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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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桂元

대한민국 육군제1야전군사령관
8대 장창국9대 김계원10대 서종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17대 김용배18대 김계원19대 서종철

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 정치인이자 외교관. 1923년 경상북도 영주군(現 영주시) 출신이다.

1942년 서울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상학과에 입학했다가 학병제가 실시되면서 강제징병 되는 바람에 일본 육군에서 복무했다.

8.15 광복[1]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국군준비대이혁기[2]와는 교회 친구였다. 당시 서북청년회와 건군준비대의 갈등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이혁기는 그가 개신교인이라 공산당 계열이 많은 건군준비대보다는 미군정장교단 인원을 만드는 쪽에 가담하 것을 추천했다.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이응준이 주로 이끌었고 김계원은 이응준의 아들과 아는 사이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육군소위임관했다. 1960년육군대학 총장이 되었다가 육군대장이 되었고 이후 1966년 부터 육군참모총장을 맡았다.

1969년 대장 예편 이후 김형욱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대비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1971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경질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중에서는 재임기간이 짧은 편인데[3] 이를 두고 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이란 책에서는 김계원이 부장으로 있던 시절에 요원들이 샌님처럼 행동해서 힘이 없어보였다는 박정희의 압박이 있었단다. 후임 중앙정보부장에는 이후락이 임명되었다.

1971년 중화민국주재 한국대사를 지냈다. 1979년에는 2월에는 비서실장을 그만 두고 주일 대사로 가게 된 김정렴의 후임으로 박정희 정권 마지막 비서실장이 되었다.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천거에 의한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신분으로 궁정동 만찬에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과 함께 참석했다. 만찬 직전에 김재규에게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나,[4]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만찬에 참석했다. 그리고 만찬장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총을 쏘고, 김재규의 부하(궁정동 안가 직원)들이 청와대 경호원들을 거의 다 죽여버릴 동안, 이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물론, 김 실장은 술에 취해있던 상황이었고, 무기를 갖고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를 쓸 수는 없었다.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나자마자,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확인한 후엔,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직후 정승화가 김재규를 체포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김재규는 아마도 김계원을 믿었던 것 같은데, 공포심에 의한 것이었든 어쨌든, 결과적으로 김계원은 김재규의 뒷통수를 친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만찬 전에 김재규로부터 박정희 사살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박정희 사살을 방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1980년 재판에서 김재규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1988년 특별사면복권되면서 정치계에서 은퇴하였다.

2 이야기거리

육군참모총장 시절에는 육군의 병력 처우 개선 및 예비군 무기 도입과 관련해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주임원사[5] 제도를 도입하며 부사관들의 권익을 개선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6] 예비군의 창설로 갑작스레 늘어난 개인화기 수요를 대처해야 했는데, 개인화기 신모델로 교체를 계획하던 미군으로 부터 구형 카빈 소총 100만정을 인수받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이를 예비군으로 편성해서 오늘날까지도 예비군의 주력화기로 있을 정도다.[7]

연세대학교 출신의 유일한 대장(계급)이다. 고려대학교에는 박세환 대장과 김진호 대장이 있다.

10.26 사건 직후 다음 날 새벽 2시에 박근혜에게 소식을 전하자, 박근혜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3 창작물에서

드라마 제3공화국, 코리아게이트, 삼김시대에서는 배우 오승명씨가 연기하였다.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상순씨가 연기하였다. 제5공화국에선 배우 나성균씨가 연기하였다. 10.26 사태를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배우 권병길씨가 연기하였다.
  1. 일본이 희한한 게 해방 직후에 소위 임관을 시켜줬다. 그 전엔 견습사관 상태로 냅둔 채로.
  2. 후에 월북하여 전쟁 전에 사망.
  3. 중앙정보부부터 국가정보원까지 역대 수장들을 다룬 항목에 보면 김계원은 12.12 반란 세력을 빼면 단기 재임 3위에 해당한다. 심지어 초대부장이었던 김종필보다 더 짧을 정도.
  4. "형님, 그놈 없애버립시다"라고 말해서 차지철만을 얘기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설도 있다.
  5. 당시에는 주임상사라 불렸다.
  6. 최근 TV자서전에 출연하면서 자신이 군인으로 있으면서 이룬 업적들 중의 주임원사 제도 도입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7. 예비군들 입장에선 이런 낡은 총을 아직도 쓰게 하느냐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6~70년대라면 카빈도 2선급 화기로는 나쁘지 않은 총이었다. 카빈을 채택한 게 문제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이걸 쓴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