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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국회의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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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30대 시절
1 개요
李萬燮
1932년 2월 25일 ~ 2015년 12월 14일
여당 속 야당 정치인
한국 정치의 산증인
2 일생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청강(靑江)이다.
8선(選) 국회의원에 국회의장을 2번 역임했다.
1932년 일제강점기하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났다. 대륜중학교 시절 잠시 면관을 당하여 체육교사로 부임했던 김재규(훗날 중앙정보부장)와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었다.
(연세대 학생증)
6년제 대륜중학교를 거쳐, 1950년 연희대학교에 진학,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1] 연세대 재학 시절에는 응원단장으로도 활동했는데, 당시에는 수염을 길러 '털보 응원단장'으로 유명했다.
(연세대 응원단장 활동 모습)
졸업 후 통신사 기자로 일하다가 1958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는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4.19 혁명 뒤 자유당 내 부정선거 책임자 구속 동의안이 부결되자 기자석에 앉았던 이만섭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유당 이 도둑놈들아!'라고 외친 적도 있는데, 이에 대해 국회부의장이 '이만섭 기자 조용하세요'라고 답변한 것이 국회속기록에 남아있다.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국회속기록에 이름을 올린 사례라고 한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의 민정 이양과 관련된 기사로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인연을 맺고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제6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6년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비판하다가 이병철과 이맹희에 의해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할 뻔 하였다. 제7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9년 정구영 등과 함께 3선 개헌에 반대하였다가 정권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의 경질 등을 선행 조건으로 내걸고 찬성으로 선회하였다. 실제로 3선 개헌 이후 김형욱은 경질되었고, 이후락은 주일대사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만섭은 이 일로 말미암아 이후락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7대 대선과 8대 총선을 앞두고 주일대사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한 이후락은 이만섭을 낙선시키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펼친다. 8대 총선을 앞두고 대구 중구 선거구민들에게만 유독 과중한 세금고지서가 발부되지 않나, 선거 이후로 옮겨가기로 한 버스터미널이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옮겨가지를 않나, 선거운동기간 내내 중구에만 교통단속이 강화되지 않나;;(...) 오죽했으면 선거운동 중 한밤중에 구청장이 찾아와 "의원님 죄송합니다. 위에서 꼭 떨어뜨리라는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여당이지만 봐주지도 감싸주지도 말라고 합니다. 선거 당일 제가 대구에 없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미리 사과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만섭은 여당 공천으로 여당 텃밭에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중구에서 신민당 한병채 후보에게 7천 여 표차로 밀리며 낙선하고 말았다.
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는 한동안 정치 낭인으로 지내야 했고, 10월 유신 이후 치러진 9대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 공천심사에서 박찬 변호사에 밀려 탈락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사실상 임명하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명단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 뒤 같은 대구 출신인 이효상 당시 공화당 의장의 배려로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상근부의장이라는 한직을 얻어 1978년까지 재임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행히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대구 중구-서구-북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당시 부가가치세 도입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1979년 3월 국회 개원 때 여당 의원임에도 현 상황을 이야기하며 정부를 비판하였다. 이를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정희에게 악의적으로 보고하여 박정희가 이만섭을 민주공화당에서 제명시키려 하였다가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 등의 만류로 겨우 없던 일이 되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며 제5공화국이 출범한 뒤 실시된 정치규제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대구 중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원내에서 당을 대표하는 부총재로 활약하였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김종철이 한국국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나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최치환을 누르고 한국국민당 총재에 당선되었다. 1987년 소속 국회의원들이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으로 대거 탈당하는 사태를 겪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3년 재산 공개 파동으로 박준규가 국회의장직을 사퇴하자 잔여 국회의장 임기를 수행하였다.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1997년 이회창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에 반발한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그를 따라 탈당했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1998년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되자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고, 1999년에는 총재권한대행에 임명되어 여당의 2인자 위치에까지 올랐다.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으로 신당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되기까지 주역을 맡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로 당선되었다. 개원과 함께 제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투표에 참여한 272명 중 140표를 얻어 132표를 받은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2]을 단 8표차로 제치는 격전을 치렀다. 취임사에서 "나는 한 번은 여당을, 또 한 번은 야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친다."는 말을 남겼다. 2002년에는 국회의장의 중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뤄진 국회법 개정에 따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되었다. 2004년 정계를 은퇴하였다.
2015년 12월 14일 별세하였다. 향년 83세. 12월 18일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했다.
3 평가
해공 신익희의 뒤를 이은 한국 국회의장의 모범이자 의회주의자
파란만장하던 군사정권과 3김시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김대중, 김영삼 등과 비교해 인지도는 크지 않고, 한편으로는 여당 생활만 해 본 정치인으로 폄하되기도 하나 여당 안에서도 시류에 굴복하지 않고 소신에 따라 정권과 여당을 비판하는 데에 서슴없었던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또한 두 번의 국회의장 재임 중 여러 차례 의장 직권상정-여당 단독 처리, 즉 날치기 압박을 많이 받았음에도 이를 거부하여 입법부의 수호자 노릇 역시 톡톡히 수행한 정치인이었다. 본인도 이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 듯 2001년에 출간한 저서의 제목을 <날치기는 없다>로 했을 정도.
4 여담
2009년 모교 연세대에서 연희관(사회과학대학 소재)의 401호실을 '이만섭 홀'로 명명하여 경의를 표했다.
김두한에 대해서는 '입 바른 소리하는 훌륭한 사람인데 너무 일찍 죽어서 안타깝다'고 평했다. 이만섭은 정치깡패로서의 김두한보다 재야 정치인으로서의 김두한을 더 많이 접했기에 이런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국회 오물 투척사건을 일으키기 전, 정부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분노하여 질의 연설을 하던 중이었고, 그 후 이어지는 김대중의 질의 연설이 끝나자, 그 다음에 차례였던 김두한이 연설을 하다가 갖고온 똥물을 뿌려버린다. 나중에는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자 김대중, 박순천과 함께 당황하여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5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7번) | 민주공화당 | - | 당선-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선거구)[3] | 민주공화당 | 24,562 (50.6%) | 당선 (1위)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선거구) | 민주공화당 | 20,265 (41.5%) | 낙선 (2위) | |
1978 |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선거구)[4] | 민주공화당 | 138,826 (24.8%) | 당선 (2위) |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선거구)[5] | 한국국민당 | 74,176 (31.0%) | 당선 (1위) |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중) | 한국국민당 | 78,305 (23.4%) | 당선 (2위) |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서) | 한국국민당 | 44,742 (33.0%) | 낙선 (2위)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번) | 민주자유당 | - | 당선 | 하반기 국회의장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3번) | 신한국당 | - | 당선 | 1997.10.28 사퇴, 탈당 (15대 대선 이인제 후보 지지)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4번) | 새천년민주당 | - | 당선 | 상반기 국회의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