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왕후

조선의 역대 왕세자빈
효종
빈궁 장씨
현종
빈궁 김씨
숙종
빈궁 김씨
조선의 역대 왕비
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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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명성왕후
숙종
인경왕후
조선의 역대 왕대비
현종
효숙왕대비
숙종
현렬왕대비
경종
혜숙왕대비
호칭명성왕후(明聖王后)
시호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출생지장통방 사저
사망지창덕궁 저승전
본관청풍(淸風)
배우자현종(顯宗)
아버지청풍부원군 김우명
어머니덕은부부인 송씨
생몰
기간
음력1642년 5월 17일 ~ 1684년 12월 5일
양력1642년 6월 13일 ~ 1684년 1월 21일(향년 43세, 만 41세)
재위
기간
1651년 ~ 1659년(세자빈)
1659년 ~ 1674년(왕비)
1674년 ~ 1683년(왕대비)

절대 명성가 아니다![1]

1 소개

조선 현종의 왕비.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재상 김육의 손녀이며,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의 딸이다.

고종황제의 정실인 명성황후 민씨보다 200년 전의 인물이니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따라서 보통은 명성왕후 김씨, 혹은 명성대비로 더 많이 불린다.[2][3]

현종을 공처가로 만든 인물이자 숙종, 영조, 정조에게 쓰리런 다혈질 종특을 물려주었다고 의심되는 인물. 심지어 유약하다는 편견이 강한 경종마저 다혈질 종특을 숨기고 있다가 제대로 표출한 적이 여러 번 있었으니 후덜덜하다. 거기에 정조의 아들 순조조차도 가족 문제만 나왔다간 영조, 정조 급으로 난폭해졌으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래도 덕흥대원군암군 종특보다는 낫다.

실제로 조선 왕비들 중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다혈질인 왕비였다고 한다. 이와 맞먹는 왕비는 태종 이방원의 정실 원경왕후 정도? 머리가 좋았으나 그 성깔 때문에 현종은 조선 왕조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못한 왕이 되었다...[4][5][6]

2 일생

아들인 숙종이 즉위한 뒤 왕대비에 오르면서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하여[7] 남인들의 비난을 샀으며[8]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이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모함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675년에 일어난 '홍수(紅袖)[9]의 변'이다. 이 때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까지 와서 통곡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10]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복평군 형제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 신하들 역시 '이건 뭐 문정왕후가 또 나타났나요?'[11]라고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결국 무고죄로 몰린 아버지 김우명은 화병으로 죽는다.[12][13]

그 뒤에 궁녀 출신으로 숙종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던 장희빈을, 성품이 극악하며 숙종이 꾀임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궁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14] 그런데 명성왕후가 장희빈을 내쫓은 진짜 이유는, 장 씨 집안에서 장희빈의 당숙 장현을 유배로 몰았기 때문인 탓도 있었다.[15] 반대로 시조모인 자의대비는 장희빈의 편을 들었다고.

명성대비의 죽음은 진짜 어이없었다. 숙종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평소 무속 신앙을 신봉했던 명성대비는 숙종의 무사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는데, 무당이 왕의 쾌유를 위해서는 "왕의 어머니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벌을 서야 한다"고 계시를 내린 것. 이에 명성왕후는 무당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혹독한 겨울 날씨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을 얻어 1683년 음력 12월에 죽었다. 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여서 그런지 신하들은 숙종에게 문제의 무당을 처형해야 한다고 했으나, 숙종은 귀양을 보내는 처벌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명성대비가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 바람에, 장희빈은 명성왕후의 3년상이 끝난 1686년에 자의대비와 숙종에 의해 재입궁할 수 있었으며 곧 숙원으로 책봉되었다.

3 왕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현종과 합장되어 있는 숭릉(崇陵)이다.

4 사극에서

대중에게는 명성황후 민씨에 밀려서 인지도는 시망이지만 숙종시대의 사극에 명성대비로 가끔 등장한다.

1995년 SBS의 <장희빈>에서는 견미리가 배역을 맡았다. 드라마에서 명성왕후는 항상 시할머니 대왕대비 조씨와 대립하고, 장희빈을 미워하는 장면을 훌륭히 재현해내었다. 한편 당시 장희빈은 정선경, 대왕대비 조씨는 김영애가 배역을 맡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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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뒤, SBS의 그 대왕대비 김영애가 이번에는 명성왕후가 되었다. 나와 또 다른 내가 싸운다. 사진은 2003년 KBS 장희빈에서의 명성왕후. 배우의 포스를 그대로 받아들여 매우 후덜덜한 왕의 모후이자 시어머니로 나온다. 사진에서의 눈빛을 보면 알겠지만 역사에서의 기록을 훌륭히 고증하여 그 카리스마 넘치는 전광렬숙종도 명성왕후 앞에서는 학원 땡땡이 치고 PC방 가다 걸린 아들처럼 온순한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로 이 KBS 장희빈은 유일하게 명성왕후가 시대고증에 맞게 가체를 쓰고 등장한 드라마이기도 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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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에서의 명성왕후. 처음부터 끝까지 희빈 장씨를 탐탁치 않아하며 친정인 서인을 두둔하고 인현왕후를 보호하는 모습으로 나오다 결국 인현왕후가 폐출되는 소식을 듣고 고통스러워하다 사망한다.[17] 명성왕후를 연기했던 박정수의 몸 상태가 안좋았던 건지 등장 후반부엔 거의 나오지 않고 극 흐름상 어쩔 수 없이 나와도 목 상태가 거의 맛이 간 상태여서 안타까움을 유발했다. 그리고 곧 사망하여 배우는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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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에서의 명성왕후. 왼쪽이 명성왕후고 오른쪽은 시어머니이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 장씨. 실제 역사에서는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여성이었지만, 현종시대 사극인 본 드라마에는 젊은 배우를 써서 여기서는 말투도 조근조근하고 가끔 시누이 숙휘공주도 두둔하는 등 전형적인 현숙한 중전 이미지를 가진 자로 나온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극에서 숙종 대 왕의 모후인 대비로 나오다 거의 처음으로 현종 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왕비로 나와서 그런 듯하다. 하지만 다혈질 대비로 익숙한 시청자들이 볼땐 아무리 봐도 둘째 며느리와 뒤바뀐 거 같다. 아직 시어머니가 살아있어서 참고 사나 보다. 하지만 시할머니랑은 잘만 싸우잖아?[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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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실패했어?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김선경이 연기했다. 장희빈을 괴롭히는 포지션을 맡아서인지 다혈질 성격과 서인 편을 든다는 식의 고증은 제대로 되었다. 심지어 물벼락 벌로 골골대기까지 하는 것도. 장희빈을 괴롭히는건 물론이고, 시할머니인 자의대비와 극한 대립하며 "자식이 없어서 쓸쓸히 늙어간다"는 망언도 서슴치 않는다. 근데 이 아줌마(?)가 뭔가를 꾸미면 결국 다 장희빈에게 좋은 일로 돌아온다. 인현왕후에게 "이 시어미만 믿으세요"라면서 뭔갈 시도하면 다 시망하고 역관광당한다(...)
  1. 한글로 읽으면 같은 발음이지만 엄연히 한자도 다르다. 현종의 비 명성왕후는 明聖王后이며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는 明成皇后로 '성'의 한자가 다르다.
  2. 명성왕후 김씨는 생전에 대비가 되지 않았다. 다만 명성대비란 호칭은 실제로는 옳지 않으며, 정식 왕대비 존호는 현렬희인정헌문덕명성왕후(顯烈禧仁貞獻文德明聖王后), 줄여서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다. 엔하위키에서 이전에는 현렬대비(顯烈大妃)라고 했는데 현렬대비라는 표현도 알고보면 잘못된 표현. 실록에서도 현렬왕대비(顯烈王大妃)로 나오지 현렬대비(顯烈大妃)로는 쓰이지 않았다.
  3. 다만, 명성대비가 틀린 표현이란 것도 좀 애매한 게 아들인 숙종 인현왕후가 죽은 직후에 쓴 행록에 버젓히 명성대비(明聖大妃)라는 표현을 떡하니 써버렸다. 출처는 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1월 23일(병오) 2번째기사.
  4. 공식적으로는 경종이나 순종황제도 후궁이 없다. 하지만 경종과 순종은 정상적인 치세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후궁이 없는 왕은 현종이 유일하다. 참고로 재위기간이 짧았던 인종이나 추존왕인 덕종이나 원종, 장조, 그리고 어린 나이에 폐위된 단종조차도 후궁이 있었다.
  5. 덕분에 효종의 직계가 단절되는데 나름 공헌(?)을 했다. 후궁을 못 두니 숙종이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 과연 아들을 못 낳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6. 사실 현종도 몹시 후궁을 두고 싶어했고, 후궁 간택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명성왕후의 지시를 받은 한 신하의 반대로 실패했고, 현종이 그 신하를 한참동안 째려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7. 아이러니하게도 명성왕후는 숙종이 14살에 즉위했지만 수렴청정은 하지 못했다. 숙종이 모후를 닮은 다혈질 성격이라서 친정을 원했기 때문.
  8. 명성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우명은 서인이었다.
  9. 붉은 소매라는 뜻. 궁녀의 소매 끝동이 붉은색이었기 때문에 궁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였다.
  10. 대소신료들이 등청을 하고 보니 대전에서 통곡소리가 나고 있었다. 공포영화 여기서 "내가 죽어야지"+"주상이 어려서 뭘 모른다"를 시전하신다. 3일 후에 윤휴가 대신과 삼사가 당황해했다고 문제삼으며 왕이 조관하지 못한 바가 있었다고 에둘러 깐다.
  11. 실제로 이런 발언이 나왔었다! 여기서 후대인들은 조선 사회에서 문정왕후란 이름은 어떤 의미였는지, 명성왕후는 얼마나 드센 강한 성격이었을 지 짐작해볼 수 있다.
  12. 아이러니 하게도 삼복(복평군 형제들)은 경신환국 때 결국 역모죄로 숙청된다. 삼복에게는 형인 복녕군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형제들의 숙청에는 휩쓸리지 않았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실제 혈통은 복녕군의 후손이다.
  13. 삼복의 형인 복녕군의 딸은 명성왕후의 올케였다. 명성왕후의 남동생 김석달의 처가 복녕군의 딸. 그리고, 명성황후의 고종사촌 언니(창원군부인 황씨)는 복창군의 처였다. 명성왕후의 고모가 황도명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
  14.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복귀를 청했던 인현왕후에게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것)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15. 실제로 장희빈은 이후 명성왕후의 당파인 서인과 대립하는 남인과 손을 잡았다.
  16.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가체 착용. 8년 전 SBS 장희빈에서는 주요 의식이 있는 장면에서만 명성왕후가 가체를 쓰고 나오고, 모든 여인들이 가체를 착용하지 않았다.
  17.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인현왕후가 폐서인 되기 한참 전에 사망했으므로 고증오류라고 할 수 있다.
  18. 참고로 인선왕후가 장렬왕후보다 나이가 6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