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읍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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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邑之戰

'"어린 놈일 뿐이군!"'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中
안읍 전투
날짜
BC 205년 8월 ~ 9월
장소
중국 산시성(河北省) 남부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한(漢)서위(西魏)
지휘관한신
조참
관영
위표
백직
풍경
항타
손속
왕양
결과
위표의 항복
기타
서위의 멸망. 한신의 북벌에 필요한 길이 열림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당시 벌어진 (漢)군과 서위(西魏)의 전투. 팽성전투(彭城之戰) 이후 수세에 몰리던 한군이 처음으로 공세적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이자, 한신의 북벌을 가능하게 만든 전투이다. 서위는 이 전투 이후 멸망하여 한나라에 흡수된다.

2 발단

2.1 서위왕 위표

통일제국을 이룩했던 (秦)이 진승 · 오광의 난(陳勝吳廣─亂)으로 뒤흔들릴때, 과거 육국(六國)의 후예들은 기회를 놓칠새라 서둘러 자립하여 세력을 일구었다. 게중 (魏)의 공자였던 위구(魏咎), 위표(魏豹) 형제는 진승(陳勝)에게 합류하였는데, 진승은 장수였던 주불(周市)에게 옛 위나라 지역을 탈취하라고 명령했다. 위나라 지역을 장악한 주불은 자신에게 왕위를 제안하는 사람들의 의사를 듣지 않고 위구를 추대하여 위나라 왕으로 삼아 위를 부활시켰다.

허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은 장초를 무너뜨린 후 그 기세를 살려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구는 놀라 전씨 형제들이 부활시킨 (齊)와 항량(項梁)이 되살린 (楚)에 구원을 요청하여 제나라에서는 국왕 전담(田儋)이, 초나라에서는 항타(項它)와 전파(田巴)가 구원하러 왔지만 장한은 이를 간단하게 섬멸했다.[1] 형세가 절망적이자 위구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고 자신은 자살했다. 위표는 그 난리 통을 간신히 벗어나 초나라로 도망쳤다.

이후 그 무적의 장한은 거록전투(巨鹿之战)에서 왕리(王離)[2]가 대패하자 크게 세력이 꺾였고, 결국 항우(項羽)에게 항복하게 된다. 당시 위표는 초회왕(楚懷王)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지역을 평정 중이었는데, 항우에게 위나라 왕으로 봉해진 후 잽싸게 정예군을 추려 항우에게 종군, 함곡관(函谷關)을 같이 넘는 발빠른 행보를 보인다.

이러한 행적으로 위표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여 서위왕(西魏王)이 되는데 성공한다.

2.2 위표의 투항과 배신

그런데 그런 위표에게 선택의 순간이 왔다. 홍문연(鴻門宴) 이후 파촉(巴蜀)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유방(劉邦)이 복수를 위해 이를 갈며 한신(韓信)과 함께 밀고 나오던 것이다. 한군이 삼진을 평정하자 눈치를 보던 위표는 유방에게 항복하는 쪽을 택했다. 위나라 전체를 바침으로써 전투를 피했던 것이다. 한나라에서는 서위를 폐지하고, 옛 서위의 영토에 군현을 설치해 한나라의 영토로 편입했다. 이는 이전에 한나라에 항복한 새나라 · 적나라에서와 마찬가지다.

당시 한군은 온갖 제후들이 달라붙어 장장 56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이었던 만큼, 마찬가지로 대세를 좇아 유방에게 합류한 위표였지만, 이후 상황은 위표의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항우가 전영(田榮)을 상대하기 위해 제나라로 떠나 팽성이 빈집이나 다름 없었던 것은 좋았지만, 이후 벌어진 팽성대전에서 한군은 항우의 3만 군대에게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되자 거의 대부분 유방을 따랐던 제후들의 외교 정책 역시 요동치게 된다.

위표 역시 자신의 주특기 눈치보기를 발휘했고, 아무래도 항우가 다시 대세로 보이자 그쪽으로 붙을 결심을 하게 된다. 6월 경, 위표는 어머니의 병간호를 구실로 삼아 유방에게 잠깐 다녀오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하고는, 한군을 떠나 위나라에 돌아온 후에 황하의 나루를 끊고, 정 반대로 초나라를 섬기게 된다. 유방은 이로 인해 완벽하게 뒤통수를 얻어 맞고 말았다.

3 전개

3.1 역이기의 설득

유방의 입장에서는 제 살자고 부모 이름 팔아 도주한 위표의 행적이 괘씸할만 했으나,[3] 위표를 혼내주기에는 유방도 썩 상황이 좋지 않았다. 팽성에서 대단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데다, 마침 관중 지역에서는 대기근이 발생하였던 참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초나라의 공세를 경색전투(京索戰鬪)에서 간신히 저지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유방은 가능하면 대화로 해결해 보기 위하여 역이기(酈食其)를 보내어 위표의 회유를 노려 보았다. 잘만 회유하면 항우에 맞설 첨병이 될 세력을 확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표는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가 걸작인데, "유방이 평소에 너무 욕을 많이 하고 제후들과 신하들을 노예나 되는 것처럼 나무라니, 나는 그런 사람하고는 일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수틀리면 욕을 퍼붓던 유방과 또 그걸 듣던 과거 시정잡배 출신 한나라 공신들과의 사이는 위나라 공자 출신 위표로서는 좀 그랬던 듯…… 물론 이런 이유 뿐만 아니라 위표 나름의 정치적 계산도 있었겠지만 기질적으로 유방을 거북스러워했던 것은 맞는 듯 하다.

3.2 한나라의 공격 준비

회유 작업을 시도했던 유방이었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은 수단은 무력 제압 밖에 없었다. 당시 유방은 성고 - 형양 등을 기점으로 항우에 맞서는 전략적 방어선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는데, 위표의 영토는 이 지역의 후방을 위협하고, 유방의 본거지인 관중과 앞선의 수비 라인의 연결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였다. 또한 북쪽의 제후들을 평정하기 위해서라도 위표를 제압해야만 후방의 안전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한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위표를 굴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유방은 이를 위해 군사를 준비하고, 그 대장으로 한신을 기용했다. 한신은 한나라군의 대장군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별도로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치룬 적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은 전투 이전에 한신을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해 권위를 더해주고, 관영과 조참 등이 더불어 위표를 치게 했다.

공격 준비가 되어가고 있을때 역이기는 한나라로 귀환했는데, 역이기가 귀환할 무렵에는 위나라도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은 역이기에게 위나라의 상황을 물었다. 유방은 먼저 "적의 대장은 누구인가?" 라고 질문했고, 역이기는 백직(柏直)이라는 인물이 대장으로 나선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방은 "그 놈은 입에서 젖내나 풍기는 놈이다. 어찌 한신을 당해낸단 말인가?"[4] 라고 비웃었고, 이후는 적의 기병 대장을 물어보았다. 당시 한군의 기병대장은 관영으로, 관영은 경색전투 무렵에 기병대장이 되어 있었다.

역이기의 정보에 따르면 서위의 기병 대장은 과거 진나라의 장수였던 풍무택(馮無擇)의 아들 풍경(馮敬)이었는데, 유방은 "그 놈이 똑똑하다고 해도 관영을 당해낼 순 없다." 라고 대답했고, 마지막으로 보병을 이끄는 장수가 항타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 녀석도 조참을 당해낼 순 없다. 나는 걱정할 게 없겠다." 고 여유만만한 태도를 취했다.

한편 원정군을 이끌게 된 한신도 정보를 얻기 위해 역이기를 만났다. 한신은 내심 주숙(周叔)이라는 인물이 마음에 걸리는지 역이기에게 서위가 주숙을 대장으로 삼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재차 백직이라는 대답을 듣자 "어린 놈일 뿐이군!" 이라고 소리쳤다.[5] 마음이 든든해진 한신은 곧 군대를 진격시켰다.

3.3 양측의 군세

향후 벌어진 정형 전투유수 전투와는 다르게, 한신과 위표의 전투에서는 양측의 군세를 짐작할 수 있는 언급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양측이 준비한 군세가 어느정도 였는지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한군의 규모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방은 경색전투에서 막 초군의 서진을 저지한 상황이었으며, BC 205년에 발생한 관중의 기근 탓에 소하의 보급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후 북벌을 요청한 한신이 부탁한 병력이 3만이었으니, 아무리 많아도 이보다는 적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좌승상이라는 한신의 지위를 고려해보자면 만단위는 되었을 수도 있다.

위표의 군대는 더 알기 어렵다. 위표가 거느렸던 군대에 대해 알 수 있는건 과거 위나라를 수복할때 병사 수천여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정도다. 이 시점에서는 과거 일이고, 당시 전란의 시대상황에선 한번에 병력이 수만명씩 불었다가도 사라지는형편이었기에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다만, 위표의 수하로 있던 인물 중에 항타라는 인물이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항타가 항우의 인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초나라의 병력을 어느정도 거느리고 있었을 수 있다. 그리고 팽월열전에서 위표가 팽성대전 직전 유방에게 항복할 당시, 팽월이 위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어 군대를 마음대로 이끌고 (梁)나라 지역을 공략하게 유방이 지시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그렇다면 서위의 군사들이 어느정도 팽월에게 귀속되어 당시에는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간 양측의 규모는 추측 외에는 알 방법이 없다.

3.4 전투

파일:66WAZiB.jpg

한신이 군사를 몰고 오자 위표는 이를 막기 위해 포판(蒲坂)[6]의 수비를 강화하고, 임진(臨晉)[7]의 수로를 막아 우주방어 형세를 갖추었다. 포판 등은 안읍의 서쪽에 있음으로, 여기서 한신은 안읍의 동쪽인 형양에서 출진하지 않고, 안읍의 서쪽인 역양(櫟陽)에서 출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방은 역양과 형양을 계속해서 오가고 있었기 때문에, 한신은 유방이 역양에 있을 무렵 출발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6월 경에는 역양에 있었고 8월 경에는 형양으로 이동했으니 한신의 출격은 유방이 형양으로 떠나는 바로 동시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위나라에 있던 역이기가 귀환하면서 위표의 전쟁 준비를 알 정도였으니, 당시 위표는 이미 치밀하게 준비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울였을 것이 자명하다. 한신으로서는 위표가 만전을 기울이는 지역에 들이붓는다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신은 묘한 작전을 생각해낸다.

우선 한신은 아군의 군이 대군으로 보이게끔 위장하며 적군과 대치하면서, 실제로는 포판보다 좀 더 북쪽에 있는 하양(夏陽)으로 일부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리고 목앵부(木罌缶)[8]에 군사들을 태워 강을 건너게 한 후, 비어있는 안읍으로 군대를 기동시킨다.

궁금해지는 것은 양쪽으로 나뉜 한군, 즉 위표와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던 부대와 우회기동하여 안읍을 타격하는 부대 중 어느쪽을 한신이 지휘했느냐 하는 점인데, 사기 조상국세가에서는 조참이 동쪽으로 나아가 위나라 장군 손속(孫遫)을 동장(東張)에서 대파했다는 언급이 보인다. 한서에 주석을 단 소림(蘇林)에 따르면 동장은 산서성의 하동군이며, 반면 별동대가 이동한 하양은 섬서성이니 포판의 위나라군과 대치하고 있던 인물은 조참이 아닌가 싶다. 조참이 대치하는 부대를 이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그 외에 이후 한신과 위표가 대적했다는 언급을 보면 한신이 별동대를 이끈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렇게 한신이 움직이는 사이, 소식을 들은 위표는 기겁하여 군대를 이끌고 한신을 상대하기 위해 회군을 시작했다. 조상국세가에서 조참이 동장에서 손속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는 이 시점으로 보인다. 즉 위표가 한신을 상대하기 위해 부랴부랴 군대를 돌린 이후, 세력이 약화된 포판의 부대는 조참에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후 기세를 탄 조참은 바로 안읍으로 진격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표는 제대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오가는 동안 양쪽으로 공격을 당할 상황에 처해졌다. 한신이 약간의 군사기동만으로 적의 수비라인을 완전히 무너뜨린 사이, 조참은 쾌진격을 거듭했다. 조참의 부대는 안읍에서 왕양(王襄)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곡양(曲陽)에서 위표의 부대는 조참 등에 의하여 패배했고, 조참은 무원(武垣)까지 추격하여 결국 위표를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그 후 마무리도 아마 잔당 등이 남아 있을 위나라의 수도 평양(平陽) 등을 공격하여 위표의 처자식등을 모조리 사로잡고, 여타 52개성을 평정하였다.

전쟁은 끝났다. 서위는 이렇게 완전히 멸망했다.

4 결과와 영향

전투 이후 위표는 포로가 되어 유방이 있는 형양으로 끌려갔고, 유방은 위표를 한번 봐주기로 했지만 한번 배신한게 워낙 한군의 장수들에게 안좋게 찍혔는지, 이후 형양을 수비하는 도중 "배신자와는 같이 일할 수 없다." 는 이유로 주가(周苛) 등에게 살해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당시 형양이 함락 직전이었던 만큼, 누군가가 배신이라도 하면 끝장나는 셈이라 이미 난세박쥐 이미지가 박힌 위표를 성 내에 두는것은 위험하다고 여겨진듯.

평정된 서위의 영역은 한나라에 의하여 하동, 상당, 태원군이 설치되어 확고한 한의 지배 영역이 되었다. 한신을 따라 큰 공을 세운 조참은 이 지역의 식읍을 받았는데, 그 영향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양후(平陽侯)가 되었다.

서위를 평정하여 위표를 무찌른 것은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앞서도 말한 부분이지만 서위의 영역은 유방의 지배 영역인 관중, 그리고 팽성대전 이후 파도처럼 다가오는 항우의 서진을 막아내는 형양 · 성고 전역의 수비라인인 형양 - 성고의 머리에 있었던 상황이라, 장기적으로 이런 세력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면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이 세력 배치를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옮긴다면, 이건 곧바로 유방과 팽월(彭越)이 항우를 상대하고 있는 형세와 비슷해진다. 유방과 팽월의 기각지세가 초한전쟁에서 한군이 승리한 원동력이었음을 감안하면 잘못했다간 항우와 위표의 기각지세가 유방을 덮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한군이 단독으로 초나라를 평정하는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을때, 승리를 위해서는 오셀로와도 같이 한군의 세력 범위를 점차 넒혀나갈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북방의 제후들을 복속시키려 한다쳐도 위표가 있는 한 대군을 보내기도 힘들고, 보낸다쳐도 후방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엄밀히 말해 한신이 북벌을 요청한건 위표를 평정한 이후지만, 위표를 평정했기에 북벌에 나서는게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지형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기세라는 측면에서도 이 싸움은 중요했다. 팽성대전에서 한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진여를 비롯한 제후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방을 기만하다시피 하며 등을 돌린 위표를 평정하지 못했다면, 패전 이후 경포 등을 필사적으로 끌이들이던 유방은 정치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형양에서 간신히 항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고, 관중에서는 대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이 공격이 실패하고 군대가 전멸하기라도 했다면 유방으로서는 정말 괴로운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단 한번의 우회기동 하나로 위표를, 그리고 이런 여타 문제들을 모조리 박살낸 한신은 이후 3만의 병력을 요청했고, 지원군과 함께 도착한 장이 등과 함께 북벌에 나섰다. 초한전쟁을 뒤집은 한신의 북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 야습 한번에 대패했다.
  2.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
  3. 훗날 주가(周苛), 종공(樅公)이 일을 가지고 위표를 죽였던 것으로 보면 한군 내에서는 상당히 괘씸하게 여깄던 듯 하다. 하기야 가장 힘들때 황당한 소리를 하고 배신을 때렸으니. 워낙 사람이 당대에 배신의 아이콘으로써 알려진 만큼 괜히 통수 맞기 전에 상큼하게 없애버렸다고 볼 수 있다.
  4. 여기서 나온 말이 입에서 젖비린내나 난다는 구상유취(口尙乳臭)다. 욕으로 사자성어 만드는 유방의 위엄
  5. 백직을 가리키는 이야기겠지만, 어쩌면 백직을 기용한 위표에 대한 감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6.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서쪽
  7. 섬서성 대려 현(大荔縣)
  8. 항아리를 나무에 매어 타고 강을 건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