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사계을(를) 찾아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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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전태관, 김종진 |
1 프로필
1980년대 중반 록음악의 중흥기, 그 가운데였던 1986년에 결성된 밴드. 결성 초창기에는 5인조 밴드로 시작했으나, 멤버들의 잇단 탈퇴로 김종진(기타, 보컬)과 전태관(드럼, 퍼커션)의 2인조 밴드로 재편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름이 너무 긴 탓에(…) 사계절, 봄여가겨, 春夏秋冬, SSaW 등으로 줄여부르기도 한다.
2 역사
2.1 결성
전술하였듯, 1980년대 중반 한국 록음악의 중흥기 시절에 결성됐다. 결성 초창기 멤버는 지금보면 가히 전설 아닌 레전드가 함께 모였는데, 현 멤버인 김종진(기타, 보컬), 전태관(드럼, 퍼커션)에 ,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출신의 천재 싱어송라이터 故 유재하(키보드), 그리고 퓨전 재즈 베이시스트로서 인지도를 쌓고 있던 장기호(베이스)[1]가 모여 만든 밴드가 시초였다.[2] 이후 그들의 선배인 '신촌블루스' 출신의 故 김현식(보컬)을 서포터 해 주는 형식으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 결성됐다.[3] 이 멤버로 만든 게 바로 김현식 3집. 김종진이 작사/작곡한 '쓸쓸한 오후'가 유명.
멤버 면면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당시 상당히 앞서나가는 사운드를 만드는데 집중했다. 록, 블루스, 재즈를 기반으로 하여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세련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김현식을 서포트 해 주는 밴드 역할만 맡다보니 밴드의 정체성이 약해졌고, 더구나 김현식의 마약사건이 터지면서 자연스레 팀은 와해되었다. 유재하가 솔로활동을 시작하면서 팀을 떠났고 유재하의 빈자리를 박성식(키보드)이 메웠지만, 이번에는 장기호와 박성식이 사랑과 평화로 떠나갔다.[4] 이 두명은 결국 듀엣으로 '빛과 소금'을 결성하게 이르렀다.
2.2 2인조로 재편
결국 1988년에[5] 김종진과 전태관의 2인조 밴드로 재편, 이름도 봄여름가을겨울로 명명하고 1집 <봄.여름.가을.겨울>을 발매했다. 10곡 중 3곡이 연주곡으로 국내 가수 최초로 연주곡이 타이틀곡이 되어 화제가 됐고,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6],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이 유명한 노래.
이듬해인 1989년에 발매한 2집 <봄.여름.가을.겨울 2 -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은 봄여름가을겨울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앨범이었다. 이 밴드의 대표곡인 '어떤이의 꿈'은 그 해 가요차트에서 상위권에 오르고,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내품에 안기어'도 인기를 얻었다.
대중적인 밴드로 성공하면서 1991년 유명 캐쥬얼 신발 브랜드인 랜드로바의 CF 모델로 출연하며 김종진이 직접 작사/작곡한 CM송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7] 국내 최초의 라이브앨범도 발매하고 미국에서 앨범 전 과정을 제작한 1992년 3집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의 타이틀곡인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와 '아웃사이더'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가히 탄탄대로. 특히 3집은 사진가 김중만이 앨범재킷 작업을 도와줬다. 그런데 이 때를 기점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은 대중적인 사운드 대신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2.3 실험적 음악 시도기
봄여름가을겨울은 4집 와 5집 <Mystery>에서 실험적인 사운드를 내기 시작했다. 신중현의 '미인'을 자신들의 까끌한 스타일로 편곡하는가 하면 모스부호 소리를 따 넣기도 했다. 세련된 사운드에서 까끌한 사운드로의 회기라고 할까. 이는 당시 평단의 극찬을 이끌어냈으나 그전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1996년 결성 1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6집 <Banana Shake>는 CD 케이스를 깡통 형태[8]로 만들어 발매했다. 신해철, 이현도, 이주노, 이소라 등이 참여했지만 이 앨범의 대표곡인 '바나나 쉐이크'[9]가 선정성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을 먹는 크리를 맛보기도 했다.
이후 베스트 앨범과 공연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 그 중 1999년 12월 31일 자정 공연 실황을 담은 <봄여름가을겨울 生生 LIVE!> Happy New Millenium이 2000장 한정판으로 발매되어 공연에 참석한 관객들에게 한하여 배송되었다. 오오오!!! 하지만 4~6집의 실험적 음악의 시도로 뜻하지 않은 침체기를 겪고만다.
2.4 Bravo, My Life 이후
그렇게 침체기를 겪다가 2002년 7집 <Bravo, My Life>가 대박을 쳤다. 특히 동명 타이틀곡인 'Bravo, My Life' 는 40대에 접어든 김종진-전태관의 심정이 그대로 녹아들어간, 중장년층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로 큰 공감을 얻었고, 그간의 침체기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7집 이후에는 주로 연주곡 중심의 앨범 발매와 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다. <Best of the Best Bom Yeo-Reum Gaeul Kyeo-Ul Song, Instrumental and their Story>(연주곡 중심) <Wine & Music Series I, II, III>(라이브 중심)을 냈는데, 특히 라이브 앨범 시리즈인 <Wine & Music Series>에서는 레게, 재즈, 보사노바 등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선보였다. 3년에 걸쳐 저작권소송을 벌였는데, 봄여름가을겨울의 모든 음반과 온라인 및 오프라인 판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2008년 9월에 20주년 기념앨범인 8집 <아름답다, 아름다워!>를 발매했고, 여기서는 클래식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3 음악 성향
밴드 초기에는 록을 기반으로 블루스와 재즈를 접목한 시도가 돋보이는 밴드였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전신밴드인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들의 음악 성향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봄여름가을겨울은 1990년대 초반 2~3집에서 퓨전 재즈로 흥했다. 그러다 4~6집 시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좀 더 다양한 음악과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록밴드이지만 한 스타일만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셈. 김종진이 50 평생 최고의 무대를 봤다는 얘기를 괜히 한 게 아니다.
4 멤버 소개
- 김종진(기타, 보컬) - 봄여름가을겨울의 작사/작곡의 많은 부분을 맡고 있다. 보컬로는 사실 애교섞인 말로라도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려우며(혀가 엄청나게 짧다) 8~90년대에 많은 혹평을 받았으나 밴드 커리어가 쌓아가며 그러한 얘기는 쑥 들어갔다.
그래서 그런지 봄여름가을겨울은 보컬이 독특한 밴드에게는 혹독하게 구나보다?!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중후하고 섹시한 미중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와인 애호가라고한다.
- 전태관(드럼, 퍼커션) - 서강대학교 중앙록밴드 '킨젝스' 출신의 드러머. 굉장한 연습벌레로 알려져 있다.[10] 손목 인대가 늘어났는데도 철제 스틱으로 연습해 나중에 2연타 스트록을 완성시켰다는 얘기는 전설 아닌 레전드. 당시 드러머에 대한 인식을 바꾼 사람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야성미 넘치거나 뭔가 무게감있는 모습을 강조하던 모습과는 달리 스마트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였기 때문.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주식에 꽤 능하다고 알려져있는데 김종진의 말에 의하면 거의 프로인 듯하다.
5 트리비아
- KBS 쿨 FM에서 저녁 6시~8시 슬롯에서 라디오 DJ를 맡은 적이 있다. 이 시간은 M본부의 절대시간인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방송되는 시간. 거기에 역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또 다른 전설아닌 레전드인 S본부의 박소현의 러브게임이 방송되는 시간이라 1년 밖에 못 버팅기고 버로우…
그리고 현재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화요일 코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출연 중이다.
- KBS TOP밴드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예선에서는 따로 심사를 했지만, 16강 이후부터는 심사평은 따로, 심사점수는 같이 발표했다. 특히 김종진이 심사 중에 다이나믹한 동작이나 뭔가 깨는 듯한
병맛스럽지만 뭔가 멋진발언들을 모아 디시인사이드 Top밴드 갤러리에서 '탑밴드 김종진 바이러스'라는 이름의 동영상을 만들기도(…) # 김종진이 TOP밴드에서 말한 주옥같은(?) 어록을 해당 영상에서 확인해 보시라.
- 김종진의 기타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7년에 경제야 놀자에서 감정된 가격으론 5000만원 정도이며 현재론 1억이 넘을거라고 했으나, 뭐 김종진씨가 팔 생각이 전혀 없으니 가격이 무의미하긴 하다. 여튼 이 기타는 데이비드 레터맨 쇼의 백밴드 기타리스트로 유명한 미국의 재즈 훵크 기타리스트인 하이럼 블럭(Hiram Bullock)이 애지중지하던 기타로 빈티지 펜더의 명기중의 명기인 1962년산(리이슈가 아니다!) 스트라토캐스터에 자기 취향에 맞게 깁슨 픽업의 명기중의 명기인 오리지널 PAF 픽업을 장착한 물건.
- 하이럼 블럭이 마약에 찌들어 있을 때 팔았는데 그걸 한상원이 우연히 알게 되어 김종진에게 알려주어 맨해튼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하이럼 블럭이 재기하려 할 때 매니저가 다시 찾으러 왔다고 하며, 당시 매니저가 '저거 (김종진이) 훔친 거다!'라는 식의 발언까지 하며 강경하게 나왔다고 한다. 김종진이 '좋은 기타는 연주되어야 한다. 이 기타도 주인에게 돌아가고 싶을 거다. 하이럼 블럭이 마약을 정말 끊는다면 그냥 돌려주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오랜 시간 심사숙고한 매니저는 기타를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 매니저마저도 블럭이 마약을 끊고 재기할 가능성을 낮게 본 셈. 이후 하이럼 블럭은 콜트에서 시그네쳐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2007년 후두암 판정을 받았고, 다음 해인 2008년 세상을 떠나 앞으로는 영영 돌려줄 수 없게 되었다.
-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중 최고의 빈티지 명기로 손꼽히는 기타에 역시 깁슨 픽업 중 최고로 평가받는 오리지널 PAF 픽업에다, 천재 기타리스트 하이럼 블럭의 이름값도 있으며, 김종진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수 십 년 동안 다른 기타를 사용하지 않고 단 하나의 모델로 수많은 곡에 연주를 했다는 프리미엄까지 겹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렉트릭 기타 중 하나가 되었다.
- 전태관은 2010년 4월 6일 방송된 <1대100 >에 출연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상금 5천만원을 획득했다. 통산 10번째며 연예인으로썬 4번째 우승자.
- 반면 김종진은 6단계에서 탈락...
- 2012년 전태관이 신장암에 걸려 한쪽을 제거하였으나 암이 드러머로서는 최악인 어깨 부위로 전이되었다고 한다. 앞으로는 몸이 회복될 때까지 회사 경영에만 참여한다고 하며 연주활동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종진 혼자 무대에 서고 있다.
- 한때 윤상을 봄여름가을겨울의 베이시스트로 키우려 했다고 한다. 당시 음악하던 10대 동생들 중에 김현철이 알려주었는데 그때 베이스 치던 친구들 중에선 가장 얼굴이 잘생겨서였다고…[11] 하지만 합숙해서 연습하던 도중 윤상은 팀을 나가게 되었고, 이후 가수로 데뷔해 재회하게 되었는데 당시 봄여름가을겨울은 윤상의 행보가 좀 의외였다고 한다.[12] 윤상은 김현식의 앨범에서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곡을 쓰기도 했었고 봄여름가을겨울은 김현식과 함께했었으니 굉장히 오래된 사이.
- 이제 막 활동하던 무렵 당시 밴드들은 주요 돈벌이가 업소에서 연주하는 것이었는데[13] 그런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서 일부러 본인들의 공연이 아니면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현식의 백밴드라는 인식에서도 벗어나고 싶어 웬만하면 공연 세션 제의도 거절했었다고.
- 젊은 시절 한동안 방황했던 김장훈의 은인이기도 하다. 당시 소속사 동아기획에서 김장훈 앨범 안 내주면 나가겠다고 소속사 대표에게 단호하게 얘기했었다고… 김현식의 밴드 시절 늘 김장훈이 놀러왔는데 늘 웃겨서 연습할 수가 없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는 걸로보아 오래되었고 변함없이 각별한 사이인 듯.
전태관:장훈이 그때부터 개그맨이었어…[14] 김장훈 또한 나이 차이가 바로 한 살 아래임에도 아직도 깎듯이 대한다고 하며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 6집 <Banana Shake>의 스킷 'Yag'는 '거북이 두 마리를 키웠는데 알을 낳지 않아 확인해 보니 두 마리 다 숫놈이었다'는 내용. 제목부터 어떤 단어의 순서를 뒤집은 것으로, 성 소수자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와 조롱이 담겨 있어 당시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을 받았다. 인권 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던 90년대라 유야무야 넘어갔지, 2010년대였다면 공개사과를 했어야 할 수준.
- 김종진의 전 부인이었던 박미령은 1980년대 하이틴 스타로 김종진과 결혼하며 화제를 모았으나, 신내림을 받고 무속인이 되었다. 이유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김종진과의 종교적 문제로 알려져 있다.[15] 이후 김종진은 영화 '올드보이'의 최면술사 역으로 유명한 이승신과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 8집의 타이틀곡 <사랑은>의 경우 이승신이 작사하기도.
내 인생이 성경책이라면 나는 지금 창세기에 있어
- ↑ 나는 가수다의 전문가위원으로 활동하시는 그 장기호 교수 맞다.
- ↑ 여담으로 당시 유재하가 다들 한명씩 맡고있는 계절이 있는데 자신은 뭐냐고 묻지 김현식이 그냥 환절기 해라라고 말했다고...
- ↑ 당시 김종진 전태관은 김현식이 자신들을 인정하고 멤버로 영입한다는말에 뛸듯이 기뻤었다고
그리고 한번 튕겼다한다. - ↑ 사실 여기에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봄여름가을겨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 '밴드 오브 브라더스' 빛과 소금 편을 통해서 이 뒷이야기를 밝혔다. 당시 봄여름가을겨울은 김현식이 스케줄을 물어오면 밴드가 거기에 맞춰 스케줄을 뛰는 식으로 밴드를 운영했는데, 제아무리 유명한 김현식이라고 해도 큰 수입을 물어오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나름 서강대 경영학도였던) 전태관이 수입을 정산하고 나면 다섯 명에게 돌아가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고 한다. 거기에 집안에서 장남이었던 장기호, 박성식은 당장의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상황.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장기호와 박성식은 봄여름가을겨울을 탈퇴하고 바로 사랑과 평화에 영입되었다.
- ↑ 김종진과 전태관은 2인조 재편 전 잠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 몸담았었다.
- ↑ 몇 년 전 옥주현이 대대적인 체중감량을 하고 활동을 재개했을 때 찍었던 파스퇴르 '쾌변 요구르트'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변이 그 변이 아니라는게… - ↑ 그해 광고대상을 거머쥐는 것을 비롯하여 1994년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타임캡슐에 보관되는 물품에 이 CF 영상자료가 들어갔을 정도다.
- ↑ 영화필름 롤 케이스를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 ↑ 바나나가 상징하는 것이 남자의 그것과 같다는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했다. 요조의 '바나나 파티'와 비슷한 예.
- ↑ 당시 늘 연습실에 놀러갔던 김장훈은 볼 때마다 연습실에 전태관이 연습을 하는 걸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그리고 본인 밴드(아마도 '김장훈과 한국사람'…) 드러머에게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장훈 또한 지독한 연습주의자인데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전태관은 한 수 위인듯 하다.
- ↑ 여담으로 윤상은 당시 손무현과 함께 김완선의 백밴드인 '실루엣'에서 베이시스트로도 활동했었고, 작곡을 하기도 했었다.
- ↑ 음악 스타일이 본인들과 하던 것과 동떨어진 면에서 좀 이질감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들으면 시대를 앞서갔었고 사적인 감정뿐이었다며 윤상의 행보를 인정했다.
- ↑ 사실 이런 부분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밴드들은 행사가 거의 주요 돈벌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 전인권도 현재는 업소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레전드고 나발이고 어디까지나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 ↑ 김장훈은 김현식과 거의 호형호제하는 사이였기에 더더욱 가까웠을 것이다.
- ↑ 박미령은 인간극장에 출연하여 김종진과의 이혼과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