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秩父宮 雍仁親王) | 지치부노미야의 문장 |
1902년 6월 25일[1] 생 - 1953년 1월 4일 몰
1 개요
일본의 황족으로, 쇼와 덴노의 첫째 동생이자 다이쇼 천황의 둘째 아들. 일본 육군 군인이었다. 최종 계급은 소장.
1.1 생애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 당시 섭정이었던 형 히로히토 황태자, 동생 노부히토 친왕과 함께. 가운데가 야스히토 친왕.
어릴 적에는 형인 히로히토, 그리고 동생인 노부히토 친왕과 함께 자라 서로 우의가 좋았다 한다.[2] 다이쇼 덴노의 아들 4명 중에서 가장 활발해 유약한 맏형인 쇼와 덴노와 비교되었는데, 형제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싸울 때마다 그가 이겼다 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형이 없으면 의미 없는 벤케이(弁慶)"라 하며 소심해졌다 하니 형에 대한 의존이 컸던 모양.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는 장난감을 사 주기는 했지만, 공무 때문에 실제로 만난 적이 없어 메이지 덴노 붕어 전까지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다. 대신 할머니인 쇼켄황태후(昭憲皇太后)[3]는 그와 자주 만나 놀아주었다 한다.
1909년, 학습원 초등과에 입학 후 1920년 10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22년 10월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만 20세가 되던 이 해에 성인식을 행하여 치치부노미야(秩父宮)라는 궁호를 받았는데, 치치부(秩父)는 옛 무사시(武藏國)국의 명산 이름으로 그의 저택이 서북쪽이라 이런 명칭이 붙었다.
1928년 12월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11월 43기로 졸업했다. 이 때의 동기가 바로 그 악명높은 츠지 마사노부. 참고로 야스히토 친왕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범생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츠지가 훌륭하다 생각했는지, 그와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며 그가 신는 두꺼운 구두와 무거운 군도[4]를 스스로 구해 패용하고 다녔다 한다. 물론 나중에 할힌골 전투에서 츠지가 보여주는 정신나간 지휘를 보고 경악한다
이후 1931년 제1사단 보병 제 3연대의 중대장으로 임관하였는데, 황도파 장교들과 기타 잇키(北一輝) 등을 가까이 하고 그들의 집을 들락거리며, 이들의 사상에 동조하여 형인 쇼와 덴노에게 직접 "친정을 펼치고 헌법을 정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한 탓에 시종장인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와 쇼와 덴노의 근심거리였고, 직접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직위에서 해제되어 참모본부 작전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1936년 2.26 사건이 발생하자 다음날 도쿄로 와서, 청년 장교들과 회담한 후, 쇼와 덴노를 배알했는데 쇼와 덴노에게 꾸중을 듣고(...) 나와 반란 주동자들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다. 1937년에는 유럽을 순방하면서 조지 6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스웨덴-네덜란드-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을 방문했을 때 나치당 전당대회에 초청받아 아돌프 히틀러와 뉘른베르크에서 회담했는데, 히틀러는 그에게 스탈린을 증오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치치부노미야는 "국제관계에서 상대국의 지도자를 혐오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 대꾸했고, 히틀러는 그를 노려봤다 한다. 이 회담이 끝난 후, 부관인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에게 "히틀러는 변덕쟁이다. 그를 신용하기란 어렵다."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자신은 일독친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귀국 후 일주일에 3번씩 궁성에 찾아가 형 쇼와 덴노에게 삼국동맹을 체결하자고 요구했다 한다(...).
이후 1940년 폐결핵 때문에 요양을 시작했고, 오랫동안 병을 앓으며 집필활동에 몰두하다 1953년 1월 4일 만 5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2 결혼과 가정
부인 세츠코 비와 함께
1928년 9월 28일, 마쓰다이라 세츠코(松平節子)와 결혼했다. 세츠코는 1909년 외교관인 아버지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恆雄)의 부임지이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고, 이후로도 중국과 미국 등에서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낸 귀국자녀이다. 야스히토 친왕은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워싱턴 DC의 주미일본영사관에서 세츠코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 결혼은 세츠코의 개인적인 용모, 성품, 재능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 세츠코의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는 아이즈 번의 영주였는데, 메이지 유신 당시 유신에 반대하여 맞서 싸운 인물이다. 따라서 유신 이후 아이즈 지역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상당히 처지가 좋지 못했다. 이러던 중에 세츠코를 황실의 비(妃)로 맞이한 것은 아이즈 지역&마츠다이라 가문과의 화해 시도였고, 야스히토 친왕과 세츠코의 결혼으로 아이즈 지역&마츠다이라 가문은 복권되었다.
본래 세츠코의 한자는 節子였으나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가 같은 한자를 쓰고 있었기에, 결혼하면서 한자를 勢津子로 바꾸었다. 이세신궁이 있어 일본 황실과 인연이 있는 지역인 이세(伊勢)에서 勢를,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아이즈(會津)에서 津을 따와서 지었다고 한다.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 나가코 황후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어머니였으나 그 아래의 며느리들은 귀여워하였는데, 특히 둘째며느리인 세츠코 비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히나마츠리 때면, 세츠코 비는 시집올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 인형들을 장식하여 놓고 그것을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함께 감상하며 즐거워했다고. 세츠코 비는 이를 두고 만년의 회상록 《은의 본보니엘(銀のボンボニエール)》에서 "아드님만 네 분이시니, 매년 즐거움으로 삼으신 일이었다."고 추억했다.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는 화족 나베시마(鍋島) 가문의 딸로,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노부코는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는데, 1959년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올 때 이 힘을 이용하여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펼쳤다. 노부코의 언니이자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도 이에 가담했다.[5]
세츠코 비도 친정어머니, 이모, 형님 나가코 황후, 아랫동서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高松宮喜久子) 비, 야나기하라 뱌쿠렌[6] 등과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고, 겨우 황실로 시집온 후로도 미치코 황태자비는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노부코는 죽는 순간까지도 미치코 황태자비를 미워했지만, 다행히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시간이 갈수록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 미치코 황태자비와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야스히토 친왕과 세츠코 비에게는 한번 아이가 생길 뻔했으나, 2.26 사건 당시 야스히토 친왕이 세츠코 비와 함께 주둔지에서 도쿄로 올 때 추운 날씨에 세츠코 비가 몸을 해쳐 결국 유산으로 끝났고,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자녀를 낳지 못했던 세츠코 비는, 대신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의 자녀들인 나루히토 친왕, 후미히토 친왕,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를 친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특히 후미히토 친왕의 아내 키코 비에게는 자신이 오랫동안 맡고 있었던 결핵예방협회 총재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자신과 같은 귀국자녀 출신이며 친왕의 아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5년 세츠코 비가 사망함으로써 결국 지치부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고, 부부가 살던 궁은 후미히토 친왕 일가가 물려받아 거주하게 되었다.
1.3 사망
그는 유언으로 "유해를 해부용으로 기증할 것, 화장할 것, 장례에 어떤 종교도 관여하지 않게 할 것."을 남겼는데, 황족은 시신을 해부하고 화장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쇼와 덴노가 그 유언을 존중하여 받아들여졌는데, 이렇게 황족으로는 처음으로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증한 사람이 되었다.
장례식은 1953년 1월 12일, 황족, 스포츠 관계자, 외교사절 800여명과 25,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하여 간단하게 화장한 시신을 평소 사용하던 집기와 함께 매장하는 식으로 열렸다. 장례식 당시에는 천황이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는 천황이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천황은 장례식 다음날 무덤에 성묘하였다.
그 사후 42년 후, 1995년 8월 25일 아내 세츠코 비도 사망하여 치치부노미야 가문은 단절되었다.
1.4 사회활동
사회 활동으로는 스키 , 럭비 등 스포츠의 보급에 앞장서서 국민들로부터 스포츠의 왕자님이란 애칭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그 이름은 '치치부노미야 럭비장', '치치부노미야 기념 스포츠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1928년에는 홋카이도 시찰 시 장차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대형 스키점프대 건설을 제안하였으며, 역시 동계올림픽 개최를 대비해 삿포로 상공 회의소와 함께 1934년 삿포로 그랜드 호텔을 개업했다. 일영협회와 일본-스웨덴 협회의 총재를 역임해 국제친선사업에서도 힘썼으며, 등산을 좋아해 영국 체류시 마터호른 등정을 완수했다. 그의 기념공원에 있는 동상도 후지산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과묵하고 학자스러운 쇼와 덴노와는 달리 테니스와 등산을 좋아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해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중심 인물이었다 한다. 요양 중에는 현지 주민들에게 친근하게 접해 학교 졸업식에 내빈으로 참가해 축사를 해 주기도 했으며, 패전 후에는 적극적으로 신문에 글을 기고하여 새로운 시대의 황실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 의견을 자주 피력했다.
특히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에 대해 기대가 컸는데, 1953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당시 아직 만 20살도 되지 않은 황태자를 대표로 보내는 것에 대해 궁내청에서는 상당히 고민이 많아서 다른 사람을 대표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치치부노미야는 황태자를 대표로 보낼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일본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다만 대관식이 열리기 전에 치치부노미야는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 어머니 데이메이 황후(1884년생)와 생일이 같다.
- ↑ 막내동생 다카히토 친왕은, 바로 위의 형인 노부히토 친왕보다도 10살이나 어리다. 그래서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 내외는, 오랜 관례를 깨고 막내아들만은 자신들의 곁에 두고 키웠다.
- ↑ 메이지 덴노의 정실로, 화족으로 고셋케(五攝家) 중 하나인 이치죠 가문의 딸.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결혼하면서 하루코(美子)로 개명. 자녀를 낳지 못했다. 다이쇼 덴노는 메이지 덴노의 측실인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이쇼는 꽤 오랫동안, 쇼켄황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있었다고.
- ↑ 츠지 마사노부는 육군대학 시절, 힘이 남아 돌았는지 아주 정력적으로 살았다 한다. 그래서 신발이 자주 닳아버려, 두꺼운 가죽으로 된 구두에 징을 박아 신었으며, 보통의 지휘도는 가볍다고 하여 좀 더 무거운 군도를 썼다고 한다.
- ↑ 이츠코는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이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나버렸구나!!"라고 썼다.
- ↑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나루코는 뱌쿠렌의 고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