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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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gei Prokofiev

풀네임은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러시아/소련작곡가피아니스트.

1891년 4월 23일 ~ 1953년 3월 5일

▲ 피아노 소나타 No.7 Op.83 3악장. 마우리치오 폴리니현존하는 컴퓨터 악기의 연주. 아아... 정신이 아득해진다...

1 생애

손초프카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심취해 다섯 살 때 첫 작품인 피아노 소품 '인디언 갈롭'을 작곡했다. 이어 아홉 살 때는 첫 오페라인 '거인'을 작곡해 집에서 연주하기도 했고, 체스에 몰두하기도 했다.

아들이 확실히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간파한 어머니는 1902년에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을 맡고 있었던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조기 교육을 시켜줄 것을 부탁했는데, 타네예프는 자신의 대위법 제자였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손초프카로 가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해주도록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처음에 글리에르의 수업에 열성적으로 따랐지만, 이내 글리에르의 보수적인 이론 교육에 싫증을 냈다.

프로코피예프의 부모는 손초프카가 아들이 음악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 낙후되고 고립되어 있다고 판단했고, 19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그 곳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게 아들이 쓴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면서 입학 시험을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글라주노프는 제안을 받아들여 프로코피예프에게 시험을 보게 해 입학시켰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여기서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고, 학생들이나 교수들도 프로코피예프의 도발적인 행동과 무례함에 당혹스러워했다. 여기서 쓴 작품들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반음계 어법과 불협화음이 자주 사용되었고, 이는 보수적인 성향의 음악원에서 자주 논쟁을 유발했다.

음악원 졸업 후 프로코피예프는 젊고 도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러시아 음악계에 일찌감치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처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에서 보수파와 혁신파 사이에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어쨌든 일찍부터 주목받은 프로코피예프는 1911년 러시아의 유력 음악 출판사인 유르겐손과 계약해 자신의 작품들을 출판했고, 1913년부터는 해외 연주 여행도 다니기 시작했다.

이들 여행에서 프로코피예프는 당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젊은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신작 발레들을 공연하던 흥행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났고, 디아길레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똘끼에 감탄했는지 발레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나왔던 '알라와 롤리'는 디아길레프가 거부했고, 1차대전으로 인해 유럽의 음악 활동 전반이 위축되자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전쟁 중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음악원에 재등록해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고, 1917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가지고 오페라 '도박사'를 완성해 초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초연 계획은 같은 해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대신 프로코피예프는 고전주의 양식을 응용한 첫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혼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혁명 후 수립된 사회주의 정권에서도 프로코피예프는 음악 활동을 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고, 당시 교육인민위원장이었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허가를 받아 191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여기서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의 초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빚만 잔뜩 지고 버로우해야 했다. 미국에서도 실망한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고, 여기서 전쟁 전 만난 디아길레프에게 두 번째 발레 작품을 위촉받아 '어릿광대'를 작곡했다. '어릿광대'는 1921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어 대박을 쳤고, 스트라빈스키와 모리스 라벨, 장 콕토를 비롯한 진보적 문예 인사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에는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을 시카고에서 초연해 역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후 뉴욕에서 재연했을 때는 망했어요 상태가 되어 또 한 번 미국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는 1923년에 다시 파리에 이주해 오페라 '불의 천사'의 작곡에 주력하는 한편, 두 번째 교향곡과 발레 '강철 계단'으로 모더니즘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도발적인 작풍에도 점차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후 작곡 스타일을 조금씩 바꾸어갔다.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불의 천사'도 1927년에 베를린에서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시립 오페라단이 초연하기로 일정을 잡았지만, 악보 발송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어 또 물을 먹었다.

같은 해에는 1918년 출국한 이래 거의 9년 만에 소련에서 연주 여행을 했는데, 레닌그라드에서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이 소련 초연되어 절찬을 받고 자신도 피아니스트로 호평을 받는 등 예전과는 다른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때부터 프로코피예프는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소련 정권이 보여주던 억압과 통제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1929년에 디아길레프가 발레 '방탕한 아들'을 공연한 것을 끝으로 사망하자, 프로코피예프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소련 문화예술계와 작업을 시작해 발레와 영화음악 등을 소련에서 발표했다. 결국 1936년에 프로코피예프는 영구 귀국을 선언했고, 곧 전년도에 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연을 위해 당국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소련의 문화 정책은 소위 '사회주의 사실주의'노선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비록 초기의 독기와 똘기가 상당히 빠지기는 했지만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도 차츰 형식주의에 빠졌다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프로코피예프도 여타 소련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정권의 노선에 영합하는 소위 '접대용'작품들에 주력하는 쪽으로 창작 노선을 바꾸었고, 10월 혁명 20주년 기념 칸타타나 소련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등을 작곡해 선보였다. 하지만 칸타타의 경우 지나치게 거대하고 난잡하다는 당국의 비판을 받아 이후 프로코피예프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고, 그 반대로 1937년에 작곡한 노골적인 쇠돌이 아저씨 써킹 작품인 '우리 시대의 노래'는 반대로 너무 단순하고 밋밋하다는 이유로 디스 당했다. 뭐 어쩌라고 님, 그걸 꼭 말해줘야 아나요? 린민을 위한 건 수수하게, 가카를 위한 건 화려하게(부르주아 정신을 인민에게 깃들게 하지 않으려는 정책과 충돌한다고 했다나)

이 시기 이후로 프로코피예프의 해외 여행은 크게 제한을 받았고, 1938년에 마지막으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뒤에는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해 이후 평생 동안 소련에 짱박혀 있어야 했다. 게다가 소련 정주 선언 이래 의욕적으로 작곡한 오페라 '세묜 코트코'도 초연에 심하게 애를 먹었는데, 초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독일과 관계가 개선되면서 독일을 악역으로 설정한 대본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오페라의 초연을 같이 준비하던 연출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가 대숙청에 쓸려나갔고, 프로코피예프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끔살당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에 스탈린 동무의 60번째 생일에 맞추어 '건배'라는 제목의 한층 더 노골적인 후빨 칸타타를 발표했고, 이 작품은 폐기된 이전의 두 교성곡들과 달리 공식적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 가장 주목받던 영화 감독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프로코피예프에게 자신의 신작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OST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해온 것도 '명예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예이젠시테인은 프로코피예프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베풀었고, 심지어 몇몇 전투 장면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 리듬에 영상을 맞추어 촬영하는 등 매우 긴밀한 협업으로 걸작을 만들어냈다. 프로코피예프는 영화 발표 후 OST의 일부를 연주회용 칸타타로 다듬어 내놓았고, 이 칸타타는 프로코피예프의 후기 작품들 중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외에도 피아노 소나타 6-8번(흔히 '전쟁 소나타'라고 부름) 같은 순수 기악 작품들도 호평을 받았다.

독소전쟁이 터진 뒤에는 다른 주요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동부로 피신했고, 거기서도 이런저런 정권 영합성 작품들 외에 바이올린 소나타나 현악 4중주 등을 계속 작곡했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작곡한 교향곡 5번은 이듬해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교향곡 7번,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번 등과 함께 전쟁 중 작곡된 소련 교향곡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널리 선전되었다.

하지만 그 즈음 낙상 사고로 입은 뇌진탕으로 인해 건강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해고, 종전 후 다시 문화예술계를 조이기 시작한 소련 당국의 압박에도 다시금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피아노 소나타 9번과 교향곡 6번이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1948년에 무라델리의 오페라 '위대한 친선'으로 불붙은 대대적인 음악계 숙청 운동에도 휘말려 공공의 적으로 신나게 까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전쟁 중 버로우해야 했던 '세묜 코트코'를 대신할 새 오페라였던 '전쟁과 평화'도 생전에 초연되지 못했고, 예이젠시테인과 작업한 《이반 뇌제》의 2부도 상영금지크리를 먹는 등 계속 불운이 이어졌다. 이미 건강도 계속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 활동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고, 1952년에 교향곡 7번의 초연을 마지막으로 예전 작품들을 개작하면서 투병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3월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하필이면 프로코피예프가 죽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강철의 대원수의 사망 소식이 발표되면서, 프로코피예프의 사망 소식은 완전히 묻혔다. 심지어 프로코피예프의 집이 붉은 광장에서 가까웠던 탓에, 서기장 동무를 조문하고자 광장으로 몰려들던 수십만 명의 군중들을 피해 다른 거리들을 전전하며 한참을 돌아나가 관을 운구해야 했다. 노보데비치 묘지에서 극히 간소한 장례식이 열린 뒤에도 한 동안 소련 언론은 인간백정 아저씨의 장례식만 줄창 보도하느라 프로코피예프의 부고를 싣지도 않았다. 후새드.

2 주요 작품들

2.1 교향곡

교향곡 1번 D장조 '고전' (1916-17)
교향곡 2번 D단조 (1924-25)
교향곡 3번 C단조 (1928)
교향곡 4번 C장조 (초판-1929-30, 개정-1947)
교향곡 5번 B플랫장조 (1944)
교향곡 6번 E플랫단조 (1945-47)
교향곡 7번 C샤프단조 (1951-52)

2.2 관현악곡

스키타이 모음곡 (발레 '알라와 롤리'에서 편집함. 1915)
헤브라이 주제에 의한 서곡 (1919)
교향적 노래 Op.57 (1933)
모음곡 '키제 중위' (같은 이름의 OST에서 편집함. 1934)
음악 동화 '피터와 늑대' (1936)
왈츠 모음곡 (1946)
모음곡 '여름의 저녁' (1953, 오페라 '수도원에서의 약혼'에서 발췌한 것)
그 외 오페라나 발레에서 편집한 모음곡들

2.3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D플랫 장조 (1911-12)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 (1912-13. 악보 소실 후 1923년에 재구성)
바이올린 협주곡 1번 (1916-17)
피아노 협주곡 3번 C장조 (1917-21)
피아노 협주곡 4번 B플랫 장조 (1931. 왼손만을 위한 작품)
피아노 협주곡 5번 G장조 (1932)
바이올린 협주곡 2번 G단조 (1935)
첼로 협주곡 E단조 (1933-38)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 협주곡 E단조 (1950-52. 초기에는 첼로 협주곡 제2번으로 이름붙음)

2.4 실내악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1912)
4대의 바순을 위한 유머레스크 스케르초 (1915)
5중주 G단조 (1924)
현악 4중주 1번 B단조 (1930)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1932)
현악 4중주 2번 F장조 (1941)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장조 (1946)
플루트 소나타 D장조 (1943)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 (1944)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나 D장조 (1947)
무반주 첼로 소나타 C샤프단조 (1949)

2.5 피아노곡

피아노 소나타 1번 F단조 (1907-09)
토카타 D단조 (1912)
피아노 소나타 2번 D단조 (1912)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빈정댐' (1912-14)
피아노 소나타 3번 A단조 (1907-17)
피아노를 위한 20개의 소품 '덧없는 환상' (1915-17)
피아노 소나타 4번 C단조 (1917)
4개의 소품 Op.32(1918)
피아노 소나타 5번 C장조 (1923-초판, 1952-53: 개정판)
3개의 소품 Op.59(1933-34)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 Op.65(1935)
피아노 소나타 6번 A장조 (1939-40)
피아노 소나타 7번 B플랫장조 (1939-42)
피아노 소나타 8번 B플랫장조 (1939-44)
피아노 소나타 9번 C장조 (1947)

2.6 합창곡

6개의 노래 Op.66 (1935)
2개의 시 Op.7 (1909~10)

2.7 가곡

2개의 시 Op.9 (1910-11)
미운 아기 오리 Op.18 (1914)
5개의 시 Op.23 (1915)
5개의 카자흐 노래 (1927)
7개의 노래 Op.79 (1939)
12개의 러시아 민요 Op.104 (1944)
2개의 듀엣 Op.106 (1945)

2.8 오페라

도박사 (1915-17. 1927-28 개작)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 (1919)
불의 천사 (1919-23. 1926-27 개작)
세묜 코트코 (1938-39)
수도원의 약혼 (1940-41)
전쟁과 평화 (1941-43. 1946-52 개작)

2.9 발레

어릿광대 (1915. 1920 개작)
강철 계단 (1925-26)
방탕한 아들 (1928-29)
드녜프르 강에서 (1930-31)
로미오와 줄리엣 (1935-36)
신데렐라 (1940-44)
돌꽃의 이야기 (1948-53)

2.10 영화음악

키제 중위 (1933)
알렉산드르 넵스키 (1938)
이반 뇌제 (1942-45)

3 수상 경력

노력적기훈장 (수상연도 불명)
레닌상 (1957)
국가 스탈린상 예술부문 1등상 (1946 3회, 1947)
국가 스탈린상 예술부문 2등상 (1943, 1951)
러시아 인민예술가 (1947)

4 창작 성향

초기에는 그야말로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식어가 지나친 것이 아닐 정도로 도발적이고 대담한 작풍으로 수많은 논쟁을 유발했는데, 특히 자신의 장기 악기이기도 했던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에서는 지금도 처음 듣는 이들에게 꽤 충격적일 불협화음의 난타나 복잡한 조바꿈, 대담한 화성 진행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낭만주의 시대에 자주 쓰인 분산화음,노래하는 듯한 레가토 등은 그의 작품에서 표방되지 않고, 거의 반낭만주의 표방으로 그의 피아니즘은 20세기 현대악파 피아니즘의 선두주자로 등극했다.

그러면서도 흔히 '고전 교향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교향곡 1번에서처럼 의식적으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은 대선배들의 작풍을 모방하거나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흘러가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 같은 작품으로 자신의 양면성을 보여주었고[1], 특히 전자의 경우 중기의 작품 활동 성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피아노곡이나 교향곡 외에도 오페라나 발레 같은 무대 작품에 상당한 관심과 열정을 쏟은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이 분야에서는 남긴 작품이 적잖은 데도 거의 대부분이 초연 때 망했던가, 아니면 초연도 이런저런 어른의 사정으로 못하고 한참 뒤에야 성사되는 등 끊임없는 안습 릴레이를 펼쳐서 지못미. 그 때문인지 프로코피예프 자신도 이들 대작이 초연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관현악 모음곡 등 연주회용 작품으로 많이 리메이크를 해놓았고, 교향곡 3번과 4번(초판)도 각각 '불의 천사'와 '방탕한 아들'의 음악 소재를 가지고 쓰여졌다.

소련 귀국 후에는 그 이전에 보여준 신고전주의 성향도 있었고[2] 스탈린의 철권 통치 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술 때문에도 좀 더 평이한 작풍을 보여주는데, 그나마 그 작풍이 개인적인 의욕과 합쳐져 빚어낸 명작들도 있기는 하지만 상당수가 애널써킹용으로 작곡되어 쓸데없이 저퀄인 작품을 양산한 것이 문제였다. 특히 이 시기 작곡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는 지금도 노골적인 스탈린과 공산주의 체제 찬양으로 인해 개무시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던 작품들의 대부분이 해금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소련 붕괴 후에는 초기 작품들이나 무대 작품들의 적극적인 음반/영상물 출반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 분야에서도 뒤늦게나마 명성을 얻고 있다.

5 사생활

어린 시절부터 꽤 건방진 성격 때문에 숱한 적을 만들고 다녔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재학 시절에도 자신보다 보수적이었던 교수들의 뒷담화를 까는데 열심이었다. 졸업 후 출세할 때도 이러한 디스 성향은 정도가 덜해졌을 지언정 계속되었는데, 일찌감치 서유럽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던 선배 스트라빈스키도 마찬가지로 프로코피예프에게 디스를 당했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는 프로코피예프를 여전히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로 평했고, 말년에도 그 평을 바꾸지 않았다.

소련으로 귀국한 뒤에는 그 곳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으로 홀랑 날리고 절찬리에 까이고 있던 쇼스타코비치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쇼스타코비치를 선율미가 부족한 작곡가라고 깠고, 쇼스타코비치도 지지 않고 프로코피예프가 소련 체류 이후 작곡한 작품들의 관현악 편곡을 포그레보프라는 인물에게 몰래 맡겼다고 깠다. 독소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이들은 서로를 못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틈만 나면 디스를 걸었고, 이는 1948년에 안드레이 즈다노프에게 둘 다 제대로 관광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즈다노프에 의한 대대적인 비난 이후에야 둘은 공동의 피해 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둘 다 어느 정도 비판 의식은 유지했지만 서로의 작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정도로 관계가 호전되었다.[3] 비슷하게 하차투리안과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1948년 이후로 연대 의식을 느꼈는지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도 소련 귀국 후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일단 소련 성립 후 외국에서 활동할 시기에 스페인 가수 리나 유베라와 한 결혼은 처음에 잘 풀리나 싶었다. 둘 사이에서 장남 스뱌토슬라프와 올레그가 각각 1924년과 1928년에 태어났고, 이들은 프로코피예프가 소련 귀국을 결심했을 때도 그대로 따라갔다.

하지만 소련으로 간 뒤에 이들도 프로코피예프와 마찬가지로 현시창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는데, 독소전쟁 중에는 정권의 탄압 같은 외적인 난관 외에 프로코피예프 자신의 불륜으로 인한 내적인 위기까지 닥쳐왔다. 독일군이 한창 모스크바를 목표로 맹공을 퍼붓고 있을 때 소련 당국은 외국 외교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동쪽으로 피난할 것을 명령했는데, 프로코피예프는 가족 동반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리나가 아들들과 남겠다고 결정해서 혼자 피난해야 했다.

이 피난 기간 중 프로코피예프는 젊은 여류 작가인 미라 멘델손과 만났는데, 미라와의 관계가 깊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리나와 별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혼까지 가지는 않았고, 프로코피예프도 리나와 아들들에게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종전 후인 1948년에 리나가 스페인으로 망명을 시도했다는 날조 혐의로 체포되어 20년 징역을 선고받게 되자, 간신히 이어오던 가족 관계는 거의 개박살나 버렸다.

리나는 1956년이 되어서야 스탈린 숙청 피해자들이 복권되면서 풀려났고, 1974년에 출국 허가를 받아 소련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리나의 아들들인 스뱌토슬라프와 올레그는 그대로 소련에 살면서 각각 건축가와 미술가로 활동했고, 이후 소련 사회에서 아버지가 복권되는데 나름대로 기여하기도 했다.

6 기타

손자인 Gabriel Prokofiev 역시 작곡가. 2014년 기준으로 점점 명성을 쌓아 가는 중이다 (1975년생). 올레그와 영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DJ인 동시에 정통 음악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의 턴테이블 협주곡은 2011년 BBC Proms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들어 보면 나름대로 굉장히 흥미로운 작곡가.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도네츠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국제공항(Міжнародний аеропорт «Донецьк» імені Сергія Прокоф'єва)이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내전이 심화되면서 이곳에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반군에 고립되어 리얼 메트로 2033을 찍고 있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1. 아마 그가 '반낭만주의자'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낭만주의만 집중적 디스한게 아닐까 싶다
  2.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신고전주의엔 그다지 동조하진 않았다.
  3. 쇼스타코비치는 이후 스탈린의 죽음으로 초라하게 진행된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에 얼마 안되는 조문객으로도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