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洙, 1946년 12월 10일 ~ )
대한민국의 제13대, 제15대, 제16대 국회의원. 제22대 노동부장관. 정당인, 법조인.
1 생애
1946년 전라남도 여수군(현 여수시)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잘 하여 서울이나 광주 등 유수 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여수공고에 들어가 장학금을 받았다. 여수공고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고, 1965년 여수공고를 졸업했다.[1]
1967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후, 3학년 때 3선 개헌반대 전국비상학생총회장으로 활동하다가 강제징집되었다.
육군만기제대한 후, 1973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졸업한지 5년만인 1978년에 제2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판사로 임용되었는데, 1982년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인 `횃불회`, `아람회`사건 관련자의 영장을 기각하고 판사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우성종합법무법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쌓아갔다. 1985년에는 한국노동상담소를 개설하였다.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당시 주임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86년 10.28 건대항쟁 때에도 학생들의 변호인을 맡는 등, 공포의 제5공화국 시기에 민주화운동의 최선봉에서 활약했다. 당시 이돈명, 조영래, 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일컬어졌다.
1986년에는 조준희, 황인철, 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인권변호사들의 모임으로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만들었는데, 이 모임은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으로 발전하였다.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당시 검찰에 구속 기소되었다. 당시 대우조선 노조설립과 관련해 그가 변호를 맡았던 이석규 노동자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대우조선소 이석규 사망사건 대책위원장'을 맡았고 이석규씨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 노동쟁의조정법 3자개입금지에 걸렸던 탓이었다. 그래서 현직 변호사 신분으로 1달여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87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한 6월 민주항쟁 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인권위원장과 상임집행위원을 역임했다. 같은 해 12월 치르게 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는 공정선거감시운동전국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 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1988년 김대중에 의해 재야 영입 평화민주당 후보로 공천되었다. 그 후 제13대, 제15대, 제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민주당의 대변인,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제22대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장관을 역임했다.
2 정치경력
서울 중랑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민정당의 이순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뒤 평화민주당 대변인과 인권위원장을 역임했다. 1988년 노무현, 이해찬 국회의원과 함께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위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1992년 서울 중랑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14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민자당의 이순재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1993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과 관권선거를 폭로한 한준수 군수 주임변호사를 지냈으며, 1995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상임이사로 활동했다.
1996년 서울 중랑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김철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지방자치위원장과 노동위원장을 지냈으며, 1997년 4월 국회 한보그룹비리사건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여당이 된 후, 1999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간사, 제1정책조정위원장을 지냈으며, 2000년 국회 정치구조개혁입법특별위원회 선거법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00년에도 서울 중랑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김철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후 새천년민주당 제1정책조정위원장, 국회 한빛은행대출관련의혹사건등의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 '인권법제정 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1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원내총무로 선출되었다. 원내총무로서 국가인권위원회법, 부패방지법, 돈세탁방지법 등 이른바 개혁3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주택임대차보호법, 상가임대차보호법, 고엽제휴유증관련법, 시국사건 관련 교원임용제외체용에 관한 특별법, 의료보험법, 근로자복지기본법, 남녀고용평등법개정, 근로기준법개정(모성보호관련조항), 고용보호법개정(모성보호관련조항) 등의 이른바 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데 여야 협의를 이끌어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예비후보에 출마하였으나, 당내 결선에서 김민석에게 아슬아슬하게 패하였다. 패하자마자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며, 김민석의 승리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상수의 인품에 감동하게 되었다.[2]
2002년말,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무본부장을 맡았다. 대선을 치르다보면 돈문제에 있어서 완전히 깨끗하기가 쉽지 않은데,[3] 남들 다 마다하는 악역을 너무 쉽게 맡은 거 아니냐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4]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2003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에서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등과 함께 창당 강경파의 입장을 취하였고, 권노갑을 비롯한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찍혔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창당한 열린우리당에서는 총무위원장과 지구당창당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2004년 2월 검찰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모금한 기업후원금 가운데 한화그룹 10억, 금호그룹 6억의 선거후원금에 대해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은 점, SK그룹 10억, 현대자동차그룹 6억 6천만원의 선거후원금에 대한 영수증을 해당기업 임직원 명의로 발급한 점 등이 문제된 것이었다.[5] 결국 그는 2004년 7월 항소심 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과거 관행이었다는 점에서 억울한 점이 있다.” 하였고, 새천년민주당 선거캠프가 현대자동차에서 임직원 명의로 받은 6억 6천만원에 대해서는 “(이상수)피고인이 편법 처리 사실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04년 8월 미국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에서 초빙연구원으로 연수 생활을 시작하여 4개월여간 미국에 머물렀다.
200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사면 조치 되었으며, 2005년 10월 부천시 원미구 갑에서 17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6]
2006년 2월 노동부 장관에 취임했다. 노동부 장관 임명 당시 노동계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였으나[7], 이후 그의 주도로 제정된 비정규직법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히려 조기 해직되는 부작용이 발생하자 노동계의 비판을 받았다.
2008년 4월, 서울 중랑구에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하였으나,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심사 과정에서 당 공천심사위원회의 '금고형 이상 형 확정자 공천배제' 방침에 따라 당 후보로 공천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인 유정현에게 밀려 낙선했다.[8]
2008년 5월 30일, 통합민주당에 복당하였다. 비록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개인적 비리가 아니라 당을 위해 희생됐던 측면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9] 그 후 7월 통합민주당 전당대회에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현재는 법무법인 우성의 대표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2015년 통상임금 소송에서 노동계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의 박지순 교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 여수공고에 다닐 당시 은사 문중근씨를 만났는데, 이상수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항상 문중근씨를 꼽았다. 문중근씨는 이후 이상수가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만사를 제쳐놓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 ↑ 여담이지만 그때 차라리 김민석 대신에 이상수가 서울시장 후보가 되는 것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민석이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에 패배한 후 막대한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어떻게 자기 무덤을 파게 되었는지는 설명 생략...
- ↑ 오죽하면 노무현 후보가 "대선 때 우리가 쓴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분의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했을까...
- ↑ 실제로도 동지의 대통령 당선과 자기 장래의 정치적 커리어 전체를 맞바꾸는 셈이 되고 말았으니...
- ↑ 이때 검찰에서 이상수를 구속 기소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 안대희였다.
- ↑ 이때 서울 중랑 갑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상수의 경쟁자였던 이순재가 이상수의 선거 후원회장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 ↑ 한나라당에서는 물론 '노 대통령의 보은인사'라며 비판하였음.
- ↑ 민주당의 임성락 후보와 표를 나눈 것이 패인으로 분석되었다.
- ↑ 이 당시 한화갑도 통합민주당에 복당을 신청했으나 기각되었다. 이에 분노한 한화갑은 2012년에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