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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의 황태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변호사, 시인이다. 종교는 불교다. 호는 청민(靑民)이다. 김옥숙의 고종사촌 동생, 노태우의 손아래 처남으로 탁구선수 현정화의 사촌 형부이다.
1942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 시절 전혜린이 지도한 독우회라는 동아리에 활동하였다.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로 활동하다가, 신군부의 등장 이후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위원으로 파견 근무하면서 제5공화국 헌법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1980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비서실 소속 정무비서관, 법무비서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선배 검사 김기춘이 1977년의 국군보안사령부 조직 축소에 관여한 것 때문에 하나회 출신 정권 수뇌부들에게 밉보여서 검사에서 짤릴 위기에 처하자 허화평 대통령비서실 보좌관에게 충성 편지를 쓰도록 조언하였다.
1985년 초 장세동이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되자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이 되었다. 1986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는 이례적으로 검찰청이 친정이라는 이유로 소신 있게 수사하도록 독려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월계수회를 조직하여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데 혁혁한 공을 세우며 6공화국의 실세가 되었다. 1988년 2월 대통령비서실 소속 정책보좌관에 임명되었다. 그 해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책보좌관 신분을 유지한 채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북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구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을 수차례 비밀리에 방문하였다. 한때는 노태우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한 이후 대표였던 김영삼과 끓임없이 부딪혔다. 의원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김영삼의 반 협박으로 인해 포기하였다. 김영삼이 만약 자기를 대선 후보로 세우지 않으면 당을 탈당해서 반정부운동을 하겠다고 노태우를 협박했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 수성구 갑 지역구에 당선되었지만. 결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 당내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이 당선되는 것을 봐야 했다. 그 이후 외사촌 형 김복동과 함께 민자당을 탈당하여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으로 가 정주영을 지원한다.
결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슬롯머신 사건[1]으로 1년 6개월의 형기를 살게 된다. 여담으로 박철언의 부인인 현경자는 박철언이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 대신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당선된다. 그 이후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그에 합류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연합 성사에 기여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김만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고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2005년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출간했고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5공화국(드라마) 방영 당시 자신이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에 간여하였다고 묘사되자 소송을 걸어서 승소하였다.
국회의원으로 재직 중에 그의 보좌관을 지낸 황태순은 현재 시사평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