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평택간 버스경쟁

1 개요

1998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백성운수경진여객-협진여객간의 안성시-평택시간 버스 노선 경쟁에 관한 일련의 내용. 이후 백성운수가 안성지역의 버스 노선을 독식하게 된 것과 연관이 없지 않으며,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덕택에 승객들만 봉이 되었다.

2 태동기 : 대신여객의 부도

1998년, 안성시에서 가장 큰 버스회사라면 대신여객이었다. 이 회사는 서울남부터미널-안성터미널간 직행버스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외 안성을 기종점으로 하는 직행, 시외버스를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예외라고 한다면 천안-안성간 시외버스(현재 천안 201번 버스)[1]와 안성 시내버스정도였다. 그나마 백성운수가 주로 운행하던 안성 시내버스도 그 위치가 확고하지 못해, 안성-공도-양성(현재의 7-2), 안성-서운(현재의 20)등의 일부 노선은 평택시의 버스회사와 공배, 혹은 해당 회사가 아예 대놓고 운행(...)하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돈이 되는 노선이 많아도 회사의 운영이 부실하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부실한 버스로 노선을 돌리던 대신운수는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다.[2] 넓은 차고지는 그대로 경매에 붙여져서 현재 상가가 들어선지 오래고, 수십 대의 버스는 헐값에 팔려서 폐차장으로 흘러간것이 대다수라는 소문이 안성에서 떠돌지만 확인은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슈가 되는 노선이 바로 37번 노선과 50번(당시 5-1)[3]이었다. 말 그대로 시골촌동네 안성을 각각 규모 있는 장호원과 평택시로 이어주는 핵심노선이었는데, 당시 안성시는 37번은 백성운수, 50번은 경진여객에 일시적으로 노선을 맡기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 50번의 경우 원래 번호였던 5-1번 임시버스를 약 한달간[4] 운행한 뒤, 현재의 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런 노선 분할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

3 전초전 : 백성운수의 직행면허 인수

하지만 대신여객이 가지고 있었던 노선은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안성시-공도-평택시 이렇게 운행하던 직행버스였고이 노선의 상당수는 용남고속[5]이 인수했는데 어정쩡한 면허였던 이 노선을 덜컥 백성운수가 인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택시는 50번의 차고지를 평택시에 두어서 버스회사간 경쟁을 유도했고, 그에 대한 특혜(?)로 해당 노선이 평택터미널까지 운행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게 된다. 그에 따라 안성시청-평택시청간을 운행하는 70번 버스가 탄생하게 된다.

4 분쟁의 시작 : 수도권 전철천안시 연장

70번 버스는 백성운수에게 계륵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었다. 평택시에서도 평택시청이라 하면 당시 막 개발되기 시작하던 지역 인근이라서 승객이 많지도 않았고, 인지도도 없던 버스였던지라 50번과 70번 버스가 같이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선지와 상관없이 50번 버스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이를 확고히 한 이유 중 하나가 배차간격이었는데, 10분 배차간격을 자랑하던 50번과 무작위 배차(...)였던 70번은 그야말로 넘사벽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논의되던 것 중 하나가 노선을 평택터미널로 연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 거부되었던 노선이 별 다른 이유 없이 인정될 리 없었고, 그렇게 해서 해당 노선은 폐지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을 하게 되는 순간 수도권 전철 천안연장이 완료되었다.

결국 안성시민들의 교통 편의를 돕는다는 명분하에 70번의 평택터미널 연장이 결정되고, 평택터미널과 평택역이 걸어서 3분거리이기 때문에 이 명분은 매우 타당하게 받아들여졌다. 대신 50번과의 차별을 위해서 평택시내의 운행을 제한하고 38번 국도 우회도로로의 운행만을 허가했기 때문에, 평택시계 지역의 정류장 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는 50번의 수요를 잠식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루어진 조치이기도 했다.[6]

그리고 저러한 정류장 제한은 70번 노선이 부흥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5 분쟁의 본격화 : 기사 소모전에 따른 경진여객의 철수

70번의 주요승객으로 대두된 계층은 한경대학교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학생들이었다. 서울남부터미널-안성터미널간 버스요금과 수도권 통합 요금가 적용되기 이전의 70번 평택-안성간 요금 + 평택역-서울권역 전철요금이 비슷한데, 서울남부터미널을 기종점으로 하는 버스가 환승이 안 되다 보니 하루 2천원(...)씩 차이가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연히 대학생들이 폭발적으로 70번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해당 노선의 파이 자체가 인구에 비해서 커졌음을 뜻하기도 했다.

당연히 평택역으로 바로 이어주는 70번의 호응이 좋았으며 50번의 경우 주로 현지 주민들이 이용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저런 고정관념은 사라지고 목적지에 따라 적당히 골라타는(!!)시대가 오게 된다. 물론 70번이 훨씬 빠른 만큼 선호도가 높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50번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버스의 증속(!!)을 하게 된다. 사실 증속이라는 게 별게 아니라 과속운행을 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동안 시골지역의 버스운행에 익숙했던 백성운수 기사들은 여기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빠른버스=50번이라는 이미지가 성립되게 되고, 배차간격도 5분간격[7]으로 줄이는 초강수 덕에 이 이미지는 굳건해졌다. 사실 여기에는 경진여객의 자금력도 있었지만, 워낙 50번과 70번이 중소도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돈이 잘 벌리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행정서류만 거치면 증차를 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당연히 백성운수도 과속과 신호위반을 통해서 50번을 따라잡는 치킨레이스를 하기에 이르고, 서로 더 빨리 가려는 경쟁이 극에 달해 교통사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해당 지역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가 겨우 돈 900원에 목숨을 맡겨야 하나라는 말까지 들릴 정도. 쿨럭.[8]

결국 경찰들이 매의 눈으로 해당지역에 대한 단속을 철저히 하게 되고, 기사들은 신호위반과 과속들로 줄줄이 벌점을 적립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그 가운데 일부는 벌점누적으로 면허정지까지 이르게 되는데, 훨씬 큰 경진여객이 싸움에서 지고만다.[9]

결국 회사와 노선이 둘 다 흑자였음에도 경진여객은 협진여객에게 해당 노선을 인계하고 평택에서 철수.[10] 그리고 말이 그나마 통하는(?) 두 향토업체간의 협상이 이어지면서 이 분쟁은 어느정도 가라앉게 된다.

6 하지만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백성운수의 버스노선은 대폭 조정되기에 이른다. 370번의 노선이 몇차례 개편을 통해 370/380/370-1 세개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협진여객와 백성운수간의 신사협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상호간의 협정위반 여부로 한 차례 분쟁이 있었지만, 워낙 그 이전의 싸움이 치열해서...

물론 협진여객도 조정한 노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500번이라고 해서 노선 인수 직후에 만든 평택터미널-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간 노선이 있었으나, 이 노선은 이용객 저조로 폐지. 딱 한대 존재하던 차량은 50번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노선조절이 여기에서 이루어진건 아니다. 평택시 택시조합에서 50번버스의 24시 5분전통에 대해 항의를 하게 된다. 이에 따라서 막차는 11시로 변경. 70번 막차가 24시로 변경. 어?

이런 조정 과정을 겪고 난 이후 전보다 과속과 신호위반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아니, 어디까지나 서로 레이싱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여전히 할 때는 한다.(...)

백성운수가 현재로써는 승자로 보이는 것이, 승객선호도가 높고 무엇보다도 농어촌버스의 상징인 구형버스들을 이 경쟁에서 완전히 치워버렸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11] 그리고 이 구간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부도난 성호여객을 인수하여, 자회사인 평택여객으로 만든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평택에서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

하지만 38번 국도에 점점 헬게이트가 열리고 있고, 그에 따라서 주요 밥줄 노선의 배차간격이 흔들리면서[12] 이 밥줄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근데 안성IC 앞에 지하차도가 완성돼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평택진입하는 쪽에서는 우회한다 해도 평택대 가기 전에 있는 주유소에서 합류해야 되는 지라... 근데 버스는 그리로 안 다녀
  1. 여기는 예전부터 면허 자체가 천안시 면허였다.
  2. 현재는 KD 운송그룹이 운행한다. 현재 안성터미널의 실 주인이 KD그룹이 되어버린 주된 이유.
  3. 참고로 5-1번은 본래 안성-평택-송탄-오산-수원-안양-용산(...)으로 이어지던 시외버스를 분할한 노선이었다. 용산터미널이 서울남부터미널로 이전한 이후 관악구로 잠시 운행을 했다가 해당 노선을 분할 후 폐지하고, 안성-서울남부터미널간 직행을 신설했다.
  4. 참고로 이 기간동안 운행했던 예비차량은 당시 경진여객의 직행버스 차량이었다!!
  5. 참고로 당시 용남고속이 운행하던 시외버스의 상당수는 전초기 시기가 끝나기 에 노선이 대폭 축소되거나 폐지되기에 이른다. 축소된 노선은 현재 KD 운송그룹이 인수했고 끈질기게 용남고속이 잡고 있던 노선들은 병점역-천안역간 전동열차 개통 한 달 뒤에 전부 폐지되어버린다. 그 흔적 중 하나가 평택터미널에서 수원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없다는 점. 본래 수원터미널-천안터미널/안성터미널을 운행하던 완행 시외버스 노선이 있었다!
  6. 그 영향인지, 50번 버스에는 평택전철역 정차를 강조하는 안내판이 지금도 붙어있다. 이건 뭐...
  7. 물론 5분배차는 R/H기준. 하지만 첫차 4시 50분막차 24시 5분.이라는 전통은 2005년경에 시작되어 경진여객이 평택에서 철수하여 협진여객이 운행할 때에도 쭉 이어져 2010년까지 유지되었다!!
  8. 얼마나 과속을 하냐면 버스 정류장에 사람이 있어도, 지금까지 있던 스피드 때문에 버스를 못 멈추고 그냥 가버린다.
  9. 백성운수의 경우 향토업체이다보니 경찰의 단속지점을 미리 파악해서 단속 적발을 최소화하였으나 경진여객은 저런 매복단속에 기사들이 줄줄이 낚여서 타 지역의 기사들을 교체투입했음에도 공백을 메꾸지 못하였다. 경진여객이 표적이었던 건 아니지만 결과가 저렇게 되었다는게 아이러니.
  10. 완전히 평택을 떠난 것은 아니고 안중에서 출발하는 4-1번 시내버스(안중 - 조암)수원/서수원 시외버스는 여전히 운행하고 있다.
  11. 항상 70번/370번/380번 노선에는 50번에 밀리지 않는 연식의 차량을 배차해둔다. 그 때문에 안성시 최초의 초저상버스가 도입된 지 2년도 안 되어 다른 노선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12. 그래봐야 5분 정도 벌어지지만, 불만은 폭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