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구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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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Époque moderne(에뽀끄 모데흐느)
일본어: きんせい(킨세이)
1 개요
'근세(近世)'란 중세와 근대 사이라는 개념으로 쓰이는 시대구분으로서 특히 로망스어군 언어권에서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미권과 독일어권을 위시한 게르만권에서는 '근대 초기'(Early Modern/Frühmoderne, Frühe Neuzeit)라는 표현을 쓴다.
사실 동양에서 부르는 '근세(킨세이)'라는 명칭의 기원은 일본 사학자들[1]이 마르크스식 시대구분론[2]을 도입하면서 일본사에 적용시킬 때 에도시대를 어디에 넣을지 고민하다가 근대는 아닌데 중세라고 보기엔 좀 그렇다고 해서 뭐라고 부를까 고민하다가 프랑스어의 'Époque moderne'이라는 단어를 직역하여 '근세'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사에서 근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정확히 에도시대로 보면 된다. 한편 [3] 중국에서는 왕조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풍토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데다 여타 학술적, 정치적 문제 때문에 근세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중세의 끝과 함께 시작이 애매한 편인데, 대개 동로마 제국의 몰락,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근세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4][5]. 하지만 '근세(近世)'나 '근대 초기(Early Modern)'라는 시대구분 대신 그냥 '중세 말기'로 보는 경향도 있다.[6] 그래서 이 시기의 애매함으로 인해 현재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고대, 중세, 근세의 시대표기는 하지 않고 있으며, 시대명칭이 확실한 근대[7]부터 시대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 기간중 일어났던 대표적 시대상이라면 르네상스, 종교개혁, 대항해시대, 절대왕정, 30년 전쟁 등이 있다. 해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또한 근세의 해적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대항해시대가 속해있기에 그런 듯. 유럽인들에겐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허벌나게 잘나가기 시작한 시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해안가 왕국들과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아프리카 내륙과 유럽의 정복이 시작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린 시대이기도 하다.
중동 및 이슬람 역사에서 또 하나의 유의미한 시대구분으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압바스 칼리프가 분권화의 압력에 사실상 해체되고 나름 잘 짜여진 법률 체계와 종교 및 민간 부분을 관료제로 포섭하면서 주변 지역을 왕성하게 정복하는 국가들이 이슬람권의 핵심 지역을 장악하면서 이 시기를 이전의 "중간시대"와 구분지어 "화약제국의 시대"라고 하는 "근세"로 파악한 것이다. 그 나라들이 바로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인도의 무굴 제국이다.
그렇다고 오스만은 터키, 사파비 왕조는 이란, 무굴 제국은 인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해선 곤란하다. 물론 오스만과 사파비 왕조와 무굴 제국이 현대 터키, 이란, 인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국들인 것은 맞다. 특히 터키의 경우는 아예 직계 국가니까. 하지만 오스만 제국만 해도 제국 내 40%가 비무슬림이었고 튀르크인 비율은 더욱 적었으며, 제국의 관료들과 장교들 대부분은 발칸의 데브시르메를 통해 징집된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이었다[8]. 사파비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에 기반한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사파비 왕조의 기반은 현재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튀르크인[9]이었고 지금도 이란 인구는 약 30%가 튀르크인이다. 무굴 제국도 인도에 있었지만 공식 문서는 이슬람 세계의 학술 용어인 페르시아어로 작성되었고, 창건자인 바부르는 튀르크화된 몽골계였으며 지배층 가운데에는 튀르크인이 많았다. 세 국가 모두 페르시아화된 튀르크인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였지만, 각자의 제국을 통치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선택한 종파와 문화에 따라 수니파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문화를 이슬람화한 오스만 제국, 유일한 시아파 교법 국가로서 페르시아 문화를 선택한 사파비조, 그리고 인도 방면으로 내려가 페르시아 문화와 인도 문화의 조화를 추구한 무굴 제국으로 갈라졌다. 전근대 국가가 바로 뒤의 근대 국민국가로 이어졌던 것은 국가적 강역이 중화 제국의 무게 아래 일찍히 정착 되어 굳은 동아시아에서는 나름 익숙한 일이지만, 이 동네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아니, 사실 이런 측면에서는 동아시아가 세계사적으로 예외적인 경우라 봐야 한다.
한국사에서는 중세와 함께 꽤 애매한 개념인데 주로 조선시대를 근세로 보는 경우가 많다.[10] 고려시대를 중세의 끝으로, 그 이후의 조선시대를 근세로 보는 관점. 그리고 구한말부터는 근대로 보는 경우가 많다. 다만 현재는 중세, 근세 개념 자체를 폐기하고 그냥 왕조별 구분으로만 가르치고 있는 편이다.
2 근세의 상징들
2.1 한국
2.2 중국
2.3 일본
- ↑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을 필두로 하는 교토대 계열 학파에서 두드러진 성향이다. 도쿄대 학파는 초기에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구분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이 시대구분 방식에 생산력과 생산수단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이다.
- ↑ 일본 사학계는 식민사관(특히 정체성론)에 의거해서 시대구분론을 자기네 식민지에 적용시킬 때 조선시대를 고대로 구분하는 병크짓을 저질렀다.
- ↑ 사실 유럽 기준으로 근세를 정의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울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유럽식 시대구분론 자체가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형태로 이뤄졌고 이것이 현시점에 와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하면 근대, 그 이전이면 중세라는 쌈박하고 심플한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르네상스는 대부분 중세로 취급된다.
- ↑ 다만 예술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를 따로 구분짓는다.
- ↑ 특히 일부 연구자들 가운데서는 '장기 중세'라고 하여 18세기까지도 중세로 간주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 ↑ 대체적으로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을 시점으로 보고 있다.
- ↑ 제국 초창기에는 '지배층 = 튀르크인' 이라는 공식이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에는 제국의 지배층에서 튀르크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서서히 감소하고, 쉴레이만 대제 시대가 되면 튀르크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해버린다. 다만 이것은 인종적인 이야기지 여전히 공용어는 페르시아어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오스만 터키어였고 지금 터키인을 터키에 사는 터키어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 ↑ 이들을 일컬어 키질바시(Qizilbash, '붉은 머리')라 한다.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는 것이 특징이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아바스 1세때까지 지배층의 대다수를 이루었다.
- ↑ 특히 임진왜란 이후
- ↑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 ↑ 17세기 미술 양식.
- ↑ 18세기 미술 양식.
- ↑ 보통 중세 기독교의 광신이니 어쩌구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집중된 관료제적 현상으로서 마녀 사냥이 본격적으로 물이 오른건 16세기 중반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지방, 그것도 개신교와 카톨릭 제후국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이 전에는 오히려 마녀를 현대인들과 비슷하게 환상적인 가상의 존재로 취급하거나, 권력 당국이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집행한게 아닌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마녀 '폭동'이 잠시 일어나는게 일반적인 경우였다.
- ↑ 현대 사극에 등장하는 주막은 조선 후기 화폐 경제 발달의 산물로 등장, 보편화된다. 이전시대는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 ↑ 조선시대 이후 지도의 제작이 활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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