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랑 비탈

프랑스어 : élan vital

1 앙리 베르그송철학 용어

프랑스철학자 베르그송의 철학적 용어로 '삶의 약동', '생의 비약'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는 생명이 가진 능동적이고 근원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지금도 철학계에서 문제없이 사용하는 철학용어이다.

2 근대 프랑스군의 공격적 군사교리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공격정신(Offensive à outrance 또는 Attaque à outrance)


근대 프랑스군의 교리. 유래는 1번 항목이다.이 문서를 읽어보면 어째 1번 항목이 심각하게 곡해당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 사상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는 전상자의 수나 상대국 영토의 획득여부가 아니라, 야전지휘관이나 국가지도부가 전쟁을 지속할 의사가 있으냐 없느냐에 있다고 파악한 사상이다. 따라서 전쟁이란 지도부가 졌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진 게 아니며 이러한 전쟁지속의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군의 높은 사기가 담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엘랑 비탈은 이 군의 사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했다.망했어요 이는 프랑스군이 보불전쟁, 보어전쟁, 러일전쟁에서 기관총, 야포 등의 진보된 화력장비의 위험성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한 채 보병돌격을 고집하게 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이론이었다.[1] 그렇기에 심지어 '모든 화기의 진보와 발달은 공세의 강화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를 집대성한 인물을 1차대전의 명장 페르디낭 포슈로 꼽지만 정신론과 사기론만 중시하는 "엘랑 비탈 교리"는 포슈의 군사사상과 멀리 벗어난 이단에 불과했다. 포슈가 엘랑이란 개념을 언급하며 프랑스군의 정신력의 우월성, 정신력의 중요함을 설파하고 공세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론은 포슈의 군사사상의 일부에 불과하고 포슈는 척후병을 통한 정보탐색, 적군의 동향을 주변 정보를 바탕으로 예측하라는 점, 우월한 병력과 화력에 대한 중요성, 포병과 보병의 합공, 예비대 운용법, 한 방법만 고집하지 않은 유연한 대응의 중요성어?나폴레옹 전쟁과 보불전쟁의 교훈과 클라우제비츠의 사상을 접목한 군대지휘의 여러 면모를 다룬 사상이다. 물론 우월한 화력이 방어력을 증대하리라 예상 못한 것은 상당한 문제지만 포슈의 군사이론을 정신승리론 하나로 요약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마디로 정신론만 중요하다 vs 정신론도 중요하다

문제는 정신론과 사기론이 워낙 매력적인 탓에 포슈의 제자들은 포슈의 군사사상에서 정신론을 제외한 대부분은 사장하고 형이상학적인 "엘랑"만 강조하게 된다. 망할 제자놈들

포슈가 육군대학 교장이던 시기 프랑스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그랑메종(Loyzeau de Grandmaison) 대령은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의 교육총감에 취임하자마자 '엘랑 비탈'에 기반한 신 전투교령을 공포, 이것에 반대 의견을 보낸 장교들은 가차없이 퇴역시켰다(…). 흠좀무. 그리곤 1913년에 개전된 야전교범에서 "향후는 공격 이외의 어떠한 전술법칙도 배제한다."라고 선언해 버렸다!

이게 그랑메종 대령의 말.

"프랑스 육군은 대육군의 영광스러운 전통에 복귀해야 하며, 오직 정면 공세 이외의 어떠한 작전 행동도 인정해서는 안된다. … (중략) …모든 공세행동은 그것을 궁극적으로 관철 할 수 있도록 강인한 정신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는 종국적으로는 총검 돌격으로(…) 적의 전열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러한 전과는 오직 피를 흘려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 육군은 향후 이 외의 어떠한 구상도 전쟁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으로 판단, 배제해야 한다."


엘랑 비탈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명문으로 마른강의 기적이라 칭하는 제 1차 마른 전투에서 페르디낭 포슈가 말한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중이다. 그야말로 상황은 최고이다. 나는 공격할것이다."가 있다.[2] 그리고 페르디낭 포슈가 남긴 또 다른 명언 중 엘랑 비탈과 관련된 것으로 "승리, 그것은 곧 의지다."(Victoire c'est la volonte.) 가 있다. 왕성한 공격정신의 강조는 1870년 보불전쟁에서의 삽질을 반성하고자 '위대한 군대' 나폴레옹 시절의 전통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셈인데 사실 보불전쟁서의 패전은 정치권의 외교적 실패와 군 지도부의 무뇌스런 전술전략 때문에 말아먹었지 의지나 정신력이 부족한 탓으로 진건 아니었다. 사실 포슈의 군사사상의 맥락을 안다면 포슈의 발언은 와전된것으로 포슈도 지도부의 무능한 전술전략을 탓했으며 아예 프로이센의 승리는 프로이센군이나 몰트케의 유능함이 아닌 프랑스군의 무능함 하나만으로 결판난 것이다라고 평가한 사람이다. 포슈가 분석하는 보불전쟁의 패배는 절대방어주의에 사로잡혀서, 몰트케의 삽질로 인해 빈틈을 보이던 프로이센군을 공격하지 않은 것과 느린 기동때문에 방어를 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증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의지드립졌다고 생각 할때까진 진게 아니다는 오래 전부터 있는 군사 격언이고 딱히 그시절 프랑스군에서 나온말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비슷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전투의 물리적 요소보다 정신적 요소가 3배나 중요하다" "끝까지 싸우는자가 승리한다. 승리란 적의 '전투의지'를 꺾는것 이란 말을 남길 정도로 전쟁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했다. 나폴레옹 이전 18세기 최고의 군인으로 불리는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조차도 "뻔뻔한 자만이 전쟁을 승리한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을정도.

문제는 나폴레옹 시절은 100년이전이고 화력수준은 비교가 안될정도로 커졌다는거... 적성국의 군사 전략자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받아서[3] 왕성한 공격정신을 강조 했다고 하나[4] 이러한 교리에 대한 평가는 개인적으론 클라우제비츠를 맹렬히 비판한 리델 하트 경 조차 "저거 쟤네들 클라우제비츠를 잘 못 읽은거다" 평할정도[5] 안습[6]

1차 대전 당시 BEF(영국 대륙 원정군)에서 복무했던 몽큐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평가도 "개인적으로 지휘관이 졌다고 할때까지 진게 아니다"라는 말에 원칙적으로 공감 한다면서도 " 그러나 지휘관은 의지보다 사리판단이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장군의 공적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때 같이 싸웠던 프랑스군 수뇌부를 디스했다. 마켓가든 작전을 말아먹고 폴란드 장군에게 누명까지 쒸운 놈이 할말은 아닌것 같은데? 몽고메리는 한 술 더떠 1차대전 초기 프랑스군 사령관 조프르에 대하여 "그 사람은 전술의 기본을 모른다."라며 아주 대놓고 깠다...[7][8]

이 처럼 엘랑 비탈은 명백히 무모하고 무의미한 피해를 조장하는 전술교리 였다. 총포와 철조망 대신 '의지로 극복 할수 있다는 전제하에 짜인 교리는 엄밀하게 교리라고 하기도 미안한 소리고, 구체적으로 전술상 이론으론 결함이 크며 초반 프랑스군의 졸전과 큰 피해를 준 교리 이었다는 점을 어느면을 보더라도 부인하기 어렵다 초기 전역에서 일방적으로 패퇴하여 수도의 코앞까지 적군이 진격해오던 상황에서 마른강의 기적을 일구어낸것도 공격정신이라기보단 독일 1군과 2군사이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서 자진해서 후퇴한 면도 컸고[9] 애초에 파리 코앞까지 적이 들어온것도 400만에 달하는 독일 예비군 동원 병력을 잘 못 예측한 조프르 장군의 삽질 탓이 컸다. 물론 전쟁의 향방을 돌릴수 있었던 것도 포슈 장군이 엘랑 비탈의 정신 그대로 왕성한 공격 정신을 유지하여 독일군에게 역습을 당할것이라는 위기감을 주어 공세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옹호론도 있겠으나, 개전 초기 3달 이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1차대전 당시 수비가 공격보다 극단적으로 유리하다고 감안할때 명백하게 실패한 전술이다. 개전 초반 최대공업지대인 북프랑스에 영토적피해, 경제적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가 무모한 공격을 시도한것도 감안해야겠고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승리할수 있었던 것도 패배주의자들을 총살 시켜가며 전쟁수행 의지를 꺾지 않았던[10] 프랑스 지도부의 엘랑 비탈 정신이 기여한 점도 일부 있긴하겠지만 막대한 피해덕에 대전의 승리는 연합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 했을것이다..

특히 인명피해는 너무 극심했다. 독일군이 200만명 전사, 프랑스가 140만명 전사로 전사자수는 독일이 더 컸다지만 독일군은 동부전선,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아프리카식민지, 대 이탈리아 전선까지 포함한데다 인구는 더 많았다. 1913년 기준 독일 6500만 프랑스 3900만으로 거의 독일이 5/3배였다. 반면 프랑스는 서부전선이 전부고 그나마도 전선의 상당부분은[11]영국군벨기에군, 후반에는 미군이 까지 담당한걸 감안하면 인명피해가 엄청났다. 더구나 프랑스는 공격이 아닌 자국 영토에서 수비하는 입장이었다...[12] 무엇보다 19세기부터 비롯된 저출산에 따른 고령화 국가에서 청년 인구가 다 날아가버렸다는건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13] 정말 연합국이 아니었다면 승전은 불가능했을 정도.

정신나간 공격정신 탓에 140만의 전사자 가운데 60만명은 첫해 1914년의 5개월 간 발생했다. 수비가 더 유리한걸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를 봤다는건 부인할수 없다. 1915년 이후 전장에서 큰 피해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은 공격 교리 일변도의 경직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14] 공격시엔 영국군과 합동작전은 미약했지만 서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한 포격뒤에 공세를 취했고 방어시에도 긴밀한 종심방어를 취하기도 했다.. 종심방어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건 아니고 독일군 프랑스군 모두 전선이 형성되다 보니 선형방어의 취약함을 깨닫고 1차 2차 3차에 달하는 참호선을 방어진을 구사할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 정신 못차린 높으신 어른들은 정치인들과 의지력 높은 똥별들은 그딴걸 왜하냐고 독전과 총살질 병크로 병사들을 죽음에 몰아넣기 바빴다. 완벽한 승리를 보장했던 니벨 공세가 실패하자 이에 반발하여 일개 병사들도 아닌 사단장들이 무의미한 공격에 항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니벨은 북아프리카로 좌천당해 다시는 서부전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베르됭의 영웅 페탱 원수덕에 추스릴 수 있었다.

이 '엘랑 비탈'에 영향을 받은 나쁜것만 배워간 군대가 다름아닌 일본군, 그리고 북한군으로 북한군이 한국전쟁때 어떤 삽질을 저질렀는지]] 알 사람은 다 알거라고 본다. 사실 1차대전 독일군도 이 엘랑 비탈에 대항하여 비슷하게 참호전을 한 적도 많으며 러시아군도 영향을 받았다.근데 북한군은 졌지만 프랑스는 이겼다
  1. 물론 이러한 공격 중심의 사고, 특히 보병의 착검돌격에 대한 로망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당대 거의 모든 군대(특히 무개념 높으신 분들, 똥별)에서 가지고 있던 통념이었다. 프랑스의 문제는 이런 통념을 이론화하고 전군에 강요하다시피 세뇌교육을 실시 했다는 점이다.
  2. 그러나 포슈가 실제로 이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당시 포슈를 보좌하던 베이강부터 부정했으며 당시 대통령 푸앵카레좀 미묘하게 부정한 적이 있다. 포슈 항목 참고.
  3.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전문 군사교육을 받은 독일인 장교가 봐도 어렵다.. 철학적인 문구라서... 전쟁론참조.
  4. 전쟁은 국가의 '의지'를 관철하는것~~ 이런식의 의지드립과 전투의지를 강조하는 문구가 있긴한데 역시 독일어 원본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프랑스어판 번역의 병크질에 독자들이 '의지'에 너무 심취한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영문판으로 1970년대 이후 번역은 전투의지를 '전투에 필요한 지성'으로 번역하는 경향이다. 현재 제일 최근판 한글번역(김만수 대전대 군사학 연구소)에서도 '국가의 의지'는 '정치적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클라우제비츠는 "공격은 적극적이지만 약한 수단이고, 수비는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수단이다" 라고 쓴 것도 있다. 또한 1812년 자신이 직접 참전한 러시아 전역에서처럼 대규모의 적군은 국경 안으로 깊숙히 끌어들여 소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냥 보고 싶은것만 보는거.. 잘못되면 책에서 그랬다고 하지 뭐...
  5. 전쟁론 이펙트 (Clausewitz's on war) -휴 스트레이천-
  6. 그러나 리델 하트가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심각한 포슈까라는 점도 감안해야한다.역시 영국인. 나름대로 백일 전투는 인정해준 것같지만 포슈를 삼류 공세주의자인양 묘사하게된 계기가 바로 리델 하트의 <포슈: 오를레앙의 남자>다. 그리고 포슈를 비롯한 유명한 군사사상가들을 분석한 <군사사상론>의 경우에는 포슈를 당대 군사사상가중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 꼽았다.
  7. 조프르는 마른의 기적의 공과 고착화된 서부전선의 과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1차대전 초기에 조프르의 뚝심이 없었다면 패배가 확실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8. 몽고메리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프랑스와-영국군의 불화와 상호불신은 큰 편이었다. 전쟁말기 1918년 4월에야 통합사령부를 구성할 정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군 평가가 박한 것도 주류인 영미 쪽의 평가가 박하기 때문인 점도 어느 정도 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광탈과 식민지에서 벌어진 추태들이지만.
  9. 그 간격을 공격하고 역포위에 거의 성공한 연합군의 공로는...?
  10. 이 내용은 두산백과에서 클레망소가 패배주의자들을 총살시켰다는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보이는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인들의 권력의 한계를 보면 이건 불가능하다. 클레망소가 감방에 보낸 사람은 많아도 저렇게 쓸데없이 죽인 사람은 없다. 애초에 클레망소가 권력을 잡은게 1917년으로 1차 마른전투와 무관하다. 애초에 보르도로 피난가느라 바빴던 프랑스 정부인데 어떻게 일일히 총살시킬 시간이 있겠는가;
  11. 영국군이 더욱 큰 비중을 자랑했다는 1917년 말에도 영국군은 겨우 150km의 전선을 담당한 반면 프랑스군은 무려 580km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 전선거리 보다 영국쪽이 맡은 지역은 독일의 주침공로이고 프랑스군이 맡은 지역보다 병력밀도도 높고 자연 지형이 없는 개활지라 병력손실 비율은 영국군이 높았다. 또한 4차에 이은 이프르 전투중 가장 큰 규모인 3차 이프르 전투 (파스샹달 전투)에선 독일군과 영국군이 나란히 22~26만씩 손실이다. 북해쪽과 프랑스 동북지역 전선은 영국쪽 부담이 컸다.한편 1차 솜 전투또한 전통적인 시각으로 영국군이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있었지만 William Philpott등 수정주의자들은 영불공동작전으로 평가한다. 사상자가 영국군이 42만 프랑스가 19만 6천명정도인걸 감안하면 영국군이 주도한건 맞다. 프랑스군이 베르됭에 집중하느라 솜전투 역할은 없었다라는 말도 존재하는데 영미사관을 대변해 영문 위키백과 솜 전투 항목에서 포슈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음에도 솜 전투에 대해 "The main part of the offensive was to be made by the French Army, supported on the northern flank by the Fourth Army of the British Expeditionary Force.라고 적었다. 게다가 이 전쟁과 악명높은 베르됭 전투가 동행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한다;
  12. 하지만 전쟁 초기를 제외하면 독일군이 1914~1915.겨울 이후 1918년 공세까지 수세적 입장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13. 당시 프랑스의 젊은 인구층은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여자 빠지고 다 빠지고 나면(...) 140만의 전사자는 18 ~ 27세 남자인구의 27%에 달했다. 이러한 인구타격은 전쟁후에도 프랑스가 다시 강대국지위를 유지하는데 엄청난 제약조건이 되었다.
  14. 물론 초반 병크를 겪으면서 지탄을 받자 이것은 '공격정신'에 대한 오해다란 변명도 나왔다. 이 같잖은 변명은 프랑스군의 계속되는 처절한 삽질로 '공격정신'이란 물건이 하등 쓸모가 없었다는것이 속속 드러나면서 조용히 묻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