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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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계곡 지도. 가운데의 KV62 무덤이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1 개요

과거 고대 이집트 고왕국, 중왕국 파라오의 묘역인 피라미드가 신나게 털려서 미라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는 데다가, 수만은 인력과 재원이 낭비되고 오랫동안 혼란기로 피라미드를 짓지 않아 건설 기술까지 실전되자 신왕국 때 파라오들을 장사지내기 위해 새로 조성한 비밀 묘역이다.

일단 조성 사유부터가 도굴꾼들을 피하기 위해서 선정한 위치였다. 그래서 룩소르 반대편인 나일 강 서안지대에[1] 왕가의 계곡이 있지만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계곡처럼 보인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지상에 노출되는 구조물을 건설하면 도굴꾼에게 털리므로 계곡에 구멍을 파서 묘실을 만든 다음에 파라오의 장례가 끝나면 입구를 봉인해서 위치를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건설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으로 500여년간 이용되었다. 신왕조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가 최초로 묻혔고 마지막으로 묻힌 파라오는 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다. 다만 주인을 알 수 없는 KV39가 있어서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2] 그리고 KV39는 말 그대로 왕가의 계곡(Kings Valley) 39호 무덤이라는 의미로 일괄적으로 매긴 번호를 말한다. 왕가의 계곡은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는데 동쪽에 대부분의 무덤이 있다. 다만 서쪽의 무덤은 따로 WV로 매기기도 한다.

그리고, 파라오의 묘역이라고 하지만 왕비, 왕자, 공주를 비롯한 왕족들과 왕이 총애하던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왕들의 애완동물들도 묻혔다. 동물까지 묻힌 이유는 이집트 신화에서 , 악어, , 원숭이, , 고양이 등의 동물은 신들과 상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제19왕조 이후로는 파라오를 제외하면 왕비, 왕자, 공주들은 인근 왕비들의 계곡에 묻히기도 했다.

2 조성 사유

당시 파라오들은 도굴꾼들 때문에 중왕국 때까지 사용하던 피라미드같이 눈에 띄기 쉬운 것들을 피하고 그들의 묘를 인적이 드문 계곡 바위 틈이나 벼랑에 만들었다. 이 결정은 왕과 왕족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결단이었는데 영혼이 영생하고, 먼 훗날에는 자신의 신체인 미라를 이용해서 다시 생전처럼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던 상황에서는 절대적이었다. 특히 영혼도 먹어야 살 수 있으므로 제사가 이루어지는 신전에 주기적으로 왕복해야 했다. 문제는 무덤은 비밀스런 장소에 마련할 수 있지만 신도들이 찾아오고, 제사장이 있어야 하는 신전은 대도시에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자신들의 영혼이 인적이 드물고 길은 무늬만 있는 험지를 한참 걸어가서 신전에 도착한 후, 다시 험악한 길을 따라 무덤에 돌아가는 천리행군을 매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어서도 영혼이 개고생을 할 각오를 한 셈이다. 그리고 말이 새어나갈 수 있는 무덤 건축 노동자들은 외부 출입이 통제되는 마을에 모여살게 한 대신 아주 많은 임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

덕분에 이곳 파라오들의 무덤은 비교적 늦게 도굴당할 수 있었다... 안습. 물론 당시 고대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도굴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지형이었으나...

3 현실은 시궁창

하지만 돈독 오른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었다.

게다가 신왕국 말기에는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는 바람에 무덤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불이 일상화되었고 그동안의 후한 대우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빡쳐서 무덤을 털어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몰래 무덤 입구와 도굴로를 동시에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장례식이 끝나면 도굴로를 열어서 전부 털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파라오뿐만이 아니라 왕비, 왕족, 귀족, 평민들까지 가리지를 않았다. 심지어 어느 귀족의 경우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 몰래 침입해서 보석으로 치장한 데드마스크를 털어가는 사례도 있었고 람세스 3세의 왕비 이시스의 경우에는 무덤 노동자들이 몰래 뒤에 굴을 파고 털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값비싼 부장품들이 시중에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집트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실 이런 심각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20왕조 말기의 파라오 람세스 9세 때 대대적으로 조사를 했다. 제11왕조부터 제20왕조의 무덤 16개를 조사했으나, 그 중에 제18왕조 2번째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과 11왕조 인테프 2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두 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당시에는 사제들과 귀족, 도굴꾼이 한 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정이 부족해진 21왕조 파라오들은 선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을 보충하는 등 막장이었다. 예를 들면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람세스 9세의 반지와 19왕조 파라오 메르넵타의 관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전 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은 물론 부장품으로 재활용했다는 좋은 증거이자 일례다.

이 당시 도굴꾼을 처벌한 기록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서는 17왕조의 파라오 소베켐사프 2세와 그의 아내 누브카스 왕비의 피라미드 무덤[3]을 약탈한 사례가 있다. 도굴꾼들은 이 무덤을 약탈하여 부장품들을 싹쓸이하고 관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에 불을 지른 이유는 미라를 불태워서 저주를 막고 무엇보다 관에 붙은 금박을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도굴꾼들은 미라가 부활할까봐 겁을 먹고 미라를 불태워버리거나 훼손하기도 했고 땅 속에 파묻거나 심지어 기념품(!)으로 챙겨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1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의 경우에는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고 무덤 벽에 파라오를 조롱하는 그림과 낙서까지 하고 갔을 정도다.

그리고 그 중 하나 비교적 멀쩡히 살아남은 것이 바로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18왕조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도굴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무덤의 봉인을 보면 2번 정도 도굴당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가볍고도 가치가 높은 귀금속류와 귀한 연고류가 주로 분실되었고 관리 마야가 후속 조치를 잘해서인지[4] 그 후에는 도굴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20왕조 파라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그의 무덤 위에 오두막을 만들고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이고 잊혀지면서 20세기 초에 와서야 발견되었다. 하워드 카터는 여러 증거들을 통해 이 곳을 발굴했는데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자세한 것은 투탕카멘의 저주 참조.

사실 이집트 파라오 중에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파라오는 현재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뿐이다. 이 무덤은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맞먹을 엄청난 고고학적 성과이나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이 아니라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 있는 타니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고 나일강 삼각주라는 지형의 특성상 부장품들이 대부분 박살나고 훼손되었으며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마저 환경 때문에 훼손되어 해골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남은 것이 위에도 있는 원래 메르넵타의 관이었던 금속제 관이나 데드 마스크정도인 수준이다. 따라서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물론 현재까지 나머지 파라오들은 죄다 도굴당하거나 무덤 자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4 예상 밖의 생존 사례

참고로 피라미드의 전성기였던 이집트 고왕국 시대도 후기에 들어오면 피라미드 중 도굴꾼에게 안 털린 피라미드가 없었다. 따라서 파라오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털린 피라미드를 수선하고 미라를 수습하며 재봉인하는 것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 임무도 나름 돈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임무를 포기한 후, 아직 멀쩡하게 남은 미라를 한 곳에 모아서 땅 속에 석실을 세우고 그냥 공동묘지처럼 한 곳에 묻어버렸다. 사제들이 이 일을 맡았는데 남은 부장품들은 대부분 거둬들여 재정으로 썼다. 이들은 왕가의 계곡과 인근 무덤들을 다니며 남아 있던 파라오, 왕비, 왕족, 기타 인물들의 미라를 거둬들이고 다시 염습한 다음 소량의 부장품과 함께 2곳의 은신 무덤에 재매장했다.

이런 식으로 공동묘지화된 곳은 2개가 발견되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부장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묻혔으므로 누구도 도굴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진짜로 잊혀지는 바람에 근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단 두 곳중 전자는 왕가의 계곡 근처에 있던 깊은 암굴 무덤(DB320)[5]으로 원래는 21왕조때의 대사제였던 피네젬 2세와 그와 가까운 가족들의 무덤이었다. 후자는 이미 고대에 도굴당한 20왕조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동묘지로 쓸 무덤도 재활용한 셈이다.

그리고 후자는 1896년 3월 프랑스의 빅토르 로레가 발견했다. 이 무덤에서는 무덤 주인 아멘호테프 2세, 아멘호테프 3세를 비롯해 15구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물론 미라들이 이미 도굴당한 무덤에서 수습된 미라라서 상태는 좋지 않다.[6] 예를 들면 DNA 검사로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의 딸이자 아케나텐의 여동생이며 투탕카멘의 어머니인 것으로 확인된 여자 미라는 입이 찢어지고 오른팔이 없어지고 가슴 벽이 무너져 내부가 드러나 있다. 이것은 도굴꾼들이 보물을 찾으려고 마구잡이로 유린한 흔적이다.[7]

그러나 귀중품 따위는 없고, 부장품도 거의 없이 묻혔기 때문에 대량의 미라가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던 좋은 방법이었으며, 그래서 의외로 많은 수의 미라가 현재도 박물관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5 결과

결국 왕가의 무덤도 도굴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털린 무덤들의 미라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공동묘지는 근대까지 무사했다는 것을 볼 때 무덤을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여서 비밀스럽게 마련하느니, 차라리 반짝거리는 귀금속과 보석등의 부장품을 일절 무덤에 넣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물론 높으신 분들이 쉽사리 그들이 사용하던 고급 명품을 다 버리고 미라만 달랑 혼자 어두운 석실에 묻히기는 싫었으므로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어차피 죽으면 그런 거 없다 공수래 공수거

결국 왕가의 계곡도 안전하지 않은 것을 느낀 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는 기껏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정작 그는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 이렇게 람세스 11세가 만들고 버린 무덤은 KV4 무덤이며, 그의 무덤은 이 후 파라오의 미라를 새로 염습하고 남은 부장품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하기 위한 작업장으로 활용되고 중세에는 은자들의 은거지로 활용되었다. 이것을 보면 그 무덤에 묻히지 않는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는 공식적으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는 없으며 일부 무덤에 침입 매장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 여기서 침입 매장이란 남의 무덤을 자기 무덤으로 쓰는 것을 말한다.

6 매체에서의 등장

이 왕가의 계곡을 소재로 쓰여진 《빛의 돌》이라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작품. 왕가의 계곡에서 무덤을 파고, 안을 장식하고, 각종 부장품들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마을 '진리의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창작소설이라고는 하나 실제 발견된 문헌에 어느정도 근거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도 그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특징을 가져다 쓴 것. 당시 이집트의 생활상이나 과학, 의학 등의 높은 지식수준을 엿볼 수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소르본 대학에서 이집트학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로, 베스트셀러 《람세스》를 시작으로 《투탕카멘》《검은 파라오》《오시리스의 신비》같은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만화 유희왕에서는 아무래도 주인공파라오이기 때문에 등장할 수 밖에 없다. 1960년대에 무토오 스고로쿠가 궁극의 게임을 찾아 발을 들인 곳으로써 처음 등장한다. 이후에는 주인공 진영과 도적왕 바쿠라 진영의 격전지로도 나오며, 마지막에는 아템이 명계로 돌아가느냐 마냐가 걸린 결전이자 유우기아템이 진정한 최강을 가리기 위한 의식인 '싸움의 의식'을 치룬 곳으로 나온다.[8]

게임 타이탄 퀘스트에서는 액트 2 이집트 미션의 던전 중 일부로 등장한다. 특히 람세스 2세의 무덤이 중요하게 나온다.

7 여행 정보

  • 룩소르의 호텔들은 대부분 왕가의 계곡 건너편에 있는 나일 강 동쪽에 있으므로, 많은 관광객들은 버스를 이용한다. 호텔들의 대부분이 버스 여행객을 모집하고 있으므로 이 버스들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 다만 버스 여행의 경우 시간을 넉넉히 주지는 않으므로, 더 많은 돈을 지불하더라도 긴 시간을 두고 왕가의 계곡을 여행을 하고 싶다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택시 기사들이 쇼핑을 권유하는 일이 많은데, 미리 확실하게 거절하는 의사를 전해야 한다.
  • 왕가의 무덤 입구에 코끼리 열차 비슷한 차량이 있으며, 걸어서 이동해도 된다.
  • 입구에서부터 왕가의 계곡 외부 뿐만 아니라 무덤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 겨울에도 날씨가 아주 덥고 그늘이 거의 없는 데다가, 무덤 내부는 습기까지 높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 무덤 모두를 구경하려고 하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넉넉히 준비하거나 구경할 무덤을 미리 선택하는 것이 좋다. 보통 티켓 1장으로 3개의 무덤을 구경할 수 있으나, 투탕카멘의 무덤은 별도로 티켓을 사야 입장할 수 있다.
  • 이집트인들이 무덤 입구에서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나서는데, 돈을 요구하므로 거절하려면 의사를 확실하게 드러내야 한다.

8 기타

왕가의 계곡에 있는 유적지중 내부모습을 VR뷰로 제공하는 곳이 있다.

  1.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묘지를 태양이 지는 서쪽으로 정했다. 카이로 부근에 있는 피라미드도 나일 강 서안에 위치해 있다.
  2. 투트모세 1세의 선왕인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3. 17왕조는 중왕조와 신왕조 사이의 혼란기였던 제2중간기였다. 고왕조와 중왕조 사이에도 제1중간기라는 현시창 시기가 있었으나, 이 때 파라오의 권력이 추락하고 많은 무덤들이 도굴되었다. 제2중간기는 이민족이었던 힉소스의 침입을 받아 남북 대결을 하던 시점이었는데 당시 무덤은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무덤이 아니었다. 암굴을 만들거나 땅에 매장해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세워 표시하는 무덤이었다.
  4. 무덤 벽화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5. 라술이라는 자가 깊은 구덩이에 빠진 염소를 구하러 내려갔다가 발견했는데 거기서 조금씩 부장품을 꺼내 팔다가 프랑스 출신 이집트 학자 가스통 마스페로에게 딱 걸렸다.
  6.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만 멀쩡한데 그나마 무덤 발견 후 도둑이 들어 관에 부장되어 있던 활과 배모형 등 일부 부장품을 도난당했다.
  7. 다만 좀 더 최근에 실행된 검사에 따르면 팔과 가슴의 손상은 역시 도굴꾼들의 소행이겠지만 입가의 구멍은 살아생전에 생긴 상처의 흔적이라고 한다. 해당 미라는 The Younger Lady라는 별칭으로 검색해볼 수 있는데, 입가에 뻥 뚫린 그 구멍을 보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부상을 입은 건지 흠좀무. 미라는 약 25세 정도의 젊은 미라이며, 입가에 있는 그 상처로 인해 사망했을 거라고 한다.
  8. 정확히는 왕가의 계곡에 있는 '운명의 석판'이 잠든 지하신전에서 치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