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사로국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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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발해고려조선대한
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소련
군정
북한
한사군
옥저
동예
신라태봉,후고구려
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신라
新羅
130px
군기[1]인장
진흥왕 재위기인 6세기 무렵 신라의 영토
B.C. 57년 ~ A.D.935년 (도합 992년)
공식 명칭사로, 사라 등 여러 표기 →
신라(503년 국호 통일)
위치한반도 동남부 →
한반도 중 ·남부
수도서라벌
인구수90만호
정치 체제군주제
국가 원수거서간[2]차차웅[3]
이사금[4]마립간[5]
[6][7]
국성밀양 박씨, 경주 석씨, 경주 김씨
주요 국왕초대 혁거세거서간 (BC 57?-4)
4대 탈해 이사금(57~80)
17대 내물 마립간 (356-402)
22대 지증왕 (500-514)
24대 진흥왕 (540-576)
27대 선덕여왕(632~647)
28대 진덕여왕(647~654)
29대 태종 무열왕 (654-661)
30대 문무왕 (661-681)
31대 신문왕 (681-692)
33대 성덕왕 (702-737)
35대 경덕왕(742-765)
36대 혜공왕(765~780)
40대 애장왕(800~809)
41대 헌덕왕(809~826)
51대 진성여왕(887~897)
55대 경애왕(924~927)
56대 경순왕(927~935)
언어신라어, 고대 한국어
종족예맥, 한족, , 말갈족[8]
종교불교, 도교, 샤머니즘
주요사건기원전 57년 건국
356년 김씨 왕위세습 독점
520년 율령 반포
433~554년 나제동맹
551~554년 한강 유역 점령
670년~676년 나당전쟁
676년 삼한일통
822년 김헌창의 난
892년 후삼국시대 개막
935년 멸망
성립 이전진한[9]
멸망 이후고려

1 개요

천년 왕조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10]. 《삼국사기》의 서술에만 의존한다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건국 시기가 가장 빠르다.[11] 도합 56명의 왕이 992년을 다스렸으며, 한민족의 문화적-혈통적 단일성이 갖춰지기 시작했던 첫 번째 왕조이다.

2 국호

세계의 신라국호
한국어신라(新羅)
의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四方’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金富軾,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第1 智證麻立干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김부식, 삼국사기 4권 신라본기 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羣臣)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운 뜻이요, '라'(羅)[12]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羣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다만 이 의미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으로,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괴), 계림(鷄林)[13],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가운데 일부가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지금의 프랑스처럼 닭이 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는지도.
중국어신루오(Xīnluó)
일본어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아랍어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어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신라 시기에는 아랍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구자라트어શીલાના 웨데에
영어SILLA/SHILLA
라틴어SELLA 의자라는 뜻도 있지만 넘어가자
마오리어HIRA
인도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마케도니아어Сила
말라얄람어സില്ലായിലേക്കുസില്ലായിലേക്കു(silāyilēkku)
몽골어ШиллаШилла(Shilla)
세르비아어силласилла (silla)
우르두어سلا
이디시어סיללאַ (silla)
암하라어በሚወርደውም
카탈로니아어cadira
칸나다어 ಸಿಲ್ಲಾ
캄보디아어ស៊ីឡា
타밀어 சில்லா
태국어ซิลลา(silla)
텔루구어సిల్లా(Sillā)
펀잡어ਸਿਲਾ(Silā)
히브리어סילה
힌디어सिला(sila)
하와이어sira
그외그밖의 세계에서는 영어를 따라 SILLA'/SHILLA (신라)로 불린다.

3 독자적 연호

신라의 연호
건원(建元)법흥왕 ~ 진흥왕 (536년 ~ 551년)
개국(開國)진흥왕 (551년 ~ 567년)
대창(大昌)진흥왕 (568년 ~ 572년)
홍제(鴻濟)진흥왕 ~ 진평왕 (572년 ~ 583년)
건복(建福)진평왕 ~ 선덕여왕 (583년 ~ 634년)
인평(仁平)선덕여왕 ~ 진덕여왕 (634년 ~ 647년)
태화(太和)진덕여왕 (647년 ~ 650년)

4 간략한 역사

4.1 건국

청동기가 전래된 이후 권력을 가진 부족장이 등장하면서 생성된 초기 신라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제적, 중앙집권적인 영역 국가가 아니라 지금의 경주시 지역에 있는 6개 촌(이씨의 양산촌, 최씨의 고허촌, 정씨의 진지촌, 손씨의 대수촌, 배씨의 가리촌, 설씨의 고야촌)의 느슨한 소형 연맹체였다. 이 6개의 부족들은 이후 6부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각각 훼부, 사훼부, 본피부, 사피부, 잠훼부, 한기부였다. 이들의 지도자 중에서 신라 전체의 추대되다가 점차 훼부가 왕위를 독점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 지방마다 간, 또는 간지[14]라고 하는 지도자가 있었고 각자 독자적인 세력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왕(王)이라고 불렸다. 흠좀무...

군주의 명칭은 처음엔 거서간이었다가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변했는데, 초대 왕(거서간)인 박혁거세부터 8대 아달라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박씨가, 9대 벌휴 이사금부터 16대 흘해 이사금까지는 대부분 석씨가 계승하였다. 신라 초기에 박-석-김 세 성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이후 신라 지배층에 포섭된 성씨들을 대우하기 위해, 훗날에 술작된 왕권 전설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15]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초기의 신라는 기원전에 건국되어 초반부터 가야 지역의 여러 나라와 상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중복된 기록이 첩출하는 등, 모순이 있어 이것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현재까지도 토론 중인 부분이 있다. 해외 기록으로는 3세기의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진한의 하나인 "사로국"이란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4.2 성장

신라는 성장하면서 주변 진한 12개국을 차례로 병합해 나갔는데, 첨해 이사금(재위 247년 ~ 261년) 시기를 전후로 진한 전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신라가 국가 체제를 공고히 하고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금석문에 최초로 등장하는 내물 마립간(내물왕)(재위 356년 ~ 402년)때다. 이전에는 박, 석, 김 3개 성씨가 돌아가며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내물왕 대에 이르러 김씨의 독점세습제가 굳어지면서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다. 또 내물왕은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했는데 이를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신라에 전래되면서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4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에 있었던 내물왕 대에는 크고 작은 여러 전투가 일어났다. 내물왕 전기에는 백제 전성기인 근초고왕이, 후기는 고구려 전성기인 광개토대왕이 재위에 있었던 시기로, 죽음의 조 이 시기에 삼국은 마한진한을 평정하고 비로소 국경에서 직접적으로 군사적 접촉을 시작하던 때였다. 또 내물왕 대에는 왜의 침략이 잦았는데 여러 차례 왜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재위 말기인 399년 백제, 가야, 의 20만 대군의 연합군이 대규모로 침공했을 때는 우호 관계에 있었던 광개토대왕(재위 392년~413년)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군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이 김해에서 연합군을 격퇴하였으나, 이로 인해 이후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기도 했다.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재위 412년~491년) 시절 전성기에 접어든 고구려는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기며(427년) 남진정책을 펼치면서 백제와 신라에 본격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눌지 마립간(재위 417년~458년)[16]은 백제의 비유왕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여 나제동맹을 맺었다(433년). 나제동맹은 진흥왕성왕이 대립할 때까지 약 120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455년과 47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했을 때 신라는 백제로 지원군을 파병했으며,[17] 494년과 495년에 걸쳐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왔을 때도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4.2.1 중앙집권화

지증왕(재위 500년~514년)과 법흥왕(재위 514년~540년)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중앙집권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지증왕(재위 500년~514년)대에 대대적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 강화를 이루었다.나라 이름을 정식으로 "신라"로 바꾸고(503년) 마립간 대신 왕(王)을 칭하였다. 또 관등 정비(503년), 상복 제정(504년) 등을 통해 체제를 정비했고 지방제도를 개편했다(505년). 아울러 502년 우경법을 실시하여 식량 생산이 크게 증대되어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써 12개의 성을 축조했고, 동시전도 설치했으며(509년), 수군을 보내 우산국(울릉도)를 복속시켰다(512년).

법흥왕(재위 514년~540년) 때는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크게 강화하여 중앙집권국가로 변모를 시도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체제를 정비했다(520년). 또 이차돈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했는데(527년) 왕족을 석가족과 동일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동시에 토속신앙의 제사장이었던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아울러 상대등 직위를 신설하여 귀족대표를 관료체계에 포함시켜서 귀족세력을 왕권에 복속시켰다(531년).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기도 하였다(536년). 또 532년에는 금관가야를 병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4.3 진흥왕대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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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6세기 진흥왕(재위 540년~576년) 때에 이르러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재편했으며 불교의 융성을 통한 국가 결속의 강화를 위해 545년에는 황룡사를 건립했다.[18]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대대적인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진흥왕은 나제동맹에 있던 백제와 동시에 고구려를 공격해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했다(551년). 이때 백제도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6군을 점령했는데, 이후 백제군이 한강 유역에서 철군하자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의 항구를 통하여 백제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은 북쪽으로 고구려 경략을 계속하여 지금의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했다. 이후 점령 지역을 시찰하면서 마운령순수비와 황초령순수비를 세웠다(568년).

한편 남쪽으로는 남아있던 가야 세력을 경략하여 대가야의 합병(562년)을 끝으로 가야 전지역을 완전히 병합했다.

영토확장과 더불어 여러 사찰의 창건이 눈에 띈다. 진흥왕은 측근들을 통해 황룡사를 비롯하여, 법주사, 화엄사 등 여러 사찰을 건립했다. 활발한 영토확장을 벌이면서 불교를 통해 국력을 결집하려 했던 신라 고유의 호국불교를 잘 활용하였음이 엿보인다. 황룡사는 수도 서라벌 한 복판에 세워져 국력을 결집하는 역할을 했으며, 법주사, 화엄사는 새로 편입된 전방지역에 세워졌는데, 불교를 통해 새로 복속된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기록에 의하면 해당 사찰에서 고승들이 화랑들에게 불법을 강연하는 등 군사적 용도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전통적으로 정복을 통해 새로 복속된 지역에 적극적인 유화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전통은 신라가 6촌의 연맹체로 출발한 기원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화정책을 통해 새로 편입된 진한가야의 백성들은 위화감 없이 신라에 융화되었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야 멸망 후 신라 왕족과 명목상 동급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단, 삼국통일 후 백제에 대한 유화책은 그 앞선 시대에 비해 미흡했던 건 사실이다. 고구려 귀족은 6두품, 백제 귀족은 5두품을 받았는데, 백제의 경우 완전 동급으로 대우해줬던 전례와 비교하면 다소 박한 조치라 볼 수 있다.[19][20] 겉으로는 신라에 맞서 부흥 운동을 도와준다고 하면서도 온갖 폭압과 만행을 일삼는 당나라 군대 탓에, 백제, 고구려 유민 들은 신라 쪽 손을 들어주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이후엔 한동안 신라의 백성으로 만족하고 살았으나, 사회 체제가 점점 발전되고 지방의 경제적 실력은 향상되는데 왕경 인을 우선하는 제도는 여전한 현실이 대두하자, 그 후엔 사정이 바뀌게 된다.[21]

4.4 백제고구려의 공격

진흥왕이 고구려와 백제를 들쑤시고 다니며 넓은 영토를 차지한 덕분에 진흥왕 사후 진지왕진평왕(재위 579년~632년)대에 들어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해오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국경이 분리되어 이제는 두 나라로부터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백제는 전국경이 신라와 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라와의 전쟁에 모든 국력을 동원하였다. 고구려 또한 남쪽의 국경선이 모두 신라와 접하게 되었으며, 한강 유역의 영토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신라와 전투를 치뤘으며 이 과정에서 온달장군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 결과 진흥왕이 점령한 함경도 지역 북쪽 영토 일부는 다시 고구려에 상실하기도 했다.

7세기에 접어들자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은 더욱 빈번해졌고 특히 백제는 호전적인 무왕의자왕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백제는 일본, 고구려, 중국과 외교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진평왕(재위 579년~632년) 사후에는 성골 출신 남성 후계자가 없어 신라 최초의 여왕선덕여왕(재위 632년~647년)과 진덕여왕(재위 647년~654년)이 연이어 즉위했다. 여왕들이 연이어 집권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겨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22] 641년에 즉위한 백제 의자왕은 호전성을 드러내며 즉위 직후 신라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하는데 이때를 삼국통일전쟁의 시발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특히 642년 백제에 대야성[23]이 함락당하면서 당시 유력자였던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사망한 것은 신라로서는 뼈아픈 일이었다.[24] 대야성 함락 이후 신라는 다른 나라(고구려, 당)와 군사적 연합을 모색하게 된다. 이후에도 연이은 전투로 빼앗은 영토를 다시 빼앗기는 소모전의 양상이 계속되었다. 이 당시 김유신은 집 앞을 지나칠 때도 집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래 사람을 시켜 집 안의 우물물만 마시고 바로 전쟁터로 떠났을 정도였다. 《삼국사기》열전 가운데 신라계 인물의 상당수가 이 무렵에 활약하는데, 또 그 중에 많은 부분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4.5 나당동맹

대야성 함락(642년) 직후 신라는 백제와의 전투에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친을 맺기로 결정하고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처음에 김춘추를 환대했던 연개소문은 백제 성충의 밀지[25]의 편지를 받은 후 돌변해 김춘추를 투옥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642년).

고구려와의 회담이 결렬된 후 648년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군사동맹(나당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로 국경을 나누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6]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 아래를 참조. 어쨌거나 이로서 나당연합군이 성립되었고 이에 고구려와 백제, 일본이 연합을 맺어 응수했다.[27]

신라가 나당동맹을 맺어 외세의 힘을 빌려 동족을 멸망시켰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중국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는 백제의 오랜 외교정책이었다. 백제의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밀서를 보내 고구려를 침략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 사실이 고구려에게 발각되어 분노한 장수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략하고 개로왕과 귀족들을 처형하여 백제가 파탄난 적이 있었다(475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백제 위덕왕수문제에게 여러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고구려 지형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물자와 군사를 보내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수나라가 실제로 고구려를 침공하자 백제는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수나라를 지원했다. 그러나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실패로 끝냈고 백제는 오히려 고구려의 보복공격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은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덕왕은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재침공해달라고 종용했다. 위덕왕 사후 무왕 역시 자발적으로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침략해 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으나 이는 수나라의 멸망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세워지자 무왕은 당나라에 고구려 침공을 거듭 요청했고 이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것에 일조했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과 회담을 할때, 백제 성충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어 고구려가 신라와 화친을 맺는다면 백제는 당나라에 협력하여 당에게 자원을 제공하고 고구려로 진격할 길 안내를 할 것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백제 성충의 이같은 협박은 연개소문이 신라의 화친 제의를 거절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당나라는 건국초기부터 신라, 백제와 모두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신라보다는 백제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나라는 신라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만, 당태종은 선덕여왕이 여자라 이웃나라들이 우습게 보고 계속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차라리 당나라 황실 종친을 왕으로 앉히는 것이 어떠냐는 황당한 제안을 하기도 하고,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을 문제삼아 시비를 거는 등 그렇게 매끄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외교관계에 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원군을 요청했는데, 연개소문의 김춘추 구금으로 고구려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신라는 당나라의 요구대로 원군을 보내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했다. 반면에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던 선대 무왕의 약조를 깨고 당나라의 파병 요청을 씹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로 출정 중이던 신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이일로 당태종은 백제와의 외교를 단절하여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고, 신라를 한반도의 유일한 외교 파트너로 삼았다.

사실 나당동맹이 체결(648년)된 것은 애초에 당태종이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에 대해 딴죽을 걸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김춘추가 당나라로 건나간 것인데, 의외로 김춘추와 당태종이 죽이 잘 맞아서 체류하는 동안 잦은 술자리를 갖던 와중에 체결된 것이다.

4.5.1 당나라와의 영토 협약에 대해

삼국사기의 실제 기록에는 진덕여왕 2년(648년)에 당시 이찬이던 김춘추가 당태종을 알현해 백제의 침공을 고하고 군사를 내줄 것을 요청하자 당태종이 그에 응했으며 복귀하는 도중에 고구려의 순라병에게 걸렸다가 겨우 탈출한 이야기가 실려있으며 당태종과의 영토분할 협약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구당서신당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다만, 구당서 199권 동이(東夷) 편에, 백제부흥군의 복신유인궤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 중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존재한다.

大唐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以國府新羅.

듣자하니, 대당백제늙고 어린 것을 묻지않고 한 번에 죽인 후에 나라와 고을을 신라에게 줄 것이라 맹세했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설인귀의 서신에 보낸 답장인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 서두에도 당태종이 했다는 약속이 표현되고 있다.

今伐髙麗非有他故 憐你新羅攝乎兩國每被侵陵靡有寧歳 山川土地非我所貪玉帛子女是我所有 我平定兩國平壤已南百濟土地並乞你新羅永爲安逸垂

지금 내가 고려(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를 불쌍히 여긴 것이로다. 두 나라에게 매번 수확철에도 침략을 당하니 말이다. 산천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며 옥백자녀(귀한 보배)는 나도 가지고 있다. 나는 두 나라를 평정하고 평양 이남 백제 토지를 너희에게 주어 오래토록 너희신라에 평안함이 드리우게 하리라.

즉, 김춘추당태종 간에 있었다는 밀약에 대한 것은 많은 논쟁거리를 지니고 있다.

복신의 서신문의 경우, 복신 자신도 '聞(들었다, 듣자하니)' 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는 저항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서 '인용'에 가깝지만 신라가 당과 짜고 백제 땅을 넘겨받기로 했다는 점이 당시 한반도의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답당설총관인귀서에 등장하는 당태종의 발언은 일종의 구두계약에 가까운데다 남겨진 문서가 없어 밀약의 확증이 되기 어려울뿐더러 만약 효력이 있었다면 당 고종이 웅진도독부를 세우고 신라왕을 계림도독에 임명한 사건 등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태종이 언급한 신라에게 할당하는 영토의 범위가 꽤 구체적이고 신라가 적극적으로 당과의 협력전에 열심이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기는 어려운 점도 분명하다.

이 골때리는 영토 협약 문제는 성덕왕 34년, 성덕왕이 패강(浿江) 이남을 사여(賜與), 즉 빌려달라고 요청했고[28] 당시 당나라 황제였던 당현종이 등주(登州)를 침공한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김의충 편으로 패강 이남을 신라에 넘겨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4.6 삼국통일나당전쟁

4.6.1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에 즉위한 후 나당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 정벌을 실행에 옮길 것을 당에 촉구하였고 당고종이 이에 응하여 마침내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각각 해상과 육로로 백제 공격을 개시했다. 이미 지속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진한 상태에서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했던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고수전쟁부터 이어진 잦은 대규모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나당연합군은 소규모 공세를 반복하여 고구려의 국력이 점차 고갈되기를 노렸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와 대결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하고 고구려와의 전투에는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전력을 비축했다. 665년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자 세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건너가 당나라군의 앞잡이 노릇까지 하였다. 고구려 남부 전선 역시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12개 성을 바치며 신라에 투항하는 등 제대로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고구려는 무너지고 있었다. 666년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했고, 신라 역시 국력을 총동원해 20만 대군으로 남쪽에서 쳐들어 올라갔으며 사천 전투의 승리를 거쳐 668년 7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에 먼저 도착해 있던 당군과 합류해 평양을 포위했다. 9월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했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와 백제의 상태가 알아서 막장일 때 운 좋게 신라가 쉽게 통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뇌부가 막장이었어도 인구수나 생산력에서 적어도 고구려는 여전히 신라보다 앞서 있었다. 또 고구려나 백제 수뇌부도 몇 십 년 전만 해도 연개소문이나 친위쿠데타 전의 의자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나라였다. 신라는 수십 년간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인 협공을 방어하면서 수도 없이 위기를 맞았지만 외교줄타기의 성공, 지리적 이점, 강력한 당 군의 존재, 신라의 정치가 고구려와 백제처럼 막장이었을 때 고구려는 당과 싸우느라, 백제는 국력자체의 한계에 당의 압력, 귀족들 간의 대립 때문에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함이라는 천운이 맞물리면서 기적처럼 다른 두 나라를 쳐내고 통일을 이룬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걸 보여준 것.

4.6.2 나당전쟁

하지만 백제고구려멸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전쟁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나당전쟁이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되어 있던 구 백제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 땅을 날로 먹으려 했고, 이어 신라본토에 계림대도독부를 두어 백제,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으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당나라는 취리산 화맹 사건으로 문무왕과 괴뢰국 웅진도독부의 도독 부여융을 거의 동급으로 대우하는 굴욕을 주기도 했다.

신라는 당나라의 직접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 없었지만, 당나라의 연이은 굴욕적인 조치에 반발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이에 응하면서 내부적으로 당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했다. 백제에 설치한 5도독부도 당나라가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한 약조를 깬 것이었지만, 신라는 이에 항의하기보다 5도독부에 주둔한 당군을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이용했다. 또 그와중에도 신라군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당나라로부터 구 백제 영토에 대한 직접 지배권을 확대해 나갔다. 신라 영토의 확대로 구백제 지역에서 5도독부의 영토가 계속 줄어들자 결국 백강 전투(663년) 이후 당나라는 5도독부를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하고 나머지 네개 도독부를 폐지했다.

이 와중에 신라는 대고구려 전쟁에 당나라와 참전하면서도 주력군을 최대한 아끼고 구진천 등을 시켜 당나라와의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9년 신라는 선제 공격으로 당나라와 국운을 건 정면 대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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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건국 이래 전통대로 백제와 고구려 정복 지역에 대해서도 유화 정책[29]을 취했는데, 이는 점령지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던 당나라군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잔존 세력들이 신라의 편에 붙어 당나라와 싸우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일통삼한'의 기치를 내걸고 백제인과 고구려인들을 하나로 규합하려 했다. 실제 나당전쟁 당시 신라군에서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반수 이상이었다. 신라는 투항한 고구려의 왕자 안승골품제 최고 등급 진골로 편입시켜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유화, 동화 정책을 펼쳤으며 백제 땅에 주둔해 있는 당나라군을 차례로 공격하여 백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당의 자체 국력은 신라를 능가했으나 전장이 신라의 홈그라운드에 가까웠는데다 그동안 고구려를 공격하느라 소모한 국력이 너무 많았고 각종 내부사정과 송첸캄포 대의 토번 등 후방의 다른 외세와의 일 때문에 신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재개할 수 없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신라는 애초에 당과 약속했던 대동강 이북으로는 더 이상 북진하지 않았다. 이미 당이 먼저 약속을 깼기 때문에 대동강 이남 지역까지만 차지하겠다는 약속을 굳이 지켜야할 명분은 없어졌지만, 척박한 이북 지역에 대한 필요성의 부재[30], 향후 당나라의 재침략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함, 당나라 재침략시 수비 용이성 등을 고려하여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결정한 듯하다. 사료를 분석한 일부 사람들은 애당초 백제 영토+@만을 차지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내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에는 당나라의 지배를 떨쳐내고 고구려를 사실상 계승한 발해가 새로 들어서면서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옛 수도평양은 신라와 발해의 국경에 위치했기 때문에 남북국 시대엔 폐허나 다름없이 방치되었다가 약 200년 뒤 고려왕건이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그나마 도시다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현대에는 나당전쟁 이후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영토가 너무 적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점이 널리 지적된다. 일단 당시 신라인들이 삼한을 일통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한데, 예를 들면 삼국사기 신문왕 12년(서기 692년)의 기사를 보면 김춘추김유신 등이 한마음으로 이룬 일통삼한(一統三韓)이 명시돼 있다. 참고로 이 시기는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이다. 상당한 수의 고구려 유민이 신라에 흡수된 것 또한 사실이며, 행정구역 설정(9주 5소경)이나 군사편제(9서당) 같은 걸 봐도 옛 고구려, 백제, 신라 땅에 거의 동등하게 영토와 군대를 분배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이렇게 통일신라를 자부하던 중 북쪽에서 또다른 고구려 유민 집단이 주체적으로 발해를 건설했는데, 고구려의 후계자를 주장한 발해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적합하다고 보기 어려워진다. 때문에 삼국통일 이후로는 통일신라시대보단 남북국시대라고 칭하는 사례가 늘어나며, 사실 676년 이전에 삼국 사이에 지금과 같은 동족 의식이 있었는 진 불분명하다. 당시 신라는 '삼한일통'을 내걸고 싸웠고 이러한 기치 아래 나당전쟁에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군과 함께 당나라와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는 민족의 통일을 위해 싸운 것이라기보다 백제와 고구려라는 가까운 두 적, 그리고 이 두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맞닥드리게 된 당나라라는 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싸워 이겼다고 보는 게 더 맞다. 또한, 신라의 목적이 어떠했든 당대 최고의 세계 제국과 싸워,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지역을 수호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이며, 또한 당나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군사적인 소모를 강요했던 신라가 아니었다면 발해의 건국도 불가능했다. 결국, 신라는 나당 전쟁을 통해 한반도 남부는 직접적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는 간접적으로 당나라에 대해 지켜낸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인정한다면, 고구려 멸망만 강조하면서 민족의 배신 운운하는 이상한 견해는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후의 기간은 나라의 이름은 통일신라로, 이 시대를 통일신라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북쪽에는 곧 고구려의 잔존 세력에 의해 발해가 건국되어서 시대는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변한 편이다. 이후 신라는 중앙집권제도를 실시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게 되는데 이 약 130년의 기간을 신라 중대라고 구분하며 대체적으로 신라의 전성기는 이때쯤이라고 볼 수 있다.

4.7 통일신라[31]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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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백제 고위층 및 진골 고위층을 섞어서 이주시켜 만든 서원경(지금의 청주시)과, 주로 고구려 고위층을 이주시켜 설치한 남원경(지금의 남원시 일대)이 설치되었고, 옛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엔 여섯개의 를 설치하여 9주 5소경 제도가 완성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백제계 인구를 포함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고구려계 3개 부대,[32] 백제계 2개 부대[33], 신라계 3개 부대[34], 말갈계 1개 부대[35]로 구성된 9서당에, 9주에 각각 1정씩(단 면적이 넓은 국경 변경지대인 한주는 2개 정)을 두어 9서당 10정 편제를 완성했다. 신라가 나머지 두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한 형태의 통일이었음에도 행정구역을 고구려 백제 신라 각각 똑같이 3주씩, 신라 수도권의 방어와 치안을 담당하는 부대 9서당 역시 옛 삼국 소속국별로 비슷한 비율로 분배해서 배치한 것은 당대 신라의 삼국통일 의식의 나름대로의 실천으로 여겨진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도 안정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스스로의 통치를 돌이키는 과정에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사회전반의 안정을 가져왔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했고, 갈문왕 제도도 없앴다. 아울러 이 때부터 한동안 태종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 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삼국통일에 힘입어 그 동안 군사력에 치중하였던 역량이 내부로 쏟아지면서 신라는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화려한 예술품들과 불교 예술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으며[36], 특히 헌강왕 시절에는 서라벌에는 집집마다 기와가 덮여있었고,집집마다 으로 을 하여 연기가 피어나지 않았던 등 국력의 강대함을 자랑했다.[37] 8~9세기에 들어 아랍페르시아의 신라에 대한 기록이 크게 늘어나는데, 관련 기사 일관적으로 귀금속이 많이 나고 자연환경이 좋다고 나와있다. 물론 먼 나라의 이야기를 적은 얘기니만큼 황금의 나라 지팡구처럼 허구나 과장도 어느정도 있겠으나, 알려진 절대 다수의 사료가 긍정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좋게 보여진게 있는 듯.[38] 알 마수디( المسعودي )의 기록 <황금초원과 보석광산(The Meadows of Gold and Mines of Gems; مروج الذهب ومعادن الجواهر‎> 프랑스어 번역판 346쪽 영문판[39] [40][41] 원성왕릉(괘릉)을 지키는 무인상도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수피주의자의 터번을 쓰고있는 등 직접 보지 않으면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한 점을 고려할 때 이미 상당수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계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당시 중동 사람들에게는 으로 여겨져 신라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된 경우가 많았다. 주로 무역 중심지가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남쪽인데다, 역사적으로 육로란 육로는 고구려백제부터 시작해서 발해, 고려, 후백제 등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수도 서라벌인구는 수십만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진한조)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주 한 곳에만 8~9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뜻. 고려 수도 개경의 2~3 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가 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학계는 서라벌은 커녕 통일신라 국가 전체의 최대 인구를 400만 내외로 추정한다. 또한, 그 시대에 전체 인구 400만명 가운데 경주에만 90만 명이 몰려 살았다는 건 근본적으로 납득이 어렵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만큼 들이 넓지 않다.[42] 아파트도 없던 시대에 그래서 삼국유사의 17만8936호는 17만8936구(약 35만)의 오기가 아니냐는 주장부터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등의 설들이 있다. 또한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관련 기사

4.8 쇠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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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후반에 이르자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국운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국가가 해체되는 국면에 접어든다. 이 시기에 성장한 신라의 지방세력을 역사적으로는 호족이라고 칭한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이후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세력이 다시 정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쿠데타가 일어나 중앙 정치는 불안정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로서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피지배 계층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호족들에게 의탁하거나 아니면 도적이 되어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지방세력이 강화된에 따라 공무역이 쇠퇴하고 9세기 중엽의 문성왕(文聖王) 이후 민간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당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인해,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 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장보고최수종 등의 해상세력이 약진하기 시작한다. 장보고는 중앙정치에도 개입, 신무왕의 즉위를 도왔지만, 태자비를 세우는 데까지 손을 쓰려다가 옛 부하였던, 수도에서 온 자객 염장송일국에게 살해당하고, 청해진도 해체되었다.

하지만, 녹읍제가 부활한 757년에 신라의 지방행정제도가 전면적으로 재개편되어 9주 5소경제가 정비된 점으로 미뤄 보아, 녹읍제의 부활이 전대의 녹읍과 같은 단순한 관리 녹봉의 성격을 떠나, 관료전의 설치 이후 촌락에 대한 국가와 관료의 이중적인 수취를 통한 지배의 불통일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설치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무엇보다 녹봉제는 쌀의 운반에 드는 인력과 다시 재분배 하는 등에 소요되는 자원을 국가에서 부담해야 하지만 녹읍제는 관료가 직접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이라는 이점도 컸다. 이 당시에 역병이 심하게 유행하여 국가의 인력이 크게 손상된 상황이었기에, 녹봉 제를 실시하는 데 들어가는 부담을 덜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점도 고려해봐야 하고. 그러나 문제는, 경덕왕 다음 왕인 혜공왕이 왕으로써 그다지 뛰어난 왕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혜공왕이 결국 살해되어 무열왕계가 쫓겨난 후, 이 제도는 효과보다는 폐단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항목에도 있지만 이 시기는 쇠퇴의 시작은 맞지만 890년 이후의 국가 막장 테크급은 아니다.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을 상당히 빨리 진압하고 일부 지역에는 7년간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이 시기까지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충분했고 오히려 이를 기회로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었으나 천년에 이르는 세월의 한계인지, 아니면 골품제를 끝까지 유지해서인지 그 영광을 되찾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서기 890년경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는 궁색한 처지에 놓인다. 당대 신라에는 골품 신분에 의해 출세의 한계가 결정되는 것 때문에 과거 제도가 존재하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빈공과 급제 후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 들과 선종 승려들은 호족과 결탁하여 반신라적인 입장에서 후삼국시대를 주도하게 된다.

4.9 /후삼국시대

한국의 역사
남북국시대후삼국시대고려
고려 / 신라 /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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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대에 이르러, 부패와 사회혼란이 극에 달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지방에선 호족이 득세하였다. 결국 옛 지역의 인심을 얻은 궁예후고구려견훤후백제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신라는 삼국시대 말기와 삼국통일전쟁 때 개척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삼국시대 초반기 때의 영역인 수도 경주시영남권 일대로 다시 축소되어[43][44]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삼국시대에 들어오면 본래 종주권을 가진 나라였음에도 너무 나라가 기울어서 연전연패를 거듭할 뿐, 속수무책으로 지방군벌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가 왕권을 되찾게 되었고, 편견과는 달리 그래도 대야성에서 후백제의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아내기도 했고, 뭔가 해 보려고 견훤과 달리 신라에 덜 적대적이었던 고려와 연합해 이런저런 조치를 하여, 후백제가 경상도를 더 이상 마음껏 제집처럼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데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뜩이나 다혈질로 추정되는 견훤을 엄청나게 자극했고, 크게 분노한 견훤은 끝내 서라벌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겁탈한다. 그리고 김부(경순왕)을 왕위에 올린다.[45]

다만 이후에, 신라가 상황을 완전히 포기하고 수동적으로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고려후백제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도, 신라의 경순왕은 형식적으로나마 취했던 존왕의 의마저도 마음껏 무시하는 왕건과 국서를 교환하는 상황이었을망정 그래도 나름대로의 저울질은 하면서 왕건에게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주 내부에서도 반발하는 기운이 있었고, 견훤의 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 군대가 또 다시 경주를 점령하기 위해 육박한 크나큰 위기 상황에서도 고려와 연합 작전을 해서 경북 의성에서 침공을 막아낸 성과도 있었다.[46]

하지만 신라의 국력은 나날이 약해져 갔다. 그리고 930년과 934년 고려와 후백제간 고창, 운주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면서 사실상 후삼국을 통일할 대세가 고려로 기울어지자 935년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함으로서 신라는 멸망했다. 이후 신라가 멸망한 뒤 고려시대에 몇 차례 신라부흥운동이 있었지만 고구려, 백제, 발해의 부흥운동만큼 치열하지 않았고 모두 실패하였다.

5 사회

신라는 같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에 비하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 정착한 시기가 늦은 편이었다. 나라를 세운 성씨 집안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등 왕실 세력이 일정했던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조선과 달리 신라는 건국 초기 박씨, 석씨, 김씨 등 서로 다른 성씨 집안 사람이 왕위를 이어가며 박씨 왕조에서 김씨 왕조, 석씨 왕조 등으로 바뀌어가며 왕실의 기복이 심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삼국시대 중기 내물왕 이후 김씨 왕조로 변모되어 김씨가 오랫동안 왕위를 독점했지만 내부적으로 불안정성은 있었다. 이후 통일신라가 몰락하고 후삼국시대가 도래하여 김씨왕조가 약화되자 박씨 세력들이 김씨를 몰아내고 다시 박씨가 왕권을 장악할 정도였었다.

5.1 골품제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신분제인 골품제가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가 유명해서 그렇지 백제, 고구려를 비롯해 고대왕국들은 대부분 골품제와 유사한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선 해당문서를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는게 좋겠다. 여담으로 신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인 고려시대까지도 옛 신라 출신 귀족들은 골품으로 서로를 텃세하며 같은 골품끼리 파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볼 때, 신라에서 골품제의 전통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그렇게 서로 텃세해도 경순왕 귀부 전에 고려에 진출했던 6두품에 비교해선 상당히 입장이 약할 수밖엔 없었다. 통일신라 때는 6두품이 진골 앞에서 고개를 드는 것조차 어려운 꼴이었지만, 적어도 왕건 때부터는 고려의 관직을 가진 6두품이 진골 앞에서 '너는 망한 나라 신하, 나는 흥한 나라 신하'라는 식으로 위세를 부리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었다. 물론 옛 진골 층들은 이런 상황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나말여초 정치 제도사 연구 참조.

5.2 관직

신라 중앙정치는 귀족들의 합의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국왕 직속의 행정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대립으로 대표된다. 귀족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귀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등이 강한 권력을 지녔고,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권력이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에는 상대등, 중기에는 시중,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서열관직명진골6두품5두품4두품중시령시랑,경도독사신군태수현령
1이벌찬
2이찬
3잡찬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7일길찬
8사찬
9급벌찬
10대나마
11나마
12대사
13사지
14길사
15대오
16소오
17조위

신라관직골품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17등급으로 구성되어 있고 골품에 따라 골품 당 최대한으로 승진할수 있는 등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은 6등급 아찬,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 대사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다. 각부의 장관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령(令)은 5등급인 대아찬 이상부터 오를수 있었으니 사실상 진골만이 이 지위를 획득할수 있었고 각부의 차관격인 경(卿)은 11관등에서 6관등의 사람, 즉 진골과 6두품만이 오를 수 있었다.

17관등 위에 특별직인 대각간, 태대각간이 있었다. 1등급 각간(이벌찬의 다른 이름)에 대 자를 붙여서 높인 것.

태봉후백제, 그리고 고려도 초기에 잠깐 동안 신라의 관등체계를 가져다 쓰거나 조금 변형해서 쓰기도 했다. 물론 이쪽은 골품제는 적용되지 않은 듯.

5.3 화랑

신라는 청소년들은 화랑도에 귀속시켜 국가적 인재양성을 꾀하였다. 대체적으로 고위급 자체들이 화랑이 되고 하위 골품의 인원들이 낭도가 되어 따르는 방식이었으며 이들은 유명한 과 큰 을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전쟁, 유불선 사상을 학습하면서 국가의 인재들로 성장하여 삼국통일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삼국 통일 후에는 그러한 과정에서 지방민들에게 주는 부담이 점점 커지게 되어, 적어도 말기엔 지방 일반의 신라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강화시켰던 것 또한 확실하다...[47]

5.4 언어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남아있는 자료를 보면 현대 한국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한가지 자료를 들자면 《일본서기》에 신라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 왜의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48] 일본서기 562년 7월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 일 테니 뭔가 아쉬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욕이라던지, 아니면 구수니자리가 내가 고자라니처럼 탄식한 말이라던지 아니면 쿳! 니 자리(너희 성..까지 왔으니 못 잡겠군!!)이라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일본서기 등을 보면 백제어신라어는 같은 계통의 언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서기 비다츠 천황조에 의하면 백제어는 왜국어(고대 일본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신라가 중국계 어휘를 많이 받아들여서 그 나라의 언어에 중국에서 쓰인 단어가 많이 있었다고 하나 기본적으로는 삼한계통의 국가였고 조선계 유민들이 남하해왔기 때문에 조선(고조선)과 부여가 기본적으로 같은 종족(예인)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백제와 신라의 언어는 같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백제 지배층과 고구려의 언어가 같았지만, 이것이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도 언어가 통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어쨌거나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 고구려와 신라 간의 기록을 보면 서로 간에 대화가 어렵지 않게 통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인명 자료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것이 같다는 이유로 일본 학자 중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방언상 차이는 크지만 서로 언어가 통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결시키는 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정작 당대 기록을 보면 고구려 약광왕 관련 사료만 봐도 고구려인들은 왜국인(일본인)들을 자신들의 동족이라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이 대놓고 나온다. 그리고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기록만 봐도 백제어를 일본어와 연결시키는 걸 대놓고 부정하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 내 사서들부터가 부여어족은 왜국과 다른 계통의 언어였다는 걸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비록 언어 동조대적 개념에서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은 언어적 어휘가 많이 전파되기는 했으나 부여어족과 일본어는 계통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건 일본서기 내에 나오는 가야어의 발음도 현대 한국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가아야에서도 국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현대 한국어와 동일한 '나라' 라고 표현하고 백제어에서도 곰을 뜻하는 단어로 고마, 곰, 고무 등이 있었다. 거의 똑같다. 고구려어나 가야어에서 '아래 (방향어)' 를 가리키는 단어로 아리라고 하여 현대 한국어의 아래와 발음의 굉장히 유사하다.

백제의 언어 경우 이기문 박사가 백제어가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나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일본서기 기록 등을 보면 이는 근거없는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단지 건길지나 어라하 등의 칭호가 달랐다고 언어가 다르다고 할 근거는 없다. 조선 시대 때 신하들은 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백성들은 임금님이라고 불렀다고 조선의 언어는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계 귀족들도 백제왕을 건길지에 해당하는 코니키시라고 부른다. 단순히 호칭상의 차이일뿐 이런 게 언어가 달랐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일본서기 인명만 봐도 아직기, 아화 등을 아지키, 아콰 라고 표기하고 있다. 현대 한국어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게 놀랍다.

고구려, 백제, 가야언어가 이렇게 현대 한국어와 유사성을 보이는데 신라가 이들과 언어가 달랐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수서 동이전 신라전에서는 신라고구려, 백제의복이 같고 풍속도 같다고 한다. 의복도 같고 풍속도 같은데 언어가 다를 가능성은 낮다.

백제는 계통상 조선, 부여계 예인(고조선인, 부여인), 맥인(고구려인)과 삼한인이 연합하여 세워진 예맥한 연합 국가고 신라 역시 예인 계통인 조선의 유민, 진한의 토착민 (삼한인), 왜인, 중국 진나라계 유이민 등이 합쳐져서 세워진 국가이다. 신라도 처음 건국 당시에는 백제와 마찬가지도 예인과 한인이 연합해서 세워진 국가였다.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 언어였다는 건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일본서기 내에 더 자세하게 나온다. 당시 일본은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국가들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경우도 한국어 계통으로 추정되는 고대 언어들과 만주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일관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어의 경우도 한국어 계통의 고대 언어들과 표기상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중국 사서들에 의거해도 고구려, 백제는 언어가 통했다는 걸 알 수 있고 백제와 신라 간에도 언어가 통한 걸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5.5 경제

구릉과 산지가 많은 한반도 북부와 달리 남부에는 비록 산지가 많았지만 농사에 적합한 기후에 산과 산 사이로는 평지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신라의 거점이었던 경주에는 거대한 하천인[49] 형산강이 있어 울산에서 경주까지 형산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농경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성립 초기부터 안정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세력을 형성하였고,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한반도 중부를 차지하여 막대한 농경지를 얻어 삼국통일 이전부터 삼국 중 가장 많은 주요 농경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기지역과 경상도 지역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벼와 곡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한강과 형산강을 중심으로 대규모 하천과 평야지대를 많이 접한 신라였기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관개설비를 정비하며 논농사가 수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전체 농토 중 논과 밭이 어느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시기를 다룬 행정자료인 신라 촌락 문서에 기재된 촌락의 논과 밭의 비중은 논은 102결, 밭은 62결 정도로 밭보다 논이 더 많음이 확인된다. 물론 아직까지 전체적인 논과 밭을 다룬 토지자료가 발굴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전체 농토의 논/밭 비중이 어떠한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논/밭의 비중과 별개로 농토의 공/민유지는 전체논의 10%미만 정도가 국유지 내지는 관유지이고 나머지 90%는 농민들의 농토로 보인다.

농토의 크기는 결과 부, 속 등으로 그 규모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결부의 개념처럼 농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절대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토지의 규모에 따라 조세를 부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토를 둘러싼 농민들의 소유형태는 당시 신라가 본받은 당나라의 조용조 제도나 정전제 개념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사유재산의 개념처럼 온전히 백성의 사유지라기 보다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왕에게 있고 농민들은 그땅의 경작권만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땅을 파는 매매나, 땅을 담보로 하여 자금이나 물자를 빌린다거나, 땅의 소유권 등을 등기하는 것 등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졌으면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전제가 실시되었지만, 신라 말기에 호족세력이 궐기한 점이나, 전체적으로 귀족의 경제력이 튼튼한 점 등 전체적으로 지방 유력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주변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없이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영농민보다 서구의 농노나 조선시대의 노비나 조선초기의 전호들처럼 자기 논밭이 있지만, 휴경등의 이유로 자신의 논밭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귀족의 논밭을 경작해주는 대가로 식물의 종자나 대형 농기구를 빌리는 형태의 장원(농업)경작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물론 통일신라나 내외부적으로 전쟁이 줄어든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외부로의 세력확대나 주변국의 침입,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초기에는 휴경기에 귀족의 논밭을 경작하기보다 농민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도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 밖에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면, 토지와 주택, 주거지의 규모, 가축과 임목의 숫자와 종류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인구의 증감, 재산의 증감을 아주 정확하게 살펴보고 있다. 농업용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후대에도 있었던 공통적인 사항이지만, 가축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특히 농업용 가축이 아닌 말의 숫자를 파악하여 전쟁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상시 동원하고 관리할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산림지역을 무주공산으로 방치해 전국에 민둥산을 양산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산림의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까지 개수와 수종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리하는 것이 확인된다. 해당 문서나 다른 자료에서 신라의 수공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수공업 자재의 일종으로 수천그루의 나무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보아 비단 생산이나 목공을 위한 대규모 공업시설이나 수공업체계의 존재 등이 추정되고, 전성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대한 기록에서 으로 요리를 하며 사치를 누렸다는 것이 등장하는데, 체계적인 임목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땔감이나 목재의 공급이 안정적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문서에서는 전체 임목 중 뽕나무 재배수량이 유달리 많은데, 촌락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이 뽕나무 육성에 특화된 마을인지 아니면 신라가 전체적으로 뽕나무 육성에 주력하였는지는 이 시기 행정자료가 촌락문서 하나뿐이라 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라(羅) 자체가 비단이라는 뜻이 있고, 이 촌락문서가 작성되기 한참 이전인 삼국통일 이전, 신라라는 국호가 지증왕대에 확정되기 전부터도 유잠국(有蠶國) 같은 누에치기와 연관이 깊은 이름을 썼던 기록이 있어서 원래 신라가 뽕나무 및 누에치기에 국가적으로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뽕나무는 보통 뽕잎이 누에의 먹이로써 비단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고, 뽕나무 자체가 활과 화살통을 만드는데 주요한 재료였다는 점, 나뭇잎이 넓은 활엽수는 비록 나무전체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목질이 단단하여 가구재로서 적합해 수공업이나 공업용 재료로서 적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촌락문서의 뽕나무 재배수량이 많은 점은 상공업을 위해 육성한 것으로 보인다. 뽕나무 항목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열매채집시기가 모를 심는 농번기와 겹치고, 뽕나무를 심으면 그 주변에 뿌리를 내려 다른 작물의 식생을 방해하므로 보통 농지와 멀리 떨어진 늪지나 습지 혹은 외곽에 심는다. 그러므로 농업을 보조하거나, 도와주기에 적합한 수목은 결코 아니다.

수공업면에서는 신라는 자가생산 자가소비를 위한 농촌가내수공업외에 귀족이나 왕족을 위한 소비재화를 만들기 위한 수공업자들이 존재하였는데, 국가권력의 통제에 따라서 장인의 신분도 등급별로 나뉘어 골품을 하사받는 기술자가 있는가 하면, 부역에 동원되어 기술노역만 제공하는 사람, 그외에 왕실수공업을 위해 노비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하였다. 시장에 관한 기록은 지방에 있는 시장보다 수도위주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으로 관영이나 사영 기술자들의 생산품은 주로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사치품이나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들의 생필품 등은 농촌의 가내수공업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스스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체계적인 산업의 형태를 띄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국가의 인력동원체제등을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남은 20세 이상의 장정으로서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을 받고 요역(徭役)에 참가하는 사람, 조자는 정남을 도울 15세 이상의 남자, 제공은 요역을 면제받은 60세 이상의 연령층, 노공은 70세 이상의 노인 등으로 보인다. 또 호(戶)의 기준은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로 나누었는데 그 구분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랐던 것 같다.

5.5.1 무역

초기에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 있었고,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 남동쪽은 왜가 있어 국제적인 흐름이나 교류에 뒤쳐져있고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5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토우(흙 인형)중에 코끼리, 원숭이의 모습을 본딴 것들이 출토되고 있으며[50] 동유럽에서 만들어진 신라 황금보검이나 로마 유리로 제작된 국보 제193호 유리병, 보물 624호 유리잔을 비롯해 황남대총 등에서 서역산 공예품이 말 그대로 쏟아졌기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다.

9세기 이후 신라의 중앙집권체계가 약화되면서 민간 무역이 성행하였고 장보고등의 해상세력은 당나라 산동 지역등에 설치된 신라방 등을 통하여 활발한 민간무역을 행하였다. 후에 무역으로 부력을 갖춘 호족들의 약진은 후일 호족들과 함께 후삼국시대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당과의 무역에서는 초기에는 원자재나 지역특산품을 수출품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비단공예품과 금속수공업품의 비중이 늘어나 신라촌락문서에서 대규모 뽕나무 숲을 육성한 것 역시 비단 생산을 위한 목적이 큰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다만, 중국과 달리 화폐제도는 본격적으로 자리잡지 못하여, 아직까지 물물교환이 일상적이었다. 보통 거래의 결제수단은 견포 즉 옷감으로 국가에서는 화폐로서 견포의 기준을 통일하기 위해 길이를 조정하고 정리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5.6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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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행정구역9주 5소경으로 대표된다. 9주 5소경 문서 참조.

통일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영토가 머물러 있던 지증왕대인 514년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주(행정구역)+소경식의 비슷한 행정구역 체계는 삼국통일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6 문화

6.1 문학

한자가 주 문자 생활에 사용되었고 설총, 강수, 최치원등의 유학자들이 활동하였으나 이들의 문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건 그리 많지가 않다. 또 한자가 어렵고 고대 한국어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 방점, 서기체 등 한자를 이용해 한국어를 좀 더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또한 신라 하면 향가를 빼놓을 수 없다. 진성여왕 때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 향가를 모았으나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등 몇몇 책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통일신라대에는 중국한시도 유행하여, 중국 본토에서도 필력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최치원이 자신이 지은 시들을 고국에 소개하기 위해 요약정리한 계원필경 등이 지금까지 전한다.

6.2 미술

고구려나 백제 고분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 덕에 다양한 고분 출토 유물이 남아있으며, 황금 왕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공예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지금도 경주 월성을 비롯해 미발굴유적이 매우 많고 계속 발굴 중이므로 앞으로도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신라 금관은 전반적으로는 스키타이 양식을 상당히 많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리 제품이나 일부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의 양식이 로마, 서남아시아 지역의 것과 동일한 것도 있는데, 이는 무역을 통해 얻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사례로 신라 황금보검으로 알려졌던 경주 계림로 보검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식과 달리 무덤의 양식이 달라서, 고분 벽화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 회화의 수는 오히려 고구려나 백제보다 적은 편이다. 천마총에서 나왔던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신라 회화다. 천마총에서 나온 다른 두 그림(또다른 천마도, 기마인물상)이 발굴 이후 2014년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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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외선 촬영된 천마총 기마인물도와 서조도(瑞鳥圖)

지금까지 전해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그림으로는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變相圖) 불화가 있다. 링크

서예 역시 발달해, 김생[51], 영업, 요극일, 최치원[52] 등이 신라대의 대표적 명필이었다.

6.3 음악

신라대의 작곡가로 우륵, 백결선생이 유명하다.

김부식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를 신라삼현(新羅三絃)으로 소개했다. 가야금은 이름대로 원래 가야(대가야, 반파국) 지역의 악기인데, 가야를 정복한 진흥왕이 가야인 악사 우륵을 우대한 계기로 신라에 전해져 발달했다. 우륵은 고향 가야지방의 지명들을 딴 12개 곡을 지었다.

사진의 출처는 histopia, 사진의 원출처는 일본 정창원 홈페이지

현대의 가야금의 원류가 되는 신라시대의 가야금이 일본정창원에 한 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新羅琴, 시라기고토)라고 부른다. 850년 11월에 이 시라기고토를 일본 궁중에서 연주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53]

거문고는 원래 고구려 지역의 악기였는데, 삼국통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들어오면서 도입되었다.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노래 30곡을 짓고 신라 땅에 거문고를 보급했고, 이후에도 속명득(續命得)과 귀금선생(貴金先生)이 거문고의 대가로 활동했다.

비파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악기이나 현을 바이올린 현 비슷한 철현을 쓰는 중국 비파와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시대에도 한국의 대표적 악기로 전승됐다.

신라의 음악은 보다 기록이 풍부한 중국, 일본 기록에서 많이 발견되는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궁중에서 신라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신라기(新羅技)라 했다. 당나라 때도 진평왕이 여악(女樂) 두 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나라 때도 신라 음악의 당나라 궁중 연주가 이뤄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신라 음악이 종종 공연됐는데, 453년에 80명이 연주한 것이 최초고 561년, 684년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대보율령(大宝律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도 신라 악사들이 소수 파견되어 악기 연주와 춤을 일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6.4 건축

목조건축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서 고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나마 신라의 경우 안압지에서 온전한 건축자재가 대량 발굴되기도 했고 문헌기록도 그나마 더 많아서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국왕이 사는 궁전경주 월성이었으며, 문무왕삼국통일 이후 동쪽으로 궁전을 확장한 것이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이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전근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유명하다.

6.5 역사

545년 진흥왕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삼국유사에도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서 인용한 글들로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를 포함해 주변 다양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삼국유사가 작성된 고려시대 후반 원간섭기까지는 국사의 원본이 존재했으나 이후에 실전되어 현전하지는 않는다. 해당 문서 참조.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삼국통일 후에도 정사를 편찬했을 법 한데 관련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고, 8세기경 김대문이 계림잡전, 고승전, 한산기, 악본, 화랑세기 등을, 9세기에는 최치원제왕연대력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54] 많은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쓰는 데 인용되었다.

6.6 종교

신라는 불교의 원조 인도나 중간경유지 중국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백제고구려에 비해 불교의 도입 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고, 그 전에는 박혁거세알영부인, 김알지 설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늘의 신이 내려왔다는 천신 탄강을 골자로 하는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 외래종교인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도 반대가 컸다. 불교는초기 눌지 마립간소지 마립간 때 일단 전해졌고 흥륜사 같은 절이 왕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박해 속에 끝났고, 비로소 법흥왕이차돈순교와 불교의 공인 이후 급속도로 불교국가화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인왕경이나 법화경 같은 호국경을 중요시했다. 임전무퇴를 제시한 원광법사 역시 승려였다. 이후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의 주도하에 많은 사찰 건축물이 창건되고 불교 미술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 덕택에 신라시기 사찰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면 그 명맥이 유지된 곳이 상당히 많다. 현재의 경주시 지역엔 황룡사,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분황사(芬皇寺)·흥륜사(興輪寺)·영흥사(永興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 연대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역시 목조 건축물 자체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부 고려-조선시대에 중건된 경우다. 현재까지 남은 신라의 건축물들은 석탑이거나 유허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교의 경우 화랑(역사) 문화와 접목되어, 신라에서는 특히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서 세속오계임신서기석 등에서 이런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신문왕은 유교 교육기관 국학을 설치하고, 이후 거기서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신라의 자체적인 국가신앙 시설로 신궁(神宮)이 있었다. 신라 김씨왕조 조상들을 기리는 유교적 종묘 체계인 5묘와는 별개로 운영됐다. 신라 왕이 새로 즉위하면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라의 관례였으며, 신궁에서 제사지낸 주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김씨 왕계 시조를 기리는 시설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신궁은 박혁거세설이 좀 더 일반적이다.

6.7 과학

자연과학 분야, 특히 농업천문학 분야에서도 통일신라시기에 발전하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55], 수학·의학이 발달하였다. 통일신라대에는 당나라와의 기술 교류가 활발해, 덕복(德福)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기술을 이용해 역법을 만들었고, 김암(金巖) 등이 당나라에 유학해 천문학을 배워 신라에 보급하고, 그리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718년(성덕왕 17년)에 물시계를 만들고 이것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든 최초의 물시계가 671년 백제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 기록된 718년 훨씬 이전부터 물시계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도 크게 발달하였을것으로 추정되는데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 잡힌 비례 구성에는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을것으로 추측된다. 최고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 교육도 이뤄졌고, 717년에는 산박사(算博士) 제도를 시행했다.

또 기포가 거의 없이 완성도가 높은 성덕대왕신종을 제조하는 등 금속공학 등의 측면에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쇄 제지술이 발달해, 신라산 한지인 저지(楮紙, 닥나무 종이)는 색이 희고 질겨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보존성이 뛰어나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며, 전란이 적었던 일본 땅에서 민정문서 등 신라 당대의 인쇄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7 외교

백제와는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은 정도를 떠나 불구대천원수급이었다. 초기 기록부터 허구헌날 치고받고 싸우는 기록이 나오고[56] 예외는 장수왕 즉위 후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과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 그러나 결국 나제동맹도 파탄난다. (관산성 전투)

고구려와의 관계는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에 주도권을 내 주고 반쯤 예속된 상태인 적도 있었으나 장수왕대에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허나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를 백제와 달리 타협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서 스스로 연개소문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하고,그 후계 국가인 발해와도 대립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키는 등 나중에 백제 등에 비해 우대했고[57] 가야 유민들도 신라에 잘 융화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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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을 보내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깊은 교류는 하지 못했다. 그러다 진흥왕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을 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목숨을 걸었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발해를 치는 시늉을 한 뒤 회복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 등 우호적인 편이었다.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고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어 한강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의 교류를 했다.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남 지역에 위치한 신라였지만 왜국과의 관계는 대대로 백제에 버금가는 원수지간에 가까웠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번을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일본을 침략한 기록은 없지만 일본측 기록에는 527년 큐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던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이 있는 등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일본은 혈맹 백제를 필사적으로 도왔고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별 수 없이 신라와도 그럭저럭 사이가 괜찮아져서 교류도 어느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일본과 신라는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덜 나쁜 시기가 나뉘는데,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중동인들은 대체로 신라를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하였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소장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58]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59]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60] 역시 후백제의 창업군주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신라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8 평가

단재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외세를 이용하여 동족을 쳐서 얻은 통일이고, 고구려의 대부분의 땅을 잃은 통일이라고 비판하며 사대주의적인 요소를 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요즘 학계에서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평가한 주관적 시선이라고 보며 신라의 삼국통일이야말로 한국이라는 역사적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계기라고 본다. [61] 그리고 고구려가 있었던 땅은 금방 발해가 대부분 수복했으므로, 책임이 누구한테 있다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긴 하지만, 발해를 한국사라고 생각한다면 한민족 만주 상실의 최종적 책임도 결국 신라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정부분 돕기도 했고, 발해가 자리잡는 과정을 딱히 방해하지도 않았고 남북국시대 수백년간 제대로 싸운 적도 없다. 만주 상실의 그 책임은 굳이 찾자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거란을 깝시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인하여 한국 역사상 최초의 단일 운명공동체가 탄생하였다. [62] 신라는 정복 민을 융통성 있게 골품제로 포용했었다. 가야를 멸망시킨 후 왕족들은 신라왕족인 진골로 편입되었으며[63],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해당 지역의 귀족들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5, 6두품 귀족으로 편입했다.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도 지속적으로 비판받는 떡밥이지만,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도 신라의 골품제 못지않은 폐쇄적인 신분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여성의 속옷까지 제한하는 가혹한 신분제는 후기 멸망을 앞당긴다. 가장 중요한 성골의 핏줄이 끊길지언정 진골을 성골로 격상시키지 않았으니. 설민석 강사도 방송에서 대차게 까댓다.

또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세 나라의 문화를 빠르게 융합, 발전시켜 당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빛나는 문화를 꽃피웠다.그리고 세계사를 보아 1000년동안 존속한 보기드문 오래된 국가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정교한 각종 공예술과 불교미술이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낸다. 그래서 발해 등을 곁가지로 취급하는 외국 한국사학계에서는 삼국-통일신라-고려-조선을 중심으로 한국사로 설명하는 편이며, 최근에 등장하는 미국 중고등학생 교과서도 그런 식이다.

그러나 통일 신라의 융화 정책에는 나름의 한계가 분명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해당 지역의 귀족들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5, 6두품, 진골 귀족으로 편입했다고 하지만, 멸망시킨 나라 귀족을 여간하면 지배층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제대로 된 정복 계획을 세우는 나라면 어느 나라나 하는 것으로 이는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도 그랬고, 심지어 훨씬 훗날의 일본 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왕가와 귀족층에 상당한 지위를 보장하였다. 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태도나, 끝까지 골머리를 썩인 전남 지역 마한 잔류 세력에 대한 백제의 상당한 푸대접보다는 지극히 문명적이었지만, 완전한 국가 통합에 성공해서 종족적, 언어적 계보 자체가 다른 족속까지 통합하는 데 성공했던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땐 여전히 빛이 바랜다. 게다가 6두품이라 한들 정치와 경제면에서의 차별은 분명했고, 5두품은 작은 군현에서 우두머리를 하는 게 끝인, 좋게 봐줘야 중상류층 정도에 불과한 지위였다. 또한 그런 대우를 받은 건 어디까지나 소수였고 대다수의 고구려, 백제 유민은 지방 세력으로 편재되었고, 지방민은 세금과 인력을 바칠 뿐으로 중앙에 진출할 기회는 상당 부분 차단되어 있었는데 이는 지방 세력의 실력이 성장하는 후기까지도 제대로 고쳐지지 못했다.

때문에 신라의 지방 세력은 신라 왕조로 대표되는 체제가 건재한 자신들에겐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 의식, 백제 유민 의식에 불을 붙여 중앙 정부로부터의 공식적 이탈, 즉 독립이라는 실력 행사로 인해 후삼국시대로 나타나게 된다. 즉, 후삼국 시대의 도래는 신라의 융화 정책이 끝내는 실패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뒷날 고려가 진정한 통일을 했다고 보는 것은,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태자였던 대광현을 비롯해 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편입되었다는 사실만이 이유는 아닌 것이다. 어차피 영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고려도 조금 더 북상에 성공했을 뿐 고구려와 그 고구려의 후계 국가인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차지하지는 못했다. 삼국 유민의 의식적, 내적 통합까지 달성한 부분이 이유인 것으로, 많은 이들이 신라 계승 적 의식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삼국사기마저도 진정한 통일 왕조는 고려라고 보고있다. [64]

중국에서도 첫 물리적 통일은 진이 이루었지만 이후 일어난 한이 진정한 통일 국가로 인정받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 진이나 신라의 통일은 의미 없는 행위였나 하면 그건 아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로 통일된 국가라는 경험을 새겨넣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었다. 한이나 고려는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진정한 통일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간단하게 요약하면 진이나 신라 이 두 나라는 각기 중국과 한국 두 민족, 국가 공동체의 통일의 시발점, 시작을 닦은 발판의 마련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고 진을 이은 한과 신라를 이은 고려 이 두 나라는 그 통일의 밑그림을 색칠도 하고 뎃셍도 하고 뭐 기타등등 해서마저 완성시킨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스포츠로 비유하면 신라와 진이 어시스트해주고 고려와 한이 득점에 성공. 이런거?

8.1 시기 구분

한국사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특히 신라는 국가 존속기간이 1,000여 년이나 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나라 체제의 차이가 커서 여러가지 시기구분이 있어왔다. 옛날부터 사용되던 구분방식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대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는 방법과 삼국유사의 구분대로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유학자 김부식이 쓴 책인만큼 왕의 혈통을 기준(성골태종 무열왕진골내물왕계 진골)으로 했으며, 상대는 통일 이전, 중대는 왕권이 강했던 전성기, 하대는 쇠퇴기와 대강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구분이다. 후자는 승려 일연의 구분답게 불교와 연관됐는데, 불교 수용 이전(고유어 왕호)→불교식 왕호 사용→중국식 왕호 사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현대에는 좀 더 세분화해 여섯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신화 시절을 포함하여 사로국으로 존속한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고 국가로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구분해야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65]

676년 이후의 신라통일신라로 부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까지 아울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현대에는 대체가 된 편인데, 그럼 남북국 두 나라 중 남국인 신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하면 이 쪽은 지금도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부적절한 호칭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자리잡은 대체 용어는 없고 학자에 따라 대신라, 후기신라 등의 이름으로 676년 이전(삼국 중 1개국으로서의 신라)과 구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정확하게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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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왕사

10.1 왕비

11 신라의 인물들(시대 순)

11.1 건국 ~ 1세기

경주 김씨 왕가의 시조. 단 본인은 생전에 신라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신라의 태조로 추존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 정확한 정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신라의 공식적 건국 이전 경주 일대 6촌 중 고허촌의 촌장. 박혁거세을 발견하고 10살까지 키우고 왕위에 추대할 때도 한몫을 한 후원자이며 소씨최씨의 시조가 됐다.
계룡 설화가 있는 신라 최초의 황후.
귀화 일본인이자 신라 초기의 명재상.

11.2 2세기

11.3 3세기

내해 이사금의 아들. 기록이 모호한 신라 초기의 몇 안 되는 명장.
고구려 출신의 승려로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하려 했다.

11.4 4세기

11.5 5세기

11.6 6세기

장군. 본래 금관가야의 제12대 왕인 구형왕의 왕자였지만 금관가야가 신라에 흡수되는 통에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이후로는 신라의 장군으로 맹활약을 하며 이사부와 같이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는 백제 성왕을 잡은 것이 이 김무력의 부대였다. 《삼국사기진흥왕편에는 김무력의 부대가 먼저 기습한 성왕의 부대와 싸우다가 김무력의 부하인 고우도도가 성왕을 전사 시켰고, 성왕편의 기록에는 성왕이 기습당해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일본서기》에는 김무력의 부하인 사마노 고도가 성왕을 잡아서 목을 벤 다음 신라 왕궁 계단 밑에 묻었다고 되어 있다. 어느 쪽이건 김무력이 성왕의 죽음에 공을 세운 것은 맞고, 김무력의 손자가 김유신인 것을 보면 이 가문은 그야말로 백제의 악몽.
가야 계열의 진골 귀족.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자 아버지 김무력과 함께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김유신의 아버지이자 사랑의 도피를 벌인 일로 유명하다. 부인은 만명부인.
김무력의 부하. 《일본서기》에는 사마노 고도라고 나온다. 《삼국사기》건 《일본서기》건 이름도 비슷하고 성왕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서술도 일관성이 있어서 동일인물로 확정. 다만 이름의 경우에는 고우(高于)를 관등인 고간(高干)으로 읽어 고간 도도라고도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우于와 간干의 차이가 끝의 획 하나 차이라 매우 애매할 뿐만 아니라 실제 판본의 글자를 보면 아무리 봐도 우에 가깝다. sg_c_004_0015&pLevel=5&pDatabaseID=sg_004r&pRecordID=sg_004r_0040_0220&pTitle=%ed%8c%90%eb%b3%b8%ec%a0%84%ec%b2%b4 4페이지 둘째 줄 가운데 그리고 고간 도도로 해석하는 경우보다 고우도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본서기》와도 잘 맞는다. 다만 사마노라는 것이 문제인데, 사마노(飼馬奴)의 뜻을 통해 고도가 말을 부리는 노예라는 추측도 있지만, 사마노는 출신지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성왕이 먼저 기습한 것을 맞서 싸우다가 난전 중에 죽였다는 기록도 있고, 성왕이 왕자를 방문하러 가던 것을 고도가 기습하여 사로잡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 성왕이 50명 미만의 적은 병력을 대동한 것으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성왕이 기습을 당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을 사로잡은 고도(고우도도)는 성왕에게 목을 베어도 되겠냐고 묻자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 수 없다"는 대답을 했는데, 이것과 사마노라는 표현 때문에 고도의 신분이 원래 종이 아니었냐는 의견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일국의 왕 입장에서는 계급이 낮은 장수는 천한 종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 것이란 식으로 해석된다. 결국 고도의 설득 끝에(...) 성왕은 목이 잘린다.
성골 귀족. 김유신의 어머니이자 사랑의 도피를 벌인 일로 유명하다. 본인도 철없이 굴었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자식한테 좀 엄격했던 모양. 김유신한테 울면서 철 좀 들라고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가야 출신의 음악가. 가야금을 만듬.
장군. 김태종이라고도 불린다. 512년에 울릉도를 정벌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게 가장 큰 공은 아니다. 백제와 일본군을 격파하여 531년에 금관가야(가락국)을 신라에 흡수시키고, 562년에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가야를 끝장낸 장군이다. 또한 국사편찬을 왕에게 건의해 거칠부국사를 쓰게 한 인텔리적인 면모도 보인다.

11.7 7세기

김춘추와 보량 사이의 딸. 백제 장군 윤충에게 대야성이 함락 되자 김품석과 함께 자결하였다. 나중에 김유신이 648년 옥문곡 전투에서 백제장군 의직과 싸워 대승하고 백제 장수 8인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자신의 딸인 고타소와 김품석의 유골을 그 장수들과 교환하였다.
쇠뇌 제작 기술자.
유명한 화랑. 관창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지휘는 이찬(2등관). 선덕여왕 시기의 인물. 일명 용수. 진지왕의 아들이고, 아내는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김춘추)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역사에서는 황룡사 9층 목탑 중건 등에 참여했다고 나온다.
장군. 신라 최고의 무장이자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삼국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관련 기록을 가지고있는 인물. 김춘추의 절친이자 처남이며 사위이기도 하다.(...)
왕족. 외교관, 문무왕 시기의 장군. 김춘추의 둘째 아들. 신라의 당나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백제 때문에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갔다 온 이후에도 당이랑 이런 저런 인연이 많다.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훗날 나당전쟁 시기에는 당 고종이 신라왕으로 삼으려고도 했었다. 결국 당에서 보국대장군상주국이란 지휘도 주었으며, 당에 건너가서 사망했다. 다만 당나라에 친화적인 인물이지 매국노 같은 것은 아니니 주의.
훗날의 태종 무열왕. 김용춘의 아들. 왕이 되기 전에는 진골 귀족이었다. 선덕여왕의 조카이기도 하다. 김유신의 절친이자 사돈이면서 매제(...) 딸 고타소가 죽은 사건이 김춘추의 인생과 삼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열왕의 일가 전체가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에 많은 공을 세웠다.
좌장군. 660년 백제의 계백과 싸우던 도중 아들 관창을 희생시킨 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664년에는 김인문·김문영 등과 함께 고구려 돌사성을 공격하고 668년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귀당총관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670년에는 문충, 중신 등과 함께 63개성을 쳐서 백제유민을 소탕하였다.
대야성주. 고타소의 남편이자 김춘추의 사위. 여자 버릇이 나빴는지 부하였던 검일의 아내를 취했는데, 나중에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치자 검일은 신라에서 도망간 백제 인물 모척과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지른다. 이에 아찬 서천이 윤충에게 항복하였지만 윤충이 신라군을 다 죽이는 것을 보고 고타소 등 가족과 함께 자결한다.
대야성주 김품석의 부하. 아내 문제로 김품석을 배신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붙잡혀 처형당했다.
  • 모척 ( ? ~ 660 ) 신라의 반역자, 원래 신라인이었으나 백제로 도망간 인물로 윤충의 부하가 되어 검일과 내통하였다.
  • 문명왕후 ( ? ~ ? )
김유신의 여동생. 이름은 김문희로 김춘추의 아내다. 시집가는 과정에서 상당히 요란법석을 떨었다. 문희의 딸은 김유신에게 시집간다.(...)
아찬. 김품석의 보좌관이었으나 대야성 함락 때 윤충을 믿고 항복하고 성 밖으로 나갔다가 기습공격을 당해 죽고 말았다.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서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화가. 황룡사 벽에 사실적인 소나무를 그려 새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벼슬은 사지(舍知). 죽죽과 함께 김품석의 보좌관이었다. 서천이 죽는 것을 보고 죽죽이 항전을 결심하자 그래도 항복하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죽죽이 자신의 이름을 빗대 대나무는 겨울에도 부러질지언정 시들지 않는다며 항복을 거부하자 같이 싸워주었다. 대야성 함락 당시 죽죽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사후에 대나마 벼슬에 올랐으며, 용석의 가족도 죽죽의 가족과 같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승려.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황룡사의 증축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벼슬은 사지(舍知). 竹竹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소유자. 김품석의 보좌관이었으나 대야성 함락 당시 서천이 항복하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결국 서천이 부하들과 함께 죽는 것을 보고는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급찬 벼슬에 올랐으며, 그 가족은 경주로 이사와 살게 하였다.
진평왕의 둘째 딸이자 선덕여왕 덕만의 동생. 남편은 김용춘. 아들은 김춘추.
벼슬은 찬간(撰干). 죽죽의 아버지. 네이밍 센스가...

11.8 7세기 통일신라(676 이후)

승려. 유학가지 않고도 킹왕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입지전적인 인물.(...)
승려. 나라에 유학을 갔다 와서 화엄종을 들여왔다. 부석사 등의 을 창건했다.
승려. 신라 왕족 출신이지만 당나라에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효소왕 시기에 활동한 영랑, 술랑, 남랑, 안상 네 명의 화랑. 전국 각지(주로 지금의 강원도 지역)에서 이들이 수련하면서 거쳐갔던 명승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고려, 조선시대까지 문인들에게 유명했다고 하며 예를 들어 관동별곡 등에서도 언급된다. 기록이 부족해도 산발적인 기록을 보아 일단 실존인물은 맞는 것 같은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신선 비슷한 존재로 윤색이 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있다.

11.9 8세기

불국사석굴암의 창건자.
서예가.
신라 최고의 미녀(...)

11.10 9세기

신라 말의 해적.

11.11 10세기

신라 말의 화랑,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

12 신라유적

13 신라유물

14 신라도서

15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

15.1 게임

15.2 만화

15.3 영화

15.4 소설

15.5 드라마

15.6 기타

16 관련 문서

16.1 통일신라

  1. 푸른 깃발을 썼다는 언급이 되어있는데 이미지처럼 파란색이나 남색이 아닌 초록색 계열의 깃발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2. 1대 박혁거세 또는 2대 남해
  3. 2대 남해
  4. 3대유리#s-1.2~16대 흘해
  5. 17대 내물~21대 소지
  6. 22대 지증~ 56대 경순
  7. 중원고구려비에는 매금(寐錦)이라는 왕호도 등장한다. 진흥왕순수비 등 금석문에서는 황왕(皇王), 제왕(帝王), 태왕(太王) 등의 칭호도 당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외왕내제적인 성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대다수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적으로 유입
  9. 진한의 12국중 하나인 사로국으로 시작했다.
  10.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정말 긴 기간이다. 다만 초기와 말기의 석씨, 박씨 집권기를 제외한 경주 김씨 단일 왕조는 약 550년간 유지되었는데 이것만 쳐도 후대의 고려조선, 은주를 제외한 중국사의 어떤 왕조들보다도 길다. 참고로 현대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신라계 혈통을 가졌다고 말해진다.
  11. 그러나 신라 초기 왕들의 실존에 대해서는 쟁론이 많으며, 특히 초기 박-석-김 삼가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이후 신라 지배층에 포섭된 성씨들을 대우하기 위해 훗날에 술작된 왕권 전설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12. 발음은 "나"이나 나라이름에 사용할땐 라로 발음.
  13.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일종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
  14. 아마도 (khan)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지만 사실 기록된 시기상으로는 유목제국들의 칸보다 이쪽이 더 먼저다. 위키백과의 영어판의 칸 문서에서도 신라의 간을 기록상 최초의 칸 사례로 소개해 놓았다. 물론 이게 칸 호칭의 원조가 신라라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리고 어차피 지도자는 우리가 흔히들 아는 그 '간지'가 있어야 할 필요도 있으니 어찌 보면 나름 적절한(?) 호칭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15. 진흥왕 때 김씨 성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16. 참고로 《삼국유사》에서는 "내물 마립간"과 "실성 마립간"라고 나오지만 《삼국사기》에는 마립간 칭호는 눌지왕부터 생겼다면서 각각 내물이사금, 실성이사금으로 나온다. 이 글에서는 《삼국유사》쪽을 따랐다.
  17. 개로왕 끔살 때도 백제 지방에서 온 지원군보다 신라 지원군이 더 먼저 도착했다. 안습.. 어차피 이미 늦었지만
  18. 다만 황룡사가 진흥왕대에 세워졌지만 황룡사의 상징으로 알려진 높이 80m에 달하는 9층 목탑은 이후 선덕여왕대에 추가로 지어졌다.
  19. 5두품은 작은 군현의 우두머리까지가 한계였다.
  20. 이는 백제와 통일 전쟁 전후로 상호 원망이 쌓였던 게 일차적인 원인으로, 백제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일본으로 많이 간 건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 설령 그랬다한들 전부 도망갔을지 어쨌을 진 모르는 일이며, 그렇게 따지면 역시 다는 건사하지 못했던 고구려 고위층한텐 백제 고위층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줄 다른 이유가 없다. 신라측도 바보가 아니라서 오히려 애초엔 백제 쪽을 더 우대해주려고 했으나, 백제측이 신라 정부 생각대로 그렇게 쉽사리 협조적으로 되진 않았다. 신형식 교수의 신라 통사 참조.
  21. 더 자세한 내용은 후삼국 시대 참조.
  22. 삼국시대 고대 국가에서는 국왕이 동시에 장수의 역할을 했다. 대규모의 전투에서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끄는 것이 기본이었고, 때문에 삼국시대에 국왕이 전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던 것이다.
  23.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24. 대야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훗날 후삼국시대에 신라가 쇠락한 상태에서도 후백제견훤은 대야성을 몇번이나 공격해서 번번이 패퇴하다 간신히 함락시킨바 있다.
  25. 김춘추가 고구려 평양성에 도착했을 때 백제 성충이 보낸 편지가 연개소문에게 당도했는데, 만약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한다면 백제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고구려를 치겠다는 협박이 담긴 내용이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고구려가 신라의 연합 제의를 거절하고 백제와 동맹을 맺기로 결심하게 된다.
  26. 사실 김춘추가 당나라에 간 것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당나라가 딴죽을 걸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파견된 것이었다. 당태종과 의외로 죽이 잘 맞아서 당태종이 사적으로 김춘추를 불러 얘기하기도 했는데 그 참에 나당연합까지 체결되었던 것.
  27. 다만 일본은 백제 부흥 운동때 백강 전투에 참여한 것 외에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없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은 나당연합만큼 원활하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28. 전당문 장구령편
  29. 앞서 언급했지만 먼저 복속시킨 가야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이 당시엔 당나라군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유화적인 조치였다.
  30. 원래 추워서 농사 효율도 낮은데 오랜 전쟁과 반복된 청야전술로 황폐화된데다 당나라가 이미 고구려 유민을 중국 본토로 많이 끌고 갔으므로 인구마저도 적어졌다. 대조영, 고선지, 이정기 등도 당나라에 끌려갔던 고구려인의 후예이다.
  31. 통일신라 문서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신라통일을 불완전한 통일로 보고 고려의 통일을 완전한 통일로 보는 축에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 '대신라'라고 칭하자는 움직임도 있으나 대중적으로는 통일신라가 더 넓게 퍼진감이 있다.
  32. 정확히는 고구려인 1개(황금서당), 보덕국민 2개 부대다.(적금서당과 벽금서당) 단 보덕국민들도 고구려 유민이다. 보덕국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지금의 전라도로 이주시켜 만든 체제고, 황금서당은 전라도로 이주하지 않았던 나머지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
  33. 청금서당과 백금서당. 부대 상징색은 이름대로 파란색과 흰색.
  34. 따로 언급은 없지만 앞서 시대에 편입됐던 가야 유민들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진다. 녹금서당, 자금서당, 비금서당. 녹금서당과 자금서당은 통일 이전 진평왕 때 만들었고, 비금서당은 문무왕 때 설치한 장창당(長槍幢)을 효소왕 때 이름 변경한 것이다. 비금서당은 말 그대로 장창으로 무장한 부대로 추정.
  35. 흑금서당. 상징색은 흑적(黑赤, 검붉은 색)
  36. 신라의 뛰어난 공예, 건축 문화재들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불국사가 이 시기에 중수되고 석굴암이 건설되었다.
  37. 가령 구한말 한양의 사진을 보면 초가집도 많았고, 숯으로 밥을 짓는 건 사치에 속했다.
  38. 사실 외국인, 특히 멀리서 온 서역인들은 모두 수도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경주시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번영한 항구나 도시 등에서 머물렀을테니 당대 서라벌의 영화로움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저런 식으로 쓰는게 무리는 아닐 수도 있다.
  39. image.png 노란색 부분이 신라(السيلى)', 빨간색이 중국(الصين), 파란색이 이라크(العـراق)다.
  40. وليس بعد بلاد الصين مما يلي البحر ممالك تعرف ولا توصف، إلا بلاد السيلى وجزائرها، ولم يصل إليها من الغرباء من العراق ولا غيره، فخرج منها؛ لصحة هوائها، ورقة مائها، وجودة تربتها، وكثرة خيرها، وصفاء جواهرها إلا النادر من الناس، وأهلها مهادنون لأهل الصين وملوكها، والهدايا بينهم لا تكاد تنقطع
  41. image.png 영문판 해당 부분.
  42. 그래서 그런지 경주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분지 땅 안에서 인구 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43. 그러나 그마저도 유지했던 경주 이외에 영남권 지역의 상당수 영토들마저 고창 전투 이후 고려에 넘어가면서 멸망 직전 경주 일대만 겨우 통치하는 도시국가 정도의 내륙 소국으로 전락하였다.최소 점유하던 국토들을 타국에 의해 상실당한 국가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44. 하지만 후삼국시대 후기 고창 전투 이후 신라가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학자들 중에서 논란이 있다. 회랑 형태로 동해안 일대 조금이나마 해안 영토를 935년 멸망 직전까지 지배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해안 영토건 내륙 영토건 다 뜯기고 영토라곤 서라벌 하나 뿐인 내륙국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등 고구려, 백제, 조선, 고려, 발해처럼 해안선을 지닌 상태에서 멸망했다는 의견과 영토들 대부분을 후삼국 시대 고려에게 빼앗기고 내륙국으로 전락하여 내륙국가 상태로 멸망했다는 의견들이 엇갈린다. 자세한건 내륙국 항목 참고.
  45. 단, 견훤이 진짜 왕비를 강간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삼국사기》라는 책이 신라 정통주의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고려의 김부식이 지은 터라 고려와 대립을 했었던 후백제의 견훤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씌웠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남은 자가 승자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경애왕 항목 참조.
  46. 경순왕이 그저 수동적으로 대세에 따라 좀 더 잘 대우해줄 것 같았던 고려에 나라를 갖다 바치고 망했다는 관점은 재평가되어 한다. 그래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한 임금이다.
  47. 역사지리학 강의 참조.
  48. 鬪將臨城洫而歎曰 久須尼自利 (此新羅語 未詳也)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久須尼自利” (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 라고 탄식하였다."
  49. 현재의 경주 시내 형산강은 보문관광단지의 인공 호수를 지으면서 수량이 줄어들어 쪼그라든 상태다. 원래는 지금보다는 넓은 강이었다.
  50. 개미핥기 토우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개미핥기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안 닮았을 뿐더러 개미핥기처럼 꼬리가 수평인게 아니라 개처럼 꼬리가 엉덩이위까지 올라가 있다. [1] 애초에 개미핥기는 아메리카에 사는 동물인데 그 시절엔 개미핥기의 존재 자체를 알 방법이 없다.
  51. 낭공대사비, 전유암산가서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52.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대표적.
  53.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 권2
  54. 화랑세기와 제왕연대력은 필사본이라 주장하는 책이 존재한다.
  55. 하지만 첨성대가 정말 천문대인지는 논란이 있다. 일단 형태적으로도 별을 관측하기 불편하고 관련 기록도 많지 않기 때문.
  56. 탈해 이사금 시대부터 백제가 쳐들어오는데 당시 백제가 아직 한강 하류를 다스리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신라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와 그 주변 수준을 다스리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백제와 신라가 싸웠다는 기록은 신뢰성은 떨어진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정말로 백제와 신라가 싸운 것이 아니라, 후에 백제에 합병되는 마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와 역시 신라의 영토가 되는 진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가 전쟁을 벌인 것이 백제와 신라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57. 가야계에 대한 차별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흡수한 다른 국가 출신에 비하면 훨씬 우대했다.
  58. 처용을 이 예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59. 어떤 국내 모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니라 태봉의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몰락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했으면 신라 침공 후 경순왕만 세워놓고 괴뢰국화하는 선에서 그친 견훤과 달리 무력으로 멸망시킨 다음 태봉 영토로 강제 병합했을것이라고 주장했다.
  60. 892년에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라는 형식상 신라의 신하로 깔고 들어가는 칭호를 자처했다. 백제왕 칭호는 8년 뒤엔 900년부터이다.
  61. 물론 민족주의가 아니라도 동족이라는 일정한 언어 및 문화, 역사적 배경을 공유한 집단이라는 정체성은 있었다. 하지만 삼국은 이런 관점에서 봐도 동족이 아닌 것이 삼국은 한 국가 한 민족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2. 한국 역사의 최초라고 평가받는 고조선은 지금의 서북한 지역을 지배했던 부족국가에 불과하여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지 한국이라는 나라가 출발하는 시발점이었을 뿐이다.
  63. 금관가야왕의 증손자였던 김유신도 신라 진골이었다.
  64. 삼국사기야 고려 왕조에서 펴낸 관찬사서니 응당 그럴 수밖에 없었으나, 신라에 대해 어느 정도 애착이 컸을 개연성이 있었다고 보는 김부식마저도, 기껏 서술한 건 신라 계승의식 뿐만이 아닌 삼한일통이었다.
  65. 고구려보다 국가체제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더 먼저 건국 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쟁점 중 하나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66. 충담사가 경덕왕 때 사람이니 경덕왕 때 세상을 떠났다면 8세기 때 사람일 것이다.
  67. <일본후기>기록에 814년,일행 5명과 함께귀화 했다고함.
  68. 그야말로 문화재의 보고. 거의 모든 등산길에 10분마다 절터와 유적지가 분포해 있다.
  69. 경주시는 2035년까지 3조 2,800억여원을 들여 황룡사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다만 논란이 분분하다. 해당 항목 참고.
  70. 노래는 관련된 게 있는지 몰라도 동명의 영화는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이 아니다.
  71. 삼국시대늘 배경으로그린 만화로,신라가 나온다
  72. 박혁거세,이사부,백결선생,관창,김유신,문무왕,원효,혜초,장보고가 나온다
  73. 신라가 익산에 세운 괴뢰국
  74. 김헌창의난때 세운 국가
  75. 이사부가 정벌한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