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 1981년 12월 사법연수원에서 - |
趙英來
1947년 3월 26일 ~ 1990년 12월 12일
1 소개
정의를 위해 어두운 시대와 맞서 싸운 이 시대의 진정한 법조인
법을 배운 전태일[1]
대한민국의 인권 변호사. 조영래(趙英來, 1947년 3월 26일 ~ 1990년 12월 12일)
대구 출생.
경기중-경기고-서울법대를 나왔다. 새정치민주연합 이미경 의원이 그의 처제이다.
2 약력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인 1964년, 6.3 항쟁을 주도하다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인 1965년에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
서울대 재학중에도 한일기본조약 반대,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규탄, 6.8 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대학생의 교련수업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김근태, 손학규와 함께 서울대학교 운동권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1969년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 재직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2]으로 구속되었으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에 만기 출소한 후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로 수배되어 6년 간 피신했으며, 수배기간 중에서도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전태일 열사의 삶을 기록한 전태일 평전(부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했다. 장기표가 전태일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전태일의 수기를 조영래가 정리하여 집필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전태일 문서 참조. 이책은 당시 시대상 일본에서 먼저 출간하였다가, 1983년 저자를 익명으로 하여 국내에도 출간하였다. 조영래가 사망하고 1년 후인 1991년 1차 개정판에 와서야 저자가 조영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다.[3]
1980년 8월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경기고등학교 선배 이종찬의 도움으로[4] 수배가 해제되면서 복권되어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하여 1982년 수료하자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3년에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1984년 망원동 수해 주민들의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하였다. 1984년 대홍수로 서울 망원동 5,000여가구가 침수당한 사건에 무보수로 참여해 3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판결을 받아내었다. 집단소송제도 없고 그 개념조차 낯설던 1984년, 그는 2300여 피해 가구를 조직하는 고단한 법정 투쟁 끝에 호우 피해는 천재(天災)가 아닌 국가의 책임임을 입증했다. 인권변호가 시국 형사사건에 머물던 시대에, 일반 국민의 일상에도 법률이 유용할 수 있음을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다.
1986년에는 한 전화교환원의 호소로 시작된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소송을 이끌었다. 당시 '미혼 여직원의 정년은 25세'라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절망해 항소를 망설이는 이경숙을 설득, 항소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임을 확인받은 이경숙 사건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주요 판결이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 씨를 변호하고 가해자 문귀동에 대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는 등의 활동으로 인권 변호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
1987년에는 연탄공장 옆에 살다가 진폐증에 걸린 시민을 도와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였다. #[5]
1988년에는 국제그룹 강제해체를 겪었던 양정모 전 회장의 헌법소원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사건 및 보도지침 사건 등을 변론했다.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및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도 역임하였다. [6]
특히, 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보고서 발간의 산파역을 하였다. 당시 대한변협의 사무실에도 국가안전기획부나 국군보안사령부 요원들이 상시로 출입하던 시절이라 그는 보고서조차 은밀히 쓰고 출간해야 했다. 보고서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그는 보고서의 후기를 이렇게 고쳐쓴다. “우리의 인권보고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치떨리는 분노로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주요 시국사건을 같이 담당하던 인권변호사들을 결집해서 상설조직인 정법회를 창립하였고, 이 정법회가 훗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약칭 민변으로 발전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게 남들이 하지 못할 노력으로 이 땅에 봄을 오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 12월 12일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44세. 유족으로는 부인 이옥경 여사와 슬하에 2남이 있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가 있다.
조영래는 실제로 엄청난 골초였다고 한다. 1980년대에 변호사로 같이 활동한 박원순 변호사[7]의 말로는 평소에도 하루에 2~3갑씩 담배를 피웠지만, 각종 소송을 담당할 때 방이 담배연기로 가득찰 정도로 피워 댔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법대 15동 건물 5층에는 그의 이름을 딴 '조영래 홀'이라는 열람실이 있다.
이 분의 삶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꾸었으나 정작 자신은 그 보답을 받기도 전에 서둘러 이 땅을 떠났다.
문성근, 홍경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그를 모티브로 하였다.
3 문장력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가졌던 그는 한일회담 반대를 위해 처음으로 쓴 문장인 '선언문'을 작성한 바 있으며, '전태일 평전'에서 그의 필력을 알 수 있다. 1977년에 전태일 7주기를 기해 발표된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은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저기서 노동자의 오랜/억압과 죽음이 탄다/아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끝없는 망서림도 마침내 끊겨버린/저기서/노동자의 저항이/노동자의 자유가/불타오른다."로 시작되며 이는 민중문학사의 첫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있다. 그러나 조영래 자신은 사망할 때 까지 자신이 '전태일 평전'과 '노동자의 불꽃'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에 대한 정부의 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김지하가 재수감돼 사형 위기에 빠지자 조영래는 김지하의 이름으로 양심선언문[8]을 쓴다. 후에 국제사회의 지식인들이 김지하 구명운동에 나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김지하가 이 문장 역시 조영래 그의 작품이라고 밝혔다.[9]
조영래가 김지하의 이름을 빌려서 위작을 내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철저하게 김지하 씨의 의견이 담긴것으로 손질,대필해주었다는 의미가 강하다. 양심선언문을 발표할 무렵의 여러가지 정치적인 문건 중에 조영래가 직접 관여한 문건이 많았다. 개인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고 단체 이름으로 하여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많은 첨삭가감이 이루어져 실제로는 공동작품일 수 있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항목의 맨 위에 있는 변론 역시 조영래가 초고를 작성하였다.
4 일화
아래의 일화는 『조영래 평전』을 참고하였습니다.
- 부인인 이옥경 여사와 만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당시 이옥경 여사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재학중이었는데, 전태일 열사의 사망에 무관심한 사회를 비난하는 글을 한 신문에 실었고, 이를 본 조영래(당시 서울대 재학중)는 '이 기특한 여성이 누구인가' 찾아나서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연애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도망다닐 때 큰 아들을 얻었는데, 수배중이라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배가 풀리고 나서야 출생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아들의 이름 후보를 적은 종이 몇 개를 주며 직접 고르라고 했다고 한다.
- 이외에도 서울 올림픽 개최에 감격하여 칼라TV를 장만했다는 일화나, 무협 소설을 좋아했다는 일화 등이 있다.
- 노무현이 1988년 당시 5공 청문회에서 펼친 활약을 보고, 그가 미래의 대통령감이라고 하며 좋아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 조영래의 직속 후배로 현직 서울시장인 박원순이 있다. 부천 성고문 사건때도 같이 변호인단으로 조영래를 도왔다. 후에 조영래 회고록이나 자서전에서 고인에게 많은 빚을 졌고 자신 인생의 멘토라고 서술한 바 있다. http://www.lawissu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672 재미있게도 조영래, 박원순, 문재인은 사법연수원 12기로 동기이다. 영래형이라고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영래 변호사의 영향이 이 둘에게 크게 미쳐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하였다
- 한때 김앤장 소속이었다. 위의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인해 사법연수원에서 퇴소당한 조영래를 김앤장에서 비공식 사무원으로 채용했고, 조영래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되서 수배를 받던 때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조영래의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고 한다.
- 문재인과도 친해 판사 임용이 거부된 문재인에게 김앤장을 추천해주었다. 그러나 문재인은 부산으로 낙향해서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법률사무소 부산을 개업한다.
- 아들에게 보낸 엽서 [10]
엽서 반댓면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
다음은 마찬가지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에 실린 추도문 중 하나다.
- 하얀 겨울에 떠나간 우리들의 ‘조변’
우리들의 ‘조변’이 갔다. 어디 가서든 그의 친구임을 자랑하고 싶도록 만들던 조영래 변호사-그의 푸근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 그리고 줄담배 연기를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는 ‘조변’없는 이승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조변! 그렇게 훌쩍 세상을 뜨는 것을 보니 저승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구려. 조변호사, 그는 어차피 요절한 천재로 기억될 것이다. ‘조변’은 그러나 바보를 존경할 줄 아는 천재였다. 예리하고 가파른 천재가 아니라 강 같은, 음악 같은, 함박눈 같은 풍류남아였다. 그 깊고 넓은 웅지를 펴기 전에 질풍노도의 시대를 만나 1년반을 감방에서, 여섯해를 도망자로 보내야 했던 ‘우리들의 조변’은 죽음까지도 태산같이 당당하게 맞아들였다. 전남 곡성의 태안사에서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던 ‘조변’은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애써 싸우지 않았다. 죽음을 사색하고, 죽음과 대화하고, 그러다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죽음과 손잡고 저승길로 떠났으리라. 조변호사는 이 나라 인권변호의 새 지평을 연 사람이었다. 그의 변호에는 인권의 파괴를 체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와 진지함이 실려 있었다. ‘작은 진실에의 열정’이 있었고 당해본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눈과 가슴이 있었다. “권양, 온 국민이 그 이름을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조변’은 불의와 싸우는 데 있어서 논리의 힘에 못지않는 감성의 떨림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의 인권활동에는 유려한 시심과 무서운 신바람이 함께 있었다. 권인숙양 사건과 망원동 수재소송사건에 열중해 있던 1986~87년이 아마도 그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지금 모두가 갑갑해하고 있지만 먼 훗날에는 이 시대를 아름답게 추억할 겁니다.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고매한 이상을 주제로 하여 나라 전체가 토론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던 그가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드러누워버렸다. 세상은 그의 희망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실패한 정권교체와 민주화의 사생아처럼 불거져나온 지역감정과 복잡다기해진 갈등들이 우리의 ‘조변’을 쓸쓸하게 만들어갔던 것이다. ‘조변’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공장 주변의 진폐증환자, 스물다섯살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이 사회를 울리는 큰 의미를 뽑아냈다. 상처받은 권양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준 이야기는 오영수의 단편소설감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바로 ‘법을 배운 전태일’이었다. ‘조변’은 꽉찬 80년대를 살았지만 결국 못다 핀 꽃이었다. 이것이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다. 그는 10년 정도를 담을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짧았던 43년보다 몇배나 더 오래 이어질 아쉬움, 추억담, 그리고 긴 여운을 우리 가슴속에 남기고 그는 표표히 떠났다. 명창 ‘조변’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를 즐겨 부르더니 한 2년 전부터는 왜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를 그토록 열창하기 시작했는지. 조영래 변호사! 그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이만 떠나시오. 뒤돌아보지 말고, 남은 것 묻은 것 있으면 다 털어버리고, 자 뛰어가세요. ‘조변’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천당, 극락이 아니고 어디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은, 아무리 천당, 극락이라지만 몸이 아프거든 제발 약도 먹고 병원에도 좀 다니시오! -조갑제- |
5 조영래 평전
같은 서울대 법대 교수인 안경환에 의해 조영래 평전이 쓰여졌다. 하지만 조영래 주변 인물들과 인터뷰조차 하지 않는 등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작성되어[11] 각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 조영래 추모사업회와 유족들은 출간 자체를 반대할 정도였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인 권인숙 씨 역시 조영래 평전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
저자 안경환은 조영래와 동시대를 살았으나 연결고리는 조영래의 후배라는 것뿐이다. 조영래와 함께 활동하기는 커녕 조영래같은 행동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성향에 있어서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물론 민주화 이후 안경환은 진보적 법학자로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인권증진에 충분히 공헌한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평전을 작성하면서 지나치게 안경환 자신의 성향을 조영래에 무리하게 대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서의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조영래가 갖고 있었다고 묘사하거나 여성에 관해 가부장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조영래 자신이 배척하였던 것을 정반대로 묘사하여 고인의 사상을 훼손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12]
그리고 서술 태도에서 박정희 정권, 노동운동 등에 대해서 의외로 보수적 시각을 드러냈으며, 서울대 법대의 인권운동사에 지나치게 분량을 투자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 실제로 전태일과 그는 꽤 닮은 점이 많다. 같은 대구 출생이고, 출생년도도 비슷하다. 자란 환경은 달랐지만, 무엇보다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 조영래가 좀 더 일찍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이나 인권운동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 ↑ 당시 수사발표로는 반체제 서울대학생 몇 명이 화염병 200개를 가지고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 ↑ 과거에는 사회과학 서적이나 사회고발, 체제비판 성격의 책들은 대부분 이렇게 나왔다. 저자를 밝히면 잡아가니까, 익명,가명 혹은 출판사 편집부 등으로 표기하고 출판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이런 책들은 원저자를 밝히고 대대적인 재출간이 이루어진다.
- ↑ 이종찬이 조영래의 행동에 대해 상당히 호의를 갖고 있었고, 중정 내부에서조차 운동을 한 건 좀 그렇지만 조영래 자체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어 생각보다 쉽게 복권 조치가 이뤄졌다고 한다.
- ↑ 이 사건을 특종보도한 이가 2011년 재보궐선거/10월 26일/선관위 공격 사건을 독자적으로 전개한
대단한비서를 거느려 화제가 된 최구식 국회의원( 당시 조선일보 기자)이었다. 위 성고문 사건 당시 동료 변호사였던 박원순이라든가, 서울대 시절 손학규와 더불어 행동하였던 김근태까지 포함되면, 정치적 기반이 없는 유명인물에게 막대한 기반을 준다는 말까지 나오는 형국이다. 더구나, 전태일 열사에 대한 관심으로 부부의 연까지 이어졌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말이 이러한 것을 가리킨다. - ↑ 1980년대 동아일보는 독재정권의 언론통제 속에서도 비교적(어디까지나 비교적) 야당 및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에 호의적인 보도를 자주 하곤 했다. 이런 성향은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당시 동아는 야당신문이란 평가를 들었다. 성향이 지금처럼 확고한 친재벌, 친보수쪽으로 바뀐 건 김대중 정부 시기 2001년 세무조사 관련으로 마찰을 빚으면서부터이다.
- ↑ 2015년 현재 서울특별시장.
- ↑ 내용: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모략이 지금 나에게 들씌워지고 있다. 박정권의 억압자들은 나를 가톨릭에 침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민주주의를 위장한 공산주의 음모가로 몰아 투옥하였다. 이제 곧 나를 교활 음험한 공산주의자로 영원히, 그리고 ‘합법적’으로 낙인 찍기위한 재판놀음이 벌어질 것이며, 그 결과 나는 이 땅에서 만들어져 온 숱한 관제공산주의자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다. 후략
- ↑ '20년 만의 참회, 그리고...'(동아일보,91년2월17일)
- ↑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엮음,1991.) 논설·컬럼·변론, 편지, 일기, 장시, 인터뷰 기사, 추모좌담, 추모글 등 수록
- ↑ 가령 부천서 사건에는 한 챕터가 할애되어 있지만 사건 변호사나 피해자와는 전혀 인터뷰하지 않았다.
- ↑ 공교롭게도, 조영래도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성향을 전태일에 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