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해전 떡밥

1 개요

한산도 대첩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떡밥. 출처가 현재까지 밝혀진 바 전혀 없다. SALT(의미는 소금. 해전이라서 그런 것인가…)로 외운다.

그리스 아테네 vs 페르시아
역사적 의미: 아테네 민주정의 확립.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 & 이집트클레오파트라 7세
역사적 의미: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의 쇠퇴와 로마의 확실한 제정체제 확립. 하지만 이 시기는 또 다른 의미로도 중요하다. 바로 이집트 치하에 있던 유태인이스라엘 때문이다. 즉, 크리스트교 역사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의미.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신성동맹 함대 vs 오스만 투르크 제국
역사적 의미: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은 것. 이 시기는 군사력으로 이슬람 세력이 서구 유럽을 압도할 수 있던 마지막 시대였다. 오스만 제국의 재상은 "키프로스는 팔과 같고, 우리네 패전은 수염과 같다. 당신네들은 팔을 뽑혔으니 다시 자랄리 없지만, 우리의 수염은 다시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라고 평했다.[1] 하지만 오스만은 이후 어리석은 황제들이 즉위하면서 내정에 혼란을 겪게 된다. 하지만 유럽도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열강들 역시 점차 이권다툼으로 갈라지면서 결속력이 약해졌고, 베네치아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레판토 해전 이전처럼 평화협정(이라 쓰고 오스만에 삥을 뜯긴다고 읽는다)에 얽매여 사는 신세가 된다. 여담이지만 돈키호테로 유명한 작가 겸 군인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포병 대령으로 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중상을 당하고 왼손을 잃었다.
프랑스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스페인 연합함대 vs 영국 호레이쇼 넬슨
역사적 의미: 프랑스의 유럽 통일을 저지한 사건. 나폴레옹은 이 전투 이후 러시아로 진격하는 병크를 터트리고, 몰락해 버린다.

가끔 레판토 해전이나 악티움 해전이 빠지고 칼레 해전(영국 vs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보다시피 누가 선정했는지는 몰라도 지극히 서유럽 중심의 편견에 바탕을 두고 선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술적으로 일시적인 승리를 가져왔지만 전략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레판토 해전[2]이 껴 있는 것도 논란이 많다.

거기다, 사실 이걸로 확정된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 살라미스, 칼레, 트라팔가,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배운다고 한다. #(팝업 많음. 주의하라.)

엄밀히 말해 (악티움을 제외한) 세계 3대 해전의 의미는 역사적 변환점이 아니라 해전양상의 변환점이다.

  • 살라미스는 전함간의 충돌을 이용하여 격파하는 방식의 해전의 시작이고,
  • 레판토는 최초로 함포위주의 전투,[3]
  • 트라팔가르는 기존의 라인배틀 개념이 해전에서 극복되었음을 상징한다.[4]

물론 서구중심이라 칼레해전보다 200년 전에 함포위주 해전을 벌인 고려해군은 논외[5]

이런 맥락이라면 뒤에 나오는 한산도 대첩의 의의는 사령선 우선 점사와 육전과도 같은 유연한 진형 운용등의 의의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드웨이 해전은 항공기의 효과적 활용, 쓰시마 해전은 한산도 대첩과 같은 의미로 들어갈 수 있다.

여하간 떡밥 자체에는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해전사 한정이라면 꼭 숙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세계 3대 해전은 변환점 이외에도 해당 내용의 교과서적 답안을 작성한 해전이니…. 예를 들어 범선시대 포격전을 연구한다면 칼레 해전의 상세한 내용을 분석해나가야 한다.

2 한산도 해전 떡밥

한산도 대첩이 세계 4대 해전에 속한 것을 외국의 해군 사관학교 등에서 보았다는 글들이 종종 올라온다. 하지만 4대 해전이란 그 자체가 떡밥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예고편부터 당당히 거론하는 통에 아직도 활활 잘 탄다.

여하간, 그런 글에서 주장되는 한산도 대첩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정예군이었다. 한산도 해전이 실패하여 수륙병진작전이 진행되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고 그들은 조선을 병참기지 삼아 그대로 [[명나라|]]으로 진격했을 것이다. 후금팔기군에게도 망했던 명군이니 승패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여하간 이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이 망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이후 일본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게 된다."

뭐... 그럴듯한 논리이긴 하지만. 떡밥은 떡밥일 뿐. 굳이 따지자면 명나라는 청나라에 망한게 아니라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에 망했다.[6] 청나라는 명이 망하는 그 순간까지 산해관에 막혀서 진입을 못했고, 오삼계가 문을 열어주자 그때서야 관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청나라가 위쪽에 버티는 바람에 반란군을 진압할 수비군을 못 보낸것도 원인이긴 하지만.

간간히 명량 해전을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실 명량 해전기에 접어들면 일본도 대륙정복 희망은 접어놓고 "조선 하3도 확보"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떡밥의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반농담이지만 전투 자체가 너무 말도 안되는 기적 수준이라 후세에도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4대 해전에 안들어간다는 말도 있을 정도.농담처럼 안들리는데?

한국의 한 군사 잡지에서는 예전에 함포의 발달사에 대한 기사를 다루면서 살라미스 해전, 한산도 대첩, 트라팔가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선정의 이유는 살라미스 해전은 해전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 한산도 해전은 함포가 해전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례, 트라팔가르 해전은 함포전의 절정에 달한 사례, 미드웨이 해전은 함포가 해전의 주역에서 퇴장하고 항공기가 새 주역에 등극한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헐버트 박사의 한국사라는 책에서는 한산도 대첩에 대해서 '넬슨 제독이 스페인 무적 함대를 살라미스에서 물리친 격'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는데, 이를 인용해 4대 해전을 만든 것 같다.

딴지일보에서 세계 4대 해전에 대해 검색해볼려고 했는데 어떠한 결과도 안나오고 세계 10대 해전을 묻는 투표 밖에 안나와 결국 리그베다위키를 참조 했다고 한다.# 어디를 찾아봐도 나무위키 말고는 세계 4대 해전을 찾는일이 쉽지 않다.

3 결론

간추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세계 4대 해전의 정확한 출처는 어디에도 없다.

원 출처는 리즈시절 영국해군에서 가르치던 해전사에 등장하는 세계 3대 해전이다. 이는 각기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이며,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또 국가에 따라 4대 해전(한국, 미국, 독일 등), 5대 해전(일본)등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2. 근거가 있다고 해도 지극히 서구(영국)적인 편견의 산물이다. 거기다 국가마다 다 다르다.

영국에서 기원한 덕에 리즈시절 영국의 해전이 3개중 무려 2개나 들어있다. 게다가 일본은 쓰시마 해전을 집어넣고,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을 집어넣었다. 일설에 따르면 한산도 대첩을 집어넣은건 원래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미국은 가르치는 교수마다 해전의 수와 내용이 달라진다.

3. 쓰시마 해전(러일전쟁,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 원인 중 하나), 미드웨이 해전(제2차 세계대전, 일본 제국이 몰락하는 결정타) 등등 4대 해전을 고르기엔 세계적으로 중요한 해전이 너무나 많다.

요약하자면 '세계 4대 해전'이라는 것 자체가 실질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것. 연연할 필요가 없다. 악티움 해전 지못미

  1. 키프로스섬은 목재와 구리의 산지로 해군력을 재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레판토에서 양측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지만 키프로스를 빼앗긴 서유럽측이 해군력 재건에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을건 사실. 하지만 오스만 측도 레판토 해전으로 숙련 선원들을 많이 잃는 바람에 망했어요. 실제로 레판토 해전직후에 오스만 제국은 함대규모 자체는 금방 회복했지만 숙련된 선원들과 병사들은 그렇게 쉽게 충분한 숫자를 보충할 수 없었기에 한동안 유럽함대와의 교전을 피했다고 한다. 당시 해전은 서로 배를 맞대고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적선으로 돌입해 백병전을 치러 육군과 다를 바 없었지만 바다에 적응(대표적으로 배멀미)하고 흔들리는 배에서 적군과 싸울 정도의 숙련도를 갖는게 금방 되는 일이 아니었다.
  2.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전투직후 당시 연합국(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 등)의 분열로 이 승리를 제대로 활용(직전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긴 키프로스를 탈환한다든가)하지 못했고 그 사이 오스만 제국은 제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함대 규모 자체는 금방 복구했기 때문에 패한 오스만 제국도 위의 보충설명에도 나오듯 별로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치 않을 정도였다.
  3. 레판토에서 함포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함포위주의 전투는 아니었다. 레판토에서의 주된 전투방식은 여전히 갤리선들간에 이루어진 화약시대 이전의 무기, 즉 활과 석궁에 의한 원거리전 및 백병전이었다. 따라서 최초의 함포위주의 대규모 전투는 칼레 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계몽주의 시대의 전쟁 문화는 당대의 이성적 세계관을 반영해 라인을 통해 화력을 미리 극대화하는데 중점이 있었다. 육전에서 레드코트가 횡대를 이루어 정연한 총격을 가하는 것처럼 해전에서는 전열함이 전열(line)을 이루어 교전을 벌이고 양측 모두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전열을 갖추는 것을 우선시하던 해전의 양상이 중앙돌파에 이은 포위 공격처럼 매 순간순간의 변화에 맞추는 우연 효과를 노리는 낭만주의로 전환하였기에 소극적으로 서로의 소모만을 누리던 기존의 틀을 벗어나 결정적인 전투를 벌인다는 개념이 명확해졌다. 이렇게 기회를 포착하면 전열을 흐트러트리더라도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모험적 시도들이 전에도 있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그리고 극적인 지점이 트라팔가르에서 빅토리 함상의 넬슨이다.
  5. 다만 고려 말에도 함포의 성능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함포 위주의 작전을 펼쳤던 진포 해전은 왜구들이 배를 묶어 놓았던 특이한 상황이어서 가능했다. 이후에 벌어진 관음포 해전은 화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는 하지만 근접해서 던지는 화통등이 비중이 높았지, 원거리에서 함포로 적을 제압하는 형식은 아니었다.
  6.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할때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고 이후 이자성과 부하들이 기고만장해져 북경의 관리들과 부자들을 핍박하는 와중에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가족들이 살해되었고 이에 격분한 오삼계가 청과 협상해 산해관을 청에 넘겨주고 휘하 군대를 끌고 북경으로 진격해와 이자성의 반란군을 철저하게 토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