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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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寅修
1919년 12월 3일 - 2001년 6월 25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친오빠로 박정희대통령의 손위처남이다. 종교는 원래는 불교였으나, 언젠가부터 개신교개종하였으며, 이후 가톨릭으로 또 개종하였으며, 세례명은 토마스였다.

1919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났다.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청주고등학교), 일본 도쿄 무사시노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교사로 근무하였다.

1963년 매제 박정희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옥천군-보은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육영수 여사가 중앙정보부에 항의 전화를 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이용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부터 197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문교공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에 연루되어 모든 공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이용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김종필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