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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沈熏, 1901년 9월 12일 ~ 1936년 9월 16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영화감독, 영화 평론가. 영화배우.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호는 해풍(海風). 청송 심씨(靑松 沈氏) 안효공파(安孝公派)로 잘 알려져 있다[1].
주요 저서로《상록수》가 유명하다. 해방 후 1949년 유고집으로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집이 발간되었다. 시, 소설 두 대표작 모두가 교과서에 실린 인물. 그 이외에 이렇게 시와 소설 둘 모두 교과서에 실은 사람은 심훈을 제외하면 이상이 유일하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고 퇴학당했다.[2] 8개월 동안 복역하고 출소한 후 중국 항저우로 건너가 주장 대학에서 공부하였으나, 복역 시절의 후유증으로 결국 중퇴했다. 1923년에 귀국하여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를 만들었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시와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 동아일보에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소설인 《탈회》를 연재했는데, 이 때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했다. 하지만 《탈회》를 계기로 영화계에 진출해 이듬해 이경손 감독의 《장한몽》[3]에 배우로 출연했으며, 《먼동이 틀 때》의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 및 감독을 맡았다.(필름이 남아 있지 않음)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한 그는 1930년 조선일보에 중편소설 《동방의 애인》을 연재했는데, 일본 경찰의 검열에 걸려 완성되지 못하고 집필이 중단되어 미완성 소설로 남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모델이 박헌영과 주세죽이라고 한다.
1927년 12월 2일에, 조선일보에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기고한다.
심훈은 박헌영과 경성고보 동창이고 친구 사이였는데, 박헌영이 신의주 사건으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고 1927년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매우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에 분노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박군은 박헌영을 가리킨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4]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5]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6]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XX(헌영)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
영화 평론가로도 활약했는데 메트로폴리스를 극장에서 감상하고 평을 남기기도 했다. 부모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가 1935년 장편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고, 이 소설이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았다. 그는 이 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상록수》를 영화화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탄압 등 여러 사정으로 끝내 만들지 못했으며,[7], 《상록수》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시는 <오오 조선의 남아여>인데, 1936 베를린 올림픽 때 동갑내기인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가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는 조선중앙일보(2.)의 호외 소식을 길거리에서 주워 들고 그 자리에서 감격하여 신문지 뒷면에 즉석해서 시를 지었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伯林마라톤에 우승한 孫, 南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
그는 《상록수》의 출간 작업을 위해 당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가,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9월 16일 아침에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심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으면서 이 시를 낭송하였고, 관을 안으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안창호가 아들처럼 생각한 유상규의 호가 태허임을 알게 유상규 차남이 알게 된 것도 그 집을 방문한 심훈이 쓴 메모 덕이라고 한다.
- ↑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
- ↑ 2005년 경기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 ↑ 이수일과 심순애를 각색하였다.
- ↑ 일본 황태자 암살사건에 연루된 아나키스트 박열을 말한다
- ↑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던 시대일보를 말한다.
- ↑ 제2차 공산당 사건으로 잡혀 고문을 당하던 끝에 죽은 박순병을 가리킨다
- ↑ 이는 8.15 광복 후인 1961년 신상옥 감독이 만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