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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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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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왕비
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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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元敬王后)
시호창덕소열원경왕후
(彰德昭烈元敬王后)
출생지송경(松京) 철동(鐵洞) 사저
사망지수강궁 별전
본관여흥(驪興)
배우자태종(太宗)
아버지여흥부원군 민제
어머니삼한국대부인 송씨
생몰
기간
음력1365년 7월 11일 ~ 1420년 7월 10일(향년 56세, 만 54세)
양력1365년 7월 29일 ~ 1420년 8월 18일
재위
기간
1400년 ~ 1418년(왕비)
1418년 ~ 1420년(왕대비)

1 소개

태종 이방원의 왕비이자 킹메이커.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의 어머니. 본관은 여흥 민씨로 아버지는 여흥부원군 민제이다.

2 일생

18살인 1382년에 아버지 민제의 제자였던 2살 아래의 이방원과 혼례를 치뤘고 1392년에 시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남편인 이방원은 정안군에 책봉되자 뒤이어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뒤이어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등이 남편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고 뒤이어 정도전 등이 신권 강화의 일환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원경왕후는 오히려 집 으슥한 곳에 무기를 숨겨놓아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이렇듯 성격이 괄괄하고 담대해서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할 때는 이방원과 왕자들이 궁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신이 배가 아프다는 핑계[1]를 대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 일을 빌미로 이방원은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2차 왕자의 난 때도 자신의 사가의 말이 홀로 집으로 오자, 남편이 죽은 줄 알고 창을 들고 나가 싸우다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친 일화도 있다.

뒤이어 세자빈이 되고 결국 이방원이 왕이 되자 덩달아 왕비가 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는데... 여기서부터 그녀의 인생에 하강곡선이 드리워진다. 왕이 된 태종은 공신들을 매우 경계하였는데 특히 정계와 군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무구민무질을 심하게 경계했다. 더군다나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세자였던 양녕대군과도 친했기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놀아날거라 생각한 태종은 이들을 가차없이 유배보내고 뒤이어 사약까지 내렸다. 뒤이어 그들의 아랫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도 역시 세자의 외숙[2]으로 정사를 농단할 것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태종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부모의 운명도 불행하기 그지 없어서 아버지 민제는 자식들이 귀양가고 집안이 쇠락해가는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 송씨는 아예 아들 넷이 모두 사위 손에 결딴나는 걸 보고서 세상을 떠났다.[3]

한편으로 태종과는 여자 문제로도 쉴새없이 싸웠는데 처가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놀이와 여자를 좋아했던 태종은 원경왕후의 투기에 질색을 하며 자주 부부싸움을 벌였고 다툼이 격해지자 원경왕후를 모시던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궁 밖으로 쫓아내고 교태전에 유폐하다시피 했다. 심지어는 폐비이혼까지 하려 했으나 상왕이었던 공처가정종이 "나는 서자밖에 없어도 하도 같이 오래 살아서 정이 들었는데 너는 왜 그러고 사느냐?"라며 말렸다고 한다.[4] 다만, 계모와 이복형제들에 의해 왕위 계승 논의에 밀려나 그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지독한 아들바보였던 태종이 후계구도를 꼬아 정통성을 훼손해 자식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폐비라는 선택을 할 리가 있겠냐며 중전에 대한 일종의 강짜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방석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의 자식이란 점 다음으로 중요한 정통성이 왕비의 자식이란 점이다.

1418년에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망나니가 되어버린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5]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을 때는 장자 상속제를 이유로 들어 양녕대군의 아들인 원손을 후계로 책봉하라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가 극심하였고 양녕대군을 멀리 내치려하자 원경왕후는 눈물을 흘리며 가까운 곳에 보내라 하여서 결국은 경기도 광주로 보내졌다. 사실 원경왕후는 태종만큼 맏아들 양녕[6]을 매우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성리학적 남존여비가 슬슬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던 시대에 18살에 결혼해서 10여년간 낳은 6명의 자식들(3남 3녀) 중 아들만 셋 다 죽는 고통을 겪고 30살이나 되어 낳은, 단 하나뿐이던 자기 아들이 양녕이고, 왕족이 되기 전에 낳았으니 그녀에게는 왕비가 아닌 어머니로서 그야말로 목숨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세상 전부와 같은 아들이었던 것. 그 후에 3년 내로 효령과 충녕(세종)을 낳고 역시 예뻐하며 길렀다고 하나, 왕-왕비-왕자 관계를 떠나서 낳은 순간부터 이방원 부부의 모든 것이었던 양녕과 받은 개인적 애정이 같을 수는 없었다.

뒤이어 새로운 세자 이도가 즉위하여 세종이 되자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고 2년 후인 1420년에 수강궁(창경궁)에서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리고 2년 후에 남편인 태종도 죽어서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헌릉에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글자 그대로 애증의 관계였을 부부였지만 결국 죽어서는 함께 묻혔다.

3 평가

여담으로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지만 정작 원경왕후는 태종의 왕비로만 기억하지 세종대왕의 어머니로 잘 기억되지는 않는다. 태종의 아내다운 괄괄한 성격에 남편을 옥좌에 올리기 위해 모든것을 걸었다가 바로 그 남편에 의해 형제들을 모두 잃고 가문이 몰락하는 장면이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가족관계는 태종(조선)/가족관계 참고. 현종명성왕후 김씨와 함께 역대 조선 왕비 중에서도 손꼽히는 괄괄한 여장부로 꼽을 수 있다.[7]

여하튼 조선조 최고의 잘난 남편과 그 잘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도 상당히 많이 했지만, 더 잘난 아들을 만든 최고의 내조의 여왕으로 평가받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4 사극에서

사극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게 포스있고 강단있는 여인으로 나오며 초반에는 남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사풍의 이미지로 나오다가[8] 왕비가 된 이후에는 태종에게 대들다가 뒤이은 결과가 신통치 않는(...) 어찌보면 불쌍한 여인으로 나온다. 그리고 사극 속 사망씬에서는 묘하게도 원경왕후의 임종을 태종이 혼자 지키며, 태종과 원경왕후가 화해하면서 원경왕후가 사망하는 것이 특징. 상왕이 된 태종이 사돈댁(소헌왕후의 친정) 박살내는 것을 보며 또 못할 짓 한다고 하면서도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왕권을 지키려는 태종이 딱해 보인다고(...). 어쨌든 그렇게 임종때는 대충(?) 화해하고 승하하였다.

  •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 마마에서 김영란씨가 열연을 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분은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과 원경왕후 때문에 말년에 비참한 신세가 된 신덕왕후를 연기한다.
  • 용의 눈물, 대왕 세종에선 둘 다 최명길이 맡았다. 최명길은 "자신이 원경왕후와 무슨 연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여담으로 용의 눈물 촬영 후반부에 최명길은 만삭이었다. 그때 태종 앞에서 상을 엎고, 바닥을 기는 연기들을 했는데 나중에 유동근씨가 당시를 회고하길 엄청나게 무서웠다고.
용의 눈물에서의 원경왕후는 원경왕후(용의 눈물) 참고.
  • 정도전(드라마)에선 고나은이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도 포스는 여전해서 '킬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사실 최명길의 포스넘치는 원경왕후에 비하면 나긋한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나 한 성격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방원과 나란히 있는 카메라 장면 때 이방원이 미소짓는 원경왕후를 쳐다보는 순간 캡처 시선이 묘해서 훗날 이방원의 숙청에 대한 암시라는 이야기들이 달렸다. 다음은 너야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공승연이 맡았다. 가문의 권력을 매우 중시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총명하고 수려한 언변을 지닌 인물로 묘사 된다. 첫등장 부터 전략적 혼담을 꺼내놓은 이방원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당차고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이며 혼인 후엔 선을 그으려다 되려 한방 먹고 KO 당황하는 귀여운 모습도 보인다. 정치적 능력으로는 정도전과 비슷한 수준. 실제로 역사상 이방원의 킹메이커이고 초반 긴장감 넘치는 거래씬 등으로 극 중 역할이 기대되는 배역이었으나 어느순간부터 비중이 공기화되고 있다. 그러나 33회에서 이방원이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상대가 되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원경왕후는 민다경 참고.
  1.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2. 조금 더 설명을 보태서, 세종이나 양녕대군이나 정순공주(맏딸로, 청주 이씨 이거이의 아들이며 이성계의 사위가 되는 이저의 동생인 이백강에게 시집을 감) 등과 같은 자식들에게는 외가가 되는 민씨 집안을 설명하자면, 위로는 조박에게 시집간 언니 한 명과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그리고 여동생 한 명이 더 있었다.
  3. 뒷날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선위한 후 임금의 장인인 심온도 명나라 사은사로 보냈다가 의주에서 군을 왕명없이 함부로 움직였다는 것을 구실삼아 사약을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왕 내외의 끈질긴 설득으로 왕비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천민으로 계급을 강등시키는 데에 그쳤고 이들은 태종 사후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숙청은 결과적으로 세종 치세 때 외척의 간섭이 없는 결과를 만들었고 세종 이후 한 동안의 왕들은 수렴청정의 경우를 빼곤 비교적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4. 정종은 이 때 이외에는 태종에게 간섭한 일이 없다. 이 일화는 폐비 논의가 있어서 한 말이 아니라 태종이 간택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후궁인 숙의를 뽑으려 하자 원경왕후가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자 이례적으로 정종이 동생에게 조언한 일화이다.
  5. 여담으로 양녕대군의 폐위 전 행적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보면 아버지로서 태종 이방원이 정말 보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살 아버지보살 동생을 둔 덕분에 폐위 후에도 평안하게 살았지만 결국 그 동생의 손자의 죽음에 앞장서 끝까지 망나니 클라쓰를 입증했다. 아버지가 태종이 아닌 영조였으면 얄짤없이 뒤주행 티켓을 끊었을텐데
  6. 사실은 넷째 아들인데 3명의 형이 어릴 때 다 죽었고, 그 때는 조선이 생기기 전 고려 시절이라 조선왕조실록 자체에 자식으로 기록도 되어 있지 않다. 단지 실록에는 태종이 왕이 되고 나서 양녕 이전에 죽었던 아들 3명에 대해 회고한 기록이 있을 뿐. 장자계승의 압박이 있던 태종이 양녕의 장자됨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그 전에 죽은 아들들을 정식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양녕의 누나 3명은 양녕이 태어날 때도 살아 있었다.
  7. 흔히 여장부로 평가받는 문정왕후 윤씨나 정순왕후 김씨는 적어도 개인적인 성품은 차분하고 신중한 편이었다.
  8. 왕자의 난 때는 남장하고 남편이 있는 곳까지 말을타고 찾아가는 괄괄한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