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濰水之戰
초나라는 패배하여 용저를 잃게 되자, 항우는 몹시 두려워하며 우이(盱眙) 사람 무섭(武涉)을 시켜서 제왕(齊王) 한신에게 가게 하여, 무섭으로 하여금 한신을 회유토록 하였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유수 전투 | ||
날짜 | ||
BC 204년 | ||
장소 | ||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웨이허(潍河) | ||
교전국 | 교전국1 | 교전국2 |
한(漢) | 초(楚), 제(齊) | |
지휘관 | 한신 조참 관영 | 용저† 주란 전광 유공 선 |
병력 | 불명 | 호왈 20만 |
피해 규모 | 불명 | 거진 전멸 |
결과 | ||
용저의 사망, 초나라 군단의 괴멸 | ||
기타 | ||
초한전쟁의 실질적인 향방 결정 |
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 시대 벌어진 한(漢)의 군대와 초(楚), 제(齊) 연합군의 대결. 한나라 군대라고 하였지만 사실상 이 싸움은 한신(韓信)의 독단적인 싸움이나 다름 없었고, 전투까지 이른 계기 역시 한신의 독단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정작 한나라의 지도자인 유방(劉邦)은 그 이전에 역이기(酈食其)의 제안을 바탕으로 제나라를 회유하려고 했었기에 이러한 싸움을 반길 이유가 없었다. 엄밀히 말해 이 싸움은 한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싸움이었으며, 사실상 한군에서 한신이 별도의 세력으로 자리매김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만, 한신 자신이 그러한 정치 상황을 감지하고 있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지만...[1]
엄밀히 말해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후, 초나라와 제나라는 가히 철천지 원수였는데, 그러한 양국이 손을 잡고 한나라 군대와 교전을 벌이게 만들었으니 사실은 굉장히 위험부담이 막대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한신은 이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역으로 제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초나라의 목숨줄을 끊었다. 사실상 초한전쟁의 향방을 결정해버린 대단히 중요한 의미의 전투.
2 배경
진(秦) 말 대혼란 시기에 가장 두각을 드러낸 군웅 항우(項羽)는 홍문연(鴻門宴)에서 라이벌 유방(劉邦)을 굴복시킨 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을 시행하여 천하를 좌지우지 하는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유방은 포기하지 않고 소하(蕭何), 한신(韓信)의 도움 등을 바탕으로 역습을 감행하였다. 이는 상당한 성공을 가져왔지만 이내 팽성대전의 대패로 유방은 위기에 빠졌고, 경색전투(京索之戰)의 승리로 간신히 위기를 돌파한 뒤 한신을 파견하여 안읍전투에서 위표(魏豹)를 무찌르는데 성공한다. 이후 한신은 북벌을 감행하여 조(趙) 나라를 정형전투에서 격파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사이 유방은 형양 · 성고 전역에서 항우를 성공적으로 붙잡아 두고 있었는데, 유방이 항우를 붙잡아두는 동안 한신은 조나라를 평정하고 세력을 다질 수 있었고, 이좌거(李左車)의 도움으로 연(燕)나라 왕 장도(臧荼)를 항복시키는데 성공했다. 다만 유방은 도중 형양과 성고가 모조리 함락되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한신의 진영으로 도주, 잠을 자고 있던 한신의 군권을 탈취하여 전력를 회복했다. 이후 유방은 또다시 항우와의 전선으로 이동했고, 그 대신 한신에게 명령하여 동쪽의 제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역이기(酈食其) 유방에게 계책을 올리며 자신의 설득으로 제나라를 한군에 끌어올 수 있다는 발언을 했고, 실제 제나라 왕 전광(田廣)을 만나 설득하여 이를 성공시킨다. 이 시점에서 한신이 제나라를 공격해야 할 이유는 사라져버렸고, 한신 역시 당초에는 공격을 중지하려고 했다. 헌데 천하삼분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던 괴철(蒯徹)은 한신에게 감언이설을 늘어놓아 공격을 중단하지 말도록 했고, 여기에 넘어간 한신은 그대로 제나라를 급습, 이미 경계를 풀고 있던 제나라는 처절하게 당하고 만다.
제나라는 삽시간에 수도 임치(臨菑)가 함락될 지경에 처해졌고, 분노한 제왕 전광은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며 역이기를 팽형(烹刑)으로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달아났다. 나라가 초토화된 제나라는 임시 재상 전광(田光)[2]이 성양(城陽)으로 달아났고, 전횡(田橫)은 박(博)으로 도주했으며, 장군 전기(田旣)는 교동(膠東)에 진을 쳤다.
이 시점에서 제나라는 나라를 잃은 셈이지만 단독으로는 한신을 물리치기 힘들었기에, 전광은 초유의 결정을 내린다. 숙적 중의 숙적인 항우에게 손을 내민 것.
3 전개
3.1 제나라에 지원군을 보내는 항우
본래 초나라와 제나라는 초한쟁패기 동안 극악한 사이였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체제를 가장 먼저 뒤흔들어 박살내버린 사람은 제나라의 전영(田榮)이었으며, 항우는 전영을 격파한 후 제나라에서 대학살을 자행하며 수많은 지역을 초토화했다. 일반적으로라면 제나라와 초나라는 손을 잡을 수가 없었으며, 역이기는 그러한 점을 통해 제나라를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신의 공격으로 제나라는 박살이 나버렸는데, 한신의 공격 자체는 유방의 의지와 상관이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한신은 한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한나라와 적대관계가 되어버린 전광으로서는 한과 대치하고 있는 세력을 끌어올 수 밖에 없었고, 천하에 그런 세력은 바로 항우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항우 역시 전광의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팽월(彭越)의 지리한 견제 때문에 항우는 형양 · 성고 전역과 광무 대치에서 보급 곤란으로 고전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신이 북방을 평정하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웠는데, 여기에 더해 제나라와 조나라를 무너뜨린 한신이 이후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소문 역시 들러왔던 것이다.
유방을 상대로 발이 묶인 항우는 대신 제나라에 보낼 지원군의 사령관으로 용저(龍且)를 결정했다. 용저는 진나라를 무너뜨린 거록대전 등에서 눈부신 무훈을 세운 경포(黥布)를 격파한 적도 있는 등, 항우의 수하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역전의 무장이었다. 이 용저에게 딸려보낸 항우의 군대는 호왈 20만. 호왈이라고 하니 실제로 20만은 아니겠지만, 20만을 일컫을 정도면 적지 않은 병력이었을 것은 틀림없다.
3.2 용저의 교만
이렇게 적지 않은 병력을 손에 쥔 용저는 여기에 더해, 제왕 전광이 패전에서 수습한 남은 제나라의 병력과 합쳐 더 큰 군세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군대가 많으니 용저의 자신감도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 용저와 전광이 군대를 모아놓고 아직 한신과 싸우기 이전, 어떤 인물은 계책을 내었다.
"한나라 군대는 멀리서 싸우러 왔으니,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봉을 막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제나라와 초 나라는 자기 나라 땅에서 싸우기 때문에 병사들이 패해 흩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성벽을 높이 해 지키면서 제나라 왕으로 하여금 그가 신임하는 신하를 보내 제나라가 이미 잃어버린 성을 이쪽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함락된 성의 군사들이 자기 왕이 건재하다는 것을 듣고 초 나라가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한나라 군대는 2천리나 떨어진 타국에 와 있습니다. 제나라 성들이 모두 배반하면 그 정세로 보아 식량도 얻을 수 없을 테니,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원정군인 한신군의 약점을 잘 이용해서 수비에 전념을 하고 있으면 적은 지치기 마련이고, 그 사이에 제나라 왕 전광의 이름을 이용해 어필을 하면 제나라 각지에서 유격군이 발생하여 한군을 괴롭힌다는 계책이다. 그렇게 된다면 보급도 어려워 지니 싸울 방법이 없어지는 한신으로서는 항복 할 수 밖에 없다는것.
이미 제나라는 비슷한 방식으로 성양(城陽)의 싸움에서 전영이 항우에게 대패하고도 초나라를 괴롭힌 전력이 있었다.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군도 그랬지만 원정군의 입장에서 저런 구도는 정말 싫을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하지만 용저는 이를 거부했다.
"내가 평소부터 한신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데, 그는 상대하기가 쉽다. 게다가 제나라를 구원한다면서 싸우지도 않고 한나라 군대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겠느냐? 지금 싸워서 승리하면 제나라의 절반은 내 것이 된다. 어찌 이대로 그만두겠는가?"
즉 한신은 찌질이에 불과하니 문제 될 것도 없고, 싸워서 이기는건 간단한데 지금 공을 세우면 항우가 자신에게 제나라 땅을 줄테니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신은 초나라군에서 낭중(郎中)으로 있으면서 여러차례 항우에게 계책을 올린 적이 있으니 용저도 한신과 면식은 있었을 것이며, 한신이 남의 가랑이 사이를 걸어갔던 찌찔한 과거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의 한신전에서는 용저의 저 말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평생 한신의 사람됨을 알아 왔는데, 쉬운 상대일 뿐이다.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 얻어 먹었으니 자신의 계책을 취하는 바가 없고, 가랭이 밑을 지나가는 치욕을 받았으니 사람의 용기라곤 겸한 것이 없으니, 족히 두려워 할 바가 아니다. 또 제를 구하고 그를 항복시킨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는가? 지금 싸워서 그를 이긴다면 제의 반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 그만두겠는가?"
용저로서는 실제 자신이 본 한신은 찌질이에 불과했는데 그런 놈이 이제와서 대장군이라고 하고 있으니 별로 대수롭지도 않게 여겼던것. 이렇게 용저는 이미 승리는 기정사실로 여기고 김칫국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 다닐때 일진과 찌질이의 관계가 사회에서는 종종 반대가 되듯, 이는 완벽한 사망 플래그 였으니...
3.3 유수의 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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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전을 벌이자는 말을 이렇게 무시한 용저는 자신만만하게 유수(濰水)로 나아가, 강을 사이에 두고 한신과 대치하여 진을 쳤다.
그러나 이렇게 용저가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을때 한신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밤 중에 수하들을 시켜 밤 중에 모래를 가득 넣은 자루를 만여 개나 만들었고, 이를 유수의 상류에 던져 넣었다. 고대의 기술로, 아니 현재도 그러겠지만 강을 막는 댐과 같은 시설을 단기간에 만들기는 어렵지만 물이 얆은 상류에 모래 주머니를 던져 물세가 조금 약해지게 하려는 정도였고, 딱히 한신이 무슨 물을 완전히 틀어막으려고 시도한것은 아니다.
또 용저와 한신이 서로 강을 사이에 두고도 대치하여 싸우려고 했던 점을 볼때 당시 유수는 그렇게까지 큰 강이 아니거나 혹은 강이 커지는 부분에서 싸웠던것은 아니지 않나 추정된다.[3]
이렇게 어느정도 물세를 막아놓은 한신은 한나라 군을 이끌고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물세가 그리 세지 않은 강을 건너 용저에게 싸움을 걸었다. 한참 동안 양군은 싸움을 벌였으나, 곧이어 한신은 일부러 지는 체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대장이 싸움을 포기하고 달아나는 판국이니 다른 한나라 병사들도 정신없이 도주했고, 그 혼란상을 지켜본 용저는 자기가 말한대로 일이 술술 풀리자 기뻐하며 소리쳤다.
"나는 한신이 겁쟁이라는 것을 원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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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하는 시기는 한참 격전이 벌어질 때가 아닌 추격전이니 만큼, 용저 역시 이 기회를 살려 한신과 한군을 모조리 박살내기 위하여 바로 군을 움직여 정신없이 공격해들어왔다.
하지만 급하게 추격한 만큼 공격을 하는 초나라군도 정신 없었을 텐데, 이후에 나오는 언급 등으로 보면 당시 초나라군은 성급히 공격하느라 규율도 대열도 엉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황급하게 초군이 유수를 건너가기 시작할때, 한신은 급히 사람을 시켜 상류에서 물을 막아놓은 자루들을 모조리 터 버리게 하였다. 갑자기 상류에서 물이 쏟아지자, 초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수천, 수만의 병력이 정신없이 강에서 얽히고 섥힌 만큼 딱히 상류에서 쏟아지는 물이 쓰나미 수준이 아니더라도 혼란스러웠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비규환의 혼란 끝에 용저가 이끈 일부 병력이 간신히 뭍에 올라오기는 했지만 그 숫자는 태반도 되지 않았다.
모랄빵 상태로 강에서 어정거리는 병력들은 제쳐놓고라도 아직 유수 반대편에서는 강으로 들어서지도 않은 병력도 있었을 정도이니, 이 시점에서 초나라군은 '유수 반대편에 간신히 올라선 부대' '강에서 휘적거리는 부대' '아직 강에 들어서지도 않은 대열 후방의 병력들' 등으로 완전히 분열되어 버렸다.
바로 그 절묘한 시기에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급히 공격해왔다. 용저는 유수를 건넌 병사들을 이끌고 저항을 해보려고 했지만 혼란에 빠진데다 전부 건너오지도 못한 몇몇 병력을 가지고 미리 준비 했던 한신의 공격을 이기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용저는 패배했고, 용저 자신도 참살당하고 만다. 용저를 죽인 주체에 대해 조상국세가에서는 조참(曹參)이 상가밀(上假密)에서 용저를 참하고 그의 부장 주란(周蘭)을 생포했다고 하는데, 관영(灌嬰)의 기록에서는 고밀현(高密縣)에서 관영이 용저와 유공(留公) 선(旋)을 공격해서 관영의 부하가 용저를 죽이고 우사마와 연윤 각각 한 사람씩과 누번의 장군 10명을 생포했으며, 주란을 포로로 잡은 것도 관영이라고 한다. 뭐야 이거
일단 항우본기나 고조본기의 기록에서는 용저를 죽인 사람이 관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관영은 경색전투 무렵에 기병대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당시의 싸움에서도 기장(騎將)으로 나왔다는 언급이 있으니 유수 전투 당시에도 기병을 이끌고 동분서주했을테고, 우왕자왕하고 도망치는 병력을 섬멸하는데 있어서는 기병대가 최고니[4] 관영이 포로를 많이 잡아 공을 세웠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것이다. 그리고 관영이든 조참이든 직접 죽이진 않고 난전 중에 그들의 부하가 죽여서 저렇게 기록이 된듯 하나, 만에 하나 둘중에 항우 버금가는 무력을 가진 용저의 목을 직접 벴다하면 아무래도 조참보단 당시 한나라 장수 중에서 번쾌와 더불어 가장 무력이 뛰어난 관영이 벴을 가능성이 더 크다.[5]
3.4 섬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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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이렇게 총대장 용저가 참살되자 나머지 병력도 더 볼 것이 없었고, 아직 유수를 건너지 않은 건너편의 병사들은 모두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도망쳤다. 용저와 함께 유수 전투에 참여했던 제왕 전광 역시 마찬가지로 달아났고, 이제 반대로 한군이 추격 섬멸전을 벌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신은 군세를 동원하여 적을 추격했다.
이 설거지 역할에서는 조참이 대활약했다. 이미 남은 군세가 초토화된 제나라는 한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조참은 추풍낙엽으로 쓰러지는 제나라 잔당들을 공격하여 단번에 제나라 70여 현을 평정했다. 성양까지 진군한 한신과 조참 등은 도망친 전광을 사로잡았으며[6]그 외에 재상인 전광(田光), 대리 승상인 수상(守相) 허장(許章) 등도 포로로 잡혔다.
또한 조참은 교동으로 이동해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장군 전기를 격파했는데, 조상국세가에서는 전기가 포로가 되었다고 하며 전담열전에서는 전기가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나라의 장군 용저와 제나라 왕 전광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됨에 따라 제나라 지역은 평정되었다.
다만, 원체 끈질긴 지역이 제나라 였던만큼 그렇게 쉽게 평정되진 않았다. 이런 난리 와중에도 전횡은 다시 자립하여 제나라 왕의 자리를 잇고 관영과 교전하기도 했으며, 관영에게 영(嬴) 땅에서 패배한 이후에는 팽월에게 도망하여 의지했다. 관영은 전횡을 물리친 이후에 천승(千乘)에서 장군 전흡(田吸)을 물리쳤다. 이후에 한신은 유방에게 요구하여 제나라 왕이 되었지만, 항우가 최종적으로 끝장나는 해하 전투 무렵에 이를 무렵에도 조참은 해하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제나라의 항복하지 않은 지역을 평정하고 있었다.
비록 대세는 유수의 패배로 끝장이 나버려 회복이 될 가능성은 없어졌지만, 항우를 그토록 괴롭혔던 제나라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악착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4 결과와 영향
유수전투는 초한쟁패에 있어 가장 극적인 전투는 아닐지라도, 가장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전투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싸움의 결과로 초한전쟁은 사실상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를 넘기며 벌어진 항우와 유방의 대치에서 항우는 형양과 성고 너머로 진격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는데, 반면에 한군은 그 사이에 하북을 완전히 평정하여 세력의 균형비가 정반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항우는 혼자서 중국 전역과 싸워야 하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눈 앞의 유방 하나도 밀어내지 못하던 상황에서 항우가 전세를 뒤바꿀 수 있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해하 전투는 그런 항우가 붙잡고 있던 썩은 줄을 끊어버렸을 뿐이다.
반면에 용저가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항우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해볼만 했다. 만일 이 싸움에서 용저가 적을 완전히 섬멸시키고 한신 이하 대장들까지 참살하는데 성공했다면 그 즉시 하북을 역으로 평정하는 일도 가능했고, 적을 어느정도 밀어내는 수준만 가능했어도 제나라 지역을 손에 넣고 형양이나 성고의 대치나 광무 대치 같은 치열한 대치를 북쪽에서도 이룰 수 있었으니, 그렇게 되었으면 승패는 좀 더 뒷일로 미루어졌을 터이다.
제나라를 초나라가 영향권 아래 두면 얻을 수 있는 이점으로는 후방의 팽월에 대한 부분이 있다. 항우에게 최대의 난관은 양나라 지역에서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는 팽월의 존재인데, 만일 제나라가 초나라에 복속된다면 이 후방의 견제를 막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하지만 결국 이는 실패로 끝났고, 이후 항우는 후방에서 팽월의 유격전뿐만 아니라 한신의 직접적인 수준의 군사적 공격까지 당해야 했다.
한군의 입장에서 보면 약간 미묘한 점이 있는데 단번에 제나라를 평정하고 용저를 참살하여 초한쟁패를 승리로 결정지은 전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이는 승리로 끝났으니 망정이지 굳이 이런 위험한 전투 상황을 초래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부분이 있다. 초나라를 후방에서 옥죄어버리는것은 제나라를 평정하지 않고 손만 잡아도 가능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유방과 역이기는 이를 거의 성사 직전까지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괴철의 말을 들은 한신의 역하 공격은 최악의 앙숙인 제나라와 초나라가 손을 잡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던 유수전투의 전개까지 치닿아야만 했다. 한신이 승리를 거두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패배했다면 기껏 만들어진 유리한 상황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었던 것.
한신의 공격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제나라 전씨들이 되었다. 당초에 유방에게 협력할 생각이 있던 전씨들은 난데없는 기습에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었으며, 원수 초나라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나라는 멸망하고 종족은 흩어져버렸다. 사마천은 전담열전에서 이에 대한 평론을 하며, 한신이 유방에게 거스르게 하여 교만해지게 한 부분과 제나라 전씨의 비참한 말로를 초래한 괴철의 계략이 너무 심하다고 한탄했다.
괴철의 이 제안은 한신을 유방에게서 독립시켜 천하삼분의 밑그림을 그리는데 있었을 터였고, 만일 그런 의도라면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한신은 공을 조금 더 탐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독립할 의사는 없었으니... 결국 이 전투로 한신은 유방의 눈 밖에 제대로 나고 만다. 유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은 눈앞의 항우와 대치하느라 진땀 빼고 있는데, 원정 총사령관은 자기 명령을 어기고 필요도 없는 전투를 치르더니, 제나라를 평정한 다음에는 왕으로 봉해달라는 부탁까지 해온 것이다. 이쯤 되면 유방 아니라 어떤 군주라도 이놈이 딴 속셈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7] 한마디로 유수 전투의 시작부터 뒤처리까지, 한신은 의심을 살 만한 짓만 골라서 했다. 훗날의 토사구팽이 일반적인 이미지처럼 황제 자리 먹은 유방이 의심병이 도져서 충직한 신하들을 닥치는대로 숙청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 한신이 유방에게 충성을 다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처세에 있어서 그는 빵점이었다.- ↑ 이런 한신의 독립적인 정치 상황이야말로 괴철이 바라고 만들어낸 그림이었지만, 정작 상황을 유도하는데 성공한 괴철은 한신을 설득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괴철의 제안을 거절한 한신이 정치적인 판도가 아닌 개인의 은원을 이유로 내세웠던 것은 괴철이 한신을 납득시키는데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 ↑ 제왕 전광과는 한자가 다르다.
- ↑ 안읍전투 당시 한군은 목앵부라는 것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이때는 그런 특별한 도하 시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리 강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 ↑ 승패가 결정되는 시점이라고 해도 이 점은 꽤 크다. 말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기병전력의 부재로 몇차례 승리를 거두어도 결국 적을 섬멸시키지 못하여 싸움을 끝낼 수가 없었다.
- ↑ 관영은 연의에서도 유방 휘하에 들어가려고 일부러 번쾌와 일기토를 하여 승부가 나지 않는 무력도 보여주고, 연의 및 정사에서 초나라 기병에 대적하기위해 임명된 한군의 기병대장으로서 수많은 활약들을했다. 실제 정사에서 장수들중에 자신이 직접 적장을(주로 기병장이나 부장급)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하는 기록과 전장에서 매우 치열하고 격렬히 싸운다는 흔치않은 표현의 기록이 가장 많은, 무력이 입증된 장수가 관영이다. 물론 조참도 공신서열 2위에 랭크되는 등 여러 지역들을 점령하며 수많은 활약을 했다.
- ↑ 조상국세가에서는 조참이 전광을 잡았다고 나오는데, 자치통감 등의 다른 기록에서는 또 관영이 전광을 사로잡았다는 둥 혼란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 ↑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신 이놈 자기가 제나라 땅 먹으려고 일부러 싸움 건 거 아냐? 거길 독립기반으로 삼아서 발이 묶여 있는 내 뒤통수를 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