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cupola_.jpg
외부 전경
대성당의 정면
기본 정보
위치이탈리아 피렌체
종교가톨릭
홈페이지공식 홈페이지
지위주교좌성당(Cathedral)
건축 정보
축성1436년 3월 25일
건축가
(공사기간)
아르놀포 디 캄비오(1296~1302)
지오토 디 본도네(1334~1337)
안드레아 피사노(1337~1348)
프란체스코 탈렌티(1349~1359)
조반니 디 라포 기니(1360~1369)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420~1446)
양식르네상스, 이탈리안 고딕[1]
착공1296년 9월 9일
완공1469년
건축 내역
전체 길이153m
전체 너비90m
높이114.5m
돔 직경45.52m
돔 높이114.5m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한글[2]
영어[3]
프랑스어[4]
국가·위치이탈리아 피렌체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1982년
등재기준(i)[5], (ii)[6], (iii)[7], (iv)[8], (vi) [9]
지정번호174bis

1 개요

이탈리아어Basilica Cattedrale Metropolitana di Santa Maria del Fiore
영어Basilica of Saint Mary of the Flower
프랑스어Cathédrale Sainte Marie de la Fleur
독일어Kathedrale Santa Maria del Fiore
스페인어catedral de Santa María de la Flor
포르투갈어Duomo di Santa Maria del Fiore
중국어聖母百花大教堂
일본어サンタ・マリア・デル・フィオーレ大聖堂

이탈리아 피렌체랜드마크이자 크고 아름다운 주교좌 성당.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으로 유명하다. 명칭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는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의미다.

2 역사

2.1 신축 결정

현재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에는 성 제노비오와 함께 피렌체의 수호성인이었던 성녀 레파라타에게 바쳐진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었다. 5세기에 세워진 이래 끊임없는 보수와 개축이 이어졌지만 13세기 말엽에 이르자 창건 이후 9백년 가까이 경과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려울 만큼 상태가 악화되었고, 이에 피렌체 자치 위원회는 모직물 무역의 번성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던 피렌체의 국위를 고양시키기 위해 다른 대도시의 대성당에 뒤지지 않는 규모로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2.2 폐건물의 위기

1294년 피렌체 시의회로부터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를 의뢰를 받은 조각가·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경~1302/1310)는 팔각형 을 중심으로 3개의 신랑이 만나게 하고, 옛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권역은 가운데 신랑으로써 포함되도록 설계했다. 마침내 1296년 9월 9일 교황청에서 처음으로 피렌체에 파견한 발레리아나 추기경이 첫 돌을 놓으면서 대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채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아르놀포가 사망하면서 공사는 30년 동안 중지된다.

한동안 멈췄던 공사는 1330년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 제노비오의 유해가 산타 레파라타 성당 자리에서 발견됨에 따라 재개되어 1331년 양모 상인 길드(Arte della Lana)가 공사비를 후원했고, 1334년 화가·건축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267~1337.1.8)가 전임자의 설계도에 따라 공사를 감독해 본당 건물 옆에 종탑을 설계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불과 3년만인 1337년 지오토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지오토의 곁에서 작업을 도와주던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90~1348)가 공사를 이어나갔지만 1348년에는 흑사병이 창궐해 또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흑사병의 여파로 피렌체의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력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지만 1349년 프란체스코 탈렌티(Francesco Talenti, 1300경~1369?)의 감독으로 공사에 들어가 지오토가 설계한 종탑이 완성되고, 본당의 후진 부분을 아르놀포가 처음 설계했던 것보다 확대시켰다. 10년 뒤인 1359년에는 조반니 디 라포 기니(Giovanni di Lapo Ghini)가 공사 감독이 되어 가운데 신랑을 4개의 정사각형 구역으로 나누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첫 돌을 놓은지 80년 가까이 지난 1375년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완전히 철거되었고 5년 후인 1380년에는 신랑이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곳은 돔 뿐이었지만 워낙에 거대한 크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돔을 설계한 네리 디 피오라반티(Neri di Fioravanti, ?~1374)가 주교좌의 지름을 확장하면서 그 위에 얹혀질 돔의 지름도 함께 늘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인 판테온보다도 더 큰 지름 42m의 돔을 짓기로 1367년에 최종 결정했다. 문제는 이처럼 거대한 돔이 받는 무게를 분산시켜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줄 공중부벽을 돔 옆에 일절 덧붙이지 않은 네리의 설계 때문에 기존의 공사 방식으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거대한 돔을 올려놓기에는 벽이 약해서 바깥으로 쓰러질텐데, 그걸 붙잡기 위해 외부에다가 추가로 기둥과 보를 만들어서 지탱해주는 방법을 쓰는 것도 거부했다는 소리다. 그러한 고집스러운 태도에는 고딕르네상스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다. 당시 피렌체나 중남부 이탈리아인 입장에서 프랑스독일은 물론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조차 로마 문명을 훔쳐간 야만인이 지배하는 곳과 다름 없다고 생각되어 정치적인, 역사적 라이벌 의식이 형성되어 있어 모방이 금기시 되었다. 게다가 당시에 성숙해지고 있던 그 지역의 고딕 건축 양식엔서는 건물의 높이를 올리며 하중을 감당하기 위한 공중부벽(buttress, flying buttress)이 많이 설치되었지만, 건축물의 높이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용서되는 분위기의 고딕과 달리 이탈리아인의 감성은 높이보다는 완벽한 조화가 우선이었기에 부벽 따위는 억지 땜빵질처럼 느껴진다는 점도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네리 역시 설계에 공중부벽을 쓰지 않았고, 사제들 또한 반대하였다. 문제는 공중부벽 대신 주교좌의 벽 두께를 늘린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진행된 주교좌의 기초공사는 모두 무효화되고, 벽 두께를 늘리는 만큼 비례상 돔의 크기도 늘어나야 된다는 악순환이 있었던 것.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공중부벽 쓰라고 참고로 오늘날에 와서는 이 과도기적 성당의 양식을 "이탈리안 고딕"이라 분류하기도 하니 아이러니..

결국 주교좌의 천장이 뻥 뚫린 상태로 51년 동안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418년 돔 공사 해결책 공개 입찰을 붙이기에 이른다. 이때 10여 명의 응모자들을 제치고 입찰에서 선택된 사람은 금 세공사이자 시계공이었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4.15)였다.

2.3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등장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동상[10]돔의 설계 스케치 및 건축학적 속성

네리가 싸지른 설계를 수습하고 실제로 돔을 올린 사람은 혜성처럼 등장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브루넬레스키는 인생의 많은 기간 동안 건축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특유의 관찰력과 창의력, 여행을 통한 지식의 습득, 교묘한 자기 가치의 관리를 통해 엄청난 난제들을 해결하고 대 공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시계공이자 금속 세공사였다. 그러나 20대의 젊은 나이에 참가하게 되었던 산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을 둘러싼 심사에서 떨어진[11] 브루넬레스키는 경쟁자였던 로렌초 기베르티를 뒤로 하고 금속 세공에서 떠나게 된다.

이후 로마를 여행하며 악마의 집이라고 부르던 당시 세계 최대의 판테온을 보았고, 여러 일을 했었지만, 40세가 넘도록 건축과 금속 세공에 있어서는 별다른 업적이 없었다. 그러나 원근법의 수학적 법칙을 발견 혹은 발굴하였고, 이로 인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공사에 참여할 명성은 얻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미술계열의 장인들이 건축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르네상스의 건축물들은 건축물의 비례와 외형적인 완성도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고, 그러한 면에서 미술적인 재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실제 건축에서 가장 중요했던 석공들은 실무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뛰어났지만, 지나치게 경험과 과거의 예를 신봉하였기에 창의성을 발휘하는데는 한계가 존재하였다.

그렇기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을 둘러싼 경쟁에는 브루넬레스키 뿐만 아니라 역시 건축에는 한 줄의 경력도 없었던 악연 로렌초 기베르티도 참가하였다.

브루넬레스키가 기베르티를 꺾은 방법은 정성이었다. 기베르티가 4명의 석공들과 4일만에 모형을 만들었을 때 브루넬레스키는 4명의 석공들과 도나텔로 같은 쟁쟁한 조각가와 함께 90일이 넘는 시간을 쏟아 돔의 모형을 완성했다.

당연하게도 공사의 담당자는 브루넬레스키가 되었지만, 부담당이 기베르티가 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기베르티가 싫었던 브루넬레스키는 기베르티에게는 계속 공사에 관해 거의 말해주지 않았고, 훗날 1420년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요양을 떠나게 된다. 그 사이에 공사를 담당하게 된 기베르티는 자신이 아는 바가 없음을 실토해야만 했고 결국 사퇴하고 만다. 1423년에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혼자 감독을 맡게 된다.

브루넬레스키는 당시로써는 한 번도 실현되지 않는 돔을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건축하겠다고 해서 세간을 놀래켰다. 브루넬레스키 이전에는 아치나 돔을 쌓기 위해 그 아래에 나무로 된 지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벽돌 등을 쌓는 방법을 사용했었다. 작은 다리의 아치를 세우는데도 지지대가 필요한데,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을 지지대 없이 세우겠다는 브루넬레스키의 발언에 다들 황당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 기울어지면 쓰러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2.4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

1420년 8월 7일, 반세기 넘게 손대지 못했던 돔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시작된 지점의 높이는 대성당 벽체 42m에 그 위에 얹은 환상벽(環狀壁) 9m로 도합 51m였다. 환상벽에서 13.6m 높이까지는 석재로, 그 위로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벽돌과 석회화를 쌓아올렸다. 돔을 둘러싼 사슬에 필요한 석재는 피렌체 북쪽의 채석장에서 캔 사암을 사용했다. 돔의 밑면이 원형이 아닌 팔각형인데다가 돔의 모양마저 반구형이 아니라 첨두형이었기 때문에 석재와 벽돌이 돔 벽면의 급격한 기울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브루넬레스키가 내세운 비장의 무기는 다름 아닌 오늬무늬 쌓기, 즉 지그재그 모양이 되도록 교대로 방향을 바꾸면서 벽돌을 배열하는 방법이었다.

정리하자면, 브루넬레스키는 그물식 버팀목 골조가 지지하는 이중 지붕으로 돔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사암과 대리석으로 된 안쪽의 돔과 벽돌과 모르타르로 된 바깥쪽의 돔으로 이중구조를 만들었으며, 다양한 모양으로 제작한 벽돌을 오늬무늬 형태로 쌓음으로써 기존의 벽돌 쌓는 방법보다 결합력이 더 강하고 안정된 구조를 창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교좌 중앙에 지지대를 세우지 않는 대신, 한쪽만 지지되고 한쪽 끝은 돌출된 일종의 기중기와 같은 구조물인 '카스텔로(castello)'를 돔의 안쪽 면에 세워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돔이 올라감과 동시에 조금씩 위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카스텔로를 사용해 무거운 건축자재를 높은 위치에 있는 작업대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많은 힘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지만, 유능한 공학자이기도 했던 브루넬레스키는 1마리의 힘만으로 거대한 카스텔로가 작동하게끔 기계장치를 설계했다. 당시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기계장치가 고작 소 한 마리의 힘으로 움직이자 사람들은 브루넬레스키를 '새로운 다이달로스'라고 부르며 경탄했다.

2.5 거장의 시련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1428년에는 돔을 덮을 대리석을 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운반하려고 설계한 수송선이 아르노 강에서 석재와 함께 침몰하는 바람에 애당초 그가 제시했던 금액의 3배에 달하는 비용을 치르고 새로 대리석을 매입해야 했다. 다음해인 1429년에는 피렌체가 루카와 벌인 전쟁에서 수공으로 루카를 함락시키기 위해 쌓은 제방이 무너지면서 도리어 피렌체군 막사로 강물이 들어차 곤란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브루넬레스키는 돔 밑부분을 성당으로 두르자며 설계도 수정안을 사업단에 제시했다가 공사비 과다 지출 우려로 반려되었다.

1434년에는 석공 조합에 회비를 제때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투옥 소식을 듣고 격분한 사업단 임원들이 피렌체 사법당국에 강하게 항의한 덕분에 브루넬레스키는 2주일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미납된 액수가 워낙 적은 데다가 회비 미납으로 체포, 투옥된 경우는 브루넬레스키가 처음이었기에 라이벌인 로렌초 기베르티가 대성당 공사에서 그에게 번번이 물먹자 석공 조합에 손을 써서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은 사건. 석방 2달 후에는 양자 안드레아 카발칸티가 브루넬레스키의 돈과 보석을 챙겨 나폴리로 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브루넬레스키는 당시 피렌체에 체류중인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청원해 양자를 나폴리에서 피렌체로 송환하라는 편지를 받아낸다. 사소한 가정 문제가 졸지에 외교 분쟁으로 비화(…). 어쨌든 교황의 편지를 받은 나폴리에서는 안드레아 카발칸티를 피렌체로 송환했고, 이후 별다른 문제없이 양부 곁에서 조각가로 일하며 일손을 도왔다.

2.6 돔의 완성과 천재의 죽음

1436년 3월 26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대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하고 나서 5개월 후인 같은해 8월 30일,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돌을 놓으면서 돔이 완공되었다. 공사가 시작된지 16년 23일만이었다. 돔이 완성된 후에도 내부의 조명과 환기를 위한 첨탑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는데, 이 첨탑은 피렌체 대주교인 안토니노 추기경이 1446년에 첫번째 돌을 놓으면서 공사에 들어갔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행사에 참석한 뒤 병을 앓다가 채 1달이 지나기 전에 68세를 일기로 4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그가 건설한 대성당의 돔 아래에서 치러졌으며, 5월 15일 대성당 남쪽 측랑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을 덮은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 묘비명이 새겨졌다.

CORPVS MAGNI INGENII VIRI
PHILIPPI S BRVNELLESCHI FLORENTINI
피렌체의 위대한 천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여기 잠들다

목재 중심틀 없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을 건설한 브루넬레스키는 '천재'라는 칭송을 받으며 건축가의 지위와 평판을 격상시키는데 공헌했다. 이후에 걸출한 후배 건축가들이 대거 등장하며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에 혁신을 가져온 것은 이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초창기 피렌체의 르네상스와 두오모 건설에 대해 그린 굽시니스트연중된 서양미술사 만화 #1, #2

2.7 대성당 정면의 완공

첨탑 공사는 1466년 화가·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36~1488)가 금도금한 구체와 십자가를 꼭대기에 올려놓으면서 끝났다. 돔 공사가 워낙 컸기 때문에 가려졌지만 사실 대성당 건축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성당 정면의 장식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한 정면은 아랫 부분만 완성된 채 중단되었다가 르네상스 양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1577~1578년에 해체되었다. 여러 건축가들이 새로운 정면의 설계안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과 19세기 중반까지 정면부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마침내 1864년에 열린 정면 설계안 공모전에서 건축가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Emilio De Fabris, 1808.10.28~1883.6.3)가 조토의 종탑 디자인을 모방한 설계안이 1871년 당선되었고, 이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어 1887년에 완성되었다.

3 관광지

동양권 관람객들에게는 여행의 필수 코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새는 어떤 작품 때문에 연인들의 성지 이미지까지 더해져서 특히 젊은 여행객들 사이에서 관광 상품으로 인기를 끄는 중. 그런다고 솔로가 간다고 안생겨요

더불어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여길 가서 낙서하는 통에 일본 망신을 시키고 있다. 하도 낙서가 많아지자 두오모 측에서 종탑으로 올라가는 벽면에 '디지털 낙서장'을 설치했는데 이게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다. 기사

4 기타

대성당에 부속된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청동문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1425년부터 27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1452년에 완성한 대작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천국의 문'이라 극찬한 이래 지금까지 그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문은 1966년 11월 3일11월 4일 이틀에 걸쳐 아르노 강이 범람한 피렌체 대홍수 때 진흙에 잠기는 피해를 입은 뒤, 진품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보관하는 대신 현재는 정교한 복제품이 대신 자리하고 있다.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방한을 기념해 동년 8월 15일부터 11월 14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천국의 문을 한국으로 가져와 특별 전시했다.

  1. 르네상스 시기에 세워지긴 했지만 훗날 알베르티가 완성한 르네상스의 표준적인 양식과는 좀 다른, 과도기적인 시기의 건물이기 때문에 이탈리안 고딕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많다.
  2. 피렌체 역사 지구
  3. Historic Centre of Florence
  4. Centre historique de Florence
  5.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6.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7.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8.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9.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10. 그의 사후 피렌체에 세워졌으며, 조각상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그가 설계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다.
  11. 공동 작업으로 결론 났으나, 브루넬레스키가 포기했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