의 경호원을 해치우기로 하고,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서 휴식 중이던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감시하는 것으로 임무를 나누었다. 사실 박선호는 절친한 정인형과 해병대 후배인 안재송을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살려보려 했지만 사람 일이 그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대기실에서 둘의 동태를 살피던 박선호는 드디어 저녁 7시 40분경 연회장에서 첫 총소리가 울리자 행동을 개시하였다. 정인형과 안재송이 연회장 쪽으로 뛰어나가려 하자 박선호는 입구를 막고 리볼버를 꺼내어 둘의 행동을 제지시켰다. 어안이벙벙 하던 둘에게 박선호는 거의 우는 소리로 "총 뽑지마, 가만히 있으면 쏘지 않겠다. 야! 우리 제발 같이 살자!" 라고 애원하였고, 정인형은 거의 체념하는 듯 했지만 안재송이 갑자기 품에서 총을 뽑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에게 흉부 관통상을 입히며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에 정인형이 괴성을 지르며 박선호에게 달려들자 반사적으로 총을 발사, 정인형은 목에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둘을 해치우고 방을 빠져나온 박선호는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총상을 입힌 후 총이 고장나 연회장을 뛰쳐나온 김재규와 마주쳤고, 김재규는 박선호가 갖고 있던 리볼버를 빼앗아 연회장으로 복귀, 화장실에서 뛰어나온 차지철을 살해하고 우측 흉부 관통상을 입고 신음하던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발사하여 그의 목숨을 끊었다.

이후 김재규는 안가에서 저녁식사 중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차에 태워 용산의 육군본부로 갔고, 박정희의 시신은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수습되어 국군서울지구병원 으로 옮겨졌다. 박선호는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남은 피해자들을 확인사살 하라 시키고 경비원들을 소집, 안가 경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한 후 경호원 대기실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던 신재순과 심수봉에게 수고비 조로 20만원 씩 건네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한 뒤 안가 관리책임자 남효주더러 차로 내자호텔까지 데려다 주라고 지시하였다. 원래 김재규의 생각은 이 둘을 인질로 삼으려 했던 거지만 지시가 제대로 안되어 박선호가 무심결에 풀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박선호는 궁정동 사무실에서 김재규의 후속 지시를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날이 밝은 후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라디오 아침 뉴스에서 박정희의 사망 소식이 들리자 박선호는 다 틀렸다고 체념한 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던 서울 방배동의 처가로 가서 "사람을 죽였다. 나는 이제 자결해야 겠다"고 털어놓았다. 가족들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울부짖자 박선호는 뉴스를 들으면 다 알거라고 한 후, 오전 11시경 정보부 감찰실의 연락을 받고 남산 중앙정보부로 복귀하여 감찰실장 김학호 소장으로부터 "계엄사에서 당신을 찾고 있다" 라는 통보를 받은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2시경 출동한 합동수사본부 수사관에게 체포당했다. 사건에 동조했던 박흥주도 같은 날 오후 3시에 체포되었고 사건 관련자 모두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5 사형

이후 박선호는 김재규와 박흥주를 비롯한 사건 당사자들과 재판을 통해 사형을 언도받았고,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

재판 중 최후진술에서 박선호는 이렇게 밝히며 김재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는 것을 털어 놓았다.

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로 하여금 항상 인간으로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 주신 데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 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김재규 또한 "이들은 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관대한 처분이 있기를 바란다" 면서 박선호, 박흥주 두 심복을 진정으로 아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박선호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1. 해병대사령부 해체 이후 해병대원들은 전부 서류상 해군 인원으로 변경되었다.
  2. 실제로 유성옥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실전 경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