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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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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 2002년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기간 | 1948년 ~ 1979년 | |
임관 | 육사 5기 | |
최종계급 | 대장 | |
최종보직 | 육군참모총장 |
鄭昇和 (1929년 2월 27일~2002년 6월 12일)
대한민국 육군의 제1야전군사령관 | ||||
13대 이소동 | → | 14대 정승화 | → | 15대 김학원 |
대한민국 육군의 참모총장 | ||||
21대 이세호 | → | 22대 정승화 | → | 23대 이희성 |
1 소개
대한민국의 군인.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했으며, 최종 계급은 대장.
2 생애
경상북도 김천군(현 김천시) 봉산면 출생이다. 상관을 잘못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었다. 임관하고 나서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하필 강태무/표무원 소령이 월북해 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 3사단 백골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보임되어서 참전하였는데 군단장이 유재흥장군이었고 그 전투는 현리 전투였다고...이 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일도 있었다. 탈출할 때 한 화전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보답으로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 때는 방첩대장(현재의 명칭은 국군기무사령관)을 역임했다.회고록에 따르면 이후의 원수지간이 되는 노태우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에 있었는데, 방첩대의 특성상 정치 분야에 관여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대해 정승화는 '너무 그 쪽(정치)에 열중하지 마라. 군인이라면 야전에서 일하는게 더욱 군인답지 않겠나'라고 가볍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이 때 육군사관학교 제11기생들의 쿠데타 음모를 감지하였으나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인 김재춘과 함께 이 사건을 덮기로 하였다.[1]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 3공화국, 4공화국을 거치면서 계속 승승장구했다. 제7보병사단장, 국방부 인사국장, 제3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후에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정승화는 김대중에게 부정적이라 그가 당선되어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편파적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여하간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시도는 없었다.
2.1 10.26 이후 ~ 87년 대선 전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큰 사건이 터지는데 1979년 10.26 사건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였던 정승화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자세한 사항은 10.26 사건참조.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이 되어 사건 수습을 진행한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 때 신군부측에 납치당하고 만다. 10.26 사건 항목에도 자세히 나오지만,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 '가'동(피살장소는 '나'동이었음)에 있었다는 점을 조사하겠다는 명목으로 전두환의 부하 허삼수 대령 등에게 강제 연행,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사건 당일 김재규는 대통령이 연회가 있으면서도 정승화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궁정동으로 불러냈다. 물론 김재규는 박정희와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와 함께하지 못했고, 정승화는 김재규가 보낸 중정 차장과 저녁을 먹던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김재규의 치밀한 계략인지 순간적인 기지인지 본능적인 직감인지는 이제 아무로 모르지만 이때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있으면서 김재규의 쿠데타를 눈치채지 못했고,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사실을 국방부장관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인 사실은 정승화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2]이에 대해 정승화는 청문회 등에서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당시 상황의 급박함으로 인해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한 것이라고 자기 변호하였다.
그래서 10.26 사건 후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혔고, 전두환의 월권행위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다. 모진 고문 후 결국은 석방되었지만 이미 모든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간 뒤였다. 장태완과 정병주가 이 일에 크게 분노하며 반기를 드나, 안타깝게도 그들만으로 신군부를 막을 수는 없었고 그들 또한 신군부에 잡혀 버린다.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기소되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에서 고문을 받고, 군사재판의 판결에 의해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자그마치 17계급이나 강등당하는 굴욕적인 처분을 받으며 불명예 전역해야 했다. 한평생 뼛속까지 군인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최악의 처분이었다.
▲ 정승화 대장(左)과 장태완 소장(右) |
2.2 1987년 제13대 대선이후~
이후 남한산성에서 형기를 채우다가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세간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니 그것이 87년 대선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로 치러지게 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은 야당의 김영삼-김대중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하고 돌아온 유신잔당 김종필까지 출마하면서 야당표의 분산으로 노태우 당선이 유력하였다. 정승화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김영삼의 삼고초려 끝에 1987년 대선 직전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겸 부총재로 전격 등장했다.
공식선거운동 시작 직후 김영삼이 정승화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하자 김영삼의 지지율이 1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고 선거 바로 전날 김현희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엄청난 북풍이 불어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노태우-36%, 김영삼-27%, 김대중-26%, 김종필-7%, 즉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의 당선으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정승화는 노태우가 당선되자 조용히 정치에서 손을 떼었으며,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어 전두환 정부에서 조치 된 장군들의 계급 환원 처리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대장의 자격을 되찾았다. 1988년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 12.12사태 당시의 피해자로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증언 했다. 1993년에는 장태완, 김진기. 하소곤 등 12.12사태 당시 육본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 반란죄로 고발 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당대 明 이유로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 유예 처리 했다. 오히려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본 측 장군들을 군사 반란죄, 무고죄 등으로 역고소 했다.
2.3 이후
1995년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 이 발생하자 증인으로 채택되어 증언하였다. 기대를 가지고 재판과정을 지켜봤지만,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전두환, 노태우가 풀려나자,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래도 풀어준다니 이나라가 진정으로 법치 국가입니까" 라며 분노를 표시 했다.
이후 1999년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 제 6대 회장에 선출 되여 군인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다. 2002년 6월12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 향년 76세. 대전 국립 현충원에 그 유해가 묻혔다.
3 미디어에서
제4공화국(MBC)에서는 MBC 성우 정승현씨가, 코리아게이트(SBS)에서는 MBC 성우 최병학씨가,[3]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박인환씨가 정승화 역을 맡았다. 장태완이 말했던 총장님이 바로 이 분이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정종준씨가 분했다. 영화 속 설정상 여자에는 사족을 못쓴다고(...)
특히 MBC 제5공화국에서는 1987년 대선 국면에서 김영삼의 제안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집앞에서 후배 고명승이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말을 하자 "전두환이가 보내서 왔나? 가서 전하게. 그렇잖아도 고민중이었는데, 결심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이만 가보게."라고 말하는 간지나는 장면이 나왔다.
4 기타
참고로 10.26 당시 자신을 몰라보는 육군본부의 초병에게 "나 참모총장이야!!" 하니 그 초병이 대답하기를 "뭔 총장?? 대학교 총장 말인가요?"라고 한 일화는 정승화 회고록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4] 궁정동 안가의 연회에 참석할 때 정승화 대장은 군복이 아닌 사복, 즉 정장 차림이었고, 자신의 관용차가 아닌 김재규의 차를 타고 온 상황이었다. 육본의 초병도 "한밤중에 갑자기 민간차량을 타고 나타난 사복 차림의 장년 남성"이 설마 육군참모총장이라곤 생각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 병사는 그날 밤 내내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굴렀을 듯 하다 다행히 곧 다른 장교가 정승화를 알아보고 통과시켰다고. 이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약간 변형되어 육군 초병(홍록기)은 "까지 말고 돌아가"로 외치는 대사를 이제 죽었다 하고 중앙정보부 직원 하나가 '총장님? 어느 대학 총장님 얘긴지...'하는 걸로 나온다.
일선 지휘관으로 있을 때부터 휘하 장병들의 사격술 향상에 매우 공을 들였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이 거쳐간 부대는 사격자세라던가, 격발 등 사격의 기본이 탄탄하게 갖춰졌다는 후문.
가족으로은 아내인 신유경 씨와 3남 1녀가 있다. 자녀 중 셋째인 정이열 씨는 아버지처럼 육군사관학교(육사 38기)를 나와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대령으로 예편했다.
소설 '리턴 1979'에선 최규하 대통령의 둘도 없는 군부 파트너로, 군부 내 2인자 장태완과 함께 '유신 체제를 이용한 국정 개혁'의 한 축이 된다. 물론 12.12 사태 같은 건 진압.- ↑ 김재춘은 5.16쿠데타에 가담해서 한때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랐으나 김종필을 중심으로한 육사 8기생 그룹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서 군부정권 핵심부에서 밀려났다.
- ↑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죽음을 현장에서 막지 못한 죄인이니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 사람인데 뻔뻔하게도(?) 자리를 보전하길래 의로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 ↑ 공교롭게도 이분은 훗날 제5공화국(드라마)에서 12.12 직후 신군부의 지지로 국방장관이 되어 5.17 내란에 동조한 주영복(공군참모총장 역임) 역할로 출연했다.
- ↑ 이에 대해 정승화는 '(대통령 저격이라는)화급한 상황이 일어났으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