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프 하인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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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 하인케스
(Jupp Heynckes)
생년월일1945년 5월 9일[1]
국적독일
출신지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묀헨글라트바흐
포지션FW
선수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63/64 - 1966/67)
하노버 96 (1967/68 - 1969/70)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0/71 - 1977/78)
지도자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9/80 - 1986/87)
FC 바이에른 뮌헨 (1987/88 - 1990/91)
아틀레틱 빌바오 (1992/93 - 1993/94)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94/95)
CD 테네리페 (1995/96 - 1996/97)
레알 마드리드 CF (1997/98)
SL 벤피카 (1999/00)
아틀레틱 빌바오 (2001/02 - 2002/03)
FC 샬케 04 (2003/04)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2006/07)
FC 바이에른 뮌헨 (2009/10)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9/10 - 2010/11)
FC 바이에른 뮌헨 (2011/12 - 2012/13)
국가대표39경기 14골(서독)
2013 FIFA 올해의 감독상
수상
유프 하인케스
2위
알렉스 퍼거슨
3위
위르겐 클롭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역대 감독
우도 라텍
(1975 - 1979)
유프 하인케스
(1979 - 1987)
볼프 베르너
(1987 - 1989)
호르스트 쾨펠
(2005 - 2006)
유프 하인케스
(2006 - 2007)
요스 뤼휘카이
(2007 - 2008)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감독
우도 라텍
(1983 - 1987)
유프 하인케스
(1987 - 1991)
쇠렌 레르비
(1991 - 1992)
위르겐 클린스만
(2008 - 2009)
유프 하인케스
(2009)
루이 판 할
(2009 - 2011)
안드리스 욘커 (감독대행)
(2011)
유프 하인케스
(2011 - 2013)
펩 과르디올라
(2013 - 2016)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파비오 카펠로
(1996 - 1997)
유프 하인케스
(1997 - 1998)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2]
(1998)

현역 시절 분데스리가 통산 220골[3]을 기록하고, 1974년 서독 월드컵 우승과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를 이끈 레전드

레알 마드리드에게 32년만에 빅이어를 되찾아주고, 황혼기에는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독일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명장

위르겐 클롭과 더불어 빠른 템포를 위주로 한 게겐 프레싱, 부분 전술의 달인

1 소개

독일 출신의 전직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1945년 5월 9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묀헨글라트바흐 출생.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출신지의 연고팀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레전드로 글라트바흐의 전성기인 60년대와 70년대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4회의 분데스리가우승과 1회의 DFB-포칼, 그리고 1975년 UEFA컵을 우승하였다. 당시 좋은 호흡을 보인 동료가 한국 대표팀 감독인 울리 슈틸리케. 또한 독일(당시 서독) 국가대표팀으로도 39경기에 출장해 14골을 기록했으며, 유로 1972와 1974 서독월드컵 우승의 주역이기도 하다.

선수시절 유럽에서 가장 빠른 공격수로 불렸으며, 분데스리가 369경기 출장 220골을 기록했다. 그의 기록은 '폭격기' 게르트 뮐러의 365골과 클라우스 피셔의 268골에 이어 통산 3번째로 많은 득점 기록이다. 참고로 이 셋은 같은시대에 뛰었다. 주로 득점 일위는 뮐러가 하지만 피셔와 하인케스가 일등한 적도 있다.

선수생활을 은퇴한 1년 후 친정팀 묀헨글라트바흐의 감독직으로 부임하는데, 감독으로써는 독일 출신의 감독으로는 드물게 프리메라 리가에 7년이나 몸담는 등 스페인 축구에 조예가 깊으며, 크게 주목받는 정상급 감독은 아니었으나 (2007년 은퇴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은퇴했으면 잊혀질 뻔했다.) 66세의 고령으로 복귀해 바이에른 뮌헨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을 이끌며 결국 마지막에 트레블 우승을 달성하고 화려하게 은퇴하며 전설로 남았다.

감독으로써의 우승기록은 아래 항목 참조.

2 선수시절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황금기를 이끈 선수시절, 좌로부터 울리 슈틸리케, 우도 라텍(감독),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

하인케스는 1964년 당시 2부리가 소속이었던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데뷔했다. 다음 시즌 팀은 바이스바일러 감독의 휘하에서 팀의 분데스리가 승격을 이끌었다. 1967년엔 하노버 96으로 이적해 3시즌간 활약했다.

그리고 1970년, 친정팀 글라트바흐로 복귀해 은퇴할때까지 뛰었으며, 이적 직후시즌인 70-71시즌에 팀은 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72-73시즌에는 팀의 UEFA컵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하인케스는 12골로 득점왕을 차지한다. 73-74, 74-75시즌에는 각각 30골, 27골로 리가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74-75시즌에는 당대 최강 FC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다시한번 팀에 마이스터 샬레[4]를 선사한 데 이어 UEFA컵에서도 결승 2차전에서 헤트트릭을 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팀의 더블을 이끈다. 하인케스는 74-75 UEFA컵에서도 1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75-76시즌에는 팀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행을 이끌었으나 결승에서 리버풀 FC에 3대1로 패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하인케스는 이 시즌 6골로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오른다. 76-77시즌 다시한번 팀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끈 하인케스는 이듬해 은퇴한다.

3 감독으로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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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한시즌만에 모은 트로피.jpg

은퇴 후 이듬해, 하인케스는 우도 라텍의 뒤를 이어 8년동안 친정팀 글라트바흐의 지휘봉을 잡았다.

1987-88시즌을 앞두고 하인케스는 독일 최강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에 부임하고, 이후 4시즌동안 두 번의 리가 우승을 이끌었으나 세대교체에 실패하며 90-91시즌 부진에 빠지자 결과적으로 경질되었다.

3.1 프리메라 리가에서의 활약

1991-92시즌 하인케스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아틀레틱 빌바오의 지휘봉을 잡으며 92-93시즌에는 라 리가 5위를 기록하며 빌바오의 UEFA컵 진출을 이끈다. 94-95시즌에는 잠깐 분데스리가로 돌아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선수단과의 마찰로 인해 9개월만에 잔여시즌을 포기하고 팀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1995-96시즌 스페인 라 리가로 돌아온 하인케스는 하위권 CD 테네리페의 한시즌만에 UEFA컵 진출을 이끈데다 이듬해에는 UEFA컵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안타깝게도 라리가에서는 중위권으로 처진 9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이런 라리가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1997년 스페인 최강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취임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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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사령탑 시절의 하인케스.
흥분하면 얼굴 붉어지시는 건 이때도 여전했다

97-98 시즌 하인케스는 레알 마드리드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감독 커리어 사상 첫 유럽대항전 타이틀을 얻는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의 32년만의 챔스 우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라리가에서 죽을 쑤며 4위에 그친데다 엘 클라시코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한 시즌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다음시즌 하인케스는 SL 벤피카 감독직을 맡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아틀레틱 빌바오의 사령탑으로 부임해 2시즌간 팀을 이끌지만 지난번처럼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지는 못했다.

3.2 분데스리가로의 복귀와 부진, 은퇴

2003-04 시즌을 앞두고 하인케스 감독은 독일로 돌아왔다. 복귀무대의 첫 도전은 FC 샬케 04 사령탑. 하지만 큰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고, 팀은 중위권에 머무르다 시즌을 7위로 마감했다. 하인케스는 그 해 9월까지 감독직을 맡다가 물러났다.

약 2년간의 공백기 끝에 2006-07시즌 하인케스는 본인의 고향팀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복귀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글라트바흐는 14경기 연속 무승을 달리며 강등권인 17위로 추락했고, 하인케스는 2007년 1월 31일 감독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며 은퇴를 선언했다.

3.3 은퇴 번복과 복귀, 전설의 시작

은퇴 후 고향 글라트바흐에서 지내던 하인케스 감독은 08-09시즌 막판에 깜짝 복귀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체제하의 바이에른 뮌헨이 시즌 내내 졸전끝에 4위로 처지며 유로파리그권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긴급 소방수로 선임된 감독이 하인케스였던 것. 그렇게 2009년 4월 27일 클린스만이 경질되자 다시 바이에른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다행히 팀의 연승행진을 이끌며 바이에른은 시즌을 2위로 마감했고, 무관에 그쳤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2009년 6월 5일,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전임 감독 라바디아가 함부르크 SV로 떠난 몇 시간 후 하인케스를 영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인케스의 레버쿠젠은 많은 공격루트를 양산해내며 09-10시즌 4위에 오르더니, 10-11시즌에는 리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부흥한다. 특히 슈테판 키슬링의 재발견과 바이에른에서 임대해온 토니 크로스의 폭풍성장을 이끌었던 이도 모두 하인케스였다.[6] 그리고 10-11시즌 종료를 앞두고 다시금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다음시즌 복귀한다는 오피셜이 떴다.

3.4 여정의 끝, FC 바이에른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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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끝을 유종의 미로 장식하다.

11-12시즌 하인케스는 이사진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공-수 양면의 선수보강을 통해 10-11시즌 무관으로 죽쑤던 것과 달리 팀을 한시즌만에 유럽 정상급 팀으로 탈바꿈시킨다. 특히 지난시즌 바이언의 전술은 '3골 먹히면 5골넣어서 이긴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분데스 공식 호구였던 수비진은 무려 1011분 무실점을 기록할 정도의 통곡의 벽의 수비진으로 탈바꿈한다. 제롬 보아텡하피냐, 마누엘 노이어등 수비진-골키퍼의 알짜배기 영입에 하인케스의 수비전술의 변화 덕택. 바이언은 전반기 2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승점 4점을 앞선 선두로 마감한다. 후반기에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부상공백에 토니 크로스아르연 로번, 토마스 뮐러등이 동반 부진에 빠지며 팀은 무재배-뜬금패-무재배의 부진을 겪는다. 부상자가 속출했던 것은 팀의 얇은 스쿼드로[7] 분데스리가, DFB-포칼, UEFA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병행하며 컨디션이 극도로 저하된 것이 원인이었다.(게다가 바이에른은 챔스4강 레알 마드리드전과 포칼4강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에서 무려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를 치렀다.[8]) 결국 30R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승점 6점짜리 단두대 매치에서 아르연 로번의 시원시원한 삽질끝에 1대0으로 패했고, 31R 1.FSV 마인츠05와 0대0 무재배를 하며 승점 8점차가 나버려 리가 우승과 멀어졌다.

DFB-포칼 결승에서 다시한번 데어 클라시커를 치렀으나 졸전끝에 5대2로 패하며 국내리그 더블을 모두 라이벌 도르트문트에게 내준 데 이어 레알 마드리드와의 혈투끝에 결승에 진출한 챔피언스리그에서도 홈에서 첼시의 영혼의 10백과 드록바에 당해 승부차기에서 이비차 올리치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실축하며 빅이어를 내줘야했다. 결국 11-12시즌 결과는 그 유명한 트리플 러너업(준우승 트레블)[9]. 그저 안습...

절치부심한 12-13시즌, 서브 부실로 피눈물을 흘렸던 바이에른은 다시한번 분노의 영입을 시전하며 하비 마르티네스단테, 마리오 만주키치, 제르단 샤치리, 클라우디오 피사로를 사왔다.

독일 슈퍼컵에서의 시즌 첫 데어 클라시커에서 신입생들의 활약으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꺾으며 우승하더니 12-13시즌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분데스리가의 역대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갈아치우며 우승하였다. 역대 최다승(29승), 역대 최소패(1패), 역대 최다 승점(91점), 역대 최단기간 우승(28라운드), 2위와의 최다승점차(25점), 역대 최소실점(18실점), 개막전 기점 최다연승(8연승), 최다 원정승(15승), 최단기간 전반기 우승(14라운드) 등등.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조별리그 선두로 올라와 아스날 FC를 원정에서 꺾고 유벤투스는 1,2차전 모두 2대0으로 침몰시키더니 4강에서는 우주최강 FC 바르셀로나를 홈4-0, 원정3-0으로 도합 7대0으로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은 공교롭게도 영국축구의 심장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데어 클라시커. 지난 시즌 도르트문트전에서 연이어 피눈물을 흘렸던 아르연 로번의 결승골로 2대1로 승리하며 팀 역사상 다섯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면서, 하인케스 본인 커리어의 두번째 유럽 정복에 성공했다.

결국 포칼에서도 결승전에서 VfB 슈투트가르트를 꺾으며 역대 최다득점으로(18골) 우승에 성공하며 바이에른 뮌헨의 독일 클럽 사상 최초로 트레블 우승을 이끌었다. 12-13시즌 바이에른이 기록한 골은 무려 153골. 흠좀무. 시즌중이었던 2월에 12-13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던 하인케스는 결국 팀의 트레블 우승 후 아름답게 은퇴한다.[10] 은퇴 선언 이후 뮌헨의 칼 하인츠 루메니게사장과 마티아스 잠머단장은 하인케스를 구단의 기술고문으로 임명하여 자문을 구하려고 했으나, 하인케스는 트레블을 이룬 자신이 구단에 잔류할 경우 후임인 펩 과르디올라감독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정중히 거절했다. 현재는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소일거리를 하며 행복한 노년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4 기타

  • 평소에는 말끔한 얼굴이지만 경기도중 기쁘거나 화나거나 흥분했을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 때문에 오스람(독일 전구회사)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 은퇴 이후에도 파리 생제르망, 맨체스터 시티, 레알 마드리드등에서 러브콜이 있었으나 모두 거절했다는 후문.
  • 12-13시즌의 미칠 듯한 우승 행진으로 역사상 7번째 트레블우승을 차지한 감독이 되었다. 또한 역사상 4번째로 다른 두 팀에서 빅이어를 들어올린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4명의 감독 중 빅이어를 들어올린 때의 시간 간격이 가장 길다. 무려 15년...실축만 아니었어도 1년 줄어드는 건데
  • 은퇴 후 2013 FIFA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여담으로 2013 감독상 최종 3인[11]은 2012 최종 3인[12]과 단 한 명도 겹치지 않는다.[13]

5 기록

5.1 선수 기록

5.2 감독 기록

  1. 여담으로 그의 생일은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바로 그 날이다. 좀 복잡한게, 정확히는 5월 8일에 독일 측이 연합군에 항복을 했다. 그런데 이오시프 스탈린이 '베를린 점령한 건 우리인데 왜 우리는 빼고 항복하냐'면서 다시 항복을 받아야겠다고 우겨서 5월 9일에 한 번 더 항복한다. 자세한 내용은 승리의 날 항목 참조.
  2. 1998년 유프 하인케스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서 사임한 후 6월 17일에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코칭 스태프와의 갈등으로 인해 22일만에(7월 9일) 사퇴했고 6일 후인 7월 15일 거스 히딩크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3. 통산 득점 3위
  4. Meister Schale ; 분데스리가 우승 트로피. 접시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마이스터 샬레라고 불린다. 방패모양 위에 역대 우승팀들이 새겨져 있다.
  5. 원래 레알은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유럽 제패를 이끈 명장 히츠펠트를 영입하려했으나 바이에른 뮌헨에 뺏기자 차선책으로 라리가에서 활약을 보이는 하인케스로 전향했고, 영입에 성공했다.
  6. 시즌 종료직전 레버쿠젠 이사진은 크로스의 완전 영입 의사를 표했으나 바이에른에서 원큐에 거절했다.
  7. 11-12시즌 바이에른은 베스트11은 유럽 정상급이었으나 그에 비해 서브진은 매우 부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8. 승부차기까지 가면서도 교체카드를 1장씩밖에 안썼다. 서브가 워낙 부실한지라. 안습.
  9. 역사상 단 두팀만이 이 업적을 이뤘다. 01-02시즌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그 10년 뒤 바이에른 뮌헨. 특히 양 팀에 모두 소속됐었던 한스-외르크 부트 골키퍼는 준우승 트레블만 두번 기록한 전무후무한 넘사벽의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부트는 11-12시즌 끝나고 은퇴해서 12-13시즌 바이에른의 트레블 우승에 함께하지 못했다.
  10. 원래 바이에른 이사진은 하인케스 감독의 잔류를 원했으나 하인케스 감독이 나이와 건강상 문제로 가족들과 상의 끝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 후임인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영입 확정은 그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과르디올라 선임 이후 너무나 놀라운 경기력에 은퇴를 번복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11. 유프 하인케스, 위르겐 클롭, 알렉스 퍼거슨
  12. 비센테 델 보스케, 주제 무리뉴, 펩 과르디올라
  13.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과르디올라는 감독직을 사퇴하여 쉬고 있었고, 무리뉴의 레알은 무관이었으며, 델 보스케의 스페인 국대는 컨페드컵 결승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털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